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버리기로 했다 - 불편한 사람과 상처 없이 멀어지는 관계 정리법
양지아링 지음, 허유영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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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사람과 상처 없이 멀어지는 관계 정리법

상대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헤어짐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심리서들을 종종 읽는다. 읽다보니 시대가 변한것을 조금 느낀다. 몇년전만 해도 심리서들은 위안.위로.격려 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리.결단.나 중심인 듯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본책들에서 더 많이 발견하긴 했다. 이번 책은 타이완 책이다. 아무래도 서양 저자 심리서들은 문화적으로 수용이 잘 안 될때가 있는데, 동양권 심리서들은 공동체중심,가족중심 이라는 공통문화가 있어서인지 마치 국내저자가 쓴 것처럼 위화감 없이 읽혀서 좋다.

"관계에도 분리수거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정리·정돈하는 것과 같다" 라는 관계정리의 해법을 담은 책들 중에서 최광현 저자 책이 참 좋았는데 이 책도 비슷하면서 좀더 부드러운 책이라 잘 읽혔다. '자존감 수업' 이라는 책으로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윤홍균 저자의 추천글을 보면서 왠지 좀더 믿음이 가기도 했다. 내용은 최광현 저자 비슷하고 표현은 윤홍균 저자 비슷한 느낌이랄까.

대부분의 대중심리서들이 그러하듯이 이책에도 많은 사례들이 들어있다. 밍위안, 리홍, 윈팅 등 이름만 낯설뿐 내용은 너무나 익숙해서 대만 사람들도 우리와 굉장히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만족스럽지 않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구속하기만 하는 관계는 감정의 불랙홀이 되어 당신의 자아와 행복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용감하게 잘라내고 그 자리를 비워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관계와 경험이 들어와 당신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당신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다. 이 책에서 배운 개념과 기술을 실생활에서 연습한다면 당신은 미소가 많아지고 시간이 여우로워지며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깨끗한 집뿐 아니라 내면의 차분함 역시 필요하다. 심리적인 공간에 과거의 관계를 쌓아놓지 말라. '참을 수 없는' 관계는 서로의 행복을 가로막을 뿐이다. 인간관계를 대청소하고 이제야말로 내게 맞는 사람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자. (p. 10)

서문에서부터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이런 태도 마음에 든다. 잘못된 죄책감없이 마음의 청소를 하는데 이 책을 활용하라는 저자의 제안이 반갑다. 책에서라도 누군가는 이렇게 분명히 말해줘야 한다. 그런 관계는 끊어버리라고.

우리 사회 전체가 '분리' 를 초조하고 불안한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바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분위기다. 아무리 튼튼한 물건도 오래되면 낡고 닳아 없어지는데 하물며 날마다 변하는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인생에서 겪고 넘어가기 마련인 단계마다 생각이 바뀌고 필요한 것이 달라지며, 이것이 인간관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시련이 된다. 관계가 변하는 것은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다. (p. 23)

사람은 변한다. 그게 당연한 거다. 계절이 변하는게 당연한 듯이. 그런데 너와나는 변치 말자고, 우리는 변치 말자고, 네마음은 변치 말라고, 내마음은 안변할거라고 관계에서는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 왜 변했냐고 어떻게 그럴수 있냐는 물음은 잘못된 거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당연한데 죽음을 언급하길 꺼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변하기 마련인데 변함을 언급하길 꺼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심리적 공간을 정리하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내면의 신념을 정리하고 무조건적으로 타인의요구에 맞추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매번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대를 떨쳐낼 용기는 필요하다. 그래도 상대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헤어짐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p. 40)

내 인생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생각해야 한다. 의외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관계에 허덕이고 치이고 힘든 거다. 이기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갖고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나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 선택을 책임지는 것도 온전히 내몫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소모시키기만 하는 사람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죄악감' 이다. 죄악감 때문에 차마 인연을 끊거나 상대와 거리를 두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남의 요구를 거절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p. 91)

죄악감은 관계 속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반응이다. 죄악감은 타인의 평가에 너무 연연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죄악감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감정이다. 죄악감이 성립하려면 우선 이 말 속에 담긴 가치판단 기준과 게임의 룰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죄악감을 느끼게 하는 건 어떤 일 자체가 아니며 그 사람이 어떤 관점이나 논리를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은 일이라도 어떤 사회 혹은 환경에 사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죄악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애초에 그것이 죄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죄악감은 사람의 행동과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p. 93~95)

죄악감은 우리가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기존 방법을 고수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더 나은 발전을 꿈꾸며 현 상황을 초월해 성장하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죄인' 이라고 자책할 필요 없다.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 (p. 99)

 

'죄악감' 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다. 죄책감 이라고 할 때보다 어감이 뭔가 좀더 '죄' 같고 무거운 느낌이다. 책임의 문제보다 '죄'로 다루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려 한다. 그래서 더욱 '정리' 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인간의 본성으로 타고 나는 감정이 아닌 후천적으로 학습되어 세뇌되어지고 교육되어진 이 죄악감 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떨쳐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포함한 많은 심리서들이 알려준다. '죄'가 아니라고. '죄인' 이 아니라고. 자기 자신 부터 챙기라고. 그래야 일단 살 수는 있다고. 살아야 나아갈 수 있다.

가족(형제나 부모)은 끊을 수 없는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데 가족과의 이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건 아닌지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가족과의 이별에는 절충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바로 상대와 마주치는 횟수를 줄이면서 천천히 거리를 넓히고,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마음속으로 혼자 이별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어느 한쪽이든 손을 놓으면 관계가 계속 이어질 수 없다. 반드시 상대의 동의를얻어야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면, 마은의 문을 닫아걸었다면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도 이미 관계를 끊은 것과 같다. (p. 167~168)

개인중심 문화인 서양과 달리 공동체중심 문화인 동야에서는 특히 가족관계에서 생기는 문제가 많다. 고부갈등, 장서갈등은 사실 약한 갈등이다. 부모자식간의 갈등과 형제자매간의 갈등은 정말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인지조차 못하기 마련이다. 문제가 터졌을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이 갈등의 가장 난점은 변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에 있다. 우정에서 사랑으로 갈수도 없고 부부에서 남남으로 갈수도 없는 관계다. 무엇보다 부모나 형제자매는 죄악감을 심어준 당사자라는 것에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혼자만의 이별이라도 해야 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심리의 문제는 사실 생존의 문제다.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아무 대가 없이 무엇이든 다 가질 수는 없다. 잘라내고 버려야만 새로운 것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관계에서 '취함' 과 '버림' 은 꼭 붙어 다니는 세트 상품과 같다. 억지로 떼어내 둘 중 하나만 사려고 하면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용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목청껏 외쳐보자. "내 인생에서 내게 맞는 사람만 남기겠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며, 이런 단호한 용기가 당신을 관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p. 198)

어른아이 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원래 있었던 단어인 것처럼 익숙해진 시대이다. 내면아이 라는 말이 심리학 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책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대이다. 어른이 되었어도 내면에 자리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고, 어른이 되었어도 아이와 같은 어른아이가 있다. 제대로 성숙한 어른은 가능하긴 한 걸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어른으로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성장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질지라도 성숙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행복은 잘라내야 하는 것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유지해야 하는 것을 열심히 회복하는 것이다. 취함과 버림의 균형을 유지하며 인연이란 만남일 뿐 아니라 때로는 이별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길 바란다. 관계가 추억속에서 아름답게 살아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떠나든 남든 당신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야 한다. 인생에서 내게 맞는 사람만 남기고 나를 소모시키는 사람은 잘라내라. 그래야만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p. 200)

행복은 인간의 본능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부자나 명예 보다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행복은 다 다른 모습이다. 사람이 다 다르게 생겼듯이 그들이 원하는 행복도 다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모두 원하는 삶이 있다. 살고 싶은 모습의 삶을 간직하고 있다. 저자는 행복하고 싶다면 집안을 청소하듯 관계도 청소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그 청소도구로서 이 책을 읽으며, 책 속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깨끗해진 관계가 어떻게 삶을 변화시켰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사례는 정말 그 자체만으로 큰 힘이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모두 다 와닿을 수도 있지 하나도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례들에서 느껴지는 공감만으로도 이 책은 참 따듯한 책이다. 관계를 끊으라는 차가운 조언을 하는 이 책이 왜 따듯한 책인지는 읽고나면 안다.

정리란 관계의 재정립을 넘어 자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p.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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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의 월든
서머 레인 오크스 지음, 김윤경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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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자라거든요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 속에 포함된 '월든' 을 보는 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의 '월든' 을 다들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월든' 이 1854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니까, 150년도 더 이전의 책이다. 문명 사회를 떠나 외딴 숲속 호숫가에서 자연인으로 살았던 시간들을 써낸 그 책이 벌써 그렇게 오래되었다니... 그 시절 이미 문명사회를 떠나 자연속에서의 삶을 추구했다고 하니... 그보다 더 현란한 사회 속에 사는 우리는 너무 자연을 잊고 있는게 아닐까... 그때처럼 자연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저자는 도시속에서 소로와 비슷한 경험을 이루어내고자 한다. 그렇게 이 책은 도시 속에 살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너무나 멀리 식물과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식물을 가까이 끌어당기에 만들어 주는 책이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숲과 밭과 함께 했고, 직업상 도시로 이사오면서 멀어졌던 자연을 아파트 안에서의 가드닝을 통해 여전히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다. 풀한포기 화분 하나에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1000그루를 훌쩍 넘는 약 550종의 식물이 아파트안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원래의 직업(패션업계, 영화제작 등등)에서 지금의 직업(건강, 웰빙, 소통)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해온 것도 식물의 영향이 큰 듯 하다. 그리고 그동안 식물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해 온 만큼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도 그러한 활동 중의 하나이다.

근처에서 숲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시에서 자연과 연결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식물을 실내로 가져오는 것이다. 실내 식물은 내 안에 잠재된 다른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움으로써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준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든 온전한 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내식물은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가 대지를 소중히 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p. 65)

저자는 자연에 있을 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저자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저자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인터뷰들이 책속에 짤막하게 인용되어 있는데, 대부분 힘들었던 삶에서 식물로 인해 어떤 치유를 받았는지 고백하고 있는 글들이다. 마음이 아플때도 몸이 아플때도 식물은 의외로 큰 치유력을 발휘한다. 은은하지만 강하게.

비의학 용어인 '식물맹' 은 1998년 식물학자 제임스 완더시와 엘리자베스 슈슬러가 만든 용어로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을 봐도 알아차라지 못하는 증상'을 일컫는다. (p. 78)

식물맹은 생각 이상으로 우리 삶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식물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면 식물이 우리 삶을 넘어 생태계에 미치는 중요성도 보지 못할 수 있다. 피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예로 환경보호와 정책에 대한 관심과 재정적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정부에서 정한 멸종위기종 중 57퍼센트가 식물이지만 절멸 및 멸종위기종에 배정된 자금 중 식물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비용은 4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p. 80)

 

'식물맹' 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는데, 생각해보니 중요한 단어인 것 같다. 우리 주변엔 식물맹이 정말 많은데 아무도 식물맹이 자신인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이라고는 집안에 화분 몇 개 들여놓고 죽지않을만큼만 겨우 돌보고 있는 나도 식물맹에 속하는 것 같다. 식물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과연 환경보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길가에 꽃이 있는지 가로수잎이 변했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바쁜 일상만 반복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얼마나 생각할 수 있을까? 생태계의 진정한 위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심각할 수 있다. 식물이 멸종하면 생태계는 무너진다. 주변 식물들에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반성을 해본다;;;

원예의 달인이든 초보자든 식물과 호흡을 맞춰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물을 '적극적으로 관찰' 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탈하다 보면 원예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속도를 늦추고 순간을 음미함으로써 마음이 차분해진다. 번잡한 도시에서도 식물을 관찰하다 보면 틈틈이 평온한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식물은 행복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좋은 동지가 되어준다. 우리는 그저 자연을 마음에 담겠다고 결심만 하면 된다. (p. 86)

사실 식물을 키우는 것은 큰 도전은 아니다. 봄이면 꽃화분 하나 들여놓고 싶고 여름이면 시원스런 나무 그늘이 그립고 가을이면 과실이 달린 나무를 보고싶고 겨울이면 설경속의 푸르름을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 들때 그런 생각이 들때 가까운 화원에 가거나 가까운 수목원에 가면 된다. 집안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하지만 식물은 일단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꽃을 보다가 화분을 보다가 작은 것부터 하나둘씩 집안에 들여놓고 하루에 몇분이라도 가만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품에 안기진 못해도 자연을 눈에 담을 수는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식물을 보는 시간은 의외로 마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해준다.

식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순응하며 우리를 도와줄 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처리가 무척 능숙하고 조용하고 우아해서 그 비범한 능력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탓에 우리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식물을 심미성이나 유용성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 세계에 직접 들어가 그 안에 담긴 억겁의 자연 '지식'을 해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식물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식물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지 인지하게 될 것이다. (p. 120)

천연자원을 생각할때 보통 화석연료부터 생각나는 것 같다. 하지만 식물은 천연자원으로서 굉장히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먹거리부터 섬유, 가구, 생활용품, 연료 등등 안 쓰이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자원고갈문제를 이야기할때 식물을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식물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던가? 정말 너무 당연하게 이용하고만 있지 않은가?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식물들에게 놀라곤 한다. 그래서 동물보다 사실 식물이 더 신비롭지 않냐고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가 먹여주고 보살펴주지 않아도 식물은 알아서 번식하고 자라고 적응한다. 심지어 극한 환경에서조차도 식물의 생명력은 놀랍다. 식물의 이용가치로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식물 자체의 가치를 잊고 사는 것도 큰 문제이다.

식물은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일으키는' 기적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식물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이는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명백한 메시지이다. 식물은 곧 생명이다. (p. 180)

그렇다. 식물은 생명이다!!! 자연 이라고 말할 때 식물의 위치를 병풍처럼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식물이 정말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발이 달려 돌아다니는 것만 눈에 보이게 움직이는 것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식물은 끊임없이 호흡하고 생사를 반복하고 있는 생.명.체. 다. 식물을 생명체로 인식하고 존중하기 시작하면 자연에 대한 환경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꼭 필요한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지만, 필요할 때 도움을 조금 얻는 것 빼고는 그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드물다. 세상의 모든 실내식물은 절대로 자연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산지에서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해 화원 너머에 있는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는 렌즈가 되어준다. 심지어 조용하고 은근한 방식으로 우리가 더 좋은 지구의 지킴이가 될 수 있도록 자극한다. 이것이 내가 식물에게서 배운 종요한 교훈 중 하나다. (p. 245)

작은 것에서 시작한 호기심과 관심이 얼마나 큰 발견과 깨달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우리는 다양한 사례들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 안에 작은 식물과 함께 살기를 시작하면서 생겨난 관심과 호기심이 지구를 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에게 늘 과도한 강탈을 해오고 있으면서도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고맙다고도 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아예 생각조차 잘 하지 않았다. 자연과 떨어져 사는 도시에서의 삶은 더욱 그러한 태도를 굳어지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콘크리트바닥의 일부 혹은 아파트시멘트벽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을 늘 생각하면 좋겠지만,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 부담스럽다면 일단, 작은 식물부터 가까이두고 찬찬히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음... 일단 우리집 화분들부터 잘 챙겨봐야 겠다;;;

땅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생 견딜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복 재생되는 자연의 후렴구에는 무한한 치유의 힘이 있다.

밤이 끝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의 끝에 봄이 찾아온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레이첼 카슨-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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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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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젯밤, 형이 살해당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책을 읽기전 표지에서 버튼만 보였다. 숫자가 써있는 버튼. 제일 아래 불이 들어온 버튼. 버튼들.

다 읽고 나서 보니 소년이 있었다.

흐릿하게 흑인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랐다. 정말 몰랐다. 진짜 못봤다. 왜?왜? 못봤지? 왜? 안 보였지?

이제 표지를 보면 소년만 보인다. 버튼 따위 이제 관심없다. 오로지 소년만 보인다.

이 신비체험?! 같은 느낌은 아마도 이 소설이 지닌 힘이자 매력인 듯 하다.

무심한 회색빛 책이 슬픔에 쌓인 흐릿함으로 묵직하게 남는 책...

책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페이지마다 시가 써있는데, 그 시들이 모여 소설이 됐다고나 할까.

 

 

 

거친 느낌으로 표현된 종이에 짧은 글들이 시처럼 씌여있는데 소설처럼 아니 영화처럼 읽힌다.

장면 하나하나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숀은 가방에 담겨 들것으로 옮겨졌고

풍선껌 별들로 이루어진

아스팔트 은하계에

숀의 피가 더해졌다. (p. 28)

형이 총에 맞았다. 숀이 죽었다.

윌은 룰을 안다.

1. 우는 것 : 하지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2. 밀고하는 것 : 하지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3. 복수하는 것 :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룰에 관해 알아둬야 할 것

룰은 망가뜨리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망가진 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이 따르도록.

윌은 이제 룰을 지키려고 한다.

룰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의 총을 찾아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젊은 것도 알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것만 명심하렴.

어두운 시간에 돌아다닐 땐

마음까지 어두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하지만 형은

헤드폰을 쓰고 있던 것 같다

윌은 집이 있는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허리춤에 형의 총을 쑤셔넣은 채

7층에서 문이 열렸다. 오전 9:08:02 벅이 탔다.

6층에서도 누가 탔다. 오전 9:08:12 대니였다.

5층에서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오전 9:08:22

4층에서도 문이 열렸다. 오전 9:08:32 아빠. 아빠? 아빠!

3층에서 탄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전 9:08:47

2층에선 2층에선... 그 사람이다! 오전 9:09:07

L층 로비에 내려오기까지... LONG WAY DOWN... 먼 길...

육십 초. 칠 층. 세 개의 룰. 하나의 총.

열다섯살 소년 윌의 이야기는 재미없게 말하자면 이렇다.

할렘가에서 마약이나 팔며 삶을 유지하는 갱단 청년들의 헛된 죽음 이야기

하지만 저자가 풀어내는 윌의 이야기는 저자가 써놓은 소설의 시작전 첫 장의 멘트로 감동실화로 되살아난다.

내가 본 적 있는, 그리고 본 적 없는

길 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해.

너희는 사랑받고 있어.

표지 뒤날개 안쪽에 실린 저자의 소개글에서 레개머리 흑인남성이 따뜻하게 웃고 있다.

외면당하는 것에 지친 젊은이들을 보는 것에 지쳤다는 저자가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듯 하다.

나는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너희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너희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한시간도 안걸려 읽어내린 소설 한편이 이렇게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 여운이 아주 오래...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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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 인류의 생존을 이끈 선택과 협력의 연대기
앨리스 로버트 지음, 김명주 옮김 / 푸른숲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생존을 이끈 선택과 협력의 연대기

길들여진 종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Tamed" = 길들여진 이라는 원제에는 주어가 없다. 무엇이 무엇에 길들여졌다는 것일까?

'길들임' 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인간이 주체가 되고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이 객체가 되는 식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향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방향을 바꿔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10종의 길들여진 것들의 기원을 추적한다. 개, 밀, 소, 옥수수, 감자, 닭, 쌀, 말, 사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 를 다룬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가축과 식량의 기원을 쫒다보면 인간과 자연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강하게 느껴진다. 어찌보면 당연한건데, 문제는 그 연결성이 새삼스럽다는데 있다고나 할까... 그렇게 인간이 자연을 너무 멀게 두고 생각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나 할까...

특정한 늑대를 가축화된 종으로 변형시킨 일에 의식적인 의도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의 관계는 일종의 공생관계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장을 시작할 때 언급한 이야기처럼 상호 이익에 기반을 둔 느슨한 동반자 관계. 심지어 그 과정을 추동한 쪽은 늑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갯과 동물들이 어떤 교활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상상할 것까지는 없다. 단지 음식 찌꺼기를 찾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질 뿐이었다해도 인간 곁을 어슬렁거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늑대들은 인간이 자신들을 처음에는 이웃으로, 그런 다음에는 동반자로 받아들이도록 무의식적으로 훈련시켰을 것이다. 두 종의 성공적인 동맹은 양측의 타고난 성향에 의존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의지가 있어야 했다. (p. 55)

개의 유전자의 99.5%가 회색늑대와 같다고 한다. 개는 늑대였다. 하지만 사람도 그러하듯 개들도 늑대들도 성격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개는 식용으로 가축이 된 동물이 아니다. 따라서 신석기 이전부터 맺어진 이 관계는 애초부터 공생관계에 가까웠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만 1천년 전에서 1만 7천년전 사이, 유라시아 전역의 동물들이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때, 모두가 춥고 배고팠을때, 수렵채집인의 야영지 가장자리에서 쉽게 구할수 있었던 먹이가 일부 늑대 무리에 변화를 가져왔을 수도, 혹독한 날씨 속에 늑대의 경계심이 수렵채집인들의 경보기로 사용됐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렇게 가축이 된 늑대인 개는 점점 인간과 친해지고 그렇게 가축이 되지 않은 늑대는 점점 인간과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개와 인간의 관계시작부터 인간의 의도적 길들임이라는 프레임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밀은 따지고 보면 풀이다. 별 볼 일 없는 풀. 누가 봐도 먹을거리로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야생풀의 작은 씨앗은 음식으로 그다지 매력이 없다. 견과류나 과일처럼 더 매력적인 다른 씨앗들이 많지 않나. 이들은 먹기 좋게 만들기 위해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맛있는 음식들이다. 도대체 1만 2500만년 전 무슨 일이 일거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풀처럼 별 볼 일 없고 매력없는 식물을 식량원으로 보게 되었을까? 무엇이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그런 식물에 의존하게 만들었을까? 게다가 하필 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p. 125)

신석기혁명 하면 농업혁명 즉 인간이 곡물을 재배하고 따라서 안정적 식량공급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사유재산과 계급이 축적되기 시작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가 빵을 만들어먹던 시기는 신석기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 부터 였다고 한다. 비록 재배는 하기 전이었지만, 들판에 자생적으로 자란 곡물류의 풀들에서 채집하고 가루로 빻아 빵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어쩌다 구석기시대에 풀의 씨앗들이 주식이 되었을까? 어쩌다 채집해 먹던 것을 기르기 시작했을까?

1만3천년 전이 되자 북반구의 빙상이 후퇴하면서 고대 빙하의 파편들은 산맥의 높은 곳에만 남았다. 기후는 점점 온화해져 갔다. 식물에게 유리해진 조건은 단지 따뜻한 기온과 증가한 강우량만이 아니었다. 대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1만5천년~1만2천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가가 상승했다. 이렇게 되면 많은 식물 유형에서 생산성이 50퍼센트 높아지고, 회복성이 좋은 풀조차 생산성이 15퍼센트 증가한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식물이 번성하자 풀은 의존할 수 있는 영양소 공급원으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수확만 하면 되는 천혜의 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보면 야생풀이 식량으로 선택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늘 그 자리에 있고, 의존할 수 있고, 양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때 문제가 생겼다. 1천년 넘게 겨울이 계속된 것이다. 지구에 기온이 하락한 이 시기를 신드리아스기라고 부른다. 1만2900년 전~1만 1700만년 전 신드리아스기에 세계적 한파로 식량 자원에도 심각한 영향이 있었음이 틀임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식량 공급을 스스로 통제하려고 시도한 것은 절박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드리아스기의 한랭화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작물재배로 눈을 돌렸지만, 앞서 1천년 동안 따뜻함과 풍요가 가져다준 변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한파로 생긴 부족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을 지나 세계가 따뜻해졌을 때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했지만, 이때는 아직 농업이 생기기 전이었다. 농업이 인구증가를 가져왔다기보다 인구증가가 어떤 식으로든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변화를 추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인구 증가로 자원 압박이 생기고 있을 때 하필 신드리아스기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p. 126~128)

농업이 먼저가 아니라 사회변화가 먼저였다는 것은 여러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1만2천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농업인이 아니라 수렵채집인들이 만든 제사유적지이다. 이 유적의 발견은 신석기 초기 인류 사회 발달에 관한 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 또한 신석기는 한 곳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자연과 기후변화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농업을 시작하고 농업을 통해 곡식을 먹고 곡식이 쌓여 부가 축적되고 부를 바탕으로 한 종교와 계급이 생성된 것이 아닐 수 있다. 구석기에도 빵을 만들어 먹었고 기후변화는 채집에서 재배로 불가피한 전환을 유도했다. 인간이 재배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재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재배를 한것이라는 차이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차이다.

목축, 즉 동물 무리를 돌보는 일은 유목 및 수렵채집 생활 방힉과 농업게 기반한 정착 생활 방식 사이의 중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수렵채집에서 목축으로의 이행은 매우 신속했을지도 모른다. (p. 173)

중유럽의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소뼈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어린 소의 개체수가 증가한다. 이는 목축의 초점이 고기 생산으로 옮겨 왔음을 암시한다. (p. 179)

한 가축 품종이 멸종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적 유산' 도 사라진다. (p. 186)

 

소는 우유부터 고기와 노동까지 활용도가 높은 가축이었다. 따라서 필요성에 따라 종을 인위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쪽으로 바꾸고 통합해 왔다. 그렇게 야생의 소들은 멸종되어 갔다. 경제성 측면에서는 우수한 품질의 소만 가축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안일하고 근시안적인 접근이다. 다양성이 사라진 종들은 이들에게 저항력이 없는 바이러스과 병원균을 만났을때 순식간에 멸종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단일화된 종을 주요 식품으로 의존하고 있는 인류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야생은 이기적 인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아이러니가 납득된다.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가 한편으로는 천혜의 에덴동산이요, 또 한편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럽인의 영감이 필요한 혁신의 공백 상태였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풍부하고 다양한 혁신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완전히 독립적인 가축화 및 작물화 중심을 포함했다. 콜럼버스 이전까지, 아메리카 대륙의 사회 대부분은 규모가 크고, 도시화되어 있었으며, 이미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p. 203)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화는 세계사적 축복일까? 세계사적 재앙일까? 그들의 멸종이 과연 인류사적 발전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문화대 문화로 만나서 교류했다면 인디언의 지혜와 잉카/아즈텍 문명의 새로움은 서로에게 더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땅덩어리의 유럽이 커다란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삼켜버린것을 너무나 당연시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적어도 서양인이 아닌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중세식물학자들은 새로운 식물을 만날 때마다 고대 그리스인, 특히 플리니우스와 그와 동시대인인 디오스코리데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들이라면 분명 모든 것을 기술해두었을 테니까. 새롭고 이국적인 모든 것을 '터키의 것'으로 간주하고 이름 붙이는 경향 때문에 진짜 기원이 가려진 것은 비단 옥수수만이 아니다. 그러한 경향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아메리카가 고향인 새 멜레아그리스갈로프보를 우리는 아직도 '터키(칠면조)'라고 부르지 않는가. (p. 206)

중세인들의 아집은 참 여러면에서 고집스럽다. 그들이 몰랐던 신대륙은 인도여야 했고, 그들이 몰랐던 식물은 고대의 책에 나와있는 그 무엇이어야 했다. 사실 '중세' 라는 말 자체도 이상한 단어라고 한다. 유럽에만 통용되는 단어다. 대부분의 역사는 왕조로 구분되고 왕조 이후는 근대와 현대 정도로 구분한다. 어떤 시대 가 아닌 ~세 라는 표현은 유럽만을 위한 표현이다. 나라로 구분되지도 못하고 왕조로 구분되지도 못하는 혼란과 혼잡의 유럽 역사만을 위한 단어다. 세계사의 프레임은 여러모로 변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특정 시기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무언가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정교한 문화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장소에 따라서는 유목 생활을 유지하는 편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조건과 자원을 감안할 때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완벽한 방법인 장소들도 있었다. 인간의 행동은 지역 생태에 맞추어 변하기 마련이다. (p. 243)

종의 발달이건 인류의 발달이건 문명의 발달이건 우리는 일직선으로 편리하게 정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모든 발달은 생각보다 많이 동시다발적이었고 공존해오면 변화했다. A에서 B로 B다음에 C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A B C 가 동시에 있었고 서로 영향을 주다가 a b 로 변화하면서 결국 a' 만 살아남는 식이다. 획일적 프레임은 모든 면에서 버려야 할 때가 많다.

환경은 한 동식물이 사는 물리적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환경도 있는데, 그 생물과 상호작용 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모든 생물학적 실체가 여기 포함된다. 바이러스, 세균, 균류, 다른 동식물 등. 그런 실체들의 대다수가 위협을 가한다. 그리고 그런 잠재걱 적들은 항상 더 나은 공격방법, 위협에 처함 유기체가 진화시킨 방어책을 피할 더 나은 방법을 진화시키고 있다. 이른바 진화적 군비경쟁으로, 방어자가 공격자를 따라잡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훤하다. (p. 277)

산업화된 농업으로 품종의 범위를 좁혀 거대한 지역을 단일 재배로 채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증명한다. 이렇게 좁혀지고 선택되어진 육종으로 탄생되는 유기체들은 태생적으로 허약하기때문에 더욱 위험하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육종가는 변이를 새로 창조하지 않는다' 라는 저자의 문장이, 진화에서 이루어지는 창조를 인간이 하고 있는 것같은 착각을 깨트리기엔 아직 약한 걸까?

어떤 면에서 보면, 유전자 변형을 둘러싼 우려와 잇따라 가해지는 놀랍도록 엄격한 규제들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규제 기관의 요구에 맞추려면 큰 미용이 든다는 점에서 규제는 사실상 금지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오직 덩치 큰 다국적기업들만이 유전자 변형에 투자할 수 있다. 그 결과 혁신의 진정한 창구가 막혀 소수의 큰 기업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p. 313)

닭은 완전유전체 서열이 분석된 최초의 가축동물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은 최신책이라는 것인데, 기원을 밝히는 문제에 있어서 과학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 DNA분석은 최근 아주 유용한 방법이고,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전개는 이 방법을 통한 결과들로 이루어진다. 닭의 유전자 분석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유전자변형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단순히 반대냐 찬성이냐로 가를 것이 아니다. 여하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에 대한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 알이 먼저다.

서아시아의 밀과 동아시아의 쌀,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메리카의 옥수수까지, 모두 신드리아스기를 계기로 인류와 손을 잡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동맹을 맺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존할 수 있는 자원인 곡류는 식생활에서 더 중요해졌고, 결국에는 주곡이 되었다. 경작은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독창성과 창의력에 힘입은 승리의 전진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 아시아의 정반대쪽에서 동시에 곡류가 주곡이 되고 그런 다음 경작이 이뤄진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기후 악화가 가져온 필연으로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p. 361)

쌀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다보니 결국 밀과 옥수수와 다 만나게 된다. 신석기혁명이 혁명이 아니게 된달까. 곡류 뿐만이 아니라 토기도 훨씬 이전 시기의 유적지에 발굴되는 것을 보면 농업이 복잡한 사회의 발달을 추동했다는 오래된 개념은 자꾸 뒤집히게 된다. 그리고 좀더 영양높은 쌀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은 유전자변형의 논란과 만나게 되고, 석기시대 변종과 변이와 잡종을 통한 주곡의 변화를 보며 유전자변형과의 차이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된다. 그렇다고 저자가 유전자변형 찬성론자라는 것은 아니다. 찬성이냐 반대냐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이해가 먼저다. 저자는 그 이해의 프레임을 넓혀주고 있었다.

기원전 4000년 대 말로 접어들면서 스텝 목축인들의 이동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다. 기원전 4000년대의 첫 몇 백년 동안 좋았던 기후가 다시 악화되었던 것이다. 큰 동물 무리에게 풀을 충분히 뜯게 하려면 더 광범위한 목초지가 필요했다. 이는 새로운 생활방식,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 목축인들은 반정착생활로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었기에 가축 무리와 함께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p. 413)

선사시대에 스텝 유목민의 확산은 동쪽과 서쪽에 존재했던 사회들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친 듯하다. 중국에서는 유목민들이 정착 사회와 융합한 것으로 보이지만, 서쪽에서 그들은 다른 유목 목축인들이 점유한 땅을 침입했다. 그리고 마치 도미노효과처럼 이들을 점점 더 서쪽으로 밀어냈다. (p. 415)

 

말의 기원을 쫒아 올라가면 유목민들과의 접접은 필연적이다. 서양역사의 주축인 로마사에서 유목민들의 등장과 퇴장은 굉장히 강렬한 흔적들을 남기는데, 알수록 그들의 문화는 정말 궁금해진다. 말또한 야생말이 멸종되다 시피 했는데, 중국에서 야생말 재도입 시도를 성공적으로 진행중이라는 내용을 읽으며 중국이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나게 발전중인 것이 새삼 또 느껴지기도 했다. 중국은 미래준비를 경제와 산업으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은 기원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가장 높은 다양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돌연변이를 축적한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이 굵은 열매가 열리는 사과나무들은 적어도 3백만년 동안 텐산산맥의 숲에서 자라고 진화해온듯 했다. (p. 444)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과인 에덴동산의 사과는 전혀 사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신화적인 무언가를 부르는 말치고는 이상해서 일종의 서사 장치로 보인다. 원본에도 사과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자라는 금단의 열매, 뱀이 여자에게 먹어보라고 꼬드긴 것은 '답부아tappuah'라는 과일이다. 이 헤브루어는 사과를 뜻하지 않으며, 이 이야기의 탄생지이 팔레스타인의 뜨겁고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사과 품종의 개발은 최근의 일이다. (p. 450)

 

중국의 텐산산맥에 있는 사과나무 숲은 사과종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들이 그러한 보고를 갖지 못하고 멸종의 위기를 맞았으니 이 지역이 더욱 중요하게 보호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절로 생긴다. 재배종 사과도 재배종으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배종들은 근처의 야생종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고 상당한 유전자 이동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즉, "사과를 길들이는 행위가 길들여지지 않은 사과종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라는 사실은 우리가 길들였다고 생각하는 종들이 실은 얼마나 달라질수 있는지에 대해 인간이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사과,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에 없었던 사과,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에 대해서 종교적 맹목성에 대해서 또한번 답답함을 느낀다. 사과 뿐만이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 를 읽으면 더 많은 오류들이 드러나는데... 읽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는 전 세계 유전적 다양성의 약 85퍼센트를 보유한,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높은 곳이었으니, 이는 이 대륙이 우리 종의 고향이라는 좋은 증거였다. (p. 477)

오래된 유럽 토착민인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5만년전~6만5천년 전 으로 추정된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퍼센트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의 유전체에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거의, 혹은 아예 없다. (p. 482)

하지만 우리의 현생인류 조상들과 엮인 것은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니었다. (p. 483)

변종 유전자의 도입과 확산은 새로운 돌연변이가 발생하거나 집단 내에 존재하던 돌연변이가 갑자기 유용해지면서 시작될 수 있지만, 유연관계가 가까운 다른 집단과의 이종교배를 통해서도 시작될 수 있다. 사과에서부터 인간까지, 우리 모두는 유전체에 잡종 기원의 증거를 지니고 있다. (p. 498)

종 길들이기는 서로 다른 많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런 장소 가운데 상당수가 산악 지대였다. 산악 지대는 다양성이 풍부한 경향이 있는데, 고도에 따라 물리적 조건이 달라지는 탓이다. 하지만 작물과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장단이 맞아야 했다.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려는 시점에 인간의 개입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종, 그것이야말로 이 결정적 결속이 맺어지게 만든 승리의 조합이었다. 사실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p. 502)

우리가 '인위선택'이라고 불러온 행위는 실은 인간이 매개하는 자연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p. 503)

 

인류의 기원은 사실 자주 바뀌었다. 새로운 화석이 새로운 뼈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종들이 늘어나고, 새로운 인류의 조상들이 생길수록 관계도는 복잡해져 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다양성의 인정 이다. 다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 다양성을 없애가는 현대는 위험할 수 밖에 없지 않을지...

역사는 우리의 폭력성이 지난 세기에 비해, 그리고 그 전의 몇 백년에 비해 평균적으로 줄었음을 보여준다. 아직은 충분하지 않지만, 우리는 분명 평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중이다. (p. 517)

얼굴 모양의 '여성화'는 홀로세까지 계속되었다. 테스토스테론의 수치의 변화가 얼굴 모양의 이런 변화를 매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양성 모두에서 나타나는 더 가냘프고 여성적인 두개골은 인간 집단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되면서 생긴 부산물일 수 있다. (p. 520)

공격성이 적은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면, 그 형질이 집단 내로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더 조밀하게 살게 되고 나아가 생존을 위해 광범위한 관계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의도하지 않게-우리 자신을 길들였을 것이다. (p. 521)

인간의 '자기 길들임'을 둘러싼 논의는 정치적·도덕적 해석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생물학적 개념은 언제든 이런 식으로 오용될 수 있지만, 사실 진화에 도덕적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이 일어난 것은, 그저 자연선택이 그 시점에 그 환경에서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적응들을 선호하고 나머지를 추려냈기 때문이다. (p. 523)

우리는 종을 한 덩어리로 불변하는 존재로 보는 덫에 빠지기 쉽다. 인간이 살아가는 짧은 시간의 틀에서는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화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 그런 생각을 강화한다. 하지만 종은 물론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이는 진화의 교훈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화석에서, 살아 있는 생물들의 구조에서, 그리고 DNA에서도 본다. 종은 항상 변한다. 한 개체군 내의 특정 유전자형의 빈도는 새로운 돌연변이 없이도, 유전자 이동과 자연선택을 통해, 그리고 다른 종의 DNA가 도입됨으로써 변한다. 이 춤을 만들어내는 것은 종의 구성원들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인데, 어떤 환경에서든 그 상황에 더 나은 변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한 유기체가 상호작용을 하는 다른 모든 종을 포함하는 생물학적 환경도 포함한다. (p. 530~532)

 

역사서를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은데 바로 잔혹함과 잔인함과 폭력성 때문이다. 과거의 일상적 폭력은 점차 줄어들어 왔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오면서 두개골 모양이 우락부락에서 부드럽게 변했듯이, 인간의 외형적 변화와 함께 인간의 내형적 형질도 변화되어 왔다. 즉, 인간도 변하고 있다. 우리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연을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다. 자연을 마음대로 변화시켜도 우리는 불변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게 변한 자연에 의해 인간은 변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변하게 될지 지금 상황에서는 무섭지 않은가?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자는 법인데...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후려치고 있는지 원...

과학기술이 민간기업체보다는 대학에서 연구되고 개발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은 기득권이 영향을 미칠 여지가 훨씬 적다. 대학의 과학자들 대부분은 인류의 공공선이라는 목표와 신념으로 연구한다. 그들은 자기비판적이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자금 제공자가 아무리 부추겨도 과장된 주장을 거부한다. 수익에 집중하는 관리자들로서는 불만이겠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다. 공공 기금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따를 자유, 공공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p. 534)

저자의 의견에 완전 공감한다. 노벨상 시즌이 될 때마다 우리나라 과학계를 폄하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과학자들에게 연구의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할때다. DNA 분석과 유전공학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었기에, 이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기업이 손을 뻗치기 전에 공공연구의 토대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많은 종을 멸종시켰다. 그리고 앞으로도 멸종은 늘어날 것이다. 과연 그 사이에서 인류는 잘 먹고 잘 살 것 같은가? 생물 다양성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야생을 살리는 것은 단순히 자연보호 차원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문제다.

어떤 생태계든, 어떤 종이든, '미래대비' 는 다양성과 그 안에 포함된 변이에서 나온다. 종의 역사, 지구 생명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생물 종에 너무 많은 제약을 가할 경우, 물리적 환경 변화뿐 아니라 이례적인 병원체의 공격 등, 미래에 변화가 닥쳤을 때 종이 적응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심각하게 제한된다. (p. 542)

우리는 진화와 생존이라는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다른 종들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p. 543)

우리는 우리와 협력하게 된 종들만을 돌봐서는 안 된다. 어느 때보다 더,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을 가꿀 필요가 있다. 자연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상호관계를 받아들이는 방법, 야생과 싸우는 대신 더불어 번성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이번 세기의 과제가 아닐까? (p. 547)

 

<총균쇠>,<사피엔스>에 이어 인류 역사에 새바람을 일으킬 책이라는 홍보문구에 과한 기대를 걸면 곤란하다. 내게 총균쇠 는 문명의 발달에서 상호연관성을 깨닫게 하고 지리적 중요성을 알게 했고, 사피엔스는 농업혁명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한지 되물으며 인류의 발달이 얼마나 많은 파괴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반성하게 했다. 그리고 이 책은 과학적 DNA분석 기법을 통해 그 모든 내용을 증명하면서 우리가 길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총균쇠 나 사피엔스 만큼 가독성이 좋다고 할 순 없었지만, 10가지 종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준비함에 있어 중점을 두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는 것도 훌륭했다. 다만, 10가지 종을 넘어 좀더 포괄적인 문명사 전개를 해주었으면 싶은 아쉬움은 조금 있었다. 그래서 다른 종 혹은 좀더 폭넓게 다룬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여하튼, 여러모로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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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채우는 그림 인문학
유혜선 지음 / 피톤치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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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막막할 때 그림을 보다

인문학적으로 사고하고 예술적으로 상상하라

 

 

저자는 자기계발분야 베테랑 강사다. 대중강연을 많이 하는 강사들은 자기만의 컨텐츠 개발을 위해 다양한 자료수집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저자는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 사람인것 같다. 저자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과 자신의 사연을 바탕으로 그림과 엮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가지 이야기당 한가지 그림을 보여주는 식인데,

신뢰하지 못할 후배이야기를 하며 제임스 엔소르의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을

보부아르와 '블루스타킹' 이라 불렸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며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를

삶에 열정적인 여성변호사 를 보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여자>를

컬러리스트로 활동하는 지인을 보며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자신이 빠져들었던 니체를 이야기하며 에드바르트 뭉크의 <프리드리히 니체>를

학교내 청소노동자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파울 클레의 <두려움의 엄습III>을

성공한 CEO를 보며 알브레히트 뒤러의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명품과 품위 이야기를 하며 헨리 베이컨의 <출발>을

대중강연자로서의 고충을 이야기하며 에드바르트 뭉크의 <사춘기>를

평온하게 살던 부잣집 마나님에서 젊은 남자에게 끌리는 방황을 격는 여성이야기를 하며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남성 나체>를

강의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앤서니 프레드릭 센디스의 <메데이아>를

연애지상주의자였던 지인의 이야기를 하며 카미유 클로델의 <중년>을

행복한 노부부를 보며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오르막길>을

방탕한 재벌3세 이야기를 하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성공했지만 외로운 싱글 여성과 평온하지만 고단한 주부의 이야기를 하며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나쁜남자 이야기를 하며 폴 고갱의 <영혼이 지켜본다>를

불행한 가정생활 속 여성을 이야기하며 페르낭 크노프의 <내 마음의 문을 잠그다> 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부채를 든 여인을>을

승진에서 누락한 여성이야기를 하며 에드워드 콜리 번 존스의 <심연>을

은퇴후 가족과 불화를 겪었던 남성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일리아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무용을 배웠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며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시골무도회>를

취준생이지만 삶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 이야기를 하며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래퍼가 된 아들과 공감을 위해 노력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하며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각자의 일로 바쁜 부부 이야기를 하며 구스타프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을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하며 줄 바스티엥 르파주의 <건초 만드는 사람들>을

술을 마시면 성격이 활달해지는 사람이야기를 하며 프란스 할스의 <유쾌한 술꾼>을

나이든 엄마 이야기를 하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와르의 <어머니의 초상>을

아버지에 대한 후회어린 기억을 이야기하며 폴 세잔의 <화가의 아버지>를

악몽을 꾸었던 이야기를 하며 헨리 퓨젤리의 <악몽>을

성공한 줄 알았으나 그렇지 못했던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에드바르트 뭉크의 <뱀파이어>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을

수직적 삶과 수평적 죽음을 이야기하며 피트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동창생들과의 수다속에 등장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를

좋아하는 블루색에 대한 이야기 속에 바실리 칸딘스키의 <스타이 블루>를

색채심리전문가 의 행복이야기를 하며 앙리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괴짜 철학자 지인 이야기를 하며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바쿠스 축제>를

가든파티에서 건배 일화를 이야기하며 디에고 발라스케스의 <술꾼들, 바쿠스의 축제>를

현대인의 삶에 대한 저자의 아쉬운 마음 속에 프랑수아 부셰의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을>을

친구들과의 호텔파자마파티 일화를 이야기하며 장 앙투안 와토의 <키테라 섬의 순례>를

보여주었다.

다양한 그림들을 보는 것은 늘 재미?!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그림 인문학' 아닌가? 그런데 어디 인문학이 있는거지? 이 책은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그림감상 에세이였다. 이야기마다 인문학적 통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마다 그림 자체의 의미를 통한 인문학적 사고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저자가 한 생각들과 저자가 느끼는 그림들을 저자 마음대로 묶어가며 쓴 에세이일 뿐인데 제목이 과하다 싶었다. 게다가 오탈자가 너무 많아서 편집자의 성의부족도 아쉬웠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느끼는 감상들이 나와 너무 달라서 공감이 안되다 보니 더욱 저자의 글이 와닿지 않았다. 그림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므로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차라리 그림에 대한 미술적 해석과 자신의 해석을 함께 실었다면 또 모를까...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은 글의 의미마저 퇴색시킬 수 있다.

'나를 채우는 그림' 혹은 '내가 그림에서 배운 것' 또는 '나는 그림을 통해 삶을 배웠다' 정도의 개인적 감상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미술감상에세이를 인문학책으로 읽기엔 많이 모자란 책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그림 보다 새로운 그림들이 많이 보였던 점은 좋았다

 

 

 

 

몰랐던 그림인데, 저자와 다른 감상을 느꼈지만, 이 그림들을 알게 되서 좋았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여자> 와 에드바르드 뭉크의 <프리드리히 니체>

 

봤던 그림들이지만 다시 봐도 또 좋았다.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와 앤서니 프레드릭 샌디스의 <메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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