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의 역사 - 음식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
윌리엄 시트웰 지음, 문희경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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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폼페이부터 현대적인 고급 요리까지,

외식 문화와 레스토랑의 사회문화적 변천사를 읽는다

시간이 멈추는 법은 없고 따라서 역사가 없는 분야는 없다. 그래서 역사는 늘 무궁무진하고 늘 다채롭기 마련이고 그런 역사를 종류별로 읽어나가는 것은 책을 읽는 중에도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시대가 되면서 외식보다는 배달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또한 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밖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 바깥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러한 문화가 배달이라는 방법을 만났을 뿐이므로. 여하튼, 모든 역사읽기가 그러하듯이 외식의 역사 또한 단순한 외식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외식의 역사는 정치, 공포, 용기, 광기, 행운, 혁신, 예술, 사랑, 그리고 묵묵히 성실하게 쌓아올린 노력에 관한 이야기다. 남다른 열정과 예지력으로 참신한 레스토랑을 내거나 새로운 주방을 만들거나 사람들의 식문화를 바꾸는 새로운 서비스나 요리를 내놓는 사람들만 연구해도 외식의 역사가 나온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인물들을 만나본다. (p. 7) 이 책은 역사상 최고의 레스토랑이나 최고의 요리사나 최고의 화덕이나 가장 혁신적인 주방 기구를 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맛있는 뒷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늘의 모습으로 만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p. 11) -서문 中-

저자는 영국의 유명한 음식작가라고 한다. 세계의 많고 많은 유명한 요리들 중에서 영국의 요리는 사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영국의 전통요리? 하고 되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러한 영국과 요리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책은 비웃음을 얻고 있는 영국의 식문화에 대한 저자의 항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양역사의 시작은 대부분 로마제국이곤 하는데 외식의 역사 또한 그 시작은 로마제국, 폼페이에서 출발한다.

로마의 주점은 역사상 다른 모든 주점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사회적 평등을 조장하던 곳이다. (p. 24) 유골은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한 부류는 돈과 보석을 소유하고 다른 한 부류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다. 노예와 상류층이 나란히 죽었고 두 부류의 유골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노예가 영양이 부족했다는 증거도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일반적인 가정의 근거가 될 만한 증거가 전혀 없다. (p. 25)

전 세계를 아우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로마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라고 하면 계급과 권력이 먼저 생각나지만 사실 제국의 초기는 굉장히 평등한 계층적 면모를 보였다 제국의 황제는 스스럼없이 대중목욕탕에 갔고 대중들이 드나드는 주점에 들렀다. 폼페이에 묻힌 유골에선 계층의 차이가 영양상의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부분 비슷한 걸 먹었고 비슷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폼페이가 백년후에 터졌더라도 상황은 몹시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될 때는 '근대화'가 화두였다. 그래서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음식전통마저 멀리했다. 터키의 요리사들은 오히려 프랑스를 선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에 형성되었지만 그 600년 역사는 배타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정치 이념이 정신을 지배하지만 음식은 다르다. (중략) 오스만 제국의 음식도 마찬가지다. 서양이 21세기의 첫 4분의1을 향하는 지금도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스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p. 27)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음식을 파는 시설이 늘어나자 규제도 생겼다. 술탄이 음식을 나눠주는데 누군가는 음식을 팔아 돈을 벌었기에 가격 정책이 도입되고 식품 위생 기준도 생겼다. (중략) 16세기와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음식점에서 파는 인기 요리의 조리법을 통제했다. (p. 36)

신석기혁명만 동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음식을 즐기는 문화 또한 동쪽에서 온 것이 참으로 많았다. 지금의 서양에는 말이다. 제국의 초기에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환대'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와 제국의 성격이 그 역사를 달리하면서 환대나 접대는 사라지고 외식의 필요성이 생겨났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 당연히 그들도 먹어야 했으니까. 여하튼, 오스만 제국의 중앙통제는 외식의 분야까지 뻗쳤고 그덕분에?! 청결하고 깔끔하게 유지되는 음식점들의 문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스만제국은 서양에 '커피'를 전수시켰다.

서양상서는 마르코 폴로를 가장 위대한 여행자로 꼽는다. (중략) 역사학자들이 바투타 여행기의 일부 내용에 대해 진위를 따지듯 폴로도 오류와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중략) 폴로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여행하고 이븐 바투타가 고향을 떠난 해보다 1년전 (1324년)에 사망했다. 폴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투타에게 대장정의 바통을 넘겨준 셈이다. 바투타는 정확성과 연대기 두 가지 모두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중략) 하지만 그의 여행기를 당대의 다른 문헌과 대조한 분석에서는 놀랄 만큼 정확한 기록인 것으로 드러났다. (p. 43) 술탄이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로마인들이 나그네에게 정원을 열어주었듯이 이븐 바투타도 낯선 이의 친절에 의지하면서 여행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점대에 관한 초기의 기록과 오늘날의 접대 문화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p. 45)

32년간 당시로서는 거의 전세계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비하자면 한참동안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그의 여행기가 출간되고 500여년간은 아무도 읽지 않았던 책... 그 책이 재발견되었어도 마르포 폴로의 입지에 비하자면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여행은 외식과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다른 지역의 일상과 문화와 그리고 음식을 알게 해준다. 더구나 돈한푼 없이 홀홀단신 세계여행이 가능했던 시절의 여행기라니 꼭한번 읽어보고 싶다. 상인집단으로 사막을 건너 중국을 다녀온 것만으로 허풍을 떠들어댄 여행기와는 분명 크게 다를 것 같다.

흥미롭게도 웨스트민스터가 고급 식당의 시초라고 정확히 짚어서 말할 수 있다. 모든 의회의 어머니인 웨스트민스터가 런던의 레스토랑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p. 61) 이런 음식점이 번창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런던의 성벽 너머는 시 당국과 시내의 모든 장인과 상인을 규제하고 독점하고 보호하는 강력한 상인 조합인 길드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p. 62)

책의 제목이 '외식의 역사'라고 했지만 사실 식문화라는 것이 유적으로 남아 있기가 어렵다 보니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은 폼페이와 이슬람의 문화를 살짝 들여다보는 정도이고 책의 대부분은 근대를 전후한 영국의 식문화 형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서양역사라는 것이 어느 한 나라만 콕 집어 따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엮이고 엮이는 관계이다 보니 영국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프랑스와 인도와 미국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의 주요 줄거리는 '영국의 레스토랑 역사' 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하튼, 예나지금이나 가진것도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창업할 수 있는 분야는 외식분야인 것이다.

헨리8세가 로마와 결별하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그 유명한 수도원 해체령이 나왔다. (중략) 갑자기 전통적인 접대의 통로가 끊겼다.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다른 교회에서 시도때도 없이 열리던 축제를 공격했다. (p. 65)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춤추고 술마시고 싶을때 갈 곳이 없어졌다. 더이상 교회가 그런 장소와 구실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심각했다. 화형당하지 않은 수도원 사람들에게는 일할 곳이 필요했다. 여행자들에게는 머물 곳이 필요했다. 지역민들에게는 여유롭게 쉬면서 함께 어울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점을 차리자 지역민과 여행자들이 모여들었다. (p. 66)

무상으로 제공되던 것들이 유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시대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기 전부터 상업이 사회의 가장 큰 부를 제공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은 돈으로 연결되었다. 다른 계기였지만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궁정을 없앴으나 레스토랑을 창조했다. 여하튼 외식사업은 환대가 아니라 사업이었으므로 식문화에도 급격히 돈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바스티유를 습겨한 날 프랑스에는 약200만 명의 하인이 있었떤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2800만명이었으니 남자든 여자든 열두명에 한명꼴로 어느 집안의 하인으로 일한 셈이다. 일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공곡의 영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다. 지방 저택의 주방에서 일하던 수많은 실업자가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올라왔다. 그리고 요리의 성격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적·사회적 격변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파리로 올라오면서 레스토랑들이 문을 열었다. (p. 88)

프랑스는 귀족문화가 사치에 정점을 찍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으로 그 문화가 대중화가 된 셈이었다. 시민혁명이 귀족문화를 퍼트린 셈이라니 역사는 역시 아이러니 투성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영국에서는 반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산업혁명으로 가내수공업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므로 결과적으로 사교 활동도 다른 데서 일어났다. (p. 103)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가의 집들은 비좁고 답답했다. 침대 하나에서 다같이 자고 느긋하게 쉴 공간이 없었다. 적어도 고된 노동을 마친 뒤 돌아가고 싶은 편안한 집이 아니었다. 미혼 남자들은 하숙집에서 눈이나 겨우 붙일 뿐이었다. 따라서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여관이나 새로 생긴 클럽에 모이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클럽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노동자들을 위한 장소였다. (p. 130)

영국의 외회제도와 커피하우스 문화발달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주점(펍)문화로 이어졌다. 나중에 고급 클럽들이 생겨났다고는 하나 영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외식산업이 노동자들의 펍 문화였다면 프랑스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이 주를 이루었다. 이게 아이러니인 것이 노동자중심 사회로 토대가 닦인 영국에는 귀족이 남아있고 귀족중심 사회로 토대가 닦인 프랑스에는 시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귀족이 펍을 즐기고 시민이 레스토랑을 즐긴달까. '영국에서 프랑스어로 메뉴를 적는 관습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버킹엄 궁에서는 아직도 이 전통을 고수한다. (p. 174)' 라는 것을 보면 역사란 참 오묘하다는 것이 다시금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고대나 오래전 역사이야기는 사실상 드물 수 밖에 없는 분야가 '외식'이다 보니 책은 근대 외식의 역사가 주 내용을 이룬다. 간략하게 보자면 친절하게도 앞 페이지에 연대표로 한눈에 정리도 잘 되어 있다. 오래전 역사일 수록 '외식'은 문화의 한 분야였다면 근대로 오면서 '외식'은 산업의 한 분야가 된 것 같다. 그러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외식의 역사로만 읽히지 않는다. 사람의 이야기가 결국 역사이고 한 분야에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다단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다보니 그러한 감정들은 결국 현재를 다시보게 만든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역시 늘 참 좋은 것이다. 그나저나 맘편히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외식의 시간이 어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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