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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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뿌리째 뽑히는 상실 앞에서 자연을 닮은 회복력으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참 좋았더랬다. 그래서 이사람저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추천도 했고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듣고선 기다리고기다렸다가 영화도 보았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경우 원작보다 덜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인데 다행히 영화도 썩 좋았다. 그러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이을 작품이라는 소개를 읽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또한번의 '벅찬 자연' 혹은 '삶의 의지' 혹은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며 <흐르는 강물처럼>을 펼쳤다. (더구나 오래전 내가 좋아하던 그 영화 제목이라니 더더욱 안 읽을 수가 없었다. ㅎ)

우리 집은 저수지 밑바닥에 있다. 우리 농장도 마찬가지다.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무엇이 나룻배의 잔해고 무엇이 농장의 잔해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물 밑에 있다.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던 응접실을, 한때 내 침실이었던 공간을 이제는 날렵한 송어가 휘젓고 다닌다. 외양간과 구유는 썩어간다. 엉킨 철조망은 녹슬어 간다. 한때 비옥했던 땅은 무위에 젖어 있다. 블루 메사 저수지 건립을 두고 역사책에서는 아마 콜로라도 강의 지류를 통해 건조한 남서부로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라고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세차게 흐르던 거니슨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건 좋은 의도였다고 하겠지만, 내가 아는 이야기에는 조금도 선한 구석이 없다. ( 가제본 p. 10~11)

한때 강이었으나 지금은 저수가 된 물 밑에서 부패하는 마을, 물속에서 조용히 잊힌 마을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불어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킬 때 이곳의 기쁨과 고통까지 모조리 앗아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그 풍경이 내어주고 앗아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어 평생 가슴에 남아 우리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가제본 p. 12)

※ 이후 아래의 인용문들 페이지도 모두 가제본의 페이지임.

프롤로그에서 느껴지듯이 이 소설은 선하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평생 가슴에 남았으나 기쁨이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때 모든 것이었던 시간과 장소들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고 그렇게 잠겨서 부패하고 있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질만한 심정으로 지금 살고 있음을 내비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때는 1948년에 시작하여 이야기는 1971년에 마무리되며 장소는 콜로라도주 아이올라 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17세의 소녀 빅토리아(=토리) 그리고 윌슨 문.

아주 평범했던 어느날 토리는 동네 길가에서 낯선 이방인을 마주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토리는 그러지 않았고, '그로써 세상의 모든 게 달라졌다. (p. 20)' 빅토리아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때는 그의 시선을 쫓기 바빠 몰랐지만, 윌슨 문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결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었고, 사람 사이에 생기는 긴 침묵을 수다로 채워야 할 어색한 그릇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좀처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를 돌이키는 일은 그보다도 없었으며,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두 손에 소중히 담고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경탄하는 사람이었다. 메인 스트리트에 목석처럼 서 있던 그때는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깃든 지혜를 나도 점점 배워나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지혜는 내게 가장 필요한 때가 찾아왔을 때 빛을 발했다. (p. 26)

그리고 토리와 윌슨의 첫사랑이자 마지막사랑이 움트던 그날 동시에 누군가의 복수의 들불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토리의 동생 세스는 토리와 윌슨의 마주침을 목격했고 우연조차도 참을 수 없어했다. '그때 나는 사탄, 뱀, 지인 등 어둠을 주제로 한 설교를 빠짐없이 들었지만, 세스가 가진 어두움에 대해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무래도 타고나는게 분명한 그런 어둠, 모든 사람이 동의한 규칙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을지 그 방법만 찾아가며 평생을 사는 자의 어둠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없없다. (p. 69)' 한살아래 남동생이었지만 세스는 어렸을때부터 남달랐다. 남다르게 사악했다. 그런 세스가 토리와 윌슨의 첫만남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당시엔 일이 그렇게까지 커질줄 아무도 몰랐다. 살인사건까지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토리도 윌슨도 그리고 세스도.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 140) 라고 부드럽게 말하던 윌슨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불랙 캐니언 바닥에서. 그 인전놈. 피부가 거의 벗겨진 채로. 차 뒤에 있었다니. 던져졌대. (p. 146)' 인전이라는 표현은 당시 인디언을 비하하던 표현이었다. 윌슨 문은 인디언 마을 출신이었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연을 동경했고 삶을 향유했고 토리를 사랑했다. 그런 윌슨을 토리도 온마음과 온몸을 다해 사랑했는데... 그런 윌슨이 살해당했다.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셀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아쏙,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이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p. 160)

토리는 열두살에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일부를 잃고 남은 가족이라곤 무뚝뚝한 아버지와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와 얹혀 사는 이모부 그리고 잔인한 동생 세스 뿐이었다. 토리는 그런 남자들에게 복종하며 집안을 꾸리고 복숭아 과수원 돌보았다. 윌슨을 만나고 사랑하고 잃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토리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리의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야 했다. 무엇보다도 세스에게서 아기만큼은 지켜내야 겠다고 결심했다. 무모함을 알면서도 가출했다. 윌슨과의 추억이 깃듯 깊은 산 버려진 산막을 향해 가면서 구체적인 계획같은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지금을 살아내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을 만큼 윌이 그리웠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에 집중해야 했다. (p. 169)'

나는 하루하루 계속 살아 나갔고, 차츰 긴장을 늦추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어느 정도의 믿음이 들어섰다. (p. 180)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면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p. 183)

집에서 지낼 때에도 토리는 방문을 늘 잠가야 했다. 남자들만 사는 집에서 유일한 여자인 토리가, 속을 알수 없는 이모부와 세스의 난폭한 친구들이 들락거리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밤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숲속에서의 날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달랐다. 자연은 두려움을 주면서도 토리를 품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삶이 그렇게 만만할리가... 자연이 그렇게 관대하기만 할 리가 없었다... 출산한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날 깡마른 토리는 굶주림에 울부짖는 아들을 데리고 정신없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들을 살려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내 아들로 살다가는 점점 야위다가 결국 죽고 말 게 거의 확실했다. 어찌어찌 아들이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둘 다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아기가 내게서 영영 떠나 다른 여자의 아들로 살아간다면, 내 아들을 잘 먹고 튼튼하게 자랄 것이었다. 내 아들도 미래와 아버지와 가족을 갖게 될 것이었다. (p. 209) 넉넉한 모유,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줄 어머니, 살아 있는 아버가 필요했던 우리 아기 앞에 이 모든게 나타났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우리 아들이 무사히 발견되었다는 증거와 먹을거리였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 손에는 이 과일이 들려 있었다. (p. 211)

복숭아 였다. 토리가 어려서부터 따오던 그 복숭아였다. 낯선 이가 남기고 간 것이 토리네 농장의 그 내시 복숭아라니.

토리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농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난한 삶의 흔적이 가득한 모습으로 걸어가면서도 토리는 집과 농장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붙박이 같은 존재였던 자신 하나쯤 사라진다고 아무 티도 안나고 그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확인한 것은 황폐해진 집과 홀로남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버지 였다.

하늘이 새파랗고 높은 가을날 치러진 아빠의 장례식에는 아이올라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참석했다. 장지에서 내려온 마을 사람들은 우리 농장 뒷마당에 다시 모여 조의를 표하며 음식을 나누었다. 거기서 라일 아저씨가 내게 세스를 고발한 사람이 아빠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p. 225)

시간은 빠르게 주변을 변화시켰다. 하루의 일과시간을 알려주던 기차의 경적 소리는 멎었고 더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은 침묵에 잠겼으며 그 침묵속에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것들이 하나둘씩 생명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댐건설 소식이 들려왔다.

"과수원 나무를 통째로 다 구하고 싶어요. 한 그루도 남김없이" (p. 243)

마을은 곧 사라질 것이다. 토리의 시간과 추억과 장소와 흔적이 곧 물에 잠길 것이다. 토리에게 남은건 이제 과수원 뿐이었다. 토리는 마지막 남은 것 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토리는 이제 더이상 토리로 불러줄 사람이 자신에겐 없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빅토리아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할 터였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째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롱누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 277)


빅토리아가 다시 살고 친구를 만나고 관계를 맺고 삶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열일곱 열여덟의 그 폭풍같은 한 해에 비하면 겉으로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속에선 늘 비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에 찔리고 천둥에 움츠려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그리웠다. 매년 그 공터에 가서 돌멩이를 올려두고 왔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그러다 발견했다. "숲의 어머니에게, (...) 사실은 당신을 위해 쓴 글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이 알았어야 할 모든 이야기를 이제야 전합니다. (p. 337)'

빅토리아는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숲속을 혼자 산책하고 강가를 혼자 거니는 것이 더 좋았다. 윌과의 기억은 여전히 가슴을 울렸고 아들의 첫울음은 여전히 귀에 쟁쟁했다. 지켜냈어야 했던 것을 지키지못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이후의 삶은 그저 있는듯없는듯 조용하게 살아왔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새로운 인연이 맺어졌고 소중한 것들이 생겨났으며 그러다 과거가 다시 돌아왔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쁨일까 슬픔일까? 빅토리아의 새로운 삶이 궁금하다면 결말은 책을 읽으며 확인하시기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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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한상원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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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반철학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가?

철학적 종합 예술, 철학적 전복의 길

니체의 저작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몇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유명한 책이었고 철학책이었기에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 겁을 내며 읽었었는데 다 읽고 난 기분이 묘했더랬다. 쉽게 읽자면 우화처럼 쉽게 읽히는 책이었고 어렵게 읽자면 온갖 은유의 의미들을 분석하느라 어렵게 읽히는 책이었기에 해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기묘한 책이었다. 여러모로 숙제처럼 남아 있는 그 책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EBS북스 클래식 시리즈로 해설서가 나왔다니 반가운 마음에 언능 집어들었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허무할까?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해 보일까? 나는 어째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이토록 비겁하게 운명에 굴종하는가? 이런 물음이 문득 내면에서 제기된다면, 당신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설파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p. 4)

이 책은 EBS북스의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만큼 시리즈의 동일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일단 책이 작고 얇아 본문의 어려움에 관계없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할 수 있게 하고, 서문에서 필요성을 본문에서 배경과 해설을 그리고 마지막에 길잡이 책들을 알려주는 구성이 그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표기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가요에도 유명한 그 '아모르파티'라는 말은 로마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니체가 최초로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즉 니체가 조로아스터 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인생을 사랑하라고 '아모르파티'라고 설파하는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인 것이다.

인생에 대한 화두는 언제어디서든 던져져온 화두이기에 지금의 시대에도 유의미하다. '니체를 통해 이 시대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을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다. (p. 8)' 라는 저자의 말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 시대에 삶에 대한 긍정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왜냐면... '아모르파티'라는 말을 하면 왠지 웃으면서 빙글빙글 돌아야 할 것 같은 밝은 분위기가 연상되므로.ㅎㅎㅎ

니체가 생애 내내 다루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가지 서구 정신이 천착해온 과정을 전복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의 예술 정신을 파헤친 [비극의 탄생]에서 그의 철학적 주저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말년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 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니체는 서양 철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p. 25)

한 사람의 지금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시간을 알아야 하듯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책을 쓴 저자의 인생에 대해 알아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특히나 철학책인 경우 저자가 어떤 삶의 여정을 통해 생각이 어떻게 변했기에 그러한 철학적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사상가의 인생알기는 중요한 포인트다. 이 시리즈의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 짧고 굵게 작가와 저작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개인적으로 참 좋았고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총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각각에는 제목이 달려 있지 않지만, 조심스럽게 제목을 달아본다면, 1부는 '우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 2부는 '낡은 도덕과 새로운 도덕', 3부는 '새로운 서판을 위하여', 4부는 '새로운 삶을 향하여' 로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p. 39)

작고 얇은 책이긴 하나 해설서이니만큼 원작을 읽기 전에 읽으면 좋을 책이 있고 원작을 읽고 나서 읽으면 좋을 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이 책의 경우 후자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터라 아무래도 이 책은 작고 얇긴 해도 어렵긴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이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읽었기에 기억을 더듬어 그 내용들에 대해 언급하는 이 책의 설명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다.

니체의 사상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사랑하면서 살았던 것일까?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이런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독자에게 커다란 숙고의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p. 127)

본문의 설명들은 전공자이자 전문가인 저자가 요약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내용들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니체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철학자들의 철학적 개념들도 종종 사용되곤 하는데 그 철학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해줄 수 없을 내용들이었다. 여하튼 저자는 니체의 철학이 지닌 긍정의 의미를 강조하며 독자에게 그 긍정의 에너지를 전달해주려 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니체를 넘어서는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은 그러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p. 35)' 라는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가 말한 문장에 더 큰 울림을 받았다. 이 시대 철학을 왜 읽어야 하는가? 철학이 없기 때문에 시대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철학책이든 철학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하며 사는 시대, 철학적 사고를 좀 하며 사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실이 너무 무식해져가고 있는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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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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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 출신 전과 7범 생계형 범죄자에서

[전태일 평전]을 펴낸 출판사 대표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전태일 평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을 몰래 숨어 읽던 세대까지는 아니지만 이 책이 어린이 동화책으로까지 나와 읽혀질 줄은 몰랐던 나로서는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만큼의 향수는 아니더라도 뒷세대로서의 어렴풋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책이다. 그 책을 펴낸 돌베개 라는 출판사는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으로도 나의 학창시절에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지만 그 출판사의 사람들까지는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그 시절 난무하던 지식인들의 발자취중 하나였겠거니 싶었었는데... 생계형 범죄자에서 돌베게 출판사 대표라...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나는 지업사를 차렸다. (...) 전두환 정권 시절 출판사를 경영할 때는 거래하던 지업사에서 혹시 모를 감시를 두려워해 종이 자체를 잘 공급해 주지 않거나 비싼 값에 제공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내가 지업사를 양심적으로 직접 운영하여 출판사들이 종이를 편하게 쓸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 들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p. 7)-프롤로그 中-

책의 내용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1993년 돌베개 출판사 대표직을 내려놓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담고 있다. 지금이 2023년인데 1993년에 끝난 이야기를 지금 왜? 그래서 그 다음은? 의문이 들자 마자 아차 싶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자연스레 들던 의문에 대한 답은 사실 프롤로그에 이미 나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실 초판이라고도 볼 수 없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수십년전에 이미 [걸밥]이라는 책으로 저자의 인생이야기가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이 책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저자나 출판사의 설명이 충분할지라도 각자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삽자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운 바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주로 생각보다는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살았다. 그런 본능을 갑자기 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바짝 선 마음속 칼날을 한 번만 드러내면 감방살이가 편안해질 터였다.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삽자루를 붙들고 나 자신과 씨름했다. 전부 [새 마음의 샘터] 때문이었다. (p. 60)

저자의 인생 지향점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 이었다. 책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책을 읽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므로 그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적 구호보다는 이렇듯 한 사람의 경험담이 풀어내는 실전은 또다른 감상을 안겨줄 터이다.

출소한 정 형이 대전교도소 소장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나만큼 순수하고 인간적인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비록 고아에 전과는 많지만 사회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마음잡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기술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공장으로 출역을 시켜주면 고맙겠다고 사연을 적어 보냈고 여기에 감동을 받은 소장이 나를 인쇄 공장으로 출역시킨 것이었다. (p. 110)

전태일 평전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에게 노동법을 쉽게 설명해줄 대학생 친구가 한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고... 임승남 저자에게는 그런 대학생 친구가 한명 있었던 것이다. 출소후에도 인연은 이어졌고 그렇게 저자는 출판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영업부장으로 열과 성을 다해 책을 팔러 전국을 다녔다. 신바람 나는 와중에 세상에 대한 눈도 뜨이게 되었다.

좋은 책을 내면 사회라는 흐린 물을 맑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44)

출판업계의 시작이 인문사회분야였던 만큼 연줄연줄하여 그가 옭겨다니게 된 출판사들의 성향은 뚜렷했다. 사회개혁적이었고 인문학적이었다. 의미가 있는 책들이 세상에 널리 읽혀졌으면 좋겠다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전태일평전을 만났다.

일본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열사의 전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승옥 주간이 어렵사리 책을 구해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을 시켰다. 조판까지 다 끝내서 본문 인쇄를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전태일열사와 평화시장에서 같이 활동했던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 민종덕 씨가 일본 출판사 원고는 복사본이며 원본은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여왔다. 그 즉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 이소선 여사를 찾아가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다칠까 봐 걱정했다. (p. 192)

이 책을 읽다보면 시간적 배경상 80년대 운동권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출판분야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잘 몰랐기에 그 당시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는 내용도 꽤 있어 흥미로웠다.

나는 그들이 그물에 옭아 넣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간첩이라는 그 그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나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자전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인 [걸밥]의 출간을 결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편집자와 한두 달을 붙어 지내다시피하며 원고를 정리했다. 책은 1986년 5월 청년사에서 출간되었다. (p. 204)

출판사 청년사... 향수감이 올라온다. 학생시절 이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책을 읽고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었는데... 너무 좋아서 나중에 아이에게 읽혀주려고 다른 책들이 버려지는 와중에도 그 역사책은 소중히 들고다녔었는데 얼마전 보니 아이에게 읽으라고 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당시 책의 인쇄상태며 문장상태가 그당시엔 몰랐는데 지금와서 다시 보니 지금의 인쇄물들에 익숙해진 세대가 읽기엔 영...;;; 그땐 그런 책도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었는데... 뭐... 그땐 그랬다. ㅎㅎ

여튼 숨고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시대였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더 안전할 수 있던 시대였다. 당시의 정치인들도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전두환 정권은 툭하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게 국가보안법의 올가미를 씌웠다. 대표와 편집자가 구속당하는 것은 물론, 책도 수시로 빼앗겼다. 대학가 서점 주인들까지 연행되기 일쑤였다. 이에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모임을 꾸려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거름, 공동체, 녹두, 두레, 동녘, 돌베개, 민맥, 석탑, 백산서당, 새길, 실천문학, 사계절, 아침, 역사비평, 이론과 실천, 일월서각, 이삭, 온누리, 지양사, 청년사, 풀빛, 한마당, 한울 등 30여개 출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 출판인들은 1986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라는 민주적 출판운동단체를 발족시켰다. 한출협은 1987년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p. 208)

저 출판사들중 살아남은 출판사들은 얼마나 될까... 나의 대학시절 책들은 대부분 저 출판사들의 명함을 박고 있었는데...

여하튼 저자는 결국 국가보안법에 걸려 잡혀들어갔다. 하지만 시대는 또 변해있었고 저자의 안위는 그전보다 위태롭지 않았다. 저자는 출소후 성장중인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그토록 사랑하고 애독했던 '전태일 평전'의 출판사를 운영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떠나게 되었다. (p. 249)'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출판사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문구에서 저자의 마음이 정말 진심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이토록 삶을 사랑하면 그 삶이

세상에 조금은 보탬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정말인 것 같아서 진짜 실현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나직하게 응원을 하게 된다고나 할까...

(책의 글밥은 성기고 저자의 기억은 완전치 않지만 수십년 전의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 지금은 고루하다고 재미없어 할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지금 시대에도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배우고자 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책책책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다시한번 말해주고 싶어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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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의 부 - 고대 점토 석판에서 발결된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1
조지 사무엘 클레이슨 지음, 서진 엮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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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빠르게

즉시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 담긴 5천년 전 유물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신화에 가까워지는 고대의 역사를 가장 흥미롭게 즐긴다. 특히 김산해 님의 수메르 관련 서적들을 통해 고대 역사에 개안?!을 했던 터라 고대 역사중에서도 수메르 관련 책이라면 일단 홀려버리고 만다. 그러니 '부'에 관한 자기계발서고 뭐고 간에 고대점토석판에서 뭔가 내용을 가져왔다는 이 책에 홀리지 않을 수가. ㅎㅎㅎ

이 책을 읽은 세계 여러 나라 독자들이 재정적인 근본 가치를 배웠다는 소식을 오랫동안 알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을 읽을 새로운 독자 역시 그들과 똑같은 영감을 얻기를 바랍니다. (p. 12) -서문 中-

이 책의 책날개에서 저자 관련 약력을 보면 이 책이 1926년에 발표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많은 나라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왔기에 '천년의 지혜 시리즈 경제 경영 편'의 고전?으로 새롭게 다시 나온 것인데, 책의 가장 첫글 '책 소개/편저자의 말'을 통해 원전 번역본은 아님도 확인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 좋아했을 법한 우화와 소설 형식의 긴 글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덜어내면서 지금 즉시 실행할 수 있는 근본적 메시지는 철저하게 남기는 방식을 지키고자 애썼습니다. (p. 8)' 즉, 옛 사람의 글이고 우화와 소설 형식의 글이며 핵심 실천 메세지만 추린 글 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이 책은 얇고 글밥도 성긴데 우화형식으로 쓰여있으니 그야말로 호로록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석판에 바빌론 최고의 부를 이룬 아르카드라는 인물과 자신의 빚을 완전히 없앤 다바시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이 겪는 문제가 5천 년이나 지난 지금의 우리들이 겪는 문제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 놀라실 겁니다. (...) 하지만 먼지로 뒤덮인 이 바빌론의 잔해에서 나온 지혜로운 노인은 제가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빚을 처리할 방법과 후손에게 남겨 줄 부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오래된 점토판이 저를 일깨우고 즉시 적용할 만한 방법을 제시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p. 20)

어느 고고학자의 편지글로 시작되는 본문의 내용은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빚을 처리할 방법과 후손에게 남겨 줄 부를 얻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5천년 전의 조상이 백년 전의 조상에게 준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며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동안 그 시간이 5천년이건 백년이건 얼마나 지나건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사람사는 방식은 늘 비슷했다. 다른 책에서 읽었었는데 수메르 점토판에도 공부하기 싫다는 낙서나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푸념이 있었다. 그 이후의 역사가 5천년이건 백년이건 아무리 지났건 사람 사는 방식은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남아있는 역사기록물 내용중 많은 부분이 경제적인 내용이다. 문자가 있던 없던 무언가를 기록할 필요성 중 가장 큰 필요성은 '부'에 대한 기록이었다. 가진 것에 대한 확인, 준 것에 대한 확인, 그 들고 나감에 있어 다른 사람과의 계약에 대한 합의와 그 보증으로서의 기록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했다. 단순했던 기록들은 점차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남기게 되고 '부'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속에 '빚'에 대한 기록도 쌍둥이처럼 함께 존재했다. 이 책에도 한쌍의 조상이 등장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가난한 사람은 부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았거나 알았어도 실천하지 않은 두 가지 경우일 뿐, 행운으로 부가 오고 가는 게 아니란 말일세. (p. 57)

고대의 부자가 고대의 빚쟁이에게 충고를 해준다. 빚을 없애고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

책속에서는 실천적으로는 7가지 교훈적으로는 5가지 등으로 나오긴 하지만 심플하게 정리하자면 3단계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덜 써서 모은 종잣돈으로 투자해서 부를 쌓은 뒤 현명하게 지키는 것. 새롭지 않다고? 앞서 말했듯 사람 사는 게 5천년 전이나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당연히! ㅎㅎ

그렇다고 에이~ 하며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실천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지. 그 실천의 원동력이 될 깨달음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고 그 깨달음을 얻는 방법 중 하나가 책을 읽는 것이다. 5천년 전 누군가의 조언이 지금도 먹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나? 진리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록 단순한 법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이 작고 얇은 책에서 깨달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득템 중의 득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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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개정판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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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에 마주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반항에서 연대로…

재난 속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

-출판사 서평 中-

코로나시대가 되면서 필독서로 급상승한 책 중 하나가 <페스트>가 아닌가 싶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일단, 무차별적인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필독서가 될 이유는 충분하다. 카뮈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이방인>이 짧고 굵게 느낌을 퐉! 준다면 <페스트>는 길고 뭉근하게 느낌을 주는 것이 전혀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방인>에서 외로움이나 스산함 혹은 부조리 등으로 카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페스트>는 굉장히 상반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될 것이다. 두괄식으로 말하자면 소설 <페스트>는 휴머니즘 이다.

이 연대기가 주제로 다루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X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인 의견에 따르면,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에서 좀 벗어나는 사건치고는, 그것이 일어난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오랑은 사실 하나의 '평범한 도시'로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p. 11)

소설의 시작은 이러하다.

이 소설은 1940년대 언젠가 알제리의 프랑스령 오랑 이라는 평범한 도시에서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을 기록하는 연대기라는 것.

연대기 서술자는 '솔직히 말해서 도시 자체는 못생겼다. (p. 11)' 라면서 너무 평범하고 특징도 없고 보잘것 없다보니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하면 상상할 수 있을까? (p. 11)' 라고 난감해하는 척 하며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p. 12)' 라고. 또한 '우리 도시에서 보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겪는 어려움이다. (p. 14)' 라고. 그렇다. 이 도시에서 발생한 '기이한 사건'은 '어떻게 죽는가' 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4월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p. 17)

그후 리유는 온 동네가 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p. 20)

키가 작달막하고 어깨가 딱 벌어지고 결단성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눈이 맑고 총명해 보이는 랑베르는 활동적인 옷차림이었는데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자유분방한 인물 같았다. 그는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파리에 있는 어떤 큰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아랍인들의 생활 조건을 취재하는 중인데, 그네들의 보건 상태에 대해 기삿거리를 얻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p. 23)

의사는 그와 악수를 하고 나서 지금 이 도시에서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죽은 쥐들에 대해서 취재해보면 흥미 있는 르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p. 24)

자, 중요한 인물과 핵심 사건이 초반에 바로 등장했다. 의사 리유와 파리에서 온 기자 랑베르 그리고 수많은 쥐들의 죽음.

아, 핵심인물로 한 명을 더 언급해야한다. 장 타루.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왜 그곳으로 온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 40)' 하지만 페스트가 퍼지고 도시가 폐쇄된 이후 타루의 활동은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여하튼, 쥐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급격한 속도로 너무나 괴상한 모습으로.

'마치 그 광경은 우리의 집들이 자리 잡고 서 있는 땅 자체가 그 속에 고여 있던 고름을 짜내고 지금까지 안으로 곪고 있던 응어리와 악혈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짙은 피가 돌연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태껏 그렇게도 고요하기만 했다가 불과 며칠 사이에 발칵 뒤집혀 버린 이 자그마한 도시의 아연실색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상상만이라도 해보라! (p. 29)'

코로나 초반의 우리 주변을 떠올려 보라. 평범했던 일상이 얼마나 갑자기 발칵 뒤집혀 버렸는지.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차차 깨닫겠지만, 하필이면 우리의 이 자그마한 도시가 쥐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죽고 수위가 괴상한 병으로 목숨을 잃는 도시로 특별히 지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p. 39)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p. 60)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p. 61)

재앙인줄 몰랐지만 엄청난 재앙이었다.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에 무시하고 그냥 넘기려 했지만 그저 모른척하려 했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과정들이 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랑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사실 <페스트>라는 작품의 주요 시사점은 전염병에 대처하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전염병으로 인해 폐쇄된 장소에서의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더 핵심적이다. 폐쇄된 도시에 남은 사람들의 폐쇄에 대처하는 모습들 이라고나 할까.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우리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p. 102)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고 제각기 혼자서 저마다의 근심에 잠겨 있었다. (p. 113)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별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공통된 감정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사를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그 질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p. 117)

하지만 폐쇄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계절이 바뀌어가고 환자는 늘어가고 물자는 부족해지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시민들의 인식과 태도는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쩔수 없이.

그런데 페스트가 절정에 이르고 그 재앙이 이 도시를 공격해 완전히 삼켜버리려고 있는 힘을 다 모으는 동안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꼭 적어둘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가령 랑베르 같은 마지막으로 남은 개개인들이 그들의 행복을 되찾기위해서, 또 그들이 그 어떤 침해의 손길과 맞서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몫을 페스트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기울인 절망적이고도 단조롭고 꾸준한 노력들이다. (...) 그 나름의 허영과 심지어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대로나마 그 당시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자랑스럽게 깃들었던 그 무엇을 증명해주기도 했다고 믿는다. (p. 206)

제목이 페스트이고 연대기를 시작한다고 서두를 뗀 초반부터 죽음을 거론하긴 하지만 이 두툼한 소설을 읽어가는 중에 전염병이라던가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감정 예를들면, 고립감이라던가 억울함이라던가 진정성이라던가 무성의 같은 사람들의 감정 표현에 집중한다. 하지만 묘한것이 읽으면서도 그 문장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읽는순간에는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부러 연대기라고 밝혀놓은 시작에서 객관성을 담보로 한 글이라는 특징 때문일수도 있지만 카뮈라는 작가만의 독특한 문장표현이 더욱 그 격렬한 감정을 너무나 무감하게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p. 302)" 라는 핵심적 문장에서조차 읽는 그순간에는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가 좀더 읽고 한참 지난후에야 아차차 싶어지는 것이다. 어? 아까 그 장면 생각해보니 되게 감동적이어야 했는데? 왜 그냥 지나쳤지? 싶어지는 것이다.

여하튼, 4월에 시작된 일은 12월이 되어서도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그러다

"그놈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쥐 말이에요, 쥐!" (p. 382) 사라졌던 쥐들이 다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펄펄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다시 희망을 가져볼 법한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군분투했던 의사와 봉사자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마지막에...

"오! 그럴 수야 없지, 지금 와서!" (p. 404)

재앙은 더 이상 이 도시의 하늘을 휘저어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방 안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직이 색색거리고 있었다. 리유가 몇 시간 전부터 듣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소리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멎고,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패배를 선언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p. 410)

리유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평화 그 자체를 치유할 길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p. 415)

도시에 휘몰아치던 재앙은 확연하게 물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비극이란 것이 그렇듯이 안심할만한 바로 그때 그동안 지속해왔던 긴장감을 살짝 늦춰도 괜찮겠지 싶어진 그때 비극의 절정이 돌연 등장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평화의 시기가 왔다고 말하지만 전쟁이 남긴 고통때문에 결코 승리라고도 평화라고도 말할 수 없는 바로 그러한 패배감을 던져주는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욕구를 느끼며, 가끔씩은 손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431)' 라고 해도 그 애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 누군가가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꺾이지는 않았다.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p. 442)

연대기를 쓰고 있는 화자는 본인을 서술자라고 지칭하며 이 휴머니즘 넘치는 글에 대해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 442)' 라고 또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p. 442) 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마무리하지만 씁쓸할지라도 평화는 평화였고 고통을 남겼을지라도 승리라면 나름 승리였기에 마무리는 희망적이었다고 총평할 수 있을 것같다.

고전명작인만큼 작품 뒤에 해설도 상당히 긴 분량으로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 소설의 작품해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의 해설은 작가와 작품서술에 대한 배경지식을 넓혀주고 있어서 정보를 얻는 재미가 쏠쏠했다.

1947년 6월 10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페스트>가 출간되었을 때 서른네 살의 작가 카뮈는 아직 일반 대중들에게는 광범하게 알려지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러 면에서 뚜렷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p. 445)

첫 구상에서부터 마지막 결정고의 마무리까지 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소요된 작품이 <페스트>다. (p. 447)

사실상 <페스트> 착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이듬해 9월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다. (...) 작품의 1부에서 페스트 상황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까지 아무도 그것이 페스트임을 단언하지 못한 채 그 '부조리한 사건'을 불신하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분위기는 전쟁 발발 초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p. 449)

카뮈는 장차 이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 있어서 톨스토이, 다니엘 디포,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현실 경험의 신화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주요한 모범으로 삼게 될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정독하고 노트를 한다. 멜빌은 카뮈의 창조를 상징과 신화의 차원으로 승격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p. 453)

'연대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페스트라는 질병의 육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고통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산출해낼 수 있는 작품의 '상징적'의미는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한 동시에 보편적인 것에까지 확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 5막으로 이루어진 고전 비극처럼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단 하나의 장으로 된 짧은 3부를 중심으로 해서 비교적 길이가 긴 앞의 1, 2부와 뒤의 4, 5부가 대칭을 이루는 균형 잡힌 형식을 갖추고 있다. (p. 461)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랑과 코타르의 관계는 <이방인> 속에서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뫼르소와 레몽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p. 483)

- 해설 [부정을 통한 긍정] 中 -

해설에서의 정보들을 읽고나니 이제야 궁금해진다.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여기저기 녹인 것은 알겠는데, 전쟁을 왜 전염병으로 바꿨을까? 어디에 모비딕의 무언가가 반영되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소설에 굳이 고전 비극의 형식을 갖춘 이유는 무엇일까? 코타르 라는 인물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부정적 인물인데 그가 지은 죄는 무엇일까? 전염병에 대처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 혹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빛과 어둠을 드러내기 보다 다른 핵심적 인물들과 코타르를 비교시킨 것은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걸까 소설 발표 당시나 지금까지 읽혀져 오는 과정에서 나처럼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까? 등... 명작은 역시 생각해봄직한 질문들을 남긴다. 해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해설의 끝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카뮈의 노벨상 수상 소감이었다.

"그렇다. 나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정확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나는 부정否定을 표현했다. 세 가지 형태로 말이다. 소설로는 <이방인>이었고 극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였으며 이념적 형태로는 <시지프 신화>였다. 만약 내가 그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겐 전혀 상상력이 없어서 지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부정 속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시지프 신화>의 서문에서 그 점을 미리 밝혀 놓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세 가지 형태의 긍정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 과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이념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의 한 층위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구체화해가는 중인 계획들이다" (p. 488~489)

1957년 프랑스 작가로는 아홉 번째이며 최연소(마흔네 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가 1960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카뮈의 세번째 층위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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