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어젯밤, 형이 살해당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책을 읽기전 표지에서 버튼만 보였다. 숫자가 써있는 버튼. 제일 아래 불이 들어온 버튼. 버튼들.

다 읽고 나서 보니 소년이 있었다.

흐릿하게 흑인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랐다. 정말 몰랐다. 진짜 못봤다. 왜?왜? 못봤지? 왜? 안 보였지?

이제 표지를 보면 소년만 보인다. 버튼 따위 이제 관심없다. 오로지 소년만 보인다.

이 신비체험?! 같은 느낌은 아마도 이 소설이 지닌 힘이자 매력인 듯 하다.

무심한 회색빛 책이 슬픔에 쌓인 흐릿함으로 묵직하게 남는 책...

책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페이지마다 시가 써있는데, 그 시들이 모여 소설이 됐다고나 할까.

 

 

 

거친 느낌으로 표현된 종이에 짧은 글들이 시처럼 씌여있는데 소설처럼 아니 영화처럼 읽힌다.

장면 하나하나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숀은 가방에 담겨 들것으로 옮겨졌고

풍선껌 별들로 이루어진

아스팔트 은하계에

숀의 피가 더해졌다. (p. 28)

형이 총에 맞았다. 숀이 죽었다.

윌은 룰을 안다.

1. 우는 것 : 하지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2. 밀고하는 것 : 하지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3. 복수하는 것 :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룰에 관해 알아둬야 할 것

룰은 망가뜨리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망가진 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이 따르도록.

윌은 이제 룰을 지키려고 한다.

룰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의 총을 찾아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젊은 것도 알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것만 명심하렴.

어두운 시간에 돌아다닐 땐

마음까지 어두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하지만 형은

헤드폰을 쓰고 있던 것 같다

윌은 집이 있는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허리춤에 형의 총을 쑤셔넣은 채

7층에서 문이 열렸다. 오전 9:08:02 벅이 탔다.

6층에서도 누가 탔다. 오전 9:08:12 대니였다.

5층에서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오전 9:08:22

4층에서도 문이 열렸다. 오전 9:08:32 아빠. 아빠? 아빠!

3층에서 탄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전 9:08:47

2층에선 2층에선... 그 사람이다! 오전 9:09:07

L층 로비에 내려오기까지... LONG WAY DOWN... 먼 길...

육십 초. 칠 층. 세 개의 룰. 하나의 총.

열다섯살 소년 윌의 이야기는 재미없게 말하자면 이렇다.

할렘가에서 마약이나 팔며 삶을 유지하는 갱단 청년들의 헛된 죽음 이야기

하지만 저자가 풀어내는 윌의 이야기는 저자가 써놓은 소설의 시작전 첫 장의 멘트로 감동실화로 되살아난다.

내가 본 적 있는, 그리고 본 적 없는

길 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해.

너희는 사랑받고 있어.

표지 뒤날개 안쪽에 실린 저자의 소개글에서 레개머리 흑인남성이 따뜻하게 웃고 있다.

외면당하는 것에 지친 젊은이들을 보는 것에 지쳤다는 저자가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듯 하다.

나는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너희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너희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한시간도 안걸려 읽어내린 소설 한편이 이렇게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 여운이 아주 오래...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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