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길들임의 역사 - 인류의 생존을 이끈 선택과 협력의 연대기
앨리스 로버트 지음, 김명주 옮김 / 푸른숲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인류의 생존을 이끈 선택과 협력의 연대기

길들여진 종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Tamed" = 길들여진 이라는 원제에는 주어가 없다. 무엇이 무엇에 길들여졌다는 것일까?

'길들임' 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인간이 주체가 되고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이 객체가 되는 식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것이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향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방향을 바꿔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10종의 길들여진 것들의 기원을 추적한다. 개, 밀, 소, 옥수수, 감자, 닭, 쌀, 말, 사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 를 다룬다.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가축과 식량의 기원을 쫒다보면 인간과 자연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강하게 느껴진다. 어찌보면 당연한건데, 문제는 그 연결성이 새삼스럽다는데 있다고나 할까... 그렇게 인간이 자연을 너무 멀게 두고 생각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나 할까...

특정한 늑대를 가축화된 종으로 변형시킨 일에 의식적인 의도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의 관계는 일종의 공생관계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장을 시작할 때 언급한 이야기처럼 상호 이익에 기반을 둔 느슨한 동반자 관계. 심지어 그 과정을 추동한 쪽은 늑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갯과 동물들이 어떤 교활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상상할 것까지는 없다. 단지 음식 찌꺼기를 찾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질 뿐이었다해도 인간 곁을 어슬렁거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늑대들은 인간이 자신들을 처음에는 이웃으로, 그런 다음에는 동반자로 받아들이도록 무의식적으로 훈련시켰을 것이다. 두 종의 성공적인 동맹은 양측의 타고난 성향에 의존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의지가 있어야 했다. (p. 55)

개의 유전자의 99.5%가 회색늑대와 같다고 한다. 개는 늑대였다. 하지만 사람도 그러하듯 개들도 늑대들도 성격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개는 식용으로 가축이 된 동물이 아니다. 따라서 신석기 이전부터 맺어진 이 관계는 애초부터 공생관계에 가까웠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마지막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만 1천년 전에서 1만 7천년전 사이, 유라시아 전역의 동물들이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때, 모두가 춥고 배고팠을때, 수렵채집인의 야영지 가장자리에서 쉽게 구할수 있었던 먹이가 일부 늑대 무리에 변화를 가져왔을 수도, 혹독한 날씨 속에 늑대의 경계심이 수렵채집인들의 경보기로 사용됐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렇게 가축이 된 늑대인 개는 점점 인간과 친해지고 그렇게 가축이 되지 않은 늑대는 점점 인간과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개와 인간의 관계시작부터 인간의 의도적 길들임이라는 프레임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밀은 따지고 보면 풀이다. 별 볼 일 없는 풀. 누가 봐도 먹을거리로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야생풀의 작은 씨앗은 음식으로 그다지 매력이 없다. 견과류나 과일처럼 더 매력적인 다른 씨앗들이 많지 않나. 이들은 먹기 좋게 만들기 위해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맛있는 음식들이다. 도대체 1만 2500만년 전 무슨 일이 일거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풀처럼 별 볼 일 없고 매력없는 식물을 식량원으로 보게 되었을까? 무엇이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그런 식물에 의존하게 만들었을까? 게다가 하필 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p. 125)

신석기혁명 하면 농업혁명 즉 인간이 곡물을 재배하고 따라서 안정적 식량공급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사유재산과 계급이 축적되기 시작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가 빵을 만들어먹던 시기는 신석기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 부터 였다고 한다. 비록 재배는 하기 전이었지만, 들판에 자생적으로 자란 곡물류의 풀들에서 채집하고 가루로 빻아 빵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어쩌다 구석기시대에 풀의 씨앗들이 주식이 되었을까? 어쩌다 채집해 먹던 것을 기르기 시작했을까?

1만3천년 전이 되자 북반구의 빙상이 후퇴하면서 고대 빙하의 파편들은 산맥의 높은 곳에만 남았다. 기후는 점점 온화해져 갔다. 식물에게 유리해진 조건은 단지 따뜻한 기온과 증가한 강우량만이 아니었다. 대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1만5천년~1만2천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가가 상승했다. 이렇게 되면 많은 식물 유형에서 생산성이 50퍼센트 높아지고, 회복성이 좋은 풀조차 생산성이 15퍼센트 증가한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식물이 번성하자 풀은 의존할 수 있는 영양소 공급원으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수확만 하면 되는 천혜의 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보면 야생풀이 식량으로 선택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늘 그 자리에 있고, 의존할 수 있고, 양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때 문제가 생겼다. 1천년 넘게 겨울이 계속된 것이다. 지구에 기온이 하락한 이 시기를 신드리아스기라고 부른다. 1만2900년 전~1만 1700만년 전 신드리아스기에 세계적 한파로 식량 자원에도 심각한 영향이 있었음이 틀임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식량 공급을 스스로 통제하려고 시도한 것은 절박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드리아스기의 한랭화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작물재배로 눈을 돌렸지만, 앞서 1천년 동안 따뜻함과 풍요가 가져다준 변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한파로 생긴 부족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을 지나 세계가 따뜻해졌을 때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했지만, 이때는 아직 농업이 생기기 전이었다. 농업이 인구증가를 가져왔다기보다 인구증가가 어떤 식으로든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변화를 추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인구 증가로 자원 압박이 생기고 있을 때 하필 신드리아스기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p. 126~128)

농업이 먼저가 아니라 사회변화가 먼저였다는 것은 여러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1만2천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농업인이 아니라 수렵채집인들이 만든 제사유적지이다. 이 유적의 발견은 신석기 초기 인류 사회 발달에 관한 이론에 균열을 일으켰다. 또한 신석기는 한 곳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자연과 기후변화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농업을 시작하고 농업을 통해 곡식을 먹고 곡식이 쌓여 부가 축적되고 부를 바탕으로 한 종교와 계급이 생성된 것이 아닐 수 있다. 구석기에도 빵을 만들어 먹었고 기후변화는 채집에서 재배로 불가피한 전환을 유도했다. 인간이 재배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재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재배를 한것이라는 차이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차이다.

목축, 즉 동물 무리를 돌보는 일은 유목 및 수렵채집 생활 방힉과 농업게 기반한 정착 생활 방식 사이의 중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수렵채집에서 목축으로의 이행은 매우 신속했을지도 모른다. (p. 173)

중유럽의 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소뼈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어린 소의 개체수가 증가한다. 이는 목축의 초점이 고기 생산으로 옮겨 왔음을 암시한다. (p. 179)

한 가축 품종이 멸종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적 유산' 도 사라진다. (p. 186)

 

소는 우유부터 고기와 노동까지 활용도가 높은 가축이었다. 따라서 필요성에 따라 종을 인위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쪽으로 바꾸고 통합해 왔다. 그렇게 야생의 소들은 멸종되어 갔다. 경제성 측면에서는 우수한 품질의 소만 가축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안일하고 근시안적인 접근이다. 다양성이 사라진 종들은 이들에게 저항력이 없는 바이러스과 병원균을 만났을때 순식간에 멸종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단일화된 종을 주요 식품으로 의존하고 있는 인류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야생은 이기적 인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아이러니가 납득된다.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가 한편으로는 천혜의 에덴동산이요, 또 한편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럽인의 영감이 필요한 혁신의 공백 상태였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풍부하고 다양한 혁신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완전히 독립적인 가축화 및 작물화 중심을 포함했다. 콜럼버스 이전까지, 아메리카 대륙의 사회 대부분은 규모가 크고, 도시화되어 있었으며, 이미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p. 203)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화는 세계사적 축복일까? 세계사적 재앙일까? 그들의 멸종이 과연 인류사적 발전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문화대 문화로 만나서 교류했다면 인디언의 지혜와 잉카/아즈텍 문명의 새로움은 서로에게 더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땅덩어리의 유럽이 커다란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삼켜버린것을 너무나 당연시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적어도 서양인이 아닌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중세식물학자들은 새로운 식물을 만날 때마다 고대 그리스인, 특히 플리니우스와 그와 동시대인인 디오스코리데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들이라면 분명 모든 것을 기술해두었을 테니까. 새롭고 이국적인 모든 것을 '터키의 것'으로 간주하고 이름 붙이는 경향 때문에 진짜 기원이 가려진 것은 비단 옥수수만이 아니다. 그러한 경향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아메리카가 고향인 새 멜레아그리스갈로프보를 우리는 아직도 '터키(칠면조)'라고 부르지 않는가. (p. 206)

중세인들의 아집은 참 여러면에서 고집스럽다. 그들이 몰랐던 신대륙은 인도여야 했고, 그들이 몰랐던 식물은 고대의 책에 나와있는 그 무엇이어야 했다. 사실 '중세' 라는 말 자체도 이상한 단어라고 한다. 유럽에만 통용되는 단어다. 대부분의 역사는 왕조로 구분되고 왕조 이후는 근대와 현대 정도로 구분한다. 어떤 시대 가 아닌 ~세 라는 표현은 유럽만을 위한 표현이다. 나라로 구분되지도 못하고 왕조로 구분되지도 못하는 혼란과 혼잡의 유럽 역사만을 위한 단어다. 세계사의 프레임은 여러모로 변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특정 시기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무언가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정교한 문화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장소에 따라서는 유목 생활을 유지하는 편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조건과 자원을 감안할 때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완벽한 방법인 장소들도 있었다. 인간의 행동은 지역 생태에 맞추어 변하기 마련이다. (p. 243)

종의 발달이건 인류의 발달이건 문명의 발달이건 우리는 일직선으로 편리하게 정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모든 발달은 생각보다 많이 동시다발적이었고 공존해오면 변화했다. A에서 B로 B다음에 C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A B C 가 동시에 있었고 서로 영향을 주다가 a b 로 변화하면서 결국 a' 만 살아남는 식이다. 획일적 프레임은 모든 면에서 버려야 할 때가 많다.

환경은 한 동식물이 사는 물리적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환경도 있는데, 그 생물과 상호작용 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모든 생물학적 실체가 여기 포함된다. 바이러스, 세균, 균류, 다른 동식물 등. 그런 실체들의 대다수가 위협을 가한다. 그리고 그런 잠재걱 적들은 항상 더 나은 공격방법, 위협에 처함 유기체가 진화시킨 방어책을 피할 더 나은 방법을 진화시키고 있다. 이른바 진화적 군비경쟁으로, 방어자가 공격자를 따라잡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훤하다. (p. 277)

산업화된 농업으로 품종의 범위를 좁혀 거대한 지역을 단일 재배로 채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증명한다. 이렇게 좁혀지고 선택되어진 육종으로 탄생되는 유기체들은 태생적으로 허약하기때문에 더욱 위험하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육종가는 변이를 새로 창조하지 않는다' 라는 저자의 문장이, 진화에서 이루어지는 창조를 인간이 하고 있는 것같은 착각을 깨트리기엔 아직 약한 걸까?

어떤 면에서 보면, 유전자 변형을 둘러싼 우려와 잇따라 가해지는 놀랍도록 엄격한 규제들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규제 기관의 요구에 맞추려면 큰 미용이 든다는 점에서 규제는 사실상 금지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오직 덩치 큰 다국적기업들만이 유전자 변형에 투자할 수 있다. 그 결과 혁신의 진정한 창구가 막혀 소수의 큰 기업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p. 313)

닭은 완전유전체 서열이 분석된 최초의 가축동물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은 최신책이라는 것인데, 기원을 밝히는 문제에 있어서 과학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 DNA분석은 최근 아주 유용한 방법이고,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전개는 이 방법을 통한 결과들로 이루어진다. 닭의 유전자 분석이야기를 하며 나오는 유전자변형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단순히 반대냐 찬성이냐로 가를 것이 아니다. 여하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에 대한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 알이 먼저다.

서아시아의 밀과 동아시아의 쌀, 그리고 아마도 중앙아메리카의 옥수수까지, 모두 신드리아스기를 계기로 인류와 손을 잡고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동맹을 맺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존할 수 있는 자원인 곡류는 식생활에서 더 중요해졌고, 결국에는 주곡이 되었다. 경작은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독창성과 창의력에 힘입은 승리의 전진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 어려운 시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생활 방식을 바꾸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들. 아시아의 정반대쪽에서 동시에 곡류가 주곡이 되고 그런 다음 경작이 이뤄진 상황도, 선택이 아니라 기후 악화가 가져온 필연으로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p. 361)

쌀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다보니 결국 밀과 옥수수와 다 만나게 된다. 신석기혁명이 혁명이 아니게 된달까. 곡류 뿐만이 아니라 토기도 훨씬 이전 시기의 유적지에 발굴되는 것을 보면 농업이 복잡한 사회의 발달을 추동했다는 오래된 개념은 자꾸 뒤집히게 된다. 그리고 좀더 영양높은 쌀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은 유전자변형의 논란과 만나게 되고, 석기시대 변종과 변이와 잡종을 통한 주곡의 변화를 보며 유전자변형과의 차이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된다. 그렇다고 저자가 유전자변형 찬성론자라는 것은 아니다. 찬성이냐 반대냐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이해가 먼저다. 저자는 그 이해의 프레임을 넓혀주고 있었다.

기원전 4000년 대 말로 접어들면서 스텝 목축인들의 이동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다. 기원전 4000년대의 첫 몇 백년 동안 좋았던 기후가 다시 악화되었던 것이다. 큰 동물 무리에게 풀을 충분히 뜯게 하려면 더 광범위한 목초지가 필요했다. 이는 새로운 생활방식,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 목축인들은 반정착생활로는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었기에 가축 무리와 함께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p. 413)

선사시대에 스텝 유목민의 확산은 동쪽과 서쪽에 존재했던 사회들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친 듯하다. 중국에서는 유목민들이 정착 사회와 융합한 것으로 보이지만, 서쪽에서 그들은 다른 유목 목축인들이 점유한 땅을 침입했다. 그리고 마치 도미노효과처럼 이들을 점점 더 서쪽으로 밀어냈다. (p. 415)

 

말의 기원을 쫒아 올라가면 유목민들과의 접접은 필연적이다. 서양역사의 주축인 로마사에서 유목민들의 등장과 퇴장은 굉장히 강렬한 흔적들을 남기는데, 알수록 그들의 문화는 정말 궁금해진다. 말또한 야생말이 멸종되다 시피 했는데, 중국에서 야생말 재도입 시도를 성공적으로 진행중이라는 내용을 읽으며 중국이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나게 발전중인 것이 새삼 또 느껴지기도 했다. 중국은 미래준비를 경제와 산업으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은 기원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가장 높은 다양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돌연변이를 축적한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이 굵은 열매가 열리는 사과나무들은 적어도 3백만년 동안 텐산산맥의 숲에서 자라고 진화해온듯 했다. (p. 444)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과인 에덴동산의 사과는 전혀 사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신화적인 무언가를 부르는 말치고는 이상해서 일종의 서사 장치로 보인다. 원본에도 사과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자라는 금단의 열매, 뱀이 여자에게 먹어보라고 꼬드긴 것은 '답부아tappuah'라는 과일이다. 이 헤브루어는 사과를 뜻하지 않으며, 이 이야기의 탄생지이 팔레스타인의 뜨겁고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사과 품종의 개발은 최근의 일이다. (p. 450)

 

중국의 텐산산맥에 있는 사과나무 숲은 사과종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종들이 그러한 보고를 갖지 못하고 멸종의 위기를 맞았으니 이 지역이 더욱 중요하게 보호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절로 생긴다. 재배종 사과도 재배종으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배종들은 근처의 야생종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고 상당한 유전자 이동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즉, "사과를 길들이는 행위가 길들여지지 않은 사과종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라는 사실은 우리가 길들였다고 생각하는 종들이 실은 얼마나 달라질수 있는지에 대해 인간이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사과,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에 없었던 사과,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에 대해서 종교적 맹목성에 대해서 또한번 답답함을 느낀다. 사과 뿐만이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 를 읽으면 더 많은 오류들이 드러나는데... 읽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는 전 세계 유전적 다양성의 약 85퍼센트를 보유한,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높은 곳이었으니, 이는 이 대륙이 우리 종의 고향이라는 좋은 증거였다. (p. 477)

오래된 유럽 토착민인 네안데르탈인과의 교잡 시점은 5만년전~6만5천년 전 으로 추정된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 밖으로 확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비아프리카인들은 평균 2퍼센트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가지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 계통 사람들의 유전체에는 네안데르탈인 DNA가 거의, 혹은 아예 없다. (p. 482)

하지만 우리의 현생인류 조상들과 엮인 것은 네안데르탈인만이 아니었다. (p. 483)

변종 유전자의 도입과 확산은 새로운 돌연변이가 발생하거나 집단 내에 존재하던 돌연변이가 갑자기 유용해지면서 시작될 수 있지만, 유연관계가 가까운 다른 집단과의 이종교배를 통해서도 시작될 수 있다. 사과에서부터 인간까지, 우리 모두는 유전체에 잡종 기원의 증거를 지니고 있다. (p. 498)

종 길들이기는 서로 다른 많은 장소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런 장소 가운데 상당수가 산악 지대였다. 산악 지대는 다양성이 풍부한 경향이 있는데, 고도에 따라 물리적 조건이 달라지는 탓이다. 하지만 작물과 가축이 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장단이 맞아야 했다. 인간이 생활 방식을 바꾸려는 시점에 인간의 개입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종, 그것이야말로 이 결정적 결속이 맺어지게 만든 승리의 조합이었다. 사실 의식적인 의사 결정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p. 502)

우리가 '인위선택'이라고 불러온 행위는 실은 인간이 매개하는 자연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p. 503)

 

인류의 기원은 사실 자주 바뀌었다. 새로운 화석이 새로운 뼈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종들이 늘어나고, 새로운 인류의 조상들이 생길수록 관계도는 복잡해져 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다양성의 인정 이다. 다양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 다양성을 없애가는 현대는 위험할 수 밖에 없지 않을지...

역사는 우리의 폭력성이 지난 세기에 비해, 그리고 그 전의 몇 백년에 비해 평균적으로 줄었음을 보여준다. 아직은 충분하지 않지만, 우리는 분명 평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중이다. (p. 517)

얼굴 모양의 '여성화'는 홀로세까지 계속되었다. 테스토스테론의 수치의 변화가 얼굴 모양의 이런 변화를 매개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양성 모두에서 나타나는 더 가냘프고 여성적인 두개골은 인간 집단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관용이 자연선택되면서 생긴 부산물일 수 있다. (p. 520)

공격성이 적은 남성들이 번식에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면, 그 형질이 집단 내로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더 조밀하게 살게 되고 나아가 생존을 위해 광범위한 관계망에 의존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의도하지 않게-우리 자신을 길들였을 것이다. (p. 521)

인간의 '자기 길들임'을 둘러싼 논의는 정치적·도덕적 해석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생물학적 개념은 언제든 이런 식으로 오용될 수 있지만, 사실 진화에 도덕적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이 일어난 것은, 그저 자연선택이 그 시점에 그 환경에서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적응들을 선호하고 나머지를 추려냈기 때문이다. (p. 523)

우리는 종을 한 덩어리로 불변하는 존재로 보는 덫에 빠지기 쉽다. 인간이 살아가는 짧은 시간의 틀에서는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화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 그런 생각을 강화한다. 하지만 종은 물론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이는 진화의 교훈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화석에서, 살아 있는 생물들의 구조에서, 그리고 DNA에서도 본다. 종은 항상 변한다. 한 개체군 내의 특정 유전자형의 빈도는 새로운 돌연변이 없이도, 유전자 이동과 자연선택을 통해, 그리고 다른 종의 DNA가 도입됨으로써 변한다. 이 춤을 만들어내는 것은 종의 구성원들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인데, 어떤 환경에서든 그 상황에 더 나은 변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환경이란,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한 유기체가 상호작용을 하는 다른 모든 종을 포함하는 생물학적 환경도 포함한다. (p. 530~532)

 

역사서를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은데 바로 잔혹함과 잔인함과 폭력성 때문이다. 과거의 일상적 폭력은 점차 줄어들어 왔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오면서 두개골 모양이 우락부락에서 부드럽게 변했듯이, 인간의 외형적 변화와 함께 인간의 내형적 형질도 변화되어 왔다. 즉, 인간도 변하고 있다. 우리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자연을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다. 자연을 마음대로 변화시켜도 우리는 불변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게 변한 자연에 의해 인간은 변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변하게 될지 지금 상황에서는 무섭지 않은가?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자는 법인데...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후려치고 있는지 원...

과학기술이 민간기업체보다는 대학에서 연구되고 개발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은 기득권이 영향을 미칠 여지가 훨씬 적다. 대학의 과학자들 대부분은 인류의 공공선이라는 목표와 신념으로 연구한다. 그들은 자기비판적이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자금 제공자가 아무리 부추겨도 과장된 주장을 거부한다. 수익에 집중하는 관리자들로서는 불만이겠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다. 공공 기금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따를 자유, 공공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p. 534)

저자의 의견에 완전 공감한다. 노벨상 시즌이 될 때마다 우리나라 과학계를 폄하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과학자들에게 연구의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할때다. DNA 분석과 유전공학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었기에, 이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기업이 손을 뻗치기 전에 공공연구의 토대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많은 종을 멸종시켰다. 그리고 앞으로도 멸종은 늘어날 것이다. 과연 그 사이에서 인류는 잘 먹고 잘 살 것 같은가? 생물 다양성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야생을 살리는 것은 단순히 자연보호 차원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문제다.

어떤 생태계든, 어떤 종이든, '미래대비' 는 다양성과 그 안에 포함된 변이에서 나온다. 종의 역사, 지구 생명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생물 종에 너무 많은 제약을 가할 경우, 물리적 환경 변화뿐 아니라 이례적인 병원체의 공격 등, 미래에 변화가 닥쳤을 때 종이 적응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심각하게 제한된다. (p. 542)

우리는 진화와 생존이라는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다른 종들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p. 543)

우리는 우리와 협력하게 된 종들만을 돌봐서는 안 된다. 어느 때보다 더,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을 가꿀 필요가 있다. 자연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상호관계를 받아들이는 방법, 야생과 싸우는 대신 더불어 번성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이번 세기의 과제가 아닐까? (p. 547)

 

<총균쇠>,<사피엔스>에 이어 인류 역사에 새바람을 일으킬 책이라는 홍보문구에 과한 기대를 걸면 곤란하다. 내게 총균쇠 는 문명의 발달에서 상호연관성을 깨닫게 하고 지리적 중요성을 알게 했고, 사피엔스는 농업혁명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한지 되물으며 인류의 발달이 얼마나 많은 파괴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반성하게 했다. 그리고 이 책은 과학적 DNA분석 기법을 통해 그 모든 내용을 증명하면서 우리가 길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총균쇠 나 사피엔스 만큼 가독성이 좋다고 할 순 없었지만, 10가지 종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준비함에 있어 중점을 두어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는 것도 훌륭했다. 다만, 10가지 종을 넘어 좀더 포괄적인 문명사 전개를 해주었으면 싶은 아쉬움은 조금 있었다. 그래서 다른 종 혹은 좀더 폭넓게 다룬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여하튼, 여러모로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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