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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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하는 마음부터 항해하는 용기까지,

열광어린 수집부터 여가와 여행의 역사까지,

혼자라는 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연대기.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낭만과 은둔이 어울리는 단어일까? 낭만은 고독에 가깝고 은둔은 고립에 가깝다. 그렇다면 고독이 과연 낭만스러운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고독은 때론 외로움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A History of Solitude' 라는 원제 그대로 '고독의 역사'라고 제목을 다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혼자있는 시간에서 낭만을 찾는다면 고독이 될 것이고 혼자 외로이 은둔한다면 외로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왜 다른가? 사실 이 책은 이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짓는 과정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혼자 살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모순되게도 지극히 오랜 세월 고독을 추구해왔다.

1791년,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의 '혼자 있기'를 고찰한 전례 없는 책이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고독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스위스 철학자 게오르그 치머만 Johann Georg Zimmermann (1728~1795, 철학가이자 조지3세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 주치의)이 집필한 네 권짜리 책이었다. (중략) 책은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어, 매년 많은 판본과 우수한 번역본들이 나오면서 1830년대까지 중쇄를 거듭했다. 요한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는 이후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책 자체로 문화적인 주제가 될 정도였다. (p. 12) 그래서 이 책의 서장에서는 '고독에 관한 세기의 고전'이 다룬 18세기와 이전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치머만은 책 전반에 걸쳐 '혼자의 장점들'과 '집단의 편리성과 축복'사이 균형을 잡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략) 지난 세기 동안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대했는지 파악해볼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이라는 병'과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은 사실 2,000년 넘게 시와 산문에서 나타난 딜레마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p. 13)

저자는 '서장'에서 외로움에 대한 불안이 2천년간 지속되어 왔다고 말했지만 책의 본문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를 주로 고찰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집단 이 개인보다 더 중심이 됐던 사회였다가 개인이 집단 보다 더 중심이 된 사회로 변한 것이 확실해진 후에야 '고독'이라던가 '외로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책의 초반부터 언급한 <고독에 관하여> 는 저자의 논리에서 상당한 근거가 되고 있는데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었다. 더군다다 '게오르그 치머만'에 대한 검색에서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고독에 관하여> 라는 치머만의 책에 대한 오마주 같은 이 책을 읽고 나면 <고독에 관하여> 라는 책이 정말 궁금해지는데 읽을 수가 없다니... 이런... ㅠㅠ

18세기에는 과학, 문학, 철학의 확실한 경계가 없었기에 치머만은 <고독에 관하여>에 유명 의사로서 바라본 멜랑콜리는 다룬다. 멜랑콜리는 지난 2,000년 동안 질병으로 분류된 용어로 슬픔, 두려움, 우울함을 아우른다. 18세기에도 마음 상태가 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점점 뒷받침되기 시작했다. (p. 17~18) 치머만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계몽주의 감수성과 뜨거운 신앙의 충돌은, 프랑스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의 1760년 소설 <수녀>에도 나타난다. (p. 19)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가 독창적인 이유는 첫째, 혼자있는 상태가 아니라 혼자 있는 이유에 집중했다는 데 있다. 고독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결정하는 요소는 자신을 은둔하게 만든 심리상태였다. (중략) 둘째, 치머만은 '혼자vs집단'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둔과 사회생활의 균형을 강조했다. (p. 21) 책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절박함은, 당시 은둔과 사회생활의 균형이 몹시 불안정하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과도해진 도시 문명 속 엘리트 문화는 은둔을 지향할 위험이 있었다. 치머만은 이런 흐름에 공감하면서도 결과를 염려했다. (p. 22) 산책은 '낭만적인' 은둔을 실행하는 주된 방식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p. 23)

계몽주의 개인주의 도시화 등등의 문제로 '낭만적 은둔'이 선호되던 18세기와 코로나비대면 개인주의 도시화 등등의 문제로 '은둔적 고립'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시대에 <고독에 관하여> 같은 책이 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는지 더더욱 이해가 안된다. 외로움을 우울로 받아들여 온갖 힐링과 치유서들은 넘쳐나면서 왜 '고독'에 대한 책들은 없는 것일까? 고독이야 말로 낭만적 은둔과 동의여라고 할 수 있는건데... 흐음... 여하튼, 고독의 대표적 행위는 '산책'으로 나타났다.

도보는 사람들을, 특히 북적대는 집을 피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적 경험이기도 했다. 산책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읽을 책을 소지해 다양한 도보 문학에 기여했다. (p. 34) 혼자 도심을 걸을 때 받는 의심을 피할 최고의 해결책은 동물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개 산책은 도심의 전형적인 관행이 되었다. (p. 63)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단독 여행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하루치 준비물을 챙겨 왕복 기차표를 사는 것과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 없이 인적 없는 야생으로 걸어가는 것은 달랐다. (p. 83)

이 책이 영국학자의 책이긴 하나 '산책' 이야기가 나오고 나니 '플라뇌르' 라는 불어단어가 생각난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지만 '플라뇌르'라는 남성명사에 대응할 여성명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산책은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그러한 산책조차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들은 산책을 넘어 더극한 고독감을 쫒아 오지탐험까지 나서는 시대에도 말이다. 저자는 여성들이 산책 대신 찾아낸 '여가활동' 에 대해 설명한다. 바느질, 수집, 카드놀이, 독서 등등등 하지만 '실내에서 혼자 즐기는 여가는 대부분 취향이 깃든 호사였다. 집단에서 분리되려면 기본적으로 돈, 시간, 실내 공간이 필요했다. 하류층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p. 113)' 그렇다면 하류층에게 가능했던 '혼자'는? '독방'에서 가능했다. 수도원이나 감옥 같은 곳의 '독방' 말이다.

독방 감금은 수감자에게 가장 자비로우면서 가장 심한 징벌이 혼합된 조치였다. 수감자는 사회에서 안정된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지속적인 사색의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장기적인 강제 분리는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수감자는 신에게 의탁할 터였다. (p. 164) 강제 독거의 경우 체계적으로 기록된 모든 면이 실패였다. (p. 177) 재소자들의 독방 감금 경험은 현대 연구자들에게 치밀한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난제를 남겼다. 사회격리, 일상생활 통제력 상실, 환경적 자극 부재의 영향을 수검자들의 다양한, 때로는 극심한 질병률의 맥락으로 평가해야 했다. (p. 179) 징벌로서 단독 감금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영국에서 더 오래 시행되었지만 (중략) 1,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독방 제도가 아예 없어졌다. 죄수를 신앙적으로 갱생시킨다는 개념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사라졌다. 19세기 중반, 장기 사색을 통한 도덕심 회생이라는 열망은 약화되었다. (p. 181)

자발적인 사색과 강제적인 분리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그저 '혼자'를 유지시켜주는 것만으로든 그 무엇도 해결하거나 향상시킬 수 있는게 없었다.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의 차이가 비단 '독방'문제 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런면에서 인간은 분명 '독립적'인 존재임이 재확인되는 듯 했다.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독립적이랄까. 달리 말하면 개성이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개성적 독립적 개인적 인간의 성향은 20세기 들어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이어진다.

혼자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아지면서 점점 취미가 전문화되었다. (p. 203)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소비의 역사와 겹쳤다. (p. 223)

사실 '혼자' 를 즐긴다는 것은 예로부터 '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달면 왠 산책이고 여가이겠는가. 문학청년들이 산책할때 그 길을 노동자들은 새벽에 일터로 나갈때 걸었다. 귀부인들이 손뜨개로 '혼자'인 시간을 나름 꾸며볼때 그 집의 하녀들은 쉴새없이 집안일을 해야 했다. 산업화가 되고 노동자들의 삶에도 즐길만한 '취미'활동이 생겨났을 때에도 그 질적 차이는 결국 '소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너무 계급차별적 시선인 것일까? 자본을 떠나서 '혼자'를 생각하려면 종교적 으로 갈수밖에 없는데 앞서서 종교와 감금의 연결은 실패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영적'회복'에 대해 다시 살펴본다.

20세기가 되자 종교 권위자나 진화론과 무관한 새로운 혼자만의 길이 모색되었다. 혼자 은밀히 떠나는 순례와 점차 형성되고 있던 대중매체 사이에 다시 균형이 잡혔다. (중략) 이 장에서는 현대 사회의 압박감에 맞서 계속 '혼자 있기'에 끌리는 요인을 다섯 가지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p. 231)

이런저런 맥락을 따져봐도 결과는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영적 회복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할만한 마음챙김도 '개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보조제로 홍보된다. 마음 챙김 명상의 수행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불공정한 구조의 관계 탐구는 기껏해야 선택사항에 그치고 있다. (p. 275)' 그렇게 '혼자 있기'는 현대시대에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으로 돌아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는 외로움을 걱정하는 현상의 본질이다. 외로움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실패로 여겨지는 듯 하다. 인구 통계, 정치, 문화, 사상, 의학 부문의 요소들이 더해져 외로움이라는 경험의 범주를 만들었다. 그 범위는 20세기 전부터 광범위하게 전개된 우울증만큼이나 넓다. (p. 280) 집단에서 소외되는 두려움은 20세기와 21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두번째 의문은 외로움과 고독의 확실한 경계로, 이 장 마지막 부분의 주제이기도 하다. (p. 281)

외로움과 고독의 경계가 자주 흐려지는 점을 고려할 때 결론을 두 가지로 맺을 수 있다. 첫째, 외로움은 가까운 시기의 실패가 낳은 산물만은 아니다. (중략) 둘째, 외로움을 후기 근대화의 결점과 관련 짓는 것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더 뚜렷해진) 부의 불평등과 국가 재정 부족 때문이다. (p. 305) 개인과 집단의 경제력이 추락하면서 외로움을 억누르며 고독을 즐기기는 어려워 졌다. (p. 306) 외로움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시대 사회적 관계의 모순이 아니라 부의 분배와 공공 서비스 공급의 긴박한 위기다. (p. 307)

외로움은 문제이고 고독감은 어느정도 필요하다고 이해되어 진다. 지금의 현실을 봐도 그렇다. 코로나 이후 휴교에 재택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하루종일 함께 있는 나날이 길어질 수록 저마다 속으론 '제발 좀 혼자 있고 싶다' 외치고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지만 가족 중에 한명만 걸려서 방 하나 차지하고 며칠을 집안에서 쟁반으로 끼니만 받으며 생활한다고 했을때 과연 그 '혼자'가 좋겠는가? 외로움과 고독감은 마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혼자'있는 것이 때론 외롭게 느껴지고 때론 고독하게 즐기게 되기도 하는 것은 그러나 결국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다. 저자가 지적한 경제력의 측면에서의 인식은 '고독'의 관점에도 꼭 필요한 것이다.

디지털 혁명은 사회적 교류와 동시에 사회적 교류 단절을 추구하는 흐름의 극치다. (p. 310) 소유욕이 강한 개인주의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현대사회에서 물리적 고립의 역할이 복잡해졌다. 한편으로는, 소비와 통신이 발달하면서 계층과 상관 없이 누구나 혼자 있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혼자 있기를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 되었다. 과소비와 과열된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은둔을 수용하고 지원하는 기관이나 시설은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 (p. 318~319) 고독은 여전히 계량되지 않는 반면, 외로움은 디지털 미디어처럼 계속 숫자로 해석된다. (p. 321) 온갖 논의가 있어도, 극단적인 은둔과 집단성에 큰 변화가 생겨도, 고독의 경험과 실행에는 뚜렷한 핵심이 남아 있다. 1791년 요한 치머만이 고독을 두고 '자기 회복과 자유롭고자 하는 경향'이라고 한 정의는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 (p. 323)

이러니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 가 정말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영어능력자라면 원서라도 찾아서 읽어보 터인데 영어무식자인것이 이렇게 또 한계를 맞닥뜨리게 하는 구나;;;

여하튼, '혼자'있는 것을 즐기는 편인 나로서는 '낭만적 혼자 있기'의 역사가 궁금해서 읽어본 책이었는데 그러한 '낭만'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예전에 다른 책에서 '론리니스loneliness 와 솔리튜드solitude' 의 차이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원제도 A History of Solitude 인 것을 보면 저자는 Solitude 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loneliness 일것 같다. 그러니 관점을 조금 달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말이다. 그러면 '혼자 있기'가 좀더 낭만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사회적으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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