저자의 바람처럼 나또한 그러한 기대를 품고 첫장을 펼쳤다. 그런데...
영화<300>으로 시작한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중요시했던 것은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그리스인의 위대한 업적과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p. 22)' 라고 그 의의를 설명하면서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과거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에 앞서 영화 <300>이 그 '의의'를 현재까지도 편향되게 유지하며 얼마나 역사고증을 왜곡시켰는지 언급했어야 했다. 역사를 왜곡된 프레임으로 보여주는 영화로 역사학을 시작한다는 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첫번째 챕터부터 보이는 아쉬움들은 뒤로 가면서 점점 더해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이 '근거 있는 사실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중요(p. 29)' 하고 '직접 보거나 충분한 근거가 있는 사실만 역사 사실로 취급한다는 그의 원칙으로 인해 역사가의 시각과 관점이 지나치게 편협해졌다는 점(p. 30)' 을 설명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으면서 감탄하게 되는 온갖 연설문은 사실 그대로 옮겼다기엔 무리가 있다. 그 당시 그 많은 사람들의 내밀한 대화며 긴 연설들을 투키디데스가 어떻게 곧이곧대로 옮길 수 있었겠는가? 근거 있는 사실만을 다루려 노력한 것은 맞지만 그 원칙으로 역사가의 시각과 관점이 편협해졌다가 보다는 근거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가의 주관이 들어갔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책 자체 보다도 책에 실려 있을 로마사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에 대해선 '로마인들이 되돌아갈 이상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p. 43)' 라고 설명했지만 내가 읽었을땐 그저 게르만족 풍습서에 가까웠을 뿐 그러한 교훈을 체감하긴 어려웠다. 폴리비오스의 <역사>의 의미는 알겠으나 본 내용에 대해선 소개가 부족했고 사마천의 <사기>가 중국 역사 서술의 전범 이라고 하면서 다른 중국 역사서들의 연계는 전혀 없었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책들은 <역사>책이이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부터는 역사서라고 하기 애매한 책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인하르트의 <샤를마뉴의 생애> 에서는 본문에서 내내 카룰루스와 신성로마제국 이라는 용어를 쓰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샤를마뉴와 프랑크 왕국으로 바꿔 사용해서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영국민의 교회사> 를 언급하기 위한 단테의 <신곡> 이야기가 너무 길었는데, 이러한 도입부는 이후로도 계속되어 뱅상 드 보베의 <역사보감>은 챕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야 잠깐 언급될 뿐이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피렌체 사람들의 역사>가 로마제정 대신 로마공화정을 역사 서술의 중심으로 삼았다거나 플라비오 비온도의 <이틸리아 조망>이 인류 역사를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라는 세 시대로 구분한 것 그리고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가 삼권분립의 기원을 제시했다는 의의 등을 알아채기엔 본문보다 사족이 너무 많았다.
종교서와 역사서를 혼합했듯이 철학서와 역사서를 혼합하기도 하고 다른 분야의 책들과도 혼합되곤 하는데,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데카르트가 대중에게 철학을 알리기 위해 집필한 저서로 (p. 119)' 라고 설명하면서도 역사학서로 끼워넣고, 게오르크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 챕터의 주 내용은 미네르바 부엉이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볼테르의 <루이14세의 시대사>에서 '볼테르는 역사학의 대상을 더는 영웅이나 천재와 같은 특별한 개인에게서 찾지 않는다. 그는 일반적인 인간의 정신 속에서 역사의 분석 대상을 찾는다. (p. 132)' 또한 역사보단 철학에,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제목 그대로 사전에 가까웠는데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할말을 잃었다.
레오폴드 폰 랑케의 <라틴 및 게르만 여러 민족의 역사>챕터에서는 영화 '라쇼몽"과 랑케의 역사학에 대해 설명할뿐 정작 제목으로 삼은 그 책은 무슨 책인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랑케의 경우 중요한 것은 그의 역사학이 역사라기 보다는 문헌학에 가깝다는 것을 알려주었어야 했다. 랑케필법은 유명한 역사기술법이긴 하지만 비판의 요소가 많은 기술법이다.
빌헬름 딜타이의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건립> 에선 그의 생철학이라는 것도 책도 뭔지 잘 모르겠고, 로빈 콜랑우드의 <역사의 인식>에선 미학의 등장을 눈치챌 수 있을 뿐이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 영향을 끼쳤다면서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먼저 설명한 순서도 아쉬웠고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펠리페2세시대의 지중해 세계>에선 본 책보다 프로델의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을 주로 언급할 거면 <자본론>뒤에 설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사가 아닌 정교와 철학 미학을 혼합하면서 주제의 순서까지도 정리되지 않는듯 하더니 에이든 화이트의 <메타 역사>로 '역사가 실제로 픽션과 다를바 없다고 주장한 역사가가 있다. (p. 201)' 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고,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시대구분에 있어서 역사학계의 큰 변혁을 설명하는가 싶더니, 토머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로 과학사를 등장시키고 이어서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의 지리적 역사를 건너 <빅히스토리> 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역사학의 흐름은 저자의 주전공인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융햡시킨 '빅히스토리'를 향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역사학의 계보를 배워보겠다는 나의 기대는 '역사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상호 학제 간 소통과 협력을 토대로 삼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추구하는 융합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역사학인 것이다. (p. 237)' 라고 포장하는 저자의 빅히스토리적 마무리에 여실히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에피소드를 함께 담아냈다고 했지만 그 에피소드들이 주요 내용이 되고 정작 알아야 할 역사서들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것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아쉽고 또 아쉬웠다. 물론 시대흐름상 알아두면 좋을 역사가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책을 알게 되는 것은 좋았지만 '한권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학의 역사'라는 홍보문구에 홀딱 빠졌던 나로서는 산만하고 뒤죽박죽인 내용들이 너무 정신없었다. 개인적으로 EBS북을 참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 책은 여러모로 좀 아쉽다.
하지만 고대부터 현대까지 역사학의 핵심적 변화와 발전과정을 핵심키워드에서 뽑아낸 것으로만 간단간단하게 기억한다면 나름 역사학을 가볍게 훑어보며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