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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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에 마주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반항에서 연대로…

재난 속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

-출판사 서평 中-

코로나시대가 되면서 필독서로 급상승한 책 중 하나가 <페스트>가 아닌가 싶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일단, 무차별적인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필독서가 될 이유는 충분하다. 카뮈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이방인>이 짧고 굵게 느낌을 퐉! 준다면 <페스트>는 길고 뭉근하게 느낌을 주는 것이 전혀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방인>에서 외로움이나 스산함 혹은 부조리 등으로 카뮈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페스트>는 굉장히 상반된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될 것이다. 두괄식으로 말하자면 소설 <페스트>는 휴머니즘 이다.

이 연대기가 주제로 다루는 기이한 사건들은 194X년 오랑에서 발생했다. 일반적인 의견에 따르면,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에서 좀 벗어나는 사건치고는, 그것이 일어난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오랑은 사실 하나의 '평범한 도시'로서 알제리 해안에 면한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 (p. 11)

소설의 시작은 이러하다.

이 소설은 1940년대 언젠가 알제리의 프랑스령 오랑 이라는 평범한 도시에서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을 기록하는 연대기라는 것.

연대기 서술자는 '솔직히 말해서 도시 자체는 못생겼다. (p. 11)' 라면서 너무 평범하고 특징도 없고 보잘것 없다보니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하면 상상할 수 있을까? (p. 11)' 라고 난감해하는 척 하며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p. 12)' 라고. 또한 '우리 도시에서 보다 더 독특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러 겪는 어려움이다. (p. 14)' 라고. 그렇다. 이 도시에서 발생한 '기이한 사건'은 '어떻게 죽는가' 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4월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p. 17)

그후 리유는 온 동네가 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p. 20)

키가 작달막하고 어깨가 딱 벌어지고 결단성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눈이 맑고 총명해 보이는 랑베르는 활동적인 옷차림이었는데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자유분방한 인물 같았다. 그는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파리에 있는 어떤 큰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아랍인들의 생활 조건을 취재하는 중인데, 그네들의 보건 상태에 대해 기삿거리를 얻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p. 23)

의사는 그와 악수를 하고 나서 지금 이 도시에서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죽은 쥐들에 대해서 취재해보면 흥미 있는 르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p. 24)

자, 중요한 인물과 핵심 사건이 초반에 바로 등장했다. 의사 리유와 파리에서 온 기자 랑베르 그리고 수많은 쥐들의 죽음.

아, 핵심인물로 한 명을 더 언급해야한다. 장 타루.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왜 그곳으로 온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 40)' 하지만 페스트가 퍼지고 도시가 폐쇄된 이후 타루의 활동은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한다.

여하튼, 쥐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급격한 속도로 너무나 괴상한 모습으로.

'마치 그 광경은 우리의 집들이 자리 잡고 서 있는 땅 자체가 그 속에 고여 있던 고름을 짜내고 지금까지 안으로 곪고 있던 응어리와 악혈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짙은 피가 돌연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태껏 그렇게도 고요하기만 했다가 불과 며칠 사이에 발칵 뒤집혀 버린 이 자그마한 도시의 아연실색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상상만이라도 해보라! (p. 29)'

코로나 초반의 우리 주변을 떠올려 보라. 평범했던 일상이 얼마나 갑자기 발칵 뒤집혀 버렸는지.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차차 깨닫겠지만, 하필이면 우리의 이 자그마한 도시가 쥐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죽고 수위가 괴상한 병으로 목숨을 잃는 도시로 특별히 지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p. 39)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p. 60)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p. 61)

재앙인줄 몰랐지만 엄청난 재앙이었다.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기에 무시하고 그냥 넘기려 했지만 그저 모른척하려 했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과정들이 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랑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사실 <페스트>라는 작품의 주요 시사점은 전염병에 대처하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전염병으로 인해 폐쇄된 장소에서의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더 핵심적이다. 폐쇄된 도시에 남은 사람들의 폐쇄에 대처하는 모습들 이라고나 할까.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우리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p. 102)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고 제각기 혼자서 저마다의 근심에 잠겨 있었다. (p. 113)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별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공통된 감정은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사를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그 질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p. 117)

하지만 폐쇄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계절이 바뀌어가고 환자는 늘어가고 물자는 부족해지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시민들의 인식과 태도는 변해가기 시작한다. 어쩔수 없이.

그런데 페스트가 절정에 이르고 그 재앙이 이 도시를 공격해 완전히 삼켜버리려고 있는 힘을 다 모으는 동안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꼭 적어둘 것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가령 랑베르 같은 마지막으로 남은 개개인들이 그들의 행복을 되찾기위해서, 또 그들이 그 어떤 침해의 손길과 맞서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몫을 페스트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기울인 절망적이고도 단조롭고 꾸준한 노력들이다. (...) 그 나름의 허영과 심지어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대로나마 그 당시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자랑스럽게 깃들었던 그 무엇을 증명해주기도 했다고 믿는다. (p. 206)

제목이 페스트이고 연대기를 시작한다고 서두를 뗀 초반부터 죽음을 거론하긴 하지만 이 두툼한 소설을 읽어가는 중에 전염병이라던가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감정 예를들면, 고립감이라던가 억울함이라던가 진정성이라던가 무성의 같은 사람들의 감정 표현에 집중한다. 하지만 묘한것이 읽으면서도 그 문장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읽는순간에는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부러 연대기라고 밝혀놓은 시작에서 객관성을 담보로 한 글이라는 특징 때문일수도 있지만 카뮈라는 작가만의 독특한 문장표현이 더욱 그 격렬한 감정을 너무나 무감하게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p. 302)" 라는 핵심적 문장에서조차 읽는 그순간에는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가 좀더 읽고 한참 지난후에야 아차차 싶어지는 것이다. 어? 아까 그 장면 생각해보니 되게 감동적이어야 했는데? 왜 그냥 지나쳤지? 싶어지는 것이다.

여하튼, 4월에 시작된 일은 12월이 되어서도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그러다

"그놈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쥐 말이에요, 쥐!" (p. 382) 사라졌던 쥐들이 다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펄펄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다시 희망을 가져볼 법한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군분투했던 의사와 봉사자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마지막에...

"오! 그럴 수야 없지, 지금 와서!" (p. 404)

재앙은 더 이상 이 도시의 하늘을 휘저어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방 안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직이 색색거리고 있었다. 리유가 몇 시간 전부터 듣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소리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멎고,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패배를 선언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p. 410)

리유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평화 그 자체를 치유할 길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p. 415)

도시에 휘몰아치던 재앙은 확연하게 물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비극이란 것이 그렇듯이 안심할만한 바로 그때 그동안 지속해왔던 긴장감을 살짝 늦춰도 괜찮겠지 싶어진 그때 비극의 절정이 돌연 등장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평화의 시기가 왔다고 말하지만 전쟁이 남긴 고통때문에 결코 승리라고도 평화라고도 말할 수 없는 바로 그러한 패배감을 던져주는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욕구를 느끼며, 가끔씩은 손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431)' 라고 해도 그 애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 누군가가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꺾이지는 않았다.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 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p. 442)

연대기를 쓰고 있는 화자는 본인을 서술자라고 지칭하며 이 휴머니즘 넘치는 글에 대해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 442)' 라고 또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p. 442) 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마무리하지만 씁쓸할지라도 평화는 평화였고 고통을 남겼을지라도 승리라면 나름 승리였기에 마무리는 희망적이었다고 총평할 수 있을 것같다.

고전명작인만큼 작품 뒤에 해설도 상당히 긴 분량으로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 소설의 작품해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의 해설은 작가와 작품서술에 대한 배경지식을 넓혀주고 있어서 정보를 얻는 재미가 쏠쏠했다.

1947년 6월 10일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페스트>가 출간되었을 때 서른네 살의 작가 카뮈는 아직 일반 대중들에게는 광범하게 알려지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러 면에서 뚜렷한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p. 445)

첫 구상에서부터 마지막 결정고의 마무리까지 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소요된 작품이 <페스트>다. (p. 447)

사실상 <페스트> 착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이듬해 9월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다. (...) 작품의 1부에서 페스트 상황임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기까지 아무도 그것이 페스트임을 단언하지 못한 채 그 '부조리한 사건'을 불신하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분위기는 전쟁 발발 초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p. 449)

카뮈는 장차 이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 있어서 톨스토이, 다니엘 디포,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현실 경험의 신화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주요한 모범으로 삼게 될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정독하고 노트를 한다. 멜빌은 카뮈의 창조를 상징과 신화의 차원으로 승격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p. 453)

'연대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페스트라는 질병의 육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고통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산출해낼 수 있는 작품의 '상징적'의미는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한 동시에 보편적인 것에까지 확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전체 5막으로 이루어진 고전 비극처럼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단 하나의 장으로 된 짧은 3부를 중심으로 해서 비교적 길이가 긴 앞의 1, 2부와 뒤의 4, 5부가 대칭을 이루는 균형 잡힌 형식을 갖추고 있다. (p. 461)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랑과 코타르의 관계는 <이방인> 속에서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뫼르소와 레몽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p. 483)

- 해설 [부정을 통한 긍정] 中 -

해설에서의 정보들을 읽고나니 이제야 궁금해진다.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여기저기 녹인 것은 알겠는데, 전쟁을 왜 전염병으로 바꿨을까? 어디에 모비딕의 무언가가 반영되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소설에 굳이 고전 비극의 형식을 갖춘 이유는 무엇일까? 코타르 라는 인물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부정적 인물인데 그가 지은 죄는 무엇일까? 전염병에 대처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 혹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빛과 어둠을 드러내기 보다 다른 핵심적 인물들과 코타르를 비교시킨 것은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걸까 소설 발표 당시나 지금까지 읽혀져 오는 과정에서 나처럼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까? 등... 명작은 역시 생각해봄직한 질문들을 남긴다. 해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해설의 끝부분에 인용되어 있는 카뮈의 노벨상 수상 소감이었다.

"그렇다. 나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게는 정확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나는 부정否定을 표현했다. 세 가지 형태로 말이다. 소설로는 <이방인>이었고 극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였으며 이념적 형태로는 <시지프 신화>였다. 만약 내가 그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겐 전혀 상상력이 없어서 지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있어서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부정 속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시지프 신화>의 서문에서 그 점을 미리 밝혀 놓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세 가지 형태의 긍정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 과 <정의의 사람들> 그리고 이념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벌써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세 번째의 한 층위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구체화해가는 중인 계획들이다" (p. 488~489)

1957년 프랑스 작가로는 아홉 번째이며 최연소(마흔네 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가 1960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카뮈의 세번째 층위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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