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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평점 :
숨 쉬듯 벌어지는 은밀한 폭력들
환상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삶의 잔혹한 순간, 현실이 된 환상의 무게
"원하는 걸 말해주세요. 무엇이 당신을 돌봐줬으면 좋겠는지"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을 정말 좋아한다. 판타지라고 하기엔 현실같고 현실이라고 하기엔 판타지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을때마다 너무 매력적이어서 새로운 신작이 나올때마다 서둘러 읽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곤 했다. 이번 작품은 '작은 책 시리즈'라서 이름 그대로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의 책이었다. 기존의 장편소설들도 두툼한 두께의 책들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 크기면 구병모작가의 작품사이즈로는 중편정도라고 해야 할듯 싶다. 하지만 마지막장을 덮고 났을땐 작품사이즈에 관계없이, 구병모 작품 특유의 묵직함이 느껴져서 책크기따위 사이즈따위 아무 의미 없어졌다. 역시 구병모 였다.
관심이라니. 요즘 기준 같아선 백세 시대의 꼭 중간까지 이르렀을 뿐이나, 자녀의 교육 및 성혼을 시작으로 영양제나 생존 운동 이상의 무언가에 또는 어딘가에 몰입하기에는 결코 최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나이의 사람에게. 관심이라는 말부터가 건강하고 의욕적인 미래의 아이들, 시미가 살아서 낳지 못할 날들에 존재하는 어린이들의 사전에나 등재되어 빛나는 낱말 같았다. (p. 47)
소설 속 주요 화자는 '시미' 라는 여성이다. 오십을 코앞에 둔 나이의 여성으로 작은 회사에서 총무팀 일을 하고 있는 싱글여성이다. 그녀가 젊은시절 함께 했던 남편은 폭력적이었고 결국 세살배기아들을 두고 도망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혼 후에도 남편은 아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어느새 대학졸업반이 되었고 시미는 여전히 혼자다.
시미의 일상이 나레이션 되는 사이사이, 시미와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 사건들이 하나하나 등장한다.
어느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화재 사고가 나서 아비는 창밖으로 떨어져 사망했는데, 딸은 작은 화상 하나 입지 않았다. 딸에게는 아비에게 당한 폭력의 흔적이 심하게 남아있었고 화재는 소방대가 오기전에 옆집으로 번지지도 않고 알아서 꺼졌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느 새벽 주택가에서 유리창이 깨지고 싸우는 듯한 소음이 들려 신고가 접수된다. 현장엔 짐승에게 물린 이빨자국을 지닌채 사망한 남성과 온몸이 청테이프로 묶여 옷장에 갇혀 있던 여성이 발견되었다.
작지만 건실한 전도유망한 회사의 사장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망의 원인은 익사였고, 거실전체가 물에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있었으나 욕실은 건조상태였다. 전날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 발견된 CCTV에서 사장은 운전기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했고 회사사람들에게도 심한 갑질로 도처에 원한관계인 사람이 널려있지만 운전기사의 알리바이는 너무나 명확해서 도대체 용의자를 좁힐 수 없는 미제 사건이 되었다.
서로 아무 연결점이 없는 이 사건들은, 특히나 시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사건들은 소설의 말미에 가서 하나로 엮이는데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독자로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지켜준다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를 해함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을 지지하는버팀목 같은 것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p. 131)
시미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나름 공들여 관계를 맺은 끝에 알게 된다. 그들을 지켜준 존재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지켜줄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을 지켜준다기 보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해. 그도 아니면 지지해주거나 지지해주어야 할 무언가에 대해...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 (p. 138)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는 크건 작건 폭력의 고통이 존재한다. 폭력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늘 등장한다. 하지만 그 폭력을 이겨낼 그 폭력의 고통을 벗어날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힘이 있어서 작가의 소설은 왠지 늘 해피엔딩처럼 느껴진다. 일반적인 해피엔딩의 그 엔딩이 아님에도 잔잔하게 남는, 끝나도 끝나지 않은 무언가를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 끝이 완전한 비극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결말을 읽는이의 마음에선 스스로만의 해피엔딩으로 남겨놓게 된다.
시미는 앞으로의 인생에 지금처럼 충동이 자신의 온몸을 구성 또는 대체할 정도로 부피가 커질 날이 다시 있을까 생각했다.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미는 그것들이 몸 곳곳에 오래된 흔적처럼만 존재하여 가끔씩만 자신을 가볍게 흔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미는 돌아서서 지나간 싸움과 현재의 공허가 앞으로의 날들에 드리울 그림자의 무게와 길이를 재어보았다. (p. 142)
이 작품 속에서도 일상에서 쉽게 벌어지는 폭력들이 등장한다. 사망사건들 속에서도 그리고 시미의 삶 속에서도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하지만 폭력으로 점철되지 않았다. 폭력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시미의 삶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심장에 새기는 상흔' 은 그녀의 눈앞에 환한 빛을 쏟아냈다.
책의 띠지에 적혀있던 문구처럼, 폭력이 숨쉬듯 벌어지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건 '구병모식 환상' 인지도 모르겠다. 그저그런 환상은 쉽게 무시될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구병모 소설들의 환상은 독자에게 강렬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되새겨주곤 한다. 그 의미가 너무나 따듯하게 다가와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산소같은 시간은 분명 선사해주곤 한다. 첫 작품 '위저드 베이커리' 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던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이번에도 역시나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