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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인간 - 불신과 불공정, 불평등이 낳은 슬픈 자화상
김기헌.장근영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3월
평점 :
불신과 불공정, 불평등이 낳은 슬픈 자화상
'영유캐슬'부터 '장시생'까지, 시험은 어떻게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당신은 몇 등급의 인간입니까? 사회학자 X 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
경쟁과 서열화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통찰
합격과 불합격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는 사회, 시험을 통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삶을 분석하다.
우리의 생애는 시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모든 평가의 잣대는 시험으로 준비되고, 시험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시험만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시험이 공정한가? 시험으로 가르는 것이 올바른가? 시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오면서 분명 이게 아니다 싶을때가 있지 않았나? 이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분명 시험만이 단 하나의 방법인것은 문제가 있다고.
누군들 시험을 보고 싶어 보겠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라질 수 있다면? 달라져야만 한다면? 다른 방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시험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다루는 시험은, 선발과 경쟁의 기능을 전제로 한 고부담 시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험인간'이란 무엇일까? 시험에 대한 정의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선발과 경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시험에 적응한 인간형을 뜻한다.
입시와 취업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은 시험인간이다. 시험공화국에서 살아가는 한 누구도 시험인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앞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실태조사 자료와 인터뷰를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p. 18, 19)
이 책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의 공동저작이다. 둘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의 선임연구위원들이다. 노동과 청소년관련 현실문제를 꾸준히 연구해온 학자들의 책이라서인지 개념정의와 논리전개가 명확해서 좋았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실을 굳이 현학적인 표현으로 풀어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용이 점차 전개될수록 그러한 풀이들이어야 뒤에 나올 내용들이 뒷받침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치부해온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문제삼고 원인을 파악해봐야 해결방법들도 모색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나라 교육제도 개혁의 역사는 입시지옥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부담의 지필시험이 견고하게 유지되며 시험공화국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고부담 시험은 끊임없는 도전에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시험이 우리 사회에서 유용하고 강력한 도구로 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시험은 잠재적인 적용 대상들에게 전체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시험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가치관이나 평가 기준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p. 35)
시험 하면 입시가 먼저 생각난다. 우리나라에서 대입시험은 출근시간을 늦추고 비행시간을 조정하는 초유의 사건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학입시제도를 우리는 구축해 왔다. 과열된 입시를 바꾸어보려고 여러번 제도가 바뀌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험의 위치만 더욱 돈독해져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입시제도가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에서 시험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투명성과 그로 인해 보장되는 공정성이다. 선발이나 자격 부여와 같은 중요한 사안일수록 시험에 의존하려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시험 출제와 채점이 투명하기 때문에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결과를 신뢰하고 인정한다. 투명성은 공정성과 연결된다. 지필시험은 응시자가 많아도 손쉽게 수량화해서 즉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도록 대상을 폭넓게 가져가는 것이 용이하다. 이것은 대상의 공정성으로 이어진다. (p. 47)
시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수량화되고 시스템으로 채점되는 시험은 결과가 투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은 불공평한데도 결과에 승복하고 사람의 주관적 평가는 불투명하기에 승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신뢰와 협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반면에 고부담 시험은 협력보다는 경쟁과 배신을 유도한다. 고부담 시험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기 때문이다. (p. 62)
시험은 신뢰기반을 무너뜨리는데 신뢰할 수 없기때문에 시험을 치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악순환을 어디서 끊을 수 있을까...
개인의 입장에서 시험은 오래되고 익숙하며 믿을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이기 때문에 시험에 의존한다. 시장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 중에서 이미 전문가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개개인의 과거 측정 내역까지 알 수 있는 시험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편리하며, 선례가 있는 수단이기에 시험에 의존한다.
처음에 시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험 이외의 방법을 통해서 사람을 평가하거나 어떤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p. 102, 103)
시험은 편리한 방법이었다. 급성장의 시기에 이만큼 빠르고 정확하고 유용한 선발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장이 거의 멈춘 시대다. 더이상 성장의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질적 성장이 다양한 측면의 성장이 필요해진 시대가 되었는데 대량선발식 시험은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학원, 사회, 대학 모두가 시험중독의 공범이다. 강남8학군의 신화에 도취되고, 출신대학만을 가지고 차별당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고 믿게 된건 우리의 본성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는 입시학원들, 그래야 신입생을 끌어모을 수 있는 부실한 대학들, 그래야 자기들의 비효율성을 숨길 수 있는 기업들이 이런 병증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끼리 차별하는 건 마치 황새와 조개가 서로 잘났다고 싸우다가 어부에게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나 다름없다. (p. 105)
강남8학군에 이사를 가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잘하고 부유한 집들이 그동네로 이사를 가서 그 허망한 소문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 일컫는 스카이의 세계대학순위를 본적 있는가? 대학들은 퇴보하고 있다. 스스로 성과를 내지 않아도 학생들이 자발적 경쟁으로 못들어와 안달인데 대학들이 뭐하러 대학의 수준을 높이려 애쓰겠는가?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오고싶어 하는 인재가 넘쳐나는데 쉽고 편리한 방법으로 뽑으면 그뿐 세심하게 인재를 고르는 노력을 뭐하러 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이대로 가다간 얼마 안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시험은 개인의 잠재력을 측정하고, 특정한 교육과정이 개개인에게 미친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시험은 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시험을 봐야 하는 세상,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받는 세상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면, 시험을 세상의 원리로 여기기 시작한다. 시험이라는 제도가 한 인간의 가치체계의 바탕을 이루어 내면화된다. 그리고 그다음, 우리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p. 114)
시험은 선방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가치관으로 내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되면 차별은 당연하게 된다. 시험에 통과한 자와 통과하지 못한자.
차별이 당연해지면 차별의 조건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런 세상이 과연 살만한 세상이겠는가?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생각했던 시험이 차별을 조장하고 있는 현실을 언젠까지 눈감고 외면할 것인가.
직업의 귀천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 빈부 차이가 우리보다 더 심한 나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시장은 상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비교하게 되어있다. 취업시장이나 결혼시장도 마찬가지다. 즉 차이나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별을 대학입학시험의 점수로 정당화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시험점수를 바탕으로 모든 구성원을 한 줄로 세우는 곳도 거의 없다. 이 현상은 '고부담 시험점수에 기초한 사회 전체의 수직계열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이 정도 수준의 수직계열화를 이룩한 유일한 곳이 우리나라 아닐까 싶다. (p. 138)
모든 것이 수직계열이 이루어져 있는 사회에서는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그 위 세상을 향해 아래세상은 더욱 무참히 밟히게 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가 아니라 나만 올라갈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게 된다. 그런 세상이 있기는 있는건지 생각해보지도 않은채...
우리나라가 제2차대전 이후 비슷한 조건에서 시작한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서 훨씬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엇던 배경으로 전 국민적 교육열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 교육열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여건이 전 국민에게 갖추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공정성은 시험이 아니라 모두엥게 공평하게 제공된 경제적 기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p. 159)
소팔아 대학간다는 말이 있었다.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소팔아 대학갈 수 있을만큼 대부분의 집에 소가 있었고 논팔아 뒷바라지하면 판사가 될 수 있는 개천의 용들에게는 팔 수 있는 논밭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시절 비슷비슷했던 경제여건을 갖춘 고만고만한 집들이 아니라, 천지차이로 벌어진 있는자와 없는자 로 나뉘어져 있다. 출발선이 너무나 달라졌다. 그런데 아직도 그때와 같은 선발방식이 공평하다고 여긴다. 아니다. 시작부터 불리한 제도다. 시험은.
시험의 공정성은 신화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신화에 의존할 때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정한 시험에 순종하지 않는 자로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의 공정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공정성을 추구할 기회를 포기하고, 허울뿐인 공정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어왔다.
수능점수는 순수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이 점수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사회체계를 정당한 것이라 여기는 믿음은 그저 미신일 뿐이다. 학생부종합전형만큼이나 수능시험 또한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능은 공정하다고 믿으면, 그 점수에 따라서 갈라지는 인생의 길,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모두 공정한 것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입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모든 가치를 몰아주고, 패배한 자에게는 오히려 ㅁ낳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긴다. (p. 161)
시험만이 올바른 방법이라 주장하고 수능정시만이 공정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의 이면을 봐야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그 논리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평등을 받아들이도록 세뇌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모든 선발제도는 공정성을 목표로 했지만 항상 그 제도 자체의 결함때문이 아닌, 그 공정한 제도를 불공정하게 악용하는 사람들때문에 무력화되고 변질되어 왔다는 것을 이제는 좀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시험 자체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험이 교육을 집어삼켜 위에서 말하듯, '교육을 잘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교육'이 되어버리고, '시험점수를 높이는 수업'을 통해 '시험선수'들을 배출하는 교육이 되어버린 현상,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당연한 정도를 넘어서 더 심각한 시험선수를 만들어내려고 이를 이른바 경쟁력의 강화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 경고하려는 것이다. (p. 175~176)
입학시험 취업시험을 거쳐 성장해온 학생들은 그 시험이 끝나면 더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세계학력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드러냈던 학생들은 취업한 이후 일년에 책한권도 읽지 않는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 공부 자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배움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부=시험 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지적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적성장이 멈춘 사회에서 추구하는 재미는 어떤 것이 될지 두렵지 않은가?
시험 훈련으로 만들어진 시험인간들이 많은 사회는 변화가 멈추고,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길도 가로막히는 말 그대로 고인 사회가 될 수 있다. (p. 195)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는 교육도 바꿀 수 있다. 대량선발과 획일적 인재들로 빠른 성장이 필요했던 시대는 지났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창의적인 차별성과 다양성이다. 변화는 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배웠지만 거꾸로 시작될 것이다. 아마도 기업들의 변화가 교육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인재채용방법이 바뀌면 대학에서의 인재선발방식도 바뀔 수 밖에 없고 대학이 원하는 인재상이 달라지면 입시제도도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서야 일괄적인 시험이 공정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중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늦지 않을까?
시험은 평가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처럼 거의 전부가 되어버린 상황이 지속된다면 정말로 필요한 역량을 높여야 하는 더 큰 과제를 놓칠 수 있다. 평가자의 전문성을 갖출 수 있게 하고, 상호평가를 통해 평가의 주관성을 줄이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덜 세분화된 평가 등급을 통한 절대평가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낡은 평가도구를 더 이상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 269)
시험사회에서 탈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합의다. (p. 290)
우리 나름대로 시험인간을 만든 고부담 시험의 문제, 획일화와 공정성의 대안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 결과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안다. 이 질문에 천착한 선행자들의 발걸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험과 시험인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건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p. 299)
시험은 평가의 일부이지만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현실분석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책이었다. 모르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깊고 심각하게 다가왔다. 교육제도와 취업방식에 대한 분석에서 의미있게 다가오는 내용들도 많았지만 그렇기에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사회적 합의의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다른 나라의 사례들과 외국 기업들의 사례들에서 해결점을 모색해보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이 제대로 된 대안을 말해주지 못할지라도 이런식으로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문제제기는 지속되어야 한다.
이 책이 던져주는 문제의식이 더욱 확산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많은 이들이 이 문제의식을 가졌을때 뭔가 다른 해결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하고 싶다. 대부분 시험을 보며 살고 있긴 하지만, 누구도 시험인간으로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