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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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뿌리째 뽑히는 상실 앞에서 자연을 닮은 회복력으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참 좋았더랬다. 그래서 이사람저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추천도 했고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듣고선 기다리고기다렸다가 영화도 보았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경우 원작보다 덜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인데 다행히 영화도 썩 좋았다. 그러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이을 작품이라는 소개를 읽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또한번의 '벅찬 자연' 혹은 '삶의 의지' 혹은 '순수한 사랑'을 기대하며 <흐르는 강물처럼>을 펼쳤다. (더구나 오래전 내가 좋아하던 그 영화 제목이라니 더더욱 안 읽을 수가 없었다. ㅎ)

우리 집은 저수지 밑바닥에 있다. 우리 농장도 마찬가지다. 온통 진흙으로 뒤덮여 무엇이 나룻배의 잔해고 무엇이 농장의 잔해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물 밑에 있다.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던 응접실을, 한때 내 침실이었던 공간을 이제는 날렵한 송어가 휘젓고 다닌다. 외양간과 구유는 썩어간다. 엉킨 철조망은 녹슬어 간다. 한때 비옥했던 땅은 무위에 젖어 있다. 블루 메사 저수지 건립을 두고 역사책에서는 아마 콜로라도 강의 지류를 통해 건조한 남서부로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라고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세차게 흐르던 거니슨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건 좋은 의도였다고 하겠지만, 내가 아는 이야기에는 조금도 선한 구석이 없다. ( 가제본 p. 10~11)

한때 강이었으나 지금은 저수가 된 물 밑에서 부패하는 마을, 물속에서 조용히 잊힌 마을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불어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킬 때 이곳의 기쁨과 고통까지 모조리 앗아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그 풍경이 내어주고 앗아간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어 평생 가슴에 남아 우리라는 존재를 형성한다. (가제본 p. 12)

※ 이후 아래의 인용문들 페이지도 모두 가제본의 페이지임.

프롤로그에서 느껴지듯이 이 소설은 선하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고 평생 가슴에 남았으나 기쁨이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때 모든 것이었던 시간과 장소들이 저수지 물에 잠겨 있고 그렇게 잠겨서 부패하고 있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질만한 심정으로 지금 살고 있음을 내비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때는 1948년에 시작하여 이야기는 1971년에 마무리되며 장소는 콜로라도주 아이올라 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17세의 소녀 빅토리아(=토리) 그리고 윌슨 문.

아주 평범했던 어느날 토리는 동네 길가에서 낯선 이방인을 마주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토리는 그러지 않았고, '그로써 세상의 모든 게 달라졌다. (p. 20)' 빅토리아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급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때는 그의 시선을 쫓기 바빠 몰랐지만, 윌슨 문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결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었고, 사람 사이에 생기는 긴 침묵을 수다로 채워야 할 어색한 그릇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좀처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를 돌이키는 일은 그보다도 없었으며,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두 손에 소중히 담고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경탄하는 사람이었다. 메인 스트리트에 목석처럼 서 있던 그때는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깃든 지혜를 나도 점점 배워나갔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지혜는 내게 가장 필요한 때가 찾아왔을 때 빛을 발했다. (p. 26)

그리고 토리와 윌슨의 첫사랑이자 마지막사랑이 움트던 그날 동시에 누군가의 복수의 들불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토리의 동생 세스는 토리와 윌슨의 마주침을 목격했고 우연조차도 참을 수 없어했다. '그때 나는 사탄, 뱀, 지인 등 어둠을 주제로 한 설교를 빠짐없이 들었지만, 세스가 가진 어두움에 대해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무래도 타고나는게 분명한 그런 어둠, 모든 사람이 동의한 규칙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을지 그 방법만 찾아가며 평생을 사는 자의 어둠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없없다. (p. 69)' 한살아래 남동생이었지만 세스는 어렸을때부터 남달랐다. 남다르게 사악했다. 그런 세스가 토리와 윌슨의 첫만남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당시엔 일이 그렇게까지 커질줄 아무도 몰랐다. 살인사건까지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토리도 윌슨도 그리고 세스도.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 140) 라고 부드럽게 말하던 윌슨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불랙 캐니언 바닥에서. 그 인전놈. 피부가 거의 벗겨진 채로. 차 뒤에 있었다니. 던져졌대. (p. 146)' 인전이라는 표현은 당시 인디언을 비하하던 표현이었다. 윌슨 문은 인디언 마을 출신이었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연을 동경했고 삶을 향유했고 토리를 사랑했다. 그런 윌슨을 토리도 온마음과 온몸을 다해 사랑했는데... 그런 윌슨이 살해당했다.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셀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아쏙,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이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p. 160)

토리는 열두살에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일부를 잃고 남은 가족이라곤 무뚝뚝한 아버지와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와 얹혀 사는 이모부 그리고 잔인한 동생 세스 뿐이었다. 토리는 그런 남자들에게 복종하며 집안을 꾸리고 복숭아 과수원 돌보았다. 윌슨을 만나고 사랑하고 잃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토리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리의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야 했다. 무엇보다도 세스에게서 아기만큼은 지켜내야 겠다고 결심했다. 무모함을 알면서도 가출했다. 윌슨과의 추억이 깃듯 깊은 산 버려진 산막을 향해 가면서 구체적인 계획같은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지금을 살아내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을 만큼 윌이 그리웠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에 집중해야 했다. (p. 169)'

나는 하루하루 계속 살아 나갔고, 차츰 긴장을 늦추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어느 정도의 믿음이 들어섰다. (p. 180)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면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p. 183)

집에서 지낼 때에도 토리는 방문을 늘 잠가야 했다. 남자들만 사는 집에서 유일한 여자인 토리가, 속을 알수 없는 이모부와 세스의 난폭한 친구들이 들락거리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밤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숲속에서의 날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달랐다. 자연은 두려움을 주면서도 토리를 품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삶이 그렇게 만만할리가... 자연이 그렇게 관대하기만 할 리가 없었다... 출산한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날 깡마른 토리는 굶주림에 울부짖는 아들을 데리고 정신없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들을 살려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내 아들로 살다가는 점점 야위다가 결국 죽고 말 게 거의 확실했다. 어찌어찌 아들이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둘 다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아기가 내게서 영영 떠나 다른 여자의 아들로 살아간다면, 내 아들을 잘 먹고 튼튼하게 자랄 것이었다. 내 아들도 미래와 아버지와 가족을 갖게 될 것이었다. (p. 209) 넉넉한 모유,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줄 어머니, 살아 있는 아버가 필요했던 우리 아기 앞에 이 모든게 나타났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우리 아들이 무사히 발견되었다는 증거와 먹을거리였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 손에는 이 과일이 들려 있었다. (p. 211)

복숭아 였다. 토리가 어려서부터 따오던 그 복숭아였다. 낯선 이가 남기고 간 것이 토리네 농장의 그 내시 복숭아라니.

토리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농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난한 삶의 흔적이 가득한 모습으로 걸어가면서도 토리는 집과 농장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붙박이 같은 존재였던 자신 하나쯤 사라진다고 아무 티도 안나고 그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확인한 것은 황폐해진 집과 홀로남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버지 였다.

하늘이 새파랗고 높은 가을날 치러진 아빠의 장례식에는 아이올라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참석했다. 장지에서 내려온 마을 사람들은 우리 농장 뒷마당에 다시 모여 조의를 표하며 음식을 나누었다. 거기서 라일 아저씨가 내게 세스를 고발한 사람이 아빠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p. 225)

시간은 빠르게 주변을 변화시켰다. 하루의 일과시간을 알려주던 기차의 경적 소리는 멎었고 더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은 침묵에 잠겼으며 그 침묵속에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것들이 하나둘씩 생명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댐건설 소식이 들려왔다.

"과수원 나무를 통째로 다 구하고 싶어요. 한 그루도 남김없이" (p. 243)

마을은 곧 사라질 것이다. 토리의 시간과 추억과 장소와 흔적이 곧 물에 잠길 것이다. 토리에게 남은건 이제 과수원 뿐이었다. 토리는 마지막 남은 것 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토리는 이제 더이상 토리로 불러줄 사람이 자신에겐 없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빅토리아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할 터였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째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롱누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 277)


빅토리아가 다시 살고 친구를 만나고 관계를 맺고 삶을 쌓아나가는 과정은 열일곱 열여덟의 그 폭풍같은 한 해에 비하면 겉으로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속에선 늘 비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에 찔리고 천둥에 움츠려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그리웠다. 매년 그 공터에 가서 돌멩이를 올려두고 왔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그러다 발견했다. "숲의 어머니에게, (...) 사실은 당신을 위해 쓴 글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이 알았어야 할 모든 이야기를 이제야 전합니다. (p. 337)'

빅토리아는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숲속을 혼자 산책하고 강가를 혼자 거니는 것이 더 좋았다. 윌과의 기억은 여전히 가슴을 울렸고 아들의 첫울음은 여전히 귀에 쟁쟁했다. 지켜냈어야 했던 것을 지키지못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이후의 삶은 그저 있는듯없는듯 조용하게 살아왔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새로운 인연이 맺어졌고 소중한 것들이 생겨났으며 그러다 과거가 다시 돌아왔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쁨일까 슬픔일까? 빅토리아의 새로운 삶이 궁금하다면 결말은 책을 읽으며 확인하시기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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