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세계 여성사 - 농업의 시작, 생산의 신神 여성
장혜영 지음 / 어문학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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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시작, 생산의 신 여성

신석기시대, 농업을 시작했던 생산의 神 여성에 대한 이야기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역사이전의 시대를 다룬 고고학도 좋아한다. 그러니 신석기시대사를 한권으로 볼 수 있는 그것도 신석기시대를 세계여성사로서 한권으로 볼 수 있는 이 책에 대한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드커버의 양장본에 두툼한 사이즈가 학문적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면서 고급스런 표지디자인까지 책에 대한 첫 인상이 무척 좋았더랬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1955년 중국 출생으로 중국문단에 데뷔한 소설가이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며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편집을 역임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보건데 저자는 중국어를 모어로 활용하는 조선족계 문인인듯 하다. 단편 70여편 중편 10여편 장편 7부를 출판했다는데 검색해보니 국내출판된 소설은 몇 권 안되는 것으로 보아 작품활동은 중국에서 주로 한것 같다. 그런데 국내 출판된 저자의 책들은 대부분 학술서 였다. 그중에서도 고대사.

물론, 전문적 학자가 아니어도 학술서를 쓸 수 있다. 시중에도 학자가 쓰진 않았지만 학자못지않게 전문적인 내용을 뽐내는 학술서를 꽤 여러권 찾아 볼 수 있다. 더구나 자료수집과 개연성 있는 구조 엮기에 있어서 탁월한 소설가가 쓴 책은 가독성면에서 오히려 더 좋을 때도 많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의 소설가적 면모를 느끼지는 못했다.

제목이 쓰여진 페이지를 넘기면 '들어가며' 가 나오는데

"집필의 수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과 유리된 채 아득한 석기 시대로의 시간여행을 하면서 문자 그대로 심신이 지치고 피폐해졌다. 타이틀이 여성사임에도 시대적 국한성에 포로가 된 필자는 본의 아니게 '고고학자'가 될 것을 강요당했으나 소설가에게 그 직분은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p. 5)

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한다. 첫문장부터 깜짝 놀랐다. 소설가인 저자에게 '고고학자'가 될 것을 강요하며 심신히 지치고 피폐해질 만큼 '집필의 수요' 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해서 일부러 찾아 읽는 편이지만 제목부터 전문적으로 보이는 이 책과 같은 학술서를 읽고자 원하는 이들이 많았단 말인가? 저자에게 이러한 험난한 집필을 요구한 그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런데 바로 뒤 페이지에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출판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쾌히 출판을 허락해주신 사장님의 용단에 다시한번 감사할따름이다" (p. 6)

라고 사의를 표한다. 그렇다. 출판계가 어려워진지는 오래되었다. 일년에 책한권도 읽지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러한 학술서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 저자는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해주어서 고맙다고 출판사에 인사를 한다.

출판사가 용기 있게 출판을 허락해준 책 과 심신이 피폐해질정도로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쓰도록 한 집필의 수요 사이에서 아이러니를 느낀다면 내가 이상한건가?

'들어가며' 로 책을 시작했는데 그 뒤에 '책머리에' 가 나오고 그 뒤에 '서문' 이 나온다. 음???;;;

들어가며 와 책머리에 와 서문 이 다 같은 의미 아니었나? 대개의 책에는 이중 하나의 소제목이 붙은 글만 존재하지 않던가? 이 책의 시작은 세번에 걸쳐 진행된다. 이렇게 시작글이 세번 있고나서야 차례가 나오고 본문이 시작된다.

독특한 세번의 시작과 다르게 마무리는 '나가는 말' 한번으로 끝난다. (수미일관의 균형을 이루려면 '나가는 말 '다음에 '책말미에' 다음에 '종문' 뭐 이런식으로 세번 마무리를 했어야 하지 않나 라는 괜한 생각을 해봄;;;)

책은 크게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신석기시대 서양여성 과 2부 신석기시대 아시아여성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서양여성사와 아시아여성사를 묶어서 세계여성사라고 할 수도 없는 거지만, 서양여성사 부분이라고 해봐야 메소포타미아지역 일부였고 아시아여성사 부분이라고 해봐야 한중일 특히 중국과 한국만을 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포부가 큰 것은 좋지만 제목은 솔직히 과하다 싶었다. 그리고 저자가 여성사를 말하기 위해 농업사를 풀어낼 수 밖에 없다고 여러차례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사라고 하기엔 많이 빈약했다. "사" 가 붙으려면 시대를 굽이치는 흐름과 변화가 읽혀져야 하는데 이 책은 그정도라기보다는 신석기시대 속 여성의 역할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저자가 책말미에도 정리하듯이 이 책의 주제는 한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다. (그 한문장은 이 글의 마지막에 쓰는 걸로...)

"한편 기나긴 석기시대는 물론 대충돌시기에도 신체상의 열세와 육아 때문에 여성들은 대부분 시간을 캠프에서 지냈다. 아이를 돌보고 남자들을 위해 끼니를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p. 61)

석기시대때부터 이렇게 명확히 남녀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동굴에서 끼니를 준비하느라 여성은 밖에 못나갔다고? 그때 끼니가 지금의 요리수준도 아닐터인데 거참...;;;

"나무가 없는 농업 발상지 자그로스 산맥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p. 106)

이라며 현재의 자그로스 산맥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진을 실어놓았는데, 저자는 석기시대가 지금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길가메시서사시' 라는 수메르문명이 남긴 토판내용을 보면 울창한 숲과 벌목에 대한 내용이 여러차례 언급되는데, 저자는 그 지역이 석기시대에도 지금처럼 나무가 없는 지역이라서 벌목이 필요없었기 때문에 농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해수면높이를 비롯하여 토지와 동·식물 자원 모두가 지금과 석기시대가 같을 수 없지 않을까?

"인류의 문명은 신석기시대 초반 여성의 혁신적인 농업 선택과 정착에 의해 그 굳건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가히 단언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이 지점에서 여성은 여신의 영광스러운 황금옥좌에 당당하게 올라가 앉을 만한 자본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p. 109)

저자는 농업을 시작한 것이 여성이며 농업이 수렵을 대체했던 서양의 신석기시대에 여성의 지위향상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런가? 어떤 향상?? 모계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어떤 권력을 누리게 했나? 신화속에서 여신으로 남아 추앙받게 된것이 여성에게 무슨 이득이었을까??

"홍수에서 권력이며 가옥이며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목숨 하나만 달랑 건진, 몇 안되는 가련한 여성 혹심한 기아와 굶주림과 온역에 노출된 여성은 죽음의 문턱에서 어쩔 수 없이 남성이 세우고 곡물을 마련해 둔 집을 찾아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여성은 자연재해에 직면하거나 타고난 체력의 열세 하나 때문에 남성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백수가 된 채 비굴하게 빌붙어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p. 190)

저자는 혜성의 대충돌로 사냥중이던 남성들이 대거 사망하면서 동굴안에 있던 여성들이 많이 살아남아 성비불균형으로 모권이 상승하고 사냥을 하지 못하는 여성이 식량생산을 위해 농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홍수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여성이 남성에게 의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성이 곡물을 저장하는 동안 여성은 한톨도 저장해둔것이 없단 말인가? 여성은 주로 캠프에서 생활했다면서? 홍수가 쓸어간 것은 여성의 농작물과 여성의 목숨 뿐이란 말인가? 남성이 주로 바깥 활동을 해서 대충돌때 목숨을 잃었다면서? 홍수는 남성을 피해 덮쳤다는 말인가?

"신석기 시대 여성은 진흙을 반죽하여 태토를 준비하고 그릇 성형작업뿐 아니라 아직 남성들이 운영하는 토기가마 등장하기 전까지는 소성 작업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토기 제작의 모든 과정을 소화하는 노동의 주체였다." (p. 215)

신석기시대 여성은 농업도 들여오고 토기도 만들며 채집도 하는 노동의 주체였다는 것이 지위향상인가? 여성이 이러한 노동을 하는 동안 남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남성의 활동과 여성의 활동에 대한 비교는 좀더 동시적으로 비교할수있도록 충실했어야 하지않을까?

"남성들이 사냥감을 따라 원정 수렵을 떠난 뒤 임신,육아,채집 등으로 인해 동굴 속에 남은 여성들이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p. 279)

동굴벽화 관련 글이나 그림에서 대부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를 남자원시인으로 표현했던 것 같은데, 인류 최초의 화가가 여성이었다는 주장은 신선했다. 다만 그 근거가 여성이 동굴에서 심심해서 그렸다는 것은 좀...;;;

무엇보다 문제라고 생각되는 점은, 이 책에서는 연도가 표시되지 않는다. 신석기시대라고 퉁치기엔 기간이 너무 길지 않나? 기원전 몇년부터 몇년엔 이러저러했다가 기원전 몇년 부터 몇년까지 이러저러했다 라고 변화의 추이를 서술했어야 하지 않을까? 신석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여성사 인데?

1부에서 전개했던 내용들은 책의 비중을 1부보다 좀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2부에서 동일하긴 한데 같은 내용의 반복이 많다. 서양부분과 비교되는 동양부분의 일부를 정리해보자면,

"서양의 경우 대충돌로 인한 남성 인구의 소수화는 여성의 생육능력을 신비화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경우 하늘이나 조상에 대한 숭배는 있어도 농업에 대한 숭배는 적었으며 남성 인구는 도리어 여성보다 다수여서 생육능력도 신비화될 토대가 없었다. 여성숭배가 당연하게 시초부터 고갈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p. 309)

"놀랍게도 서양학계의 영거드라이어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중국은 대충돌 사건의 영향범위 안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p. 316)

"설령 중국에서 신석기시대에 서양처럼 모계사회가 존재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결코 여성이 사회적 영도권을 장악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것이 필자의 논리다. 일단 농업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시농업의 생산 주체마저도 남성이었다. 강력한 모권제의 배경을 상실한 당시 여성에게 사회적 주도권 장악이란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 377)

"농업의 존재 여부는 당시 여성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미리 단정하지만 신석기시대 한반도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중국의 별반 다름이 없었거나 더 위축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농업이 한국의 경우보다 조금은 앞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518)

"농업이 침체된 상황에서 신석기시대 한반도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다시 한번 된서리를 맞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농업을 통한 여성들만의 고유한 문화도 생산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의 주도권도 장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국 신석기 시대 여성과 한반도 여성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운명이었다." (p. 531)

"채집 위주 경제패턴을 영위했던 야외노동에서 채집활동은 물론 물고기잡이나 조개잡이에까지 노동영역을 확대했던 일본의 신석기시대의 여성은 같은 시기의 중국이나 한국의 여성에 비해 사회적 지위와 역할 면에서 어느 정도는 우월했을 것으로 예단할 수 있다." (p. 610)

저자는 혜성의 대충돌 지역은 서양이었기에 그 직접적 충돌지역이 아니었던 중국일대 동양에서는 급격한 성비불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혜성은 그렇다치고 홍수도 없었단 말인가? 서양은 혜성과 홍수로 여성과 남성의 성비가 왔다갔다 했는데, 그동안 중국일대는 혜성충돌도 홍수도 없어 성비가 바뀔 일이 없었고, 농업혁명도 지지부진 했기에 쭈욱 남성이 권력을 잡아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좀... 혜성의 직접적 충돌지역이 아니더라도 그로인한 지구전체의 기온저하로 생태계에 큰 변화가 왔었음은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혜성의 직접적 충돌이 없다는 것만으로 서양과 중국일대의 동양을 비교한다는 것이 좀;;;

게다가 모계중심사회문화는 서양보다 동양에 친숙한 문화아닌가? 역사책은 아니지만 '오래된 미래' 라는 책에 나오는 히말라야 산맥부근의 라다크 지역은 여전히 모계중심 사회이다.

무엇보다 어찌되었든간에 신석기시대에 여성의 지위향상이 일부 지역에서라도 있었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당시 신석기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는 말인가?

농업활동의 중심을 여성으로 이야기하다가도 결국은 남성의 노동력이 농업혁명의 핵심기반이었고, 토기제작에서도 가마가 있기 이전까지만 여성의 활동이 의미있었다. 잠시잠깐으로 보이는 모계중심사회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여성의 지위향상이었다 라는 주장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걸까?

석기시대의 여성지위향상에 대한 주장은 결국 석기시대의 생활상을 알수없는 현재시점에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영역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환언하면 신석기시대 서양 여성을 위대한 神으로 등극시킨 장본인은 대충돌 사건이며 남자와 동등하고 평범한 구성원으로 만든 장본인은 기후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기온상승이 농업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비록 원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지지부진한 농업생산 활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배경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약이 일정하게나마 향상되었으며 그 결과 남성과 평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의 담론이 지금까지 고고학계를 군림하던, 극심하게 과장 또는 왜곡되었거나 아니면 서양 즉 중동 여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맹목적으로 모든 지역에 적용했던 이론적 오류에서 벗어나는 유익한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필자는 만족할 것이다. 신석기시대 여성에게 부당하게 짊어지웠던 그 모든 가짱 영광과 거품을 걷어내고 그들을 무거운 탈 진실의 광기와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일 따름이다. (p. 686)

신석기 여성에게 부당하게 짊어지웠던 가짜 영광과 거품이 무엇일까? 무엇이 신석기 여성들을 광기에 억압에 눌러놓았기에 저자는 해방시키고 싶다고 하는 걸까?

서양에서는 여성이 신격화 되었으나 동양에서는 그런적 없었다는, 동양에서는 아니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 어떤 일이 있었어도 내내 여성이 신성화 된적이 없고 남성중심사회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학술서처럼 보여지는 이 책은 학술서가 갖추어야 할 색인이나 참고자료 가 정리된 뒷 페이지가 없다. 페이지들 밑부분에 짧게 제시된 주석들에 제시된 책들도 중국서적들이 많고 그 참고책들도 오래된 것들이 많았다. 인용된 사진이나 도표, 지도들도 출처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몇 권의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서술은 반복적으로 신석기시대를 저자가 개인적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700페이지에서 조금 모자라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은 한문장으로 요약된다. 그 한문장 또한 책속에서 저자가 여러번 말해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농업의 발전과 직결되는 데 농업의 발전은 또 대충돌 사건과 연관되면서 파생된 생존공간의 이동과 경제운영방식의 전이 그리고 인구에서의 성비 불균형을 토대로 향상된다는 논리가 본서의 핵심 서사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p. 684)

그런데... 어떤 사건이 있었건간에... 인원이 많은 쪽이 대세가 되고 세력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서양과 동양의 역사를 파악함에 있어서 문화적 기반이 상이함을 기본태도로 인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기존의 역사학계가 서양만을 쫒아왔다면 각성해야 함은 또한 당연하다. 어쩌면 이 책의 교훈은 긴 세월동안 한국의 고고학계가 너무 고인물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런지...

ps. 저자에 따르면 서양에 비해 중국과 한국일대는 농업의 발달이 지지부진했다. 이는 곧 권력의 집중과 발달 또한 지지부진하게 발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로 유명하다. 세계 고인돌 수의 40%가 한반도에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권력표시 무덤인 고인돌이 이렇게나 많은 한반도에서는 어떻게 신석기시대 지지부진한 농업을 바탕으로 청동기시대 급격한 권력집중이 이렇게나 많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저자는 어떤 주장을 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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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2020-03-2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궁금해서 인물검색에 들어가 보았는데 LILLY님의 말과는 다른 것 같네요.

LILLY님의 말:
˝국내출판된 소설은 몇 권 안되는 것으로 보아 작품활동은 중국에서 주로 한것 같다. 그런데 국내 출판된 저자의 책들은 대부분 학술서 였다. 그중에서도 고대사.˝

그런데 장혜영이 출판한 책은 ˝희망탑˝한부만 중국에서 출판(연변대학)되고 나머지는 죄다 한국에서 출판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술서는 6권인데 장편소설은 7권으로 더 많았구요.

ㅎㅎㅎ.

LILLY 2020-03-27 21:05   좋아요 0 | URL
아....네... 제가 검색을 제대로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깊게 파고 들어간 것은 아니라서요^^;;; 동명이인의 소설가분들고 계시고... ^^;;;
잠깐 검색으로 네이버 인물검색에서 저자를 검색하니 총17권의 책이 나오더라구요. 그중 12권이 소설이었는데, 저자의 이력에 쓰여진 다수의 책 작품수 대비 국내 출판이 적게 느껴져서 저는 국내 소설 활동이 적었다 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리고 학술서는 비교적 최근 출판본들이 대부분이라 상대적으로 국내에는 학술서 위주로 출판하는 걸로 느껴지기도 했구요 ^^;;;
여하튼, 제 글을 읽어주시고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uturn 2020-03-27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흠, 뭐랄까. 그냥 한마디로 저자가 힘 없는 조선족이라서 횡설수설 마구 짓밟아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무식하고 건방진 분위기? 저자가 일본이나 미국의 교수라면 아마도 입술에 꿀을 ...... 설마 강한 자 앞에서는 .....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 하는 건 아니겠지.
이 책 읽어야 되나. 고민이다.

LILLY 2020-03-27 21:10   좋아요 0 | URL
저는 학술적으로 큰 기대를 갖고 읽었던 책이라 평이 좋게 쓰여지진 않았습니다만, 저자의 연구에 깊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만큼 파고들고 다양한 책들을 참고하여 이정도로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노력은 박수쳐 주고 싶었습니다. 신석기시대에 대해 이정도로 풀어낸 책이 별로 없긴 하죠. 다만 좀더 최신자료와 명확한 출처를 바탕으로 한 고고학책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좀 있었습니다. ^^;;;;

urn 2020-03-2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무덤이 어떻게 신석기시대 농업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책 한 권의 주제는 하나가 아니라 도대체 몇 개여야 되는지?
솔직히 책은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괜한 노파심인가......

LILLY 2020-03-28 16:40   좋아요 0 | URL
청동기시대 고인돌 언급은 제 개인적 감상입니다. 저자는 청동기 시대를 언급하지 않급니다. 신석기시대 농업이 한반도에서 그닥 발달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들에 대해서는 저자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 책의 주제는 한가지 입니다.

걍워니 2020-03-29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게 뭐야! ‘신석기시대 세계여성사‘가 어떻다는 거야.
이 책 때문에 LILLY 님이 대노했잖아.
아무튼,
내가 저자나 출판사라면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일단 머리부터 조아렸을 거야.
LILLY 님의 글을 읽어 보니 ‘들어가는 말‘도, ‘책머리에‘도,‘서문‘도 유죄이고 주제넘게 제목에 ˝史˝를 붙인 것도 유죄이고 심지어 자그로스 사진과 오래된 문헌 인용은 물론 문자 그대로 내용 전체가 유죄판결이라잖아.

-전하,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어리석은 신이 죽을 죄를 지었사옵나이다. 이제부터는 ‘들어가는 말‘이나 ‘서문‘은 전하의 윤허를 얻은 후에야 쓰도록 하올 것이며 강조나 상기를 위한 짤막한 반복 서술도 금지할 것이오며 전하가 원하신다면 책 판매도 중지시킬 것이옵나이다. 지금 당장 타임머신을 타고서라도 아득한 신석기시대로 돌아가 만 년 전의 자그로스 사진을 찍어오도록 하겠사옵니다.
-전하, 이제 화가 좀 풀리셨다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나이다.
.......

내가 쓰고도 은근히 사극 같다.
다만 우리 ‘전하‘가 역사에 문외한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LILLY 2020-03-29 21:08   좋아요 0 | URL
제 서평이 읽기에 많이 불편하셨나 봅니다;;;
책에 대한 제 개인적인 감상일뿐 비난의 의도는 없었습니다. 좀더 나은 책에 대한 바람을 담은 비판으로 읽고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한 수학책 - 그림으로 이해하는 일상 속 수학 개념들
벤 올린 지음, 김성훈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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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일상 속 수학 개념들

진짜 중요한 건 수학 문제 푸는 법이 아니다. 수학자처럼 생각하는 법이다!

 

 

재치발랄함이 넘쳐나는 이 책은 수학을 소재로 하고 있긴 하지만 수학책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제목 그대로 이상한 수학책이다. ㅎㅎ

'Math with Bad Drawings' 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며 올렸던 글을 바탕으로 묶여 나온 이 책에서 저자는 수학을 전공하고 청소년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경험을 살려서 수학자가 일상속에서 어떤 식으로 수학개념들을 떠올릴 수 있는지 '생각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내용들을 자유로이 풀어낸다.

수학책으로 읽기 시작하긴 했는데 읽다보면, 크게는 과학과 경제학을 넘나들고 작게는 디자인과 보험과 스포츠와 정치선거와 세금이야기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수학보다는 다른 분야로 더 넓게 읽혀지는 잡학서였다.

어째서 수학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을까? 수학은 어떻게 동전과 유전자, 주사위와 주식, 책과 야구 등 서로 상관없는 영역을 연결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수학이 생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된다. (p. 8)

교과서 속 수학이 아니라 일상 속 수학을 풀어내다 보니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건드리게 되는 모양새의 이 책은 저자가 직접그린 졸라맨체의 그림들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어서 (이상하건 어쨌건)수학책이라고 이름지어진 책을 읽고 있음에도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리게 했다.

그 세부 사항 자체를 위해 세부 사항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세부 사항을 배우는 이유는 나중에는 그것을 무시하고 더 큰 덩어리의 그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p. 43)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긴 추상적 진실이다. 수학은 과학의 물질적 우주가 아니라 논리의 개념적 우주에 산다. 수학자는 이런 연구를 '창의적' 이라고 하며, 예술에 비유한다. 그래서 과학이 수학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준다. (p. 51~52)

 

수학과 과학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과거 학자들은 수학자와 과학자를 따로 명칭하지 않았다. 대부분 과학자이자 수학자였고 수학자이자 사상가였다. 학문이 세분화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실이 복잡해질수록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 필요했고 현실분석논리체계학문이 과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학은 현실을 분석한다. 현실을 분석하는 과학에는 수학적 방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수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과학에서 영감을 얻긴 하지만 그너머 추상적 논리체계를 지향한다. 그래서 수학은 철학과 연결된다. 철학은 삶의 지향점과 삶 자체를 숙고하지만 그 과정은 당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수학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대체 왜 지금 삼각함수를 배우고 곱셈공식을 외워야 하냐고 이걸 어디다 써먹냐고 항변하는 학생들에게 어른들은 그저 나중에 다 쓸모가 있어 하는 식상한 답변 이외에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과학적 창의성은 눈에 보이지만 수학적 창의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학생들이 그러한 세부적 수학지식들을 지금 배우는 것은 필요하다. 배울때는 그저 어렵고 성가시고 번거로운 공식들로만 보이겠지만 나중에 큰그림을 그리려 할때 그러한 세부적 지식들로 단련된 사고체계는 분명 밑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수학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배운 경험이 추상적 논리체계를 습득시킬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같은 말을 또 할 수 밖에 없다. 나중에 다 쓸모가 있다고;;;

저자가 '수학자처럼 생각하는 법'에서 비교한 뛰어난 수학자와 위대한 수학자 관련 그림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이해가 쑤욱 됐다.

 

 

 

등수가 분명하게 나오고 옆 사람들과 손쉽게 비교할 수 있고 보상을 통해 꾸준히 채찍질을 하는 학교의 경쟁적 분위기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이 정해진 답이 없는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학생 때와는 다른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 경쟁자로 길러진 사람들이 협력자로 진화하는 것이다. (p. 71)

 

힉생때 뛰어났던 사람들도 어른이 되어선 평범해지는 경우가 어쩌면 흔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뛰어남 보다 위대함은 어렵다. 학문의 세계는 뛰어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니라 위대한 사람들로 성장하는 곳이다. 그리고 수학자만큼 수학적으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수학자처럼 생각하는 방법은 배우고 익힐 수 있다. 그렇게 위대함은 학문의 영역이 아닌 일상에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수학자처럼 생각한다면. ㅎㅎㅎ

1부 수학자처럼 생각하는 법 뒤의 내용들은 구체적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2부 디자인에서의 삼각형의 존재감, A4 용지 규격에서 찾아낸 무리수, 부피와 주사위 게임등에서 수학적 생각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3부 확률론에서부터 살짝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복권과 보험 이야기는 확률을 심히 복잡하게 응용하고 있었고 그렇게 확률이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들고 있었다.

4부 통계학에서 확률론에서 미지근하게 건드렸던 수학의 오용사례에 대해 대놓고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통계학은 불완전한 목격자다. 진실을 말하지만, 결코 진실을 전부 말하지는 않는다." (p. 294)

 

 

 

 

평균이 정말 평균수준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는가? 백분율의 차이만으로 비교하는 성장율을 또 어떤가?

통계학은 전제조건과 분산범위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고 통계학은 유용한 수학적 방법이지만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통계수치들에 대해 우리는 그 이면을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이 책속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부분이 통계학 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수학책이라고 하면서 현실문제들을 수학적으로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야구에서의 타율, 과학실험에서의 수치 등에서부터 명작이라 일컫는 고전 소설속 단어들의 갯수분석까지 " 모든 통계는 자신이 측정하려고 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 (p. 357)

통계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고체계도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마지막 5부 전환점 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치 않았다.

"인생에서 어떤 갈림길에 설 때마다 그곳에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다. 그곳에서는 작디작은 한 걸음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을 힘을 갖는다." (p. 382)

라며 다양한 전환점 적인 사례들을 이야기하지만, 한계혁명으로 바뀐 경제개념과 과세등급과 미국 대선에서의 전환점 제시는 구체적이지 않고 조심스러웠다.

책의 마지막 장이었던 '24장 역사의 카오스' 에서의 결말은 더더욱 카오스적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군중은 그렇지 않다. 군중의 정교한 상호 관계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일부 패턴은 증폭하고 일부 패턴은 지워 버린다. 본질적으로 카오스는 사람이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무엇이든 매끄럽게 펴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고 진실을 보기 편한 소수 자리로 반올림해 버리는 습성이 있다. 카오스를 자유자재로 다루어그 패턴을 드러내려면, 또는 패턴이 없음을 드러내려면 우리 뇌보다 훨씬 더 크고 빠른 뇌가 필요했을 것이다. (p. 451)

수학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역사로 마무리짓는 이 책은, 분명하게 보이는 수학적 개념들에서 혼돈의 인간역사로 결말을 짓는 이 책은, 정말이지 좀 이상한 수학책이다. ㅎㅎㅎ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살면서 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수학문제에 반드시 답이 있는 것 같지만 답이 없는 것이 답일수도 있다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이 모든것을 다 알고 있고 알수 있다고 믿는 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조언 아니었을까...

"카오스는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충고한다. 카오스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거듭 가르친다." (p. 456)

수학이야기를 하면서 세상과 삶의 태도에 대한 충고를 슬쩍슬쩍 끼워놓은 이 책은 가벼운 말투로 무거운 주제를 우스운 그림들로 어려운 수학문제들을 재치있는 수학풀이들로 세상사는 방법을 다시생각하게보게 하는 기묘한 수학책이었다.

ps. 책 뒤쪽에 주석이 상당한 양의 페이지로 실려 있는데(개인적으로 주석은 해당 구절의 같은 페이지 아랫부분에 써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책의 경우 뒤에 몰아 쓸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주석들이긴 했다;;;) 그중 저자가 너무너무 맘에 든다는 인용구절이 나또한 마음에 들어 옮겨놓아 본다.

그는 이제 역사사들이 역사를 연구하지 않음을안다. 그 누구도 Hain의 역사를 망라하여 연구할 수 없다. 그 역사가 무려 300만년(......)셀 수 없이 많은 왕과 제국, 발명, 수백만 개의 국가에서 살았던 수십억 명의 사람들, 군주 국가들, 민주 국가들, 과두 정부들, 무정부 상태들, 혼돈의 시대와 질서의 시대, 신의 신전 위에 세워진 신전, 무수히 많은 전쟁과 평화의 시대, 끝없는 발견과 망각, 셀 수 없이 많은 공포와 승리, 끝없는 새로움의 무한한 반복, 한순간,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다음 순간, 그다음.....그다음..... 이렇게 계속해서 강의 흐름을 설명하려 드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지친다. 우리는 그냥 이러고 만다. '아주 큰 강이 있어. 그 강은 이 땅을 관통해 흐르지. 그 강에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을 붙였어.' -어슐러 르 귄 의 <사람들의 남자> 에서 (p.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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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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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듯 벌어지는 은밀한 폭력들

환상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삶의 잔혹한 순간, 현실이 된 환상의 무게

"원하는 걸 말해주세요. 무엇이 당신을 돌봐줬으면 좋겠는지"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을 정말 좋아한다. 판타지라고 하기엔 현실같고 현실이라고 하기엔 판타지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을때마다 너무 매력적이어서 새로운 신작이 나올때마다 서둘러 읽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곤 했다. 이번 작품은 '작은 책 시리즈'라서 이름 그대로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의 책이었다. 기존의 장편소설들도 두툼한 두께의 책들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 크기면 구병모작가의 작품사이즈로는 중편정도라고 해야 할듯 싶다. 하지만 마지막장을 덮고 났을땐 작품사이즈에 관계없이, 구병모 작품 특유의 묵직함이 느껴져서 책크기따위 사이즈따위 아무 의미 없어졌다. 역시 구병모 였다.

관심이라니. 요즘 기준 같아선 백세 시대의 꼭 중간까지 이르렀을 뿐이나, 자녀의 교육 및 성혼을 시작으로 영양제나 생존 운동 이상의 무언가에 또는 어딘가에 몰입하기에는 결코 최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나이의 사람에게. 관심이라는 말부터가 건강하고 의욕적인 미래의 아이들, 시미가 살아서 낳지 못할 날들에 존재하는 어린이들의 사전에나 등재되어 빛나는 낱말 같았다. (p. 47)

소설 속 주요 화자는 '시미' 라는 여성이다. 오십을 코앞에 둔 나이의 여성으로 작은 회사에서 총무팀 일을 하고 있는 싱글여성이다. 그녀가 젊은시절 함께 했던 남편은 폭력적이었고 결국 세살배기아들을 두고 도망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혼 후에도 남편은 아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어느새 대학졸업반이 되었고 시미는 여전히 혼자다.

시미의 일상이 나레이션 되는 사이사이, 시미와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 사건들이 하나하나 등장한다.

어느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화재 사고가 나서 아비는 창밖으로 떨어져 사망했는데, 딸은 작은 화상 하나 입지 않았다. 딸에게는 아비에게 당한 폭력의 흔적이 심하게 남아있었고 화재는 소방대가 오기전에 옆집으로 번지지도 않고 알아서 꺼졌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느 새벽 주택가에서 유리창이 깨지고 싸우는 듯한 소음이 들려 신고가 접수된다. 현장엔 짐승에게 물린 이빨자국을 지닌채 사망한 남성과 온몸이 청테이프로 묶여 옷장에 갇혀 있던 여성이 발견되었다.

작지만 건실한 전도유망한 회사의 사장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망의 원인은 익사였고, 거실전체가 물에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있었으나 욕실은 건조상태였다. 전날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 발견된 CCTV에서 사장은 운전기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했고 회사사람들에게도 심한 갑질로 도처에 원한관계인 사람이 널려있지만 운전기사의 알리바이는 너무나 명확해서 도대체 용의자를 좁힐 수 없는 미제 사건이 되었다.

서로 아무 연결점이 없는 이 사건들은, 특히나 시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사건들은 소설의 말미에 가서 하나로 엮이는데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독자로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지켜준다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를 해함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을 지지하는버팀목 같은 것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p. 131)

시미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나름 공들여 관계를 맺은 끝에 알게 된다. 그들을 지켜준 존재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지켜줄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을 지켜준다기 보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해. 그도 아니면 지지해주거나 지지해주어야 할 무언가에 대해...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 (p. 138)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는 크건 작건 폭력의 고통이 존재한다. 폭력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늘 등장한다. 하지만 그 폭력을 이겨낼 그 폭력의 고통을 벗어날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힘이 있어서 작가의 소설은 왠지 늘 해피엔딩처럼 느껴진다. 일반적인 해피엔딩의 그 엔딩이 아님에도 잔잔하게 남는, 끝나도 끝나지 않은 무언가를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 끝이 완전한 비극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결말을 읽는이의 마음에선 스스로만의 해피엔딩으로 남겨놓게 된다.

시미는 앞으로의 인생에 지금처럼 충동이 자신의 온몸을 구성 또는 대체할 정도로 부피가 커질 날이 다시 있을까 생각했다.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미는 그것들이 몸 곳곳에 오래된 흔적처럼만 존재하여 가끔씩만 자신을 가볍게 흔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미는 돌아서서 지나간 싸움과 현재의 공허가 앞으로의 날들에 드리울 그림자의 무게와 길이를 재어보았다. (p. 142)

이 작품 속에서도 일상에서 쉽게 벌어지는 폭력들이 등장한다. 사망사건들 속에서도 그리고 시미의 삶 속에서도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하지만 폭력으로 점철되지 않았다. 폭력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시미의 삶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심장에 새기는 상흔' 은 그녀의 눈앞에 환한 빛을 쏟아냈다.

책의 띠지에 적혀있던 문구처럼, 폭력이 숨쉬듯 벌어지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건 '구병모식 환상' 인지도 모르겠다. 그저그런 환상은 쉽게 무시될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구병모 소설들의 환상은 독자에게 강렬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되새겨주곤 한다. 그 의미가 너무나 따듯하게 다가와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산소같은 시간은 분명 선사해주곤 한다. 첫 작품 '위저드 베이커리' 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던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이번에도 역시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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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인간 - 불신과 불공정, 불평등이 낳은 슬픈 자화상
김기헌.장근영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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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불공정, 불평등이 낳은 슬픈 자화상

'영유캐슬'부터 '장시생'까지, 시험은 어떻게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당신은 몇 등급의 인간입니까? 사회학자 X 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

경쟁과 서열화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통찰

합격과 불합격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는 사회, 시험을 통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삶을 분석하다.

 

 

우리의 생애는 시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모든 평가의 잣대는 시험으로 준비되고, 시험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시험만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시험이 공정한가? 시험으로 가르는 것이 올바른가? 시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오면서 분명 이게 아니다 싶을때가 있지 않았나? 이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분명 시험만이 단 하나의 방법인것은 문제가 있다고.

누군들 시험을 보고 싶어 보겠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라질 수 있다면? 달라져야만 한다면? 다른 방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시험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다루는 시험은, 선발과 경쟁의 기능을 전제로 한 고부담 시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험인간'이란 무엇일까? 시험에 대한 정의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선발과 경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시험에 적응한 인간형을 뜻한다.

입시와 취업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은 시험인간이다. 시험공화국에서 살아가는 한 누구도 시험인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앞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실태조사 자료와 인터뷰를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p. 18, 19)

 

이 책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공동저작이다. 둘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의 선임연구위원들이다. 노동과 청소년관련 현실문제를 꾸준히 연구해온 학자들의 책이라서인지 개념정의와 논리전개가 명확해서 좋았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실을 굳이 현학적인 표현으로 풀어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용이 점차 전개될수록 그러한 풀이들이어야 뒤에 나올 내용들이 뒷받침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치부해온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문제삼고 원인을 파악해봐야 해결방법들도 모색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나라 교육제도 개혁의 역사는 입시지옥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부담의 지필시험이 견고하게 유지되며 시험공화국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고부담 시험은 끊임없는 도전에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시험이 우리 사회에서 유용하고 강력한 도구로 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시험은 잠재적인 적용 대상들에게 전체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시험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가치관이나 평가 기준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p. 35)

 

시험 하면 입시가 먼저 생각난다. 우리나라에서 대입시험은 출근시간을 늦추고 비행시간을 조정하는 초유의 사건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학입시제도를 우리는 구축해 왔다. 과열된 입시를 바꾸어보려고 여러번 제도가 바뀌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험의 위치만 더욱 돈독해져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입시제도가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에서 시험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투명성과 그로 인해 보장되는 공정성이다. 선발이나 자격 부여와 같은 중요한 사안일수록 시험에 의존하려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시험 출제와 채점이 투명하기 때문에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결과를 신뢰하고 인정한다. 투명성은 공정성과 연결된다. 지필시험은 응시자가 많아도 손쉽게 수량화해서 즉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도록 대상을 폭넓게 가져가는 것이 용이하다. 이것은 대상의 공정성으로 이어진다. (p. 47)

시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수량화되고 시스템으로 채점되는 시험은 결과가 투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은 불공평한데도 결과에 승복하고 사람의 주관적 평가는 불투명하기에 승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신뢰와 협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반면에 고부담 시험은 협력보다는 경쟁과 배신을 유도한다. 고부담 시험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기 때문이다. (p. 62)

시험은 신뢰기반을 무너뜨리는데 신뢰할 수 없기때문에 시험을 치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악순환을 어디서 끊을 수 있을까...

개인의 입장에서 시험은 오래되고 익숙하며 믿을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이기 때문에 시험에 의존한다. 시장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 중에서 이미 전문가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개개인의 과거 측정 내역까지 알 수 있는 시험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편리하며, 선례가 있는 수단이기에 시험에 의존한다.

처음에 시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험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 사람을 평가하거나 어떤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p. 102, 103)

 

시험은 편리한 방법이었다. 급성장의 시기에 이만큼 빠르고 정확하고 유용한 선발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장이 거의 멈춘 시대다. 더이상 성장의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질적 성장이 다양한 측면의 성장이 필요해진 시대가 되었는데 대량선발식 시험은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학원, 사회, 대학 모두가 시험중독의 공범이다. 강남8학군의 신화에 도취되고, 출신대학만을 가지고 차별당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고 믿게 된건 우리의 본성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는 입시학원들, 그래야 신입생을 끌어모을 수 있는 부실한 대학들, 그래야 자기들의 비효율성을 숨길 수 있는 기업들이 이런 병증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끼리 차별하는 건 마치 황새와 조개가 서로 잘났다고 싸우다가 어부에게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나 다름없다. (p. 105)

강남8학군에 이사를 가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잘하고 부유한 집들이 그동네로 이사를 가서 그 허망한 소문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 일컫는 스카이의 세계대학순위를 본적 있는가? 대학들은 퇴보하고 있다. 스스로 성과를 내지 않아도 학생들이 자발적 경쟁으로 못들어와 안달인데 대학들이 뭐하러 대학의 수준을 높이려 애쓰겠는가?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오고싶어 하는 인재가 넘쳐나는데 쉽고 편리한 방법으로 뽑으면 그뿐 세심하게 인재를 고르는 노력을 뭐하러 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이대로 가다간 얼마 안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시험은 개인의 잠재력을 측정하고, 특정한 교육과정이 개개인에게 미친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시험은 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시험을 봐야 하는 세상,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받는 세상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면, 시험을 세상의 원리로 여기기 시작한다. 시험이라는 제도가 한 인간의 가치체계의 바탕을 이루어 내면화된다. 그리고 그다음, 우리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p. 114)

시험은 선방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가치관으로 내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되면 차별은 당연하게 된다. 시험에 통과한 자와 통과하지 못한자.

차별이 당연해지면 차별의 조건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런 세상이 과연 살만한 세상이겠는가?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생각했던 시험이 차별을 조장하고 있는 현실을 언젠까지 눈감고 외면할 것인가.

직업의 귀천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 빈부 차이가 우리보다 더 심한 나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시장은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비교하게 되어있다. 취업시장이나 결혼시장도 마찬가지다. 즉 차이나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별을 대학입학시험의 점수로 정당화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시험점수를 바탕으로 모든 구성원을 한 줄로 세우는 곳도 거의 없다. 이 현상은 '고부담 시험점수에 기초한 사회 전체의 수직계열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이 정도 수준의 수직계열화를 이룩한 유일한 곳이 우리나라 아닐까 싶다. (p. 138)

모든 것이 수직계열이 이루어져 있는 사회에서는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그 위 세상을 향해 아래세상은 더욱 무참히 밟히게 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가 아니라 나만 올라갈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게 된다. 그런 세상이 있기는 있는건지 생각해보지도 않은채...

우리나라가 제2차대전 이후 비슷한 조건에서 시작한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엇던 배경으로 전 국민적 교육열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 교육열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여건이 전 국민에게 갖추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공정성은 시험이 아니라 모두엥게 공평하게 제공된 경제적 기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p. 159)

소팔아 대학간다는 말이 있었다.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소팔아 대학갈 수 있을만큼 대부분의 집에 소가 있었고 논팔아 뒷바라지하면 판사가 될 수 있는 개천의 용들에게는 팔 수 있는 논밭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시절 비슷비슷했던 경제여건을 갖춘 고만고만한 집들이 아니라, 천지차이로 벌어진 있는자와 없는자 로 나뉘어져 있다. 출발선이 너무나 달라졌다. 그런데 아직도 그때와 같은 선발방식이 공평하다고 여긴다. 아니다. 시작부터 불리한 제도다. 시험은.

시험의 공정성은 신화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신화에 의존할 때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정한 시험에 순종하지 않는 자로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의 공정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공정성을 추구할 기회를 포기하고, 허울뿐인 공정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어왔다.

수능점수는 순수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이 점수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사회체계를 정당한 것이라 여기는 믿음은 그저 미신일 뿐이다. 학생부종합전형만큼이나 수능시험 또한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능은 공정하다고 믿으면, 그 점수에 따라서 갈라지는 인생의 길,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모두 공정한 것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입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모든 가치를 몰아주고, 패배한 자에게는 오히려 ㅁ낳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긴다. (p. 161)

 

시험만이 올바른 방법이라 주장하고 수능정시만이 공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의 이면을 봐야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그 논리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평등을 받아들이도록 세뇌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모든 선발제도는 공정성을 목표로 했지만 항상 그 제도 자체의 결함때문이 아닌, 그 공정한 제도를 불공정하게 악용하는 사람들때문에 무력화되고 변질되어 왔다는 것을 이제는 좀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시험 자체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험이 교육을 집어삼켜 위에서 말하듯, '교육을 잘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교육'이 되어버리고, '시험점수를 높이는 수업'을 통해 '시험선수'들을 배출하는 교육이 되어버린 현상,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당연한 정도를 넘어서 더 심각한 시험선수를 만들어내려고 이를 이른바 경쟁력의 강화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 경고하려는 것이다. (p. 175~176)

입학시험 취업시험을 거쳐 성장해온 학생들은 그 시험이 끝나면 더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세계학력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드러냈던 학생들은 취업한 이후 일년에 책한권도 읽지 않는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 공부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배움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부=시험 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지적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적성장이 멈춘 사회에서 추구하는 재미는 어떤 것이 될지 두렵지 않은가?

시험 훈련으로 만들어진 시험인간들이 많은 사회는 변화가 멈추고,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길도 가로막히는 말 그대로 고인 사회가 될 수 있다. (p. 195)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는 교육도 바꿀 수 있다. 대량선발과 획일적 인재들로 빠른 성장이 필요했던 시대는 지났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창의적인 차별성과 다양성이다. 변화는 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배웠지만 거꾸로 시작될 것이다. 아마도 기업들의 변화가 교육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인재채용방법이 바뀌면 대학에서의 인재선발방식도 바뀔 수 밖에 없고 대학이 원하는 인재상이 달라지면 입시제도도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서야 일괄적인 시험이 공정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중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늦지 않을까?

시험은 평가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처럼 거의 전부가 되어버린 상황이 지속된다면 정말로 필요한 역량을 높여야 하는 더 큰 과제를 놓칠 수 있다. 평가자의 전문성을 갖출 수 있게 하고, 상호평가를 통해 평가의 주관성을 줄이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덜 세분화된 평가 등급을 통한 절대평가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낡은 평가도구를 더 이상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 269)

시험사회에서 탈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합의다. (p. 290)

우리 나름대로 시험인간을 만든 고부담 시험의 문제, 획일화와 공정성의 대안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 결과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안다. 이 질문에 천착한 선행자들의 발걸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험과 시험인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p. 299)

 

시험은 평가의 일부이지만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현실분석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책이었다. 모르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깊고 심각하게 다가왔다. 교육제도와 취업방식에 대한 분석에서 의미있게 다가오는 내용들도 많았지만 그렇기에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사회적 합의의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다른 나라의 사례들과 외국 기업들의 사례들에서 해결점을 모색해보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이 제대로 된 대안을 말해주지 못할지라도 이런식으로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문제제기는 지속되어야 한다.

이 책이 던져주는 문제의식이 더욱 확산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많은 이들이 이 문제의식을 가졌을때 뭔가 다른 해결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하고 싶다. 대부분 시험을 보며 살고 있긴 하지만, 누구도 시험인간으로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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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커스티 애플바움 지음, 김아림 옮김 / 리듬문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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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집안의 모든 첫째들은 열네 살이 되면 '조용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야 한다.

둘째 매기는 어느날 마을 경계 근처에서 방랑자 아이, 우나를 만난다.

과연 경계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어른들은 절대 경계를 넘어선 안된다고 했을까?

 

 

책소개 문구들을 봤을 때 판타지 소설인가? 싶었었다.(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 엄청 좋아한다 but 이 소설은 판타지는 아니었다) 어두운 숲속 작은 램프 하나들고 걸어가는 세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를 통해 아이들이 경계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탐험을 하겠구나 싶었었다. (개인적으로 청소년문학 또한 완전 좋아한다) 그렇게 읽고 나니 묘하게 자꾸 웃음이 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작가의 데뷔작이다.

제드 오빠는 우리 가운데 첫째다. 4년 후 막내 트리그가 태어났다. 그리고 나, 매기는 중간에 낀 아이다. 둘째는 가장 운이 나쁘다. (p. 5)

형제자매가 숫자적으로 셋일때 둘째는 불리한 위치다. 첫째는 첫째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지만 가운데 둘째는 그렇지 못하다. 형제자매가 둘이거나 넷이거나 하면 또 다르다. 문제는 항상 셋일때 발생한다. ㅎㅎ

촌장님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들었다. "우리가 안전하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이 무엇일까요?"

"절대 경계를 넘지 않는 거에요!" 트리그가 크게 외쳤다. (p. 17)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학교에선 매일 아침 구호를 외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인시키는 구호의 내용은 첫째들의 전쟁참여에 대한 것이다. 첫째들은 열네살이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 경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은 첫째자식을 전쟁에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오래되고 깊은 각인이었다.

크루즈 집안엔 삼남매가 있다. 그 중 첫째인 제드는 곧 14살이 되고 조용한 전쟁에 참전학 위해 집을 떠날 예정이다. 열한살 매기는 마냥 첫째가 부럽기만 했다. 첫째만 특별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첫째가 아닌 존재들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아무도 둘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와 아빠마저도. 제드 오빠가 말했다면 믿어 주지 않았을까? 첫째라면 모든 것이 허락되니 말이다. (p. 44)

어느날 마을 경계 부근에서 매기는 방랑자 아이 우나를 만난다. 방랑자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매기는 특별해지고 싶었다. 첫째가 아닌 둘째로서 특별해지려면 방랑자 를 잡는 것 만큼 영웅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렵지만 우나와 대화를 하게 되고 도움을 주게 된다. 언젠가는 방랑자를 잡기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며 우나와 만나는 사이 둘은 친구가 된다.

"이상하지 않아? 너희들은 마을 바깥의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마을 안쪽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야.

너는 어떻게 그 울타리가 경계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게는 그저 오래된 울타리일 뿐인데. 내 말은 너는 어떻게 경계인 울타리와 보통의 울타리를 구분 할 수 있어?" (p. 126)

"방랑자로 사는 건 어때? 내가 물었다.

"어떠냐고? 그냥 보통 사람과 같아. 나는 항상 이렇게 지내 왔지. 경계 같은 건 없어" (p. 131)

 

우나와 가까워질수록 경계바깥 사람들인 방랑자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울타리라는 경계에 대해 매기는 혼란스럽다. 우나는 자신과 별다를 것 없어보이는 천진한 아이였고 자신의 도움이 절실한 아이였다. 매기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학교사람들보다 자신을 유일한 친구로 대해주는 우나가 좋았다. 견고하게 마을을 지켜주는 것 같던 울타리는 그저 허술한 나무 울타리일 뿐이었다. 그 울타리를 넘어 경계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떼기까지 매기는 두렵고 두렵고 두려웠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꼿곳이 섰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구호를 외쳤다.

"첫째는 영웅이다.

첫째는 특별하다.

첫째는 용감하다.

첫째를 캠프에 보내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들의 친족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방랑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조용한 전쟁을 평화롭게 마무리하자.

진심으로, 그리고 영원히"

나는 그 내용이 진짜로 느껴졌고 그런 구호를 외치게 되어 좋았다. 어느 때보다도 훌륭하고 진실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p. 163)

 

좋았었다. 생각했었다. 믿었었다.

하지만.

매기는 경계를 넘어간 첫번째 아이였다.

그리고 둘째 였다.

매기는 첫째들을 구하고 방랑자들을 마을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진짜 세상을 마을안 세상과 연결시킨다.

이 소설은 둘째아이의 정체성과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허상을 동화적으로 잘 풀어낸 성장담이다.

'조용한 전쟁' 이라는 물리적 사건이 없더라도 첫째로서의 가족내에서 존재하는 특별함에 대해 공감해본 사람이라면

위아래 끼인 둘째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보수적으로 만들어놓은 자신만의 세상과 그 바깥 세상을 철저히 구분하며 우물안에서의 안전함만 지켜본 사람이라면

단 한번이라도 새로움에 두려워하며 첫발을 내디뎌본, 그래서 변화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제프에게 혹은 매기에게 혹은 우나에게 마음을 주며 읽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성장을 다시한번 순수하게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착한 소설을 읽고나면 역시 기분이 가벼워진다. ㅎㅎㅎ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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