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 남들보다 튀는 여자들의 목을 쳐라
모나 숄레 지음, 유정애 옮김 / 마음서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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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지만 결코 꺽을 수 없었던 시대의 저항자들

"마녀들은 지금도 세상 어디에나 있다"

마녀. 원제도 '마녀들' 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내건 이 책은 현재의 페미니스트로서 과거의 마녀 이미지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져왔는지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면서 '그래 그렇다면 나는 마녀다' 라고 냅다 내지르는 책이다.

마녀라는 단어 주변에선 에너지가 들끓는 듯하다. 이 단어는 밑바닥에 있는 어떤 지식, 생명의 힘, 공인된 학문이 무시하고 억압하는 축적된 어떤 경험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녀의 기술은 오직 열정 하나로 자신의 전부를 바치고,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며, 평생 쉼 없이 연마해서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개념 또한 맘에 든다. 마녀는 모든 지배와 계약에 얽매임이 없는 여성을 구현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아가야 할 이상과 길을 보여주는 존재다. (p. 16)

저자가 마녀에 이토록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사실 마녀가 그동안 아니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왜곡되고 핍박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녀사냥은 일종의 희생제의였고 그 역사를 지금도 똑바로 보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저자는 열정적으로 마녀 이미지를 들이대며 '우리가 마녀사냥을 직시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역사가 우리 세계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p. 21)' 라며 현재 시점에서 마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마녀 신화는 인쇄술이 탄생한 1453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했다. 인쇄술은 마녀 신화의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p. 22)

마녀는 신화적이거나 맹목적 종교가 가능했던 비이성적 역사시대에나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마녀신화가 널리 퍼지고 마녀사냥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시기는 인쇄술이 탄생하고 르네상스가 유행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지식이 인쇄물로 공유되고 남성들의 전유물화 되어갈 때 '광범하게 남보다 튀는 여성의 등장은 마녀사냥이라는 소명을 불러일으켰다. 이웃 남성에게 말대꾸하거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거나, 성격이 강하거나, 다소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성격이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을 불러오기에도 충분했다. (p. 26)' 남성보다 지혜롭고 조금이라도 권력화될 요소를 지닌 여성은 마녀화 되었고 그 기준은 '보이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보이는 인쇄물'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마녀사냥을 한때 있었던 작은 사건처럼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향해 보인 증오는 아무리 적의를 품었다지만 정당하게 가할 수 있는 비판의 수위를 한참 넘었다. 그들에 따르면 민주당 후보자는 '악'과 연결되었고 그러므로 마녀와 톡톡히 비교되었다. 다시말해 힐러리 클린턴은 여성으로서 공격받았지 정치적 지도자로서 비판받은 게 아니었다. (중략) 힐러리 클린턴의 경쟁자였던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도 이러한 지시기능을 써먹었다. 그의 사이트에서 어느 지지자는 자금 모금을 알리는 글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Bern the Witch" Bern은 Burn 대신 버니 샌더스의 이름 Bernie에서 따온 것으로 '마녀를 불태우라'는 뜻인 Burn the Witch의 말장난이다. (p. 43)' 등의 일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저자는 '우리는 지금 온갖 양상으로 지배가 강화되는 사실을 목도한다. 아무 거리낌없이 인종차별주의와 여성혐오를 발언하는 한 억만장자를 세계 최강 국가의 수장으로 뽑은 선거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p. 49)' 며 새로운 마녀들의 등장이 필수불가결한 상황임을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러니까 마녀가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마녀가 되어주리라 뭐 이런 식의 결의라고나 할까.

나의 관심사는 여기서 대강의 줄기만 말했던 역사를 기반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후예를 탐색하는 데 있다. 마녀사냥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일부 여성이 겪었던 치욕을 드러냈고 또한 이를 증폭시켰다. 마녀사냥은 일부 여성의 행동과 존재방식을 억압했으며,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 계승되고 벼리어진 그 표현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여성에 대한 이 부정적 이미지들은 최선의 경우 검열이나 자기검열, 장애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최악의 경우 혐오감을 일으키고 나아가 폭력을 야기한다. (p. 54)

저자는 크게 네가지 측면에 집중해서 마녀이미지를 분석한다. 독신녀와 미망인같은 여성의 독립적 삶, 낙태와 피임, 늙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그리고 여성의 노예화 이다. 마녀로 축약되는 이 모든 부정적 이미지들의 편견과 왜곡을 뒤집어보임으로써 저자는 '축적된 이미지와 담론의 층에서 우리가 불변의 진리로 여기던 것을 몰아내고,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가두는 표현들에서 임의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면을 명백히 밝히고, 이 표현들을 우리를 충만하게 살도록 만들어주고 우리에게 동의를 보내는 표현들로 바꾸는 것, 바로 여기에 인생 마지막날까지 내가 행복하게 실행할 마법의 형식이 존재한다. (p. 67)' 라며 이 책의 포부를 밝힌다.

여성이 진정으로 주권을 가진 개인이자 단순한 부속품이나 짐수레의 말을 기다리는 연결 부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사람들 머릿속에 파고들게 하기는 쉽지 않다. 보수 정치가들만 그런 게 아니다. 1971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 월간지 <미즈>를 공동 창립한다. 독신을 가리키는 Miss도 아니고, 기혼 여성을 가리키는 Mrs도 아닌, mizz로 발음하는 Ms.는 정확히 Mr.와 등가를 이루는 여성형으로, 지시하는 대상의 결혼여부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p. 78)

조선시대적 유교관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치인 한국 여성들이 보기에 서양 여성들은 좀더 자유분방하고 존중받는 것으로 보여져 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알면알수록 서구 문명에서 여성의 위치는 우리보다 상황이 더 안좋아 보인다. 영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문명 언어들은 여성형과 남성형이 존재하고 결혼하면 본인의 성씨를 잃어버리고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하다못해 기혼유무를 알리는 수식어는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로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Ms는 지금도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여성형 단어와 남성형 단어에 대해서는 건드리지조차 못하고 있다. 언어는 문화를 반영하고 문화는 사람의 인식을 유지하게 한다. 서구문명의 언어가 변하지 않는한 그들의 페미니즘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요원하지 않을까.

나는 프랑스 미디어만큼 여성에게 순종과 포기를 노골적으로 명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프랑스 방송에서는 유행에 민감한 부모가 나와서 자신들의 일상과 여가생활,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장 선호하는 장소의 주소를 알려주고, 이상적인 집의 인테리어 이미지, 멋지고 우아한 외관을 보여주는 인터뷰를 동원해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선전한다. (p. 103)

프랑스인 저자가 알려주는 프랑스 여성의 실제는 혁명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출산율 1위 국가라고 한다. 여성을 곧 출산으로 연결시키는 문화가 자연스러운 곳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여성은 곧 마녀가 될수밖에 없다. 여하튼 출산과 관련된 여성은 곧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했다. '르네상스의 악마 연구자들은 여성의 완전한 독립을 상상도 하지못했다. 그러니 그들 눈에는 자신들이 마녀라고 고발한 여성들의 자유는 또 다른 종속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들은 당연히 악마에게 종속되는, 말하자면 여전히 남성의 권위에 순종하는 여성들이었다. (p. 116)' 출산과 관련없어보이는 마녀조차도 말이다.

마녀는 막대기나 의자의 다리 하나를 무릎 사이에 끼어 자신에게는 없는 음경으로 대용한다. 이로써 상상으로나마 자신의 성기를 버리고 여성 젠더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러고는 사회적 차원에서 남성의 전유물인 이 이동의 용이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녀가 이 독립성을 스스로 취한 것, 말하자면 그녀를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자한테서 벗어난 것은 그녀가 그에게서 힘을 일부 가로챘음을 말한다. 즉 이 비행은 일종의 절도라 할 수 있다. (p. 117)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서양마녀의 이미지가 이런 의미였다니

마녀사냥꾼들은 임신한 여성 용의자들을 고문하고, 어린 아이들을 처형하거나 강제로 부모의 처형식에 참관하도록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오늘날 낙태 반대 투사들이 괴상하게 붙이고 있는 이 '낙태반대'배지보다 더 기만적인 것도 세상에 없을 듯 싶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 대부분은 사형에 긍정적이고, 2017년에만 1만5000명 이상 사망한 미국 내 총기 유통에 긍정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만큼 열정을 가지고 반전운동을 하거나 환경오염에 반대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중략) 그들은 여성의 삶을 악화시키는 것과 관련될 때만 이 '생명'문제에 열중한다. 산아 증대 정책은 권력과 관련이 있지 인류애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p. 154)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모성이 한결같이 경이로운 경험이라면 왜 여성들이 출산에 등을 돌리는 걸까? (p. 145)'라고 질문을 던진다. '무자녀로 살겠다는 선택이 소수 상류층에만 국한된게 아님을 보여(p. 155)' 주기도 한다. '출산거부는 인간의 모험은 방향을 바꾸면 훨씬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으며, 우리가 지금 이 세계에서 하고 있는 일에 반대하는 저항의 일환이다. (p. 158)' 그러니까 출산에 대한 거부는 '생명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이를 마음껏 누리도록 허용받는다는 것이 나의 논리다. (p. 159)' 출산거부를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를 분석해보라, 그들이 불편해하는 지점이 과연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출산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떠넘기고 있는지도 조금은 보일 것이다. '세계 인구가 75억명이란 점을 고려할 때 종족 절멸의 위험 자체는 사라진 듯 하다. 적어도 출산 부족으로 인해 인류가 소멸할 위험은 없을 것이다. (p. 166)'

남성은 열여덟부터 생이 끝날 때까지 '무슈'라는 호칭을 듣는다. 그러나 여성은 어느 날 문득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악의는 없을지라도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치단결한 것 같은 순간을 어김없이 맞이한다. 나도 '마담'이라는 호칭을 처음 들었을 때 당황하고 모욕감마저 느꼈떤 기억이 난다. (p. 221)

마드무아젤 과 마담 이라는 두 호칭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은 아가씨와 아줌마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하지만 프랑스에서 남성은 여성과 달리 무슈 라는 하나의 호칭이 붙는 것에 비해 우리는 청년과 아저씨로 나뉘는 것을 보면 역시 그네와 우리네는 많이 다른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거기나여기나 여성의 나이듦은 남성의 나이듦과 분명 다른 대우를 받는다.

어머니 나이만을 문제삼는 것은 결국 돌봄과 교육이라는 힘겨운 일을 오로지 여성에게 의존하는 구조를 강화한다. (p. 230)

남성은 결코 나이로 인해 연애와 성적 차원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며 노화의 표시들이 나타날 때도 여성과 똑같은 동정의 시선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 여든일곱 살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잘생긴 구릿빛 얼굴을 황홀해하며 바라본다. (p. 231)

수전 손택은 파블로 피카소에 관한 기사를 썼는데 파블로 피카소는 죽기 몇 달 전쯤 작업실에서 팬티만 입고 있는 모습 또는 자신보다 마흔다섯 살 연하인 마지막 아내 자클린 로크 옆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장난치는 모습을 사진 찍혔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평했다. "구십 먹은 여성이라면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자기 소유지의 한데에서 그처럼 샌들에 팬티만 입고 사진을 찍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p. 233)

그렇다. 할아버지는 약간 멋스러움을 토대로 하고 있다면 할머니는 대부분 할망구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러고보니 할방구는 없지 않나? 이런!!!

클린트 이스트 우드나 피카소 같은 유명인의 예시는 확실히 다른 반응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2014년 할리우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희극 배우 티나 페이와 에이미 포엘러는 조지 클루니와 산드라 블록이 우주비행사로 분한 <그래비티>의 줄거리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 영화는 조지 클루니가 자신과 나이가 같은 여성과 한 우주선에 갇혀 단 1분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기보단 차라리 우주를 표류하다가 죽는 쪽을 얼마나 선호하는지 보여준다" (p. 236)' ㅍㅎㅎㅎ 개인적으로 산드라 블록을 좋아하지 않지만(젊었을때도) 이 평을 보고 나니 <그래비티>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우주에서의 그 몸부림을 꼭 보겠어~! ㅋㅋㅋ

항상 나이의 불균형이 큰 커플만 있는 게 아니며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고의적으로 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해도 나이 차는 남성이 사회, 직업, 재정, 지식 차원에서 적어도 어느 하나라도 더 나은 조건에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 그런데 나이 차가 있는 관계에서 일부 남성이 바라는 것은 젊은 여성의 육체가 아니고 그 육체가 나타내는 것, 즉 열등한 지위, 경험 부족일지도 모른다. 마흔다섯 살이 넘은 남성의 신체가 성적으로 매력이 있는 것으로 통용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오로지 젊은 육체에만 집중하려는 에로티즘은 잘못된 확신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p. 257)

새로운 시선 이었다.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성을 탐하는 것에 대해 그동안 에로티즘적 성적 측면에서만 바라봤었는데 다르게 보면 권력과 지배의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거였다. '마녀 사냥이 누구보다도 늙은 여성을 대상으로 삼았던 이유는 그녀들이 보이는 자신감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p. 262)' 그래놓고 남성은 마녀사냥 이후 대놓고 나이든 여성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늙은 마녀와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일 대립시켰다. 마녀가 나오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바로 아~! 하게 될 것이다.

서구문화는 아주 초창기부터 육체는 혐오스러운 것이며, 육체는 곧 여성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여성은 육체이며,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여성들에게 육체의 끔찍함을 투영하고 자신들은 육체가 없는 양 굴었다. (p. 272)

서구문화에는 '효' 문화가 없었나? 문득 의문이 든다. 그들에게 '어머니'란 어떤 존재였을까... 신에게 눈을 뜨고 나면 어머니에게 눈을 감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또 어떻게 되는 건가... 흠... 여하튼 다음 수전 손택의 기사는 큰 울림을 남긴다.

수전 손택은 1972년 자신이 쓴 기사를 이렇게 마무리 했다. (중략) "나이에 대한 사회의 '이중 잣대, 이중 저울'에서 생겨난 규범들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그에 불복종하면서,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소녀로 있다가 굴욕을 느끼는 중년 여성이 되고, 이어 혐오스런 늙은 여성이 되는 소녀에 머무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빨리 여성이 되고, 활동적 성인으로서 되도록이면 더 오랫동안 연애를 할 수 있다. 여성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살아온 삶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 여성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p. 296)

그러나 여성이 자신들의 얼굴에 살아온 삶을 표현한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비가 아니라 자연과의 전쟁으로 확대시키는, 더 커다란 범주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논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젖을 주는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 끝나면서 그것은 순화시켜야 할 무질서한 야성의 힘이 된다. (중략)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고, 성적으로 그들보다 더 열정적이다. 오늘날 여성의 성욕이 남성의 성욕보다 덜하다고 여기는 걸 보면 여성을 억압하려고 했던 의도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자연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마녀는 폭풍우가 휘몰아치게 하고, 질병을 초래하고, 수확물을 해치고, 출산을 방해하고,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무질서한 자연처럼 혼란을 야기하는 여성은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일단 순화되고 진정되면 여성과 자연은 둘 다 관상용으로 축소되어 "지친 사업가 남편을 위한 기분 전환용 정신적 자원'이 될 수 있다. (p. 322, 323)

자연이 정복이 되던 시대에 여성도 정복의 대상이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논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생산'이라는 자연적 능력을 남성은 없고 여성이 갖게 된 순간 여성은 지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자연과 여성이 동일시되는 논리가 기이하다 싶으면서도 퍽 잘 들어맞는 것을 보면 그동안 시스템에서 교육되어온 논리가 얼마나 강했단 말인가...

오늘날 의학은 신기하게도 마녀사냥 시대에 탄생한 과학의 제반 양상들을 모두 다 보여준다. 말하자면 여성혐오와 공격적 정복 정신,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 및 과학 만능에 대한 믿음, 신체와 정신의 분리에 대한 믿음, 감정을 일체 배제한 냉정한 이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들이 총집결한 곳이다. (p. 332)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의학에서 여성의 신체는 존중받지 못해 왔다. 여성만의 경험인 '출산'의 분야에서도 그랬다. '산과'에서 당하는 모멸감이 공론화 된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세계는 다시 전복되어야 한다"

(중략) 세상을 뒤집는 일,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한한 즐거움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고와 상상력을 마녀들의 속삭임이 이끄는 대로 내맡길 때도 대담함, 당돌함, 사활이 걸린 주장, 권위에의 도전 같은 즐거움이 있다. 크나큰 희생의 대가로 얻는 자연의 정복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인류의 평안을 보장하는 세계, 말하자면 우리 몸과 정신의 자유로운 환희를 더는 끔찍한 마녀집회와 동일시하지 않는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밝히려는 시도도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p. 383)

저자의 문장은 때론 선동적이고 때론 발칙해서 논리정연한 글이라기 보다는 팜플렛 처럼 읽힌다. 따라서 정리가 되지 않는 독해의 난해함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여하튼 읽다보면 '마녀'라는 주제에 고개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남들보다 튀는 여자들의 목을 쳐라' 라는 부제를 다시 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튀는 여성들의 목이 날아간 것인가? 그런데 지금도 목이 날아가지 않기 위해 튀는 것을 조심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기꺼이 목을 내놓겠노라고, 마녀들이여 세계를 전복하자고, 그것도 즐겁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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