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고아 출신 전과 7범 생계형 범죄자에서

[전태일 평전]을 펴낸 출판사 대표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전태일 평전]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을 몰래 숨어 읽던 세대까지는 아니지만 이 책이 어린이 동화책으로까지 나와 읽혀질 줄은 몰랐던 나로서는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만큼의 향수는 아니더라도 뒷세대로서의 어렴풋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책이다. 그 책을 펴낸 돌베개 라는 출판사는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으로도 나의 학창시절에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지만 그 출판사의 사람들까지는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그 시절 난무하던 지식인들의 발자취중 하나였겠거니 싶었었는데... 생계형 범죄자에서 돌베게 출판사 대표라...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나는 지업사를 차렸다. (...) 전두환 정권 시절 출판사를 경영할 때는 거래하던 지업사에서 혹시 모를 감시를 두려워해 종이 자체를 잘 공급해 주지 않거나 비싼 값에 제공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내가 지업사를 양심적으로 직접 운영하여 출판사들이 종이를 편하게 쓸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 들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p. 7)-프롤로그 中-

책의 내용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1993년 돌베개 출판사 대표직을 내려놓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담고 있다. 지금이 2023년인데 1993년에 끝난 이야기를 지금 왜? 그래서 그 다음은? 의문이 들자 마자 아차 싶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자연스레 들던 의문에 대한 답은 사실 프롤로그에 이미 나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실 초판이라고도 볼 수 없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수십년전에 이미 [걸밥]이라는 책으로 저자의 인생이야기가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이 책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저자나 출판사의 설명이 충분할지라도 각자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삽자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운 바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주로 생각보다는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살았다. 그런 본능을 갑자기 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바짝 선 마음속 칼날을 한 번만 드러내면 감방살이가 편안해질 터였다.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삽자루를 붙들고 나 자신과 씨름했다. 전부 [새 마음의 샘터] 때문이었다. (p. 60)

저자의 인생 지향점을 바꾼 것은 한 권의 책 이었다. 책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책을 읽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므로 그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적 구호보다는 이렇듯 한 사람의 경험담이 풀어내는 실전은 또다른 감상을 안겨줄 터이다.

출소한 정 형이 대전교도소 소장에게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나만큼 순수하고 인간적인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비록 고아에 전과는 많지만 사회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마음잡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기술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공장으로 출역을 시켜주면 고맙겠다고 사연을 적어 보냈고 여기에 감동을 받은 소장이 나를 인쇄 공장으로 출역시킨 것이었다. (p. 110)

전태일 평전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에게 노동법을 쉽게 설명해줄 대학생 친구가 한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고... 임승남 저자에게는 그런 대학생 친구가 한명 있었던 것이다. 출소후에도 인연은 이어졌고 그렇게 저자는 출판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영업부장으로 열과 성을 다해 책을 팔러 전국을 다녔다. 신바람 나는 와중에 세상에 대한 눈도 뜨이게 되었다.

좋은 책을 내면 사회라는 흐린 물을 맑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44)

출판업계의 시작이 인문사회분야였던 만큼 연줄연줄하여 그가 옭겨다니게 된 출판사들의 성향은 뚜렷했다. 사회개혁적이었고 인문학적이었다. 의미가 있는 책들이 세상에 널리 읽혀졌으면 좋겠다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전태일평전을 만났다.

일본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열사의 전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승옥 주간이 어렵사리 책을 구해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을 시켰다. 조판까지 다 끝내서 본문 인쇄를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전태일열사와 평화시장에서 같이 활동했던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 민종덕 씨가 일본 출판사 원고는 복사본이며 원본은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여왔다. 그 즉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 이소선 여사를 찾아가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다칠까 봐 걱정했다. (p. 192)

이 책을 읽다보면 시간적 배경상 80년대 운동권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출판분야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잘 몰랐기에 그 당시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는 내용도 꽤 있어 흥미로웠다.

나는 그들이 그물에 옭아 넣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간첩이라는 그 그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나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자전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인 [걸밥]의 출간을 결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편집자와 한두 달을 붙어 지내다시피하며 원고를 정리했다. 책은 1986년 5월 청년사에서 출간되었다. (p. 204)

출판사 청년사... 향수감이 올라온다. 학생시절 이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책을 읽고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었는데... 너무 좋아서 나중에 아이에게 읽혀주려고 다른 책들이 버려지는 와중에도 그 역사책은 소중히 들고다녔었는데 얼마전 보니 아이에게 읽으라고 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당시 책의 인쇄상태며 문장상태가 그당시엔 몰랐는데 지금와서 다시 보니 지금의 인쇄물들에 익숙해진 세대가 읽기엔 영...;;; 그땐 그런 책도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었는데... 뭐... 그땐 그랬다. ㅎㅎ

여튼 숨고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시대였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더 안전할 수 있던 시대였다. 당시의 정치인들도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전두환 정권은 툭하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게 국가보안법의 올가미를 씌웠다. 대표와 편집자가 구속당하는 것은 물론, 책도 수시로 빼앗겼다. 대학가 서점 주인들까지 연행되기 일쑤였다. 이에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모임을 꾸려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거름, 공동체, 녹두, 두레, 동녘, 돌베개, 민맥, 석탑, 백산서당, 새길, 실천문학, 사계절, 아침, 역사비평, 이론과 실천, 일월서각, 이삭, 온누리, 지양사, 청년사, 풀빛, 한마당, 한울 등 30여개 출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 출판인들은 1986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라는 민주적 출판운동단체를 발족시켰다. 한출협은 1987년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p. 208)

저 출판사들중 살아남은 출판사들은 얼마나 될까... 나의 대학시절 책들은 대부분 저 출판사들의 명함을 박고 있었는데...

여하튼 저자는 결국 국가보안법에 걸려 잡혀들어갔다. 하지만 시대는 또 변해있었고 저자의 안위는 그전보다 위태롭지 않았다. 저자는 출소후 성장중인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그토록 사랑하고 애독했던 '전태일 평전'의 출판사를 운영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떠나게 되었다. (p. 249)'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출판사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문구에서 저자의 마음이 정말 진심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이토록 삶을 사랑하면 그 삶이

세상에 조금은 보탬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정말인 것 같아서 진짜 실현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나직하게 응원을 하게 된다고나 할까...

(책의 글밥은 성기고 저자의 기억은 완전치 않지만 수십년 전의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 지금은 고루하다고 재미없어 할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지금 시대에도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배우고자 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책책책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다시한번 말해주고 싶어진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