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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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하는 마음부터 항해하는 용기까지,

열광어린 수집부터 여가와 여행의 역사까지,

혼자라는 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연대기.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낭만과 은둔이 어울리는 단어일까? 낭만은 고독에 가깝고 은둔은 고립에 가깝다. 그렇다면 고독이 과연 낭만스러운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고독은 때론 외로움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A History of Solitude' 라는 원제 그대로 '고독의 역사'라고 제목을 다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혼자있는 시간에서 낭만을 찾는다면 고독이 될 것이고 혼자 외로이 은둔한다면 외로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왜 다른가? 사실 이 책은 이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짓는 과정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혼자 살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모순되게도 지극히 오랜 세월 고독을 추구해왔다.

1791년,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의 '혼자 있기'를 고찰한 전례 없는 책이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고독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스위스 철학자 게오르그 치머만 Johann Georg Zimmermann (1728~1795, 철학가이자 조지3세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 주치의)이 집필한 네 권짜리 책이었다. (중략) 책은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어, 매년 많은 판본과 우수한 번역본들이 나오면서 1830년대까지 중쇄를 거듭했다. 요한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는 이후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책 자체로 문화적인 주제가 될 정도였다. (p. 12) 그래서 이 책의 서장에서는 '고독에 관한 세기의 고전'이 다룬 18세기와 이전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치머만은 책 전반에 걸쳐 '혼자의 장점들'과 '집단의 편리성과 축복'사이 균형을 잡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략) 지난 세기 동안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대했는지 파악해볼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이라는 병'과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은 사실 2,000년 넘게 시와 산문에서 나타난 딜레마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p. 13)

저자는 '서장'에서 외로움에 대한 불안이 2천년간 지속되어 왔다고 말했지만 책의 본문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를 주로 고찰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집단 이 개인보다 더 중심이 됐던 사회였다가 개인이 집단 보다 더 중심이 된 사회로 변한 것이 확실해진 후에야 '고독'이라던가 '외로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책의 초반부터 언급한 <고독에 관하여> 는 저자의 논리에서 상당한 근거가 되고 있는데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었다. 더군다다 '게오르그 치머만'에 대한 검색에서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고독에 관하여> 라는 치머만의 책에 대한 오마주 같은 이 책을 읽고 나면 <고독에 관하여> 라는 책이 정말 궁금해지는데 읽을 수가 없다니... 이런... ㅠㅠ

18세기에는 과학, 문학, 철학의 확실한 경계가 없었기에 치머만은 <고독에 관하여>에 유명 의사로서 바라본 멜랑콜리는 다룬다. 멜랑콜리는 지난 2,000년 동안 질병으로 분류된 용어로 슬픔, 두려움, 우울함을 아우른다. 18세기에도 마음 상태가 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점점 뒷받침되기 시작했다. (p. 17~18) 치머만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계몽주의 감수성과 뜨거운 신앙의 충돌은, 프랑스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의 1760년 소설 <수녀>에도 나타난다. (p. 19)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가 독창적인 이유는 첫째, 혼자있는 상태가 아니라 혼자 있는 이유에 집중했다는 데 있다. 고독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결정하는 요소는 자신을 은둔하게 만든 심리상태였다. (중략) 둘째, 치머만은 '혼자vs집단'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둔과 사회생활의 균형을 강조했다. (p. 21) 책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절박함은, 당시 은둔과 사회생활의 균형이 몹시 불안정하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과도해진 도시 문명 속 엘리트 문화는 은둔을 지향할 위험이 있었다. 치머만은 이런 흐름에 공감하면서도 결과를 염려했다. (p. 22) 산책은 '낭만적인' 은둔을 실행하는 주된 방식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p. 23)

계몽주의 개인주의 도시화 등등의 문제로 '낭만적 은둔'이 선호되던 18세기와 코로나비대면 개인주의 도시화 등등의 문제로 '은둔적 고립'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시대에 <고독에 관하여> 같은 책이 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는지 더더욱 이해가 안된다. 외로움을 우울로 받아들여 온갖 힐링과 치유서들은 넘쳐나면서 왜 '고독'에 대한 책들은 없는 것일까? 고독이야 말로 낭만적 은둔과 동의여라고 할 수 있는건데... 흐음... 여하튼, 고독의 대표적 행위는 '산책'으로 나타났다.

도보는 사람들을, 특히 북적대는 집을 피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적 경험이기도 했다. 산책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읽을 책을 소지해 다양한 도보 문학에 기여했다. (p. 34) 혼자 도심을 걸을 때 받는 의심을 피할 최고의 해결책은 동물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개 산책은 도심의 전형적인 관행이 되었다. (p. 63)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단독 여행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하루치 준비물을 챙겨 왕복 기차표를 사는 것과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 없이 인적 없는 야생으로 걸어가는 것은 달랐다. (p. 83)

이 책이 영국학자의 책이긴 하나 '산책' 이야기가 나오고 나니 '플라뇌르' 라는 불어단어가 생각난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지만 '플라뇌르'라는 남성명사에 대응할 여성명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산책은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그러한 산책조차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들은 산책을 넘어 더극한 고독감을 쫒아 오지탐험까지 나서는 시대에도 말이다. 저자는 여성들이 산책 대신 찾아낸 '여가활동' 에 대해 설명한다. 바느질, 수집, 카드놀이, 독서 등등등 하지만 '실내에서 혼자 즐기는 여가는 대부분 취향이 깃든 호사였다. 집단에서 분리되려면 기본적으로 돈, 시간, 실내 공간이 필요했다. 하류층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p. 113)' 그렇다면 하류층에게 가능했던 '혼자'는? '독방'에서 가능했다. 수도원이나 감옥 같은 곳의 '독방' 말이다.

독방 감금은 수감자에게 가장 자비로우면서 가장 심한 징벌이 혼합된 조치였다. 수감자는 사회에서 안정된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지속적인 사색의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장기적인 강제 분리는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수감자는 신에게 의탁할 터였다. (p. 164) 강제 독거의 경우 체계적으로 기록된 모든 면이 실패였다. (p. 177) 재소자들의 독방 감금 경험은 현대 연구자들에게 치밀한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난제를 남겼다. 사회격리, 일상생활 통제력 상실, 환경적 자극 부재의 영향을 수검자들의 다양한, 때로는 극심한 질병률의 맥락으로 평가해야 했다. (p. 179) 징벌로서 단독 감금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영국에서 더 오래 시행되었지만 (중략) 1,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독방 제도가 아예 없어졌다. 죄수를 신앙적으로 갱생시킨다는 개념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사라졌다. 19세기 중반, 장기 사색을 통한 도덕심 회생이라는 열망은 약화되었다. (p. 181)

자발적인 사색과 강제적인 분리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그저 '혼자'를 유지시켜주는 것만으로든 그 무엇도 해결하거나 향상시킬 수 있는게 없었다.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의 차이가 비단 '독방'문제 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런면에서 인간은 분명 '독립적'인 존재임이 재확인되는 듯 했다.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독립적이랄까. 달리 말하면 개성이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개성적 독립적 개인적 인간의 성향은 20세기 들어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이어진다.

혼자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아지면서 점점 취미가 전문화되었다. (p. 203)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소비의 역사와 겹쳤다. (p. 223)

사실 '혼자' 를 즐긴다는 것은 예로부터 '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달면 왠 산책이고 여가이겠는가. 문학청년들이 산책할때 그 길을 노동자들은 새벽에 일터로 나갈때 걸었다. 귀부인들이 손뜨개로 '혼자'인 시간을 나름 꾸며볼때 그 집의 하녀들은 쉴새없이 집안일을 해야 했다. 산업화가 되고 노동자들의 삶에도 즐길만한 '취미'활동이 생겨났을 때에도 그 질적 차이는 결국 '소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너무 계급차별적 시선인 것일까? 자본을 떠나서 '혼자'를 생각하려면 종교적 으로 갈수밖에 없는데 앞서서 종교와 감금의 연결은 실패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영적'회복'에 대해 다시 살펴본다.

20세기가 되자 종교 권위자나 진화론과 무관한 새로운 혼자만의 길이 모색되었다. 혼자 은밀히 떠나는 순례와 점차 형성되고 있던 대중매체 사이에 다시 균형이 잡혔다. (중략) 이 장에서는 현대 사회의 압박감에 맞서 계속 '혼자 있기'에 끌리는 요인을 다섯 가지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p. 231)

이런저런 맥락을 따져봐도 결과는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영적 회복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할만한 마음챙김도 '개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보조제로 홍보된다. 마음 챙김 명상의 수행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불공정한 구조의 관계 탐구는 기껏해야 선택사항에 그치고 있다. (p. 275)' 그렇게 '혼자 있기'는 현대시대에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으로 돌아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는 외로움을 걱정하는 현상의 본질이다. 외로움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실패로 여겨지는 듯 하다. 인구 통계, 정치, 문화, 사상, 의학 부문의 요소들이 더해져 외로움이라는 경험의 범주를 만들었다. 그 범위는 20세기 전부터 광범위하게 전개된 우울증만큼이나 넓다. (p. 280) 집단에서 소외되는 두려움은 20세기와 21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두번째 의문은 외로움과 고독의 확실한 경계로, 이 장 마지막 부분의 주제이기도 하다. (p. 281)

외로움과 고독의 경계가 자주 흐려지는 점을 고려할 때 결론을 두 가지로 맺을 수 있다. 첫째, 외로움은 가까운 시기의 실패가 낳은 산물만은 아니다. (중략) 둘째, 외로움을 후기 근대화의 결점과 관련 짓는 것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더 뚜렷해진) 부의 불평등과 국가 재정 부족 때문이다. (p. 305) 개인과 집단의 경제력이 추락하면서 외로움을 억누르며 고독을 즐기기는 어려워 졌다. (p. 306) 외로움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시대 사회적 관계의 모순이 아니라 부의 분배와 공공 서비스 공급의 긴박한 위기다. (p. 307)

외로움은 문제이고 고독감은 어느정도 필요하다고 이해되어 진다. 지금의 현실을 봐도 그렇다. 코로나 이후 휴교에 재택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하루종일 함께 있는 나날이 길어질 수록 저마다 속으론 '제발 좀 혼자 있고 싶다' 외치고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지만 가족 중에 한명만 걸려서 방 하나 차지하고 며칠을 집안에서 쟁반으로 끼니만 받으며 생활한다고 했을때 과연 그 '혼자'가 좋겠는가? 외로움과 고독감은 마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혼자'있는 것이 때론 외롭게 느껴지고 때론 고독하게 즐기게 되기도 하는 것은 그러나 결국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다. 저자가 지적한 경제력의 측면에서의 인식은 '고독'의 관점에도 꼭 필요한 것이다.

디지털 혁명은 사회적 교류와 동시에 사회적 교류 단절을 추구하는 흐름의 극치다. (p. 310) 소유욕이 강한 개인주의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현대사회에서 물리적 고립의 역할이 복잡해졌다. 한편으로는, 소비와 통신이 발달하면서 계층과 상관 없이 누구나 혼자 있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혼자 있기를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 되었다. 과소비와 과열된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은둔을 수용하고 지원하는 기관이나 시설은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 (p. 318~319) 고독은 여전히 계량되지 않는 반면, 외로움은 디지털 미디어처럼 계속 숫자로 해석된다. (p. 321) 온갖 논의가 있어도, 극단적인 은둔과 집단성에 큰 변화가 생겨도, 고독의 경험과 실행에는 뚜렷한 핵심이 남아 있다. 1791년 요한 치머만이 고독을 두고 '자기 회복과 자유롭고자 하는 경향'이라고 한 정의는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 (p. 323)

이러니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 가 정말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영어능력자라면 원서라도 찾아서 읽어보 터인데 영어무식자인것이 이렇게 또 한계를 맞닥뜨리게 하는 구나;;;

여하튼, '혼자'있는 것을 즐기는 편인 나로서는 '낭만적 혼자 있기'의 역사가 궁금해서 읽어본 책이었는데 그러한 '낭만'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예전에 다른 책에서 '론리니스loneliness 와 솔리튜드solitude' 의 차이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원제도 A History of Solitude 인 것을 보면 저자는 Solitude 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loneliness 일것 같다. 그러니 관점을 조금 달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말이다. 그러면 '혼자 있기'가 좀더 낭만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사회적으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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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의 역사 - 음식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
윌리엄 시트웰 지음, 문희경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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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폼페이부터 현대적인 고급 요리까지,

외식 문화와 레스토랑의 사회문화적 변천사를 읽는다

시간이 멈추는 법은 없고 따라서 역사가 없는 분야는 없다. 그래서 역사는 늘 무궁무진하고 늘 다채롭기 마련이고 그런 역사를 종류별로 읽어나가는 것은 책을 읽는 중에도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시대가 되면서 외식보다는 배달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또한 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밖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 바깥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러한 문화가 배달이라는 방법을 만났을 뿐이므로. 여하튼, 모든 역사읽기가 그러하듯이 외식의 역사 또한 단순한 외식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외식의 역사는 정치, 공포, 용기, 광기, 행운, 혁신, 예술, 사랑, 그리고 묵묵히 성실하게 쌓아올린 노력에 관한 이야기다. 남다른 열정과 예지력으로 참신한 레스토랑을 내거나 새로운 주방을 만들거나 사람들의 식문화를 바꾸는 새로운 서비스나 요리를 내놓는 사람들만 연구해도 외식의 역사가 나온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인물들을 만나본다. (p. 7) 이 책은 역사상 최고의 레스토랑이나 최고의 요리사나 최고의 화덕이나 가장 혁신적인 주방 기구를 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맛있는 뒷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늘의 모습으로 만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p. 11) -서문 中-

저자는 영국의 유명한 음식작가라고 한다. 세계의 많고 많은 유명한 요리들 중에서 영국의 요리는 사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영국의 전통요리? 하고 되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러한 영국과 요리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책은 비웃음을 얻고 있는 영국의 식문화에 대한 저자의 항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양역사의 시작은 대부분 로마제국이곤 하는데 외식의 역사 또한 그 시작은 로마제국, 폼페이에서 출발한다.

로마의 주점은 역사상 다른 모든 주점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사회적 평등을 조장하던 곳이다. (p. 24) 유골은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한 부류는 돈과 보석을 소유하고 다른 한 부류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다. 노예와 상류층이 나란히 죽었고 두 부류의 유골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노예가 영양이 부족했다는 증거도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일반적인 가정의 근거가 될 만한 증거가 전혀 없다. (p. 25)

전 세계를 아우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로마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라고 하면 계급과 권력이 먼저 생각나지만 사실 제국의 초기는 굉장히 평등한 계층적 면모를 보였다 제국의 황제는 스스럼없이 대중목욕탕에 갔고 대중들이 드나드는 주점에 들렀다. 폼페이에 묻힌 유골에선 계층의 차이가 영양상의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부분 비슷한 걸 먹었고 비슷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폼페이가 백년후에 터졌더라도 상황은 몹시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될 때는 '근대화'가 화두였다. 그래서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음식전통마저 멀리했다. 터키의 요리사들은 오히려 프랑스를 선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에 형성되었지만 그 600년 역사는 배타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정치 이념이 정신을 지배하지만 음식은 다르다. (중략) 오스만 제국의 음식도 마찬가지다. 서양이 21세기의 첫 4분의1을 향하는 지금도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스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p. 27)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음식을 파는 시설이 늘어나자 규제도 생겼다. 술탄이 음식을 나눠주는데 누군가는 음식을 팔아 돈을 벌었기에 가격 정책이 도입되고 식품 위생 기준도 생겼다. (중략) 16세기와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음식점에서 파는 인기 요리의 조리법을 통제했다. (p. 36)

신석기혁명만 동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음식을 즐기는 문화 또한 동쪽에서 온 것이 참으로 많았다. 지금의 서양에는 말이다. 제국의 초기에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환대'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와 제국의 성격이 그 역사를 달리하면서 환대나 접대는 사라지고 외식의 필요성이 생겨났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 당연히 그들도 먹어야 했으니까. 여하튼, 오스만 제국의 중앙통제는 외식의 분야까지 뻗쳤고 그덕분에?! 청결하고 깔끔하게 유지되는 음식점들의 문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스만제국은 서양에 '커피'를 전수시켰다.

서양상서는 마르코 폴로를 가장 위대한 여행자로 꼽는다. (중략) 역사학자들이 바투타 여행기의 일부 내용에 대해 진위를 따지듯 폴로도 오류와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중략) 폴로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여행하고 이븐 바투타가 고향을 떠난 해보다 1년전 (1324년)에 사망했다. 폴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투타에게 대장정의 바통을 넘겨준 셈이다. 바투타는 정확성과 연대기 두 가지 모두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중략) 하지만 그의 여행기를 당대의 다른 문헌과 대조한 분석에서는 놀랄 만큼 정확한 기록인 것으로 드러났다. (p. 43) 술탄이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로마인들이 나그네에게 정원을 열어주었듯이 이븐 바투타도 낯선 이의 친절에 의지하면서 여행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점대에 관한 초기의 기록과 오늘날의 접대 문화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p. 45)

32년간 당시로서는 거의 전세계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비하자면 한참동안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그의 여행기가 출간되고 500여년간은 아무도 읽지 않았던 책... 그 책이 재발견되었어도 마르포 폴로의 입지에 비하자면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여행은 외식과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다른 지역의 일상과 문화와 그리고 음식을 알게 해준다. 더구나 돈한푼 없이 홀홀단신 세계여행이 가능했던 시절의 여행기라니 꼭한번 읽어보고 싶다. 상인집단으로 사막을 건너 중국을 다녀온 것만으로 허풍을 떠들어댄 여행기와는 분명 크게 다를 것 같다.

흥미롭게도 웨스트민스터가 고급 식당의 시초라고 정확히 짚어서 말할 수 있다. 모든 의회의 어머니인 웨스트민스터가 런던의 레스토랑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p. 61) 이런 음식점이 번창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런던의 성벽 너머는 시 당국과 시내의 모든 장인과 상인을 규제하고 독점하고 보호하는 강력한 상인 조합인 길드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p. 62)

책의 제목이 '외식의 역사'라고 했지만 사실 식문화라는 것이 유적으로 남아 있기가 어렵다 보니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은 폼페이와 이슬람의 문화를 살짝 들여다보는 정도이고 책의 대부분은 근대를 전후한 영국의 식문화 형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서양역사라는 것이 어느 한 나라만 콕 집어 따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엮이고 엮이는 관계이다 보니 영국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프랑스와 인도와 미국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의 주요 줄거리는 '영국의 레스토랑 역사' 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하튼, 예나지금이나 가진것도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창업할 수 있는 분야는 외식분야인 것이다.

헨리8세가 로마와 결별하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그 유명한 수도원 해체령이 나왔다. (중략) 갑자기 전통적인 접대의 통로가 끊겼다.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다른 교회에서 시도때도 없이 열리던 축제를 공격했다. (p. 65)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춤추고 술마시고 싶을때 갈 곳이 없어졌다. 더이상 교회가 그런 장소와 구실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심각했다. 화형당하지 않은 수도원 사람들에게는 일할 곳이 필요했다. 여행자들에게는 머물 곳이 필요했다. 지역민들에게는 여유롭게 쉬면서 함께 어울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점을 차리자 지역민과 여행자들이 모여들었다. (p. 66)

무상으로 제공되던 것들이 유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시대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기 전부터 상업이 사회의 가장 큰 부를 제공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은 돈으로 연결되었다. 다른 계기였지만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궁정을 없앴으나 레스토랑을 창조했다. 여하튼 외식사업은 환대가 아니라 사업이었으므로 식문화에도 급격히 돈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바스티유를 습겨한 날 프랑스에는 약200만 명의 하인이 있었떤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2800만명이었으니 남자든 여자든 열두명에 한명꼴로 어느 집안의 하인으로 일한 셈이다. 일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공곡의 영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다. 지방 저택의 주방에서 일하던 수많은 실업자가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올라왔다. 그리고 요리의 성격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적·사회적 격변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파리로 올라오면서 레스토랑들이 문을 열었다. (p. 88)

프랑스는 귀족문화가 사치에 정점을 찍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으로 그 문화가 대중화가 된 셈이었다. 시민혁명이 귀족문화를 퍼트린 셈이라니 역사는 역시 아이러니 투성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영국에서는 반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산업혁명으로 가내수공업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므로 결과적으로 사교 활동도 다른 데서 일어났다. (p. 103)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가의 집들은 비좁고 답답했다. 침대 하나에서 다같이 자고 느긋하게 쉴 공간이 없었다. 적어도 고된 노동을 마친 뒤 돌아가고 싶은 편안한 집이 아니었다. 미혼 남자들은 하숙집에서 눈이나 겨우 붙일 뿐이었다. 따라서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여관이나 새로 생긴 클럽에 모이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클럽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노동자들을 위한 장소였다. (p. 130)

영국의 외회제도와 커피하우스 문화발달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주점(펍)문화로 이어졌다. 나중에 고급 클럽들이 생겨났다고는 하나 영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외식산업이 노동자들의 펍 문화였다면 프랑스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이 주를 이루었다. 이게 아이러니인 것이 노동자중심 사회로 토대가 닦인 영국에는 귀족이 남아있고 귀족중심 사회로 토대가 닦인 프랑스에는 시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귀족이 펍을 즐기고 시민이 레스토랑을 즐긴달까. '영국에서 프랑스어로 메뉴를 적는 관습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버킹엄 궁에서는 아직도 이 전통을 고수한다. (p. 174)' 라는 것을 보면 역사란 참 오묘하다는 것이 다시금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고대나 오래전 역사이야기는 사실상 드물 수 밖에 없는 분야가 '외식'이다 보니 책은 근대 외식의 역사가 주 내용을 이룬다. 간략하게 보자면 친절하게도 앞 페이지에 연대표로 한눈에 정리도 잘 되어 있다. 오래전 역사일 수록 '외식'은 문화의 한 분야였다면 근대로 오면서 '외식'은 산업의 한 분야가 된 것 같다. 그러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외식의 역사로만 읽히지 않는다. 사람의 이야기가 결국 역사이고 한 분야에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다단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다보니 그러한 감정들은 결국 현재를 다시보게 만든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역시 늘 참 좋은 것이다. 그나저나 맘편히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외식의 시간이 어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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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개릿 라이언 지음, 최현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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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역사를 좋아하고 서양역사 책을 이것저것 읽다보니 그리스·로마사에 대한 애정이 좀 생겼다. 그래서인지 해당 분야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곤 한다. 그렇게 읽게 된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뒷표지의 추천사들에 훅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한국 고고학계의 미래 강인욱 교수, 그리스·로마사 관련 대중서로 인기가 높은 김헌 교수 그리고 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이라는 곽민수 님이 '신화 중심의 그리스 로마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책' 이라며 강추하다니 대체 어떤 책인것일까~

이 책은 36가지 질문에 답을 제공할 것이다. (중략)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내용 중 핵심 지식들을 간결하게 정리했고, 현장감 넘치는 도판을 풍부히 실었다. 흥미진진한 세부 일화들은 각주에 충분히 담으려 노력했고, 스스로 고전을 해독하는 경험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출처를 미주에 게시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고대 세계의 역사를 부록으로 아주 간결하게 수록했다. 전체상을 먼저 파악하고 싶다면 부록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바로 질문 속으로 뛰어들어도 좋다. (p. 7)

저자는 그리스·로마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여러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교육 현장에서 정말 학생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역사 책 속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쩌면 사소한 호기심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책을 구상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라고 하면 신화나 제국에 대한 것들을 배우지만 그런 내용들 속에 당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제대로 담겨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들은 정말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신화를 정말 믿었는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조각상들은 왜 하나같이 나체인지 등등 세속적이지만 유쾌하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36가지로 추려 답하고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당대의 삶이 좀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적나라한 조각상 뚱뚱한 검투사 전쟁 코끼리> 라는 다소 엉뚱한 원제는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권력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윗세계를 다뤘다면 그 아래 피지배층의 삶을 다룬 이 책은 아랫세계로부터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이라는 의미이리라.

그리스·로마인들은 왜 바지를 입지 않았을까? 게다가 어떤 의복에도 호주머니가 없었다고 한다. 너무 불편하지 않았을까? 첫질문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답변또한 아주 신선하다고는 볼 수 없다. '지중해 기후에 적합했고 사회적 상황이나 날씨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할 수 있었다. (p. 14)' 라는 모범적 답변으로 끝났다면 정말 너무 식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어쩌다 바지를 입게 됐고 왜 입게 됐는지 살피면서 '경건한 기독교인 몇몇은 손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속옷을 입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p. 18)' 라는 식의 유머를 곁들임으로써 역사를 읽고 있으나 역사를 읽고 있지 않는 것같은 편안함과 재미를 선사한다.

저자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통해 쉽고 발랄하게 시작하면서도, 턱수염과 면도의 유행변천사를 살펴보기도 하고, 남성 유방 축소와 원시 형태의 지방 흡입술 까지 있었으며, 화려한 연회에 등장하는 음식들에 놀라기도 하지만 '칠성장어의 이리(정액 덩어리), 강꼬치고기의 간, 꿩과 공작의 뇌, 홍학의 혀 등이 수북이 쌓인 거대한 접시가 등장했다. 이 음식의 요리로서의 가치는 의심스럽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음식은 권력이었다. (p. 58)' 같은 확실한 마무리를 통해 역사서로서의 빛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적 상식들도 다수 배울 수 있었다. 서력기원제도는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보편화되었다거나 요일의 명칭이 게르만 민족이 고안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까지도 다른 방식으로 요일을 표시하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 로마 귀족들은 상업에 대한 직접 투자는 금기였기에 노예들을 훈련시켜 상업, 수공업, 필경사, 대출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것, 키케로가 아내보다 훨씬 젊은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30년간 함께 산 아내를 떠났고 다소 빨리 이혼했다는 것, 델포이의 여사제가 바위에서 새어 나오는 증기로 인해 환각상태에서 예언을 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향락용 증기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고 흡입한 종족은 스키타이인들이었다는 것, 경기장에 집어 넣을 동물들을 잡아들이느라 터키의 표범, 이란의 호랑이, 이집트의 하마, 북아프리카의 코끼리가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 등등 알쓸신잡용 상식들이 수두룩 ㅎㅎㅎ

또한 잘못 알고 있던 역사적 상식들을 수정하게 될 수 있기도 했다. 로마인이 납으로 된 수로관 때문에 납 중독으로 죽었다고들 하지만 사실 로마인들은 납에 독성이 있음을 알고 있어서 수로관 대부분을 토관으로 만들었다는 것,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고 해서 노예 수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스·로마의 누드 조각품은 사실은 대단히 이례적이라는 것, 검투사들이 상대편 검투사를 죽이는 것은 경제적 여유때문에라도 많이 꺼려졌다는 것 오히려 자비를 베풀기를 권장했기에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콤모두스도 검투사와 싸울땐 목검으로 싸웠고 상대를 한번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 게르마니아 나 아일랜드는 정복을 못한 것이 아니라 정복함으로써 얻을 이익이 없었기에 굳이 정복하지 않았다는 것(그러나 경계지역에서의 교유로 인해 로마제국이 적을 성장시키는 경우가 됐다는 것) 등등등

새로 알게된 당대의 일상을 통해 역사적 생각거리들이 있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는데 예를 들어, '신들은 숭배자들의 마음을 읽거나 영혼을 살펴보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자신이 하사한 선물의 대가로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가장 효과적은 방법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p. 163)' 라는 내용을 보며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원하는 것을 빌었던 고대인들은 빈부 격차에 따라 제물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한 명의 희생으로 모든 희생제물이 사라졌으니 예수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었겠구나 그래서 당대에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했고, 게다가 '주교에 의한 관리는 규모에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일종의 결속감을 주었다. 이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에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p. 223)' 라는 걸 보면 개인으로서 점점 살기 힘들어지던 사회상이 어떻게 종교와 맞물릴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서양에서는 논란?!거리인 '그리스·로마인의 진정한 후손은 누구일까?' 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

현대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패망으로부터 20세대,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부터 약50세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70세대, 소크라테스로부터 80세대 쯤 떨어져 있다. 이 눈금자 위에서 유전이란 무의미하다. 그 누구도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할 만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원하든 원치 않든 그리스·로마인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물려받았다. 이 유산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의 후예이다. (p. 384)

라고 현명하게 마무리 지음으로써 고대의 역사가 일부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모두가 알아야 할 역사임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뭐... 저렇게 따져도 극동지역에 사는 우리가 로마인의 후예라고 말하기엔 뭣하지만 여하튼 역사는 돌고도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심 권력들을 이해하려면 세계사적 지식은 필수인 시대다. 그러니 역사책은 읽어야 하고 처음부터 역사적 사건들의 위압감에 눌리기 싫다면 이런 가벼운 책들로 고대사를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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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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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유토피아 사유를 풀기 위한 열쇳말

유토피아를 둘러싼 현대적 물음들

동서양 철학고전을 쉽고 입체적으로 읽도록 도와주는 시리즈라고 안내된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얇고 작은 책이라서 일단 겉보기만으로는 '고전은 어렵다'라는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기대했던 고전책은 아니었다. 나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려나 기대했던건데, 이 책은 '모어의 유토피아'를 먼저 읽고 난 후 읽었어야 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생각했던 질문들에 대해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본 적 없는 내가 어찌 그 질문을 이해하며 하물며 답을 유추해볼 수 있었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어의 '유토피아' 원전 번역서를 찾아 읽는 건데...싶었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기 전에 사전정보로 알아둘 만한 내용들도 꽤 있었기에 + - 퉁치는 걸로.

유토피아는 15,16세기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어는 어떤 시대에 살았을까? 그는 왜 <유토피아>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일까? 토머스 모어가 살았던 때인 15,16세기 유럽 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흔히 암흑기라 불리는 1,000여년 동안 중세 유럽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고 새로운 기운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 곳은 이탈리아였다. (p. 18) 유럽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르네상스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 사상과 문화, 예술에서 새로운 기운이 퍼져나갈 때,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p. 21)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스위스, 프랑스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중세 교회의 통일은 무너지고, 계파간 갈등과 대립이 심해져 유럽 각지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모어가 살았던 영국에서는 다소 엉뚱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p. 22) 헨리8세는 자신의 재혼을 관철시키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독특한 영국식 성공회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p. 23)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교회가 구교와 신교로 나뉘는 것을 반대했다. 모어가 다른 데에서는 굉장히 진보적이었지만, 종교에서만큼은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 24)

모어가 살던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였고 종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으며 무역의 활로가 점차 전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모어는 급변하는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개혁적인 성향으로 비판적 관점을 가졌으나 종교에서만큼은 보수적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이렇게 각 나라마다 앞다투어 신천지를 발견하려는 분위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26)' 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땅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유럽땅에 국한되어 있던 상상력이 새로운 땅 즉 어쩌면 유토피아 같은 새로운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력이 발휘되기 딱 좋은 때였던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지금 이 문제투성이 현실보다 좋은 곳, 하지만 그동안은 몰랐던 곳, 그러니 새로 발견되는 땅이 그러한 유토피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런 상상력의 흐름이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지금 눈앞의 현실속 문제점들이 적나라하면 적나라하게 보일 수록 더 꿈꾸게 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유토피아>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천지로 비유되는 유토피아 땅의 삶을 5년 동안이나 경험하고 온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이다. 이 라파엘이 참여한 탐험대가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 일행이라고 모어는 상상력을 발휘해 설정한 것이다. (p. 26)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를 대표하는 에라스무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의 교분이 상당히 지속되었다. (p. 28) 당시 영국은 장미전쟁에서 승리한 헨리7세가 리처드3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튜더왕조를 열고 있었다. 모어는 헨리7세와 여러 가지 정책 면에서 종종 충돌하곤 했다. (p. 29) 헨리7세와 종종 충돌했던 모어는 헨리8세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p. 30) 귀족과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청에 헨리8세의 이혼 청구서를 제출하는 서류에 모어는 서명을 거부하고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해 헨리8세로부터 거듭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534년 마침내 모어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다. 15개월 동안 악명 높은 런던탑에 구금된 기간에도 그는 저술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35년 7월1일 모어는 재판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닷새후 단두대에 올랐다. (중략) 가톨릭 교회는 죽음을 선고받고도 의연히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굳건히 지킨 모어를 그의 400주기인 1935년에 성인으로 올렸다. (p. 33)

사실 <유토피아> 원전 번역본을 읽었다면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지식들은 아마도 해제에 설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쉽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모어의 유토피아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들을 미리 던져주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저자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현대적 버전의 질문들까지 던진다. 그런 질문들을 열쇳말로 삼아 왜 지금 이 현대에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원제는 <사회의 가장 좋은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 이다. <유토피아>를 몇 개의 핵심 개념으로 정의하면,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 사회, 미래를 위한 관점, 완벽한 사회, 새로운 법률제도, 인간적인 시선 등이 될 것이다. (p. 34)

<유토피아>의 원문이 조금 인용되고 있긴 하지만 그 양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책만으로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직접 탐험하고 돌아온 라파엘 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마치 소설처럼 혹은 여행담처럼 서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분명 당시 영국사회에서는 나름 파격적인 사상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대의 플라톤의 <국가> 부터 근대의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그 생각의 범위가 넓어보이는 <유토피아>는 무척 궁금한 고전이다. 이 책을 보니 고전이긴 하나 소설처럼 읽혀질 것도 같아 무척 궁금해진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 '모어의 <유토피아>와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될 여섯 권의 대표적인 책들을 소개 (p. 164)' 하고 있다. 이 부분을 보니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라는 책도 무척 궁금해진다. 또한 본문에 등장했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도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비록 이 책이 처음의 내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으나 이렇게 읽고 싶은 책들을 남긴 것을 보면 이 책또한 읽어봄직한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좋은 책들이 어찌나 많은지...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없고... 여하튼 이 책이 속한 시리즈는 고전읽기를 할때 참고용으로 썩 괜찮은 책들이 될 것 같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 그만큼 유토피아가 저절로 꿈꿔지는 요즘 시대에 중세말의 <유토피아>를 찾아 읽어보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지, 이 책의 저자와 나는 어떤 질문을 공감하고 다른 질문을 생각하게 될지 숙제처럼 남은 이 궁금증을 언제 풀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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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나는 예술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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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혼자 가지 않아도 좋은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거리 미술관 산책

2020년 한 해 동안 <국민일보>에 연재되었던 칼럼 '궁금한 미술'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우리가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굳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일상 속에 미술품이 있다는 것. 하지만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작품의 작가, 제작 경위, 미학적 가치, 시대사적 맥락을 두루 알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거리 위 조각물과 건축물이 누구의 손을 거쳐 탄생했는지, 설치된 배경은 무엇인지, 어떤 점이 멋진지 등을 궁금해할 이들에게 '친절한 거리예술 안내서'가 될 내용을 담았다. - 책표지 앞날개 내용 中-

예술작품이라 하면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어딘가 좀 격조 높은? 곳에 있을 것 같고, 그런 곳의 야외전시장에서 보는 작품들 조차 실내에서 보는 작품들에 비해 대충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공공미술'을 막상 의식하고 나면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길거리 곳곳 도심의 한복판에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내가 봤더라도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 그리하여 봤어도 기억나지 않을 그렇게 예.술.작.품. 인지 몰랐을 작품들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첫번째 소개 작품은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앞에 있는 <해머링 맨> 이었다. [ 흥국생명은 당시 '1%법'에 따라 이 작품을 주문했다. (중략) 흥국생명은 2008년 <해머링 맨>의 인체 윤곽이 멀리서 더 잘 보이도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도로 쪽으로 5m 더 빼는 결단을 내렸다. 이 거대한 철제 조각상은 망치질하는 데 드는 전기료, 보험료 등 유지비만 1년에 7천만원 가량이 든다고 한다. 설치와 이전, 유지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기업 오너의 미술 애호가 거리의 공공조각의 수준을 어떻게 업그레이드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p. 27) ] 그랬구나... 광화문에 가면 당연하게 눈에 보이는 그 거대한 입상이 수많은 사람들의 출퇴근길에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공공미술작품이었구나... 이 작품에 비하면 두번째 소개되는 청계광장의 <스프링>은 그야말로 공공미술의 폐해애 가까웠다.

올덴버그에게 제시된 작품 가격은 무려340만달러 (당시 환율로 35억원). 해외 미술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거액이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지속 가능한 녹색 성장 시대로의 이륙을 선언하는 기념비적 상징물을 외국인 작가에게 빼았겼다는 허탈감이 미술계를 휘정었다. 서울시는 다슬기 모양이라고 설명하지만, 소라를 닮은 게 분명한 조각의 형태도 생뚱맞았다. 그리고 설사 다슬기가 맞다고 해도 거기 왜 다슬기 모양의 조각이 들어서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미술인들 (p. 35) <스프링>을 제작하던 당시에는 이 과정이 없었다.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내리꽂은 것이다. 그때 여러 미술 단체에서 '외국 작가의 작품이 선정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공론화 과정이 빠진 것이 문제'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스프링>에 대해 미술계가 반감을 가지는 또 다른 이유는 올덴버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청계천을 찾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올덴버그는 한국을 단 한번도 찾지 않고 <스프링>을 디자인했다. (p. 38) 2007년 대선이 코앞인 시점이었다. 천천히 제대로 개울을 복원하고 조각물을 세우는 것은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그는 '빨리빨리'를 거듭 외쳤을 것이다. 그 결과, '길게 누운 분수대' 거대한 시멘트 어항'으로 불리는 청계천이 탄생했다. 복원된 자연 하천이 아닌 한강과 지하수를 끌어와 흘려보내는 인공하천이다. 그러니 청계천 초입에 놓인 <스프링>은 허구이자 위장이다. (p. 40)

MB의 대권 야망 속에 서둘러 마무리된 청계천 공사와 공공미술 작품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건만은 그의 위풍당당한 자랑질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어갔던 것이 아닐까. 비싸게 들여온 외국작가의 작품들이 흉물 취급 당한 작품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있다고 해서 공공미술일지라도 소위 '작품'이려면 반드시 외국작가의 작품이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DDP 앞에 서있는 거대한 인간꽃처럼 보이는 조형물의 작가는 김영원 조각가였다. 아무리 예술성이 높더라도 말도많고 탈도많은 건물인 DDP에 비해 나는 이 조각상의 예술성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았다. 앞선 사례들에서도 확인되지만 건물앞에 서있는 예술작품은 동상인 경우가 많다.

동상은 통치자가 국민에게 통치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서구에서는 19세기에 엄청나게 생겨났다. 민족적 우월감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제국주의 시대는 애국주의 물결이 거셌고, 이런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수단은 영웅화된 인물의 동상을 공공장소에 높이 세우는 일이었다. 이성의 시대인 근대는 동상을 통해 영웅적인 인물의 강인한 정신력과 실천력을 보여주려 했다. (p. 62) <이순신 동상>자리에 예정돼 있었던 4·19기념탑은 5·16군사정변 이후 지금의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는 곳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 시대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동상에 따라붙는 오명이기도 하다. (p. 65)

권력이 독재일때 그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분야는 없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라서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조각상과 건물은 그 모양을 달리하게 되곤 했다. 공공미술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호도에 맞춘 그런 작품들을 과연 공.공.미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1%법'을 만들었기에 그나마 그런식의 공공미술이나마 확장되게 되었다.

때는 1983년. 서울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건축 심의 조례를 강화했다. 핵심은 서울의 미관지구 안에 11층 이상, 건축면적 10000㎡이상 건물을 신축할 때 건축주가 공사비의 1% 이상을 조각과 벽화 등 '미술장식'에 쓰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준공검사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건축물 미술장식'이라는 용어는 2011년부터 '건축물 미술작품'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면서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제13조에서 건축물 미술장식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권고 사항이었지만, 서울시가 선제적으로 '미술장식'을 의무화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1995년부터 의무화되면서 '1%법'으로 통칭되었으나, 2000년부터 설치 비용이 건축비의 1%에서 0.7%이하로 경감됐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거리 조형물 시장의 분수령이 된 계기였다. (p. 71)

공공미술작품이 흔해지는 만큼 그 작품성에 대해 둔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을때 뭔가 들어서면 초집중하여 보게 되지만 여기에도 하나 저기에도 하나 있게 되면 그냥 뭔가 있는가보다 하면서 지나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지나친 공공미술 작품들 중에 은근 작품성 높은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고나서 좀 놀랍기도 했다. 저자는 도심 안의 또 다른 예술로 '건축'이야기도 풀어놓는다.

"객실 수는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수익은 적게 나도 좋습니다. 버킷 리스트에 올릴, 그런 건축물을 지어주세요. 우리나라에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그런 건축물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2015년 봄, 코오롱 그룹으로부터 리조트 설계를 요청받은 김찬중 대표는 이 같은 주문이 믿기지 않았다. (p. 117)

울릉도에 있다는 '코스모스 리조트' 는 2개동을 합쳐봐야 총 객실 수가 고작 12개. 리조트로서 경제성은 한참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작고 소박하게 지음으로써 울릉도의 절경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풍광이었다. 여기... 꼭 가보고 싶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이나 한옥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 이야기였다. 일명 '달항아리'로 불린다는 이 건물또한 오너가 경제성만을 추구하지 않을때 어떤 미학적 가치가 획득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DDP 건물은... 건축가 본인의 이력에는 상당한 장점이 됐겠지만... 글쎄...

1988년 서초구에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 개관하기 전까지 1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장 역할을 한 세종문화회관은 남북 체제 경쟁과 대화의 산물로 탄생했다. 그 시절 남북은 군사력·경제력 뿐 아니라 문화적 능력을 두고도 경쟁했다. 21세기인 지금, 그때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는 건축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p. 179)

애초 5층으로 설계됐던 국회의사당은 해방 후 중앙청(5층)으로 쓰던 총독부 건물보다 높아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6층으로 높아졌다. 이렇듯 권력자 입맛에 따라 시공 과정에서 누더기가 된 것이 국회의사당이다. (p. 189)

앞선 에피소드들에서 잠깐씩 이야기되기도 했지만 저자는 한 챕터를 역사이야기로 할애해서 공공미술 혹은 건축물과 관련된 역사를 들려준다. 예술의 전당이 왜 갓을 쓰게 됐는지 세운상가가 왜 '좌절된 유토피아'가 됐는지 등의 이런저런 뒷이야기들 모두 재미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은 국회의사당 뒷얘기였다. 건축가 누구도 자신이 참여했음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누가 지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게된 기형의 건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사당이라니...

오피스텔에 설치된 이 전광판 작품에 주목한 이유는, 이 작품이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의해 설치됐기 때문이다. 통상 건축물 미술작품은 조각이나 회화를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미디어아트다. 게다가 그걸 전광판 형식에 구현하니 신선하다. (p. 230)

시대가 변한 만큼 공공미술도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관점을 바꾸고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 조경에서부터 전광판, 길가 혹은 계단 아래 등 작품이 위치하는 공간은 이제 반드시 건물앞이 아니었고 그 형태또한 동상이 다가 아니었다. 그 새로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울로7017에 있다는 <윤슬> 이었다. 언젠가 서울로에 가게되면 이곳에 꼭 가봐야 겠다.

광화문 하면 떠오르는 풍경, 인천공항 하면 떠오르는 풍경, 녹사평역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곧 공공미술 작품이 녹아든 일상의 풍경이고 거리 갤러리 풍경이다.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를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길. 공공예술, 공공미술이 멀게 느껴졌던 사람들에게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p. 296)

이 책은 그야말로 공공예술에 대한 도슨트투어가 맞았다. 이 이게 이런 작품이었어? 하며 새롭고 아니 이런 배경이 있었어? 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고나니 더 궁금해진다. 거리 곳곳에 또 어떤 예술작품들이 있을지... 저자가 2편을 내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좀 시일이 걸릴 것 같으니까, 저자의 말대로 공공예술작품들 앞에 안내판이라도 어서 설치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그게 작.품.인지 정도는 알고 지나치게 될테니 말이다.

ps. 생각해보니 아파트마다 있는 이런저런 조형물들도 대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건지 모를 것들이 수두룩한데 설치할때 작품설명판도 함께 붙여주면 참 좋을 것 같다. 꼭 대작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작품일테니 그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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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좋았던 리뷰 ㅎㅎ 축하드립니다 *^^*

LILLY 2022-03-15 11: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