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를 읽는 시간
이택광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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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 에 대한 오마주 이다.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 에 대한 기억은 오마주 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했다.

저자가 언급했던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를 통해 나도 처음 그 이름을 알았고

올란도 라는 영화를 통해 그 이름이 되새겨졌으며

자기만의 방 이라는 책을 통해 그 이름이 각인되었다.

목마와 숙녀 에서는 그 이름이 생소했고 올란도 라는 영화에선 그 이름이 혼란스러웠으나 자기만의 방 에선 그 이름이 감탄스러웠다.

그래서 이 책이 신간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책을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얇은 책이라 부담없이 시작했는데, 처음엔 좀 어렵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저자가 소개하는 대부분의 버지니아 울프 작품들이 내가 읽지 않은 작품들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 책과 함게 이 책에서 언급했던 작품들을 모은 책도 함께 세트로 나왔다면 좋았을 껄 하는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읽을 수록 점점 적응이 되고 읽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비평과 철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해설에 익숙해지고 저자가 인용하는 구절들로 어림잡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어 이해에 큰 무리는 없었다.


이 책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들이 참 많았다.

작가, 비평가, 사상가, 출판인, 무엇보다 글 이외에 삶의 다른 가치를 찾아내지 못한 생활인.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삶을 사랑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침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용기있게 시대에 참여하고자 했던 활동가이기도 했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분석함으로써 더 상세한 설명과 분석을 할 수 있었다. 울프의 일기는 소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독자적 장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울프는 매일매일 일기를 썼고 쓰기 위해 살았고 쓰기를 통해 살았다.  울프의 작품세계는 '일기-소설-에세이'로 이어지는 '삼위일체'를 통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소설은 개인사에 근거하지만 개인사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소설보다 일기나 에세이를 통해 더 진정한 울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울프에게 일기는 삶의 언어였다.


울프의 표현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이 여럿 있었다.


'보통의 독자' 라는, 학자에 대항해 지식인이 포괄하고자 하는 대중에 대한 표현과 독서와 글쓰기의 중요성 관련 언급은 사상가로서의 울프가 느껴졌다. 울프의 책읽기에 대한 조언도 새로웠다. 울프는 책을 잘 읽으려면 마치 자신이 그 책을 쓰는 것처럼 읽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울프는 각각의 동물을 다르게 다루어야 하듯이 책도 각각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즉 울프는 적극적인 독서법을 독자에게 주문한다. 무엇보다 울프는 책을 제대로 읽고자 한다면 먼저 무엇이든 써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울프의 독서법은 책에 대한 전문적인 관점을 갖고 있지 않은 '보통의 독자'에게 어떻게 책을 제대로 읽을지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울프는 자신이 독서를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독서가 대중을 지적으로 고양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보통의 독자'야말로 책의 미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독서의 미래를 비평가나 학자가 아닌 자기 발전의 본능으로 독서에 매달리는 '보통의 독자'에게서 찾았다는 점에서 울프의 생각은 굉장히 현대적인것 같다. 울프가 충고하는 독서법의 핵심은 독자로 머무르지 말고 스스로 작가가 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책을 읽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울프의 생각이, 민주주의 속 대중을 생각하는 그 독서법이 실천적 지식인임에 분명해보여 반갑기도 했다.


'모던픽션' 이라는 개념도 새로웠다. 울프는 삶과 글을 일치시키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한 시럼적 작가였고, '모던픽션'은 바로 이런 실험을 지칭하는 비형식적 글쓰기를 가리키는 울프의 개념이었다고 한다. 모더니즘과 소설을 결합한 울프만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울프의 여성 관련 활동이나 표현들은 '자기만의 방'이란 책을 읽으며 조금 알고 있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포괄적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남성을 통해 규정되는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해체하고자 했던 울프의 시도를 알게 되면서 근래의 페미니즘이 오히려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정관념을 깨트리게 하는 생각들이 있었다. 울프는 당시 사회단체들에게 여성들이 전문직을 갖도록 돕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전문직 여성들이 앞장서서 전쟁반대를 비롯한 사회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울프가 보기에 전문직은 부르주아 남성 중심중의가 만들어 놓은 폐해였다. 울프가 구상한 더 자유로운 사회는 전문화가 없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당시로보나 지금으로보나 놀랍도록 급진적인 생각이다. 울프는 여성이 전문직에 진출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만, 여성이 기존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확대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인식했다. 또한, 울프는 여성에게 주권을 부여하지 않은 국가가 어떻게 여성의 보호자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울프는 여성의 조국은 세계 전체 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여성은 보편적 존재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남성과 대등한 존재가 되려고 하기보다 여성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울프의 주장은 지금 관점에서 봐도 혁신적이다. 울프에게 참된 여성의 자아는 여성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며, 글쓰기라는 표현 방법은 다른 자아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울프는 자신의 자아형성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울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다. 또한 평생 우울증으로 힘들어했던 작가이다. 이 두가지 상식처럼 퍼져있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는 부분들도 좋았다. 우울증이라고 하면 사는 내내 우울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울프도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고, 행복은 창조해야 한다고 말할정도로 행복에 능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울프는 기존의 것을 지워야 새로운 것이 들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과정이야말로 행복을 만들어내는 기제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활동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울프 자신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울프대신 대답을 적어놓았다.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삶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울프는 삶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라고. 이런 의미에서 울프의 죽음은 삶에 대한 사랑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저절로 동의가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에 대한 전기도 아니고 작품들을 구절구절 해설한 작품해설서도 아닌, 울프의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치열한 사상적 흐름을 느끼게 해준 책이라서 읽고 난후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울프의 작품들을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숙제도 설레는 마음으로 떠안으며 기꺼이 버지나아 울프의 북클럽에 가입하게 된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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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혁명적인 글쓰기 방법론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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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술술 잘 읽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자유로운 글쓰기!


저자는 글쓰기 수업을 많이 한 작가이다. 그녀는 어디서 누구를 가르치든 항상 똑같은 방법론을 주장한다고 한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한 확신을 키워 나가야 한다' 라는 것. 글쓰기를 배우는 길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고 실천적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충실하게 살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의 글쓰기는 작가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고 싶은 이라면 해볼법한 다양한 글쓰기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책 내용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퇴비' 부분이었다. 해당 부분을 옮겨 보면,

'우리의 지각 능력이나 판단력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과 판단력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를 거쳐서 나온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퇴비를 섞는 과정' 이라고 부른다. 인생이 남긴 쓰레기 더미는 자꾸 쌓여 간다. 우리는 그 안에서 특수한 경험들만을 수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린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경험으로 삼기도 한다. 우린가 버린 .....것들이 삭아 뜨거운 열량을 가진 비옥한 토양으로 변한다. 이 비옥한 토양이 우리의 시와 이야기를 꽃 피워 주는 자원이다. 하지만 비옥한 토양은 단시일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월이 필요하다. 유기적으로 이어진 인생의 모든 세부 항목들을 계속 뒤집고 또 뒤집어서 쓸데없는 찌꺼기들을 걸러 내야만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알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인생의 쓰레기에 대한 용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구절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고난한번 겪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그 고난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면 문제이지. 그 고난속에 묻혀 사는 경우도 비일비재 할 것이다. 어떤 스님이 한 말씀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데, 똑같은 문장은 기억이 안나고 의미만 옮겨 보자면. 자신에게 상처준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를 왜 버리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냄내나냄새나 하고 있냐는 것이다. 내가 버리면 그만인것을. 쓰레기 인줄 알면서 버리지 못하고 부둥켜 안고 힘들어 하던 시절 우연히 읽은 그 구절이 내내 힘이 됐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의 쓰레기도 퇴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저자의 글을 읽고 나서야 갑자기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직접적으로야 글의 소재로 삼을 수 있을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인생의 퇴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말한 인생의 쓰레기는 마음의 상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쓸데 없는 인생의 순간들도 비료가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끄적거림의 흔적들도 비료가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계속해서 비료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발효시키고, 비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때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계속 성숙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쓰레기 같은 글일지라도 일단 계속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한달에 노트한권정도씩을 꾸준이 썼다고 한다. 어떨땐 더 많이 쓰기도. 그 노트로 집을 짓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쓰기를 두려워하고 써온글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거의 대부분 몇권의 노트를 써본 경험이 있다. 일기.

의무적으로 일기를 써오며 컸고 학창시절이 지나도 꽤 오래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일기가 됐든 무엇이 됐든 일단 자기의 얘기를 계속 써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마치 작가가 된 것처럼 대단한 글을 써야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들기 마련이다.

저자는 쉽고 가볍게 시작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준다. 일단 쓰라고. 무엇보다 꾸준이 쓰라고. 뭘써야 할지 모른다면 이렇게 써보라고 방법들도 꽤 여럿 알려준다. 피식 웃음이 나는 유쾌한 방법들도 있고, 뭘 그렇게까지 싶은 방법들도 있다. 하지만 해보고 싶은 유용한 방법들이 많다.


이 책은 1986년 출간 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한 글쓰기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약간 신기하기도 하다. 시대를 타지 않는 책인건가?!

예전에 김영하 작가의 말하다 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작가지망생들에게 유용한 내용들도 많았지만 작가는 타고나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연습하고 노력하고 글을 써봐도 타고 나지 않으면 작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걸로 읽혀져서 기분이 나빴었다. 더구나 김영하 작가의 글은 너무 치밀하게 계산적으로 씌여진 글인 것이 느껴져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다 보니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그 뒤로 작가들이 쓴 글쓰기 관련 책들은 안 봤었는데, 이 책은 거의 정반대의 책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편하고 자유롭고 작가의 권위의식이 없어서 좋았다.


전문작가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시대가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이다. 책이 많이 읽히지 않는 시대라고 하는데 책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은 시대 같기도 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읽히지 않는 다면 써놓고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른이에게 읽히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면 이 책에서 알려주는 방법들로 글쓰기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작가로서 작가의 글쓰기를 지도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부분도 많지만, 저자가 말하는 작가는 누구나 될 수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냥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방법들이다. 그렇게 글을 쓰다가 자신의 인생이 더 충만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더욱 선물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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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 남자 없는 출생
앤젤라 채드윅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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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소설이었다. 이런 책이 왜 아직 베스트셀러가 안됐지? 어서어서 소문이 퍼져서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이 소설은 있을 법한 기발한 생각에서 출발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촘촘한 서사로 잘 엮어내고 있다.​ 

난자와 난자로 인공수정이 가능해지고 그 첫 대상으로 선택된 여성 동성애자 커플이 겪는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 이다.


여성과 여성의 인공수정으로 태어나는 아이는 XX + XX 니까 XX 일 수밖에 없다. 즉, 여자아이 일 수밖에 없다. 이 실험이 성공하자마자 종교단체와 보수정치단체 에서 들고 일어난다. 남성이 소수자가 되고 그러다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 거센 저항은 많은 동지를 모았고 그 현실적 패악이 너무나 있을법 해서 소름이 돋았다. 여성끼리의 임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남성의 존폐위기를 불러올 정도로 남성은 본인들에 대해 그렇게 존재적 자신감이 없는 건지 실소가 나왔다. 여성끼리 임신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여성끼리만 임신하는 게 아닐텐데, 임신에서조차 남성의 역할이 독보적이지 않게 되면 당장 위기에 몰릴 만큼 본인들이 잘못해온 부분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인정하는 건가 싶어서.


이 커플중 한명의 직업은 기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언론의 파급력은 엄청나다. 그 중앙에서 오해와 왜곡을 피하기 위해 무시와 무대응으로 버티는 선택은 험난한 시간들을 가져왔지만 참아내는 모습을 읽으며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을 보기도 했다. 그 번민의 시간들이 인간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저자가 기자출신이라서인지 언론의 어두운 면도 세세히 느낄 수 있게 묘사하고 있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다행스러운건지 소설의 배경인 영국은 동성애에 대해서 아무래도 우리나라보다는 정서적으로 열려 있는 것 같다. 물론, 소설적 배경으로 그렇게 설정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커플의 양가 부모와 친구 모두 자신들의 딸들이 친구가 동성애자인 것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룬 딸들의 가정이 비정상적이라는 버리지 못한 미련, 친손주에 대한 욕구, 조부모대에 이루어진 학대로 망가진 시간들이 만든 정서적 피폐함 등 우리나라 정서에서 일어날법한 가정의 문제들이 이질감없이 이해되어졌다.


새로운 과학적 성공을 둘러싼 내부적 갈등과 그것을 이용하는 언론과 언론을 등에 업은 정치권력의 연결고리도 빠짐없이 잘 엮어져서 더욱 현실감이 높은 소설이었다. 난임을 해결하고 존폐위기의 생물을 보존하고 동성애를 제3의 성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가치들을 떠나 오로지 여성과 남성의 대립으로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의 정서또한 이질적이지 않았다. 이런면에선 이 소설만큼 페미니즘적인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제3의 성... 나도 아직 잘 모르겠는 부분이긴 하다. 남성 vs 여성 으로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는 동성애커플을 볼때도 한쪽은 여성역할 한쪽은 남성역할 이겠거니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남성 여성으로만 구분지을 수 없고 구분지어서도 안되는 것 같다. 이쪽저쪽이 아닌 제3의성 이 있는게 아닐까?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


주인공이 겪는 모성애에 대한 혼란스러움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동성 커플이 아니라 이성 커플 에서도, 모성애는 자연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모르는 척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모성애 없는 부성애 없는 가족들을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지만 외면할 뿐. 그래서 그 내적갈등을 그려내는 과정도 좋았다.


여성끼리의 임신이 가능해졌다고 해서 여성끼리만 잘 살아보겠다는 소설이 아니다. 동성애와 임신 이라는 커다른 두 줄기를 다루면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존재적 위치를 다시 고민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동성애, 모성애, 가족애, 동지애, 인간애 모두를 다루고 있다. 그 모든 사랑이 사랑으로만 인정받고 이해되어졌으면 좋겠다. 그 모든 사랑을 되짚어 생각해보게 하는 이 작품이 많이 읽혀져서 논쟁이 아니라 포용으로 마음의 지평을 넓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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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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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자 손에서 내려 놓을 수가 없어서 중간에 밥숟가락까지 떠가며 책을 붙잡고 있다가 단번에 읽어내렸다.

가슴뛰는 소설이었다.

구병모 작가의 책은 '위저드 베이커리' 로 처음 접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청소년문학을 참 좋아한다.

어줍잖은 멋내려고 본인도 잘 모를 것 같은 문장들을 마구 뒤섞어 놓은 소설들이 간혹 있는데, 청소년문학은 대부분 명확한 편이기 때문이다. 깊이나 구성의 질적 차이가 있어서 완성도는 떨어지게 느껴지는 작품일지라도, 적어도 통하지도 않을 인위적인 기교가 없달까.

'위저드 베이커리' 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청소년이 겪음직한 폭력의 문제를 시크하지만 온정있게 다독여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었다.

맘에 드는 작가의 책은 연달아 읽는 경향이 있는 나는 바로 구병모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었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 을 읽고 마음이 너무 무거웠었다. 역시 특유의 필력이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더 현실적이었고 그래서인지 더 가슴답답했었다. 분명 어딘가 있을 그런 학교에 그런 아이들이 있을 텐데, 어른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법이, 제도가 그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너무 죄책감이 느껴져서 대상도 없이 마냥 미안해졌었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이 궁금하면서도 바로 다음 작품을 찾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년이;;;


그러다가 창비 '눈가리고 책읽는당' 이벤트에 당첨되서 제목도 작가도 모른채 읽게 된 소설이 '버드 스트라이크' 였다.

믿거나말거나 지만 영어덜트소설/작은날개/새인간 이라는 출판사의 단서만 보고도 구병모 작가가 떠올랐다. 내가 아는 작가들이 몇 안되어서 일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청소년문학 작가가 구병모 작가여서 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단 한명의 작가 이름이 떠올랐다.


작가도 모르고 제목도 없는 가제본 책을 받고, 이제 작가도 제목도 알게 된 상황에서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는데, 구병모 는 필명이고 본명은 정유경 인 1976년생 여성 작가 였다. 헐. 구병모 이름만 보고 남성 작가 인줄 알고 있었는데(그래서 남성 작가가 이런 분위기를?! 하며 더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작품도 꽤 많고 해서 나이도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왠지 의외였다.


이제 어엿한 제목이 붙여진 이 소설은 뭐랄까... 판타지는 아닌데 그렇다고 현실세계도 아닌 이 소설은... 날개가 돋는 익인이 나오고 십대 소년소녀가 주인공인 이 소설을 뭐라고 해야 할까... 소외된 가족을 품어안고 과학화되는 사회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대비시켜 드러내는 이 소설을... 순간의 사랑과 영원의 사랑과 사랑아니어도 사랑인 "사랑"을 풀어내는 이 소설은... 읽는 이를 날고 싶게 하는 소설이다. 그 날갯짓이 도피인지자유인지 떠나가기함인지돌아오기위함인지 어디를 향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던간에 여하튼, 날고 싶어 진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시니컬함이 가시처럼 느껴질때 구병모작가의 작품을 멈추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아무래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더더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요새 읽을 책들이 좀 쌓여 있어서 바로 시작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한데...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을 모조리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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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AI 공존 패러다임 - 인공지능 시대 서바이벌 리포트
김송호 지음 / 물병자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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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인가? 라는 질문에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사는 공존의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는 이 책은 요즘 읽기에 아주 시기적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오너들이나, 정책권력자, 교육종사자 들이 꼭 읽고 실천해 주었으면 싶은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이 책은 인공지능 시대를 조망하고 그 패러다임 속에서 개인이 생존,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하자는 생각으로 집필한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공지능을 내 일자리로 뺏는 경쟁자로 생각하지 말고, 인공지능을 동반자로 생각하고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공지능을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한 도구로 만들자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가장 큰 메시지라고 한다.


그저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은 산업사회에 맞춰진 과거형 인재라고 한다. 나는 지극히 과거형 사람이다. 사고방식도 지극히 옛날 사람이었나 보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머리를 때렸던 부분은 초반에 나오는 내용으로,

'고령화와 저출산이 정말 문제만 일으키는 현상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서면 인력이 많이 필요한 산업은 점차 사라지는 게 당연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현실 하에서 젊은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도 그들이 일할 자리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높은 출산율은 오히려 부담이 될 것이다. ...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 젊은이들이 해왔던 힘든 일을 인공지능이 담당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노인보다 많아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산업사회의 논리는,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자 나이 든 세대가 은퇴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일자리를 양보하고, 그 대신 젊은 세대는 은퇴한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는 빅딜을 통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 젊은이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주장은 기성세대들의 편견 내지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 고령화에 의한 문제를 젊은이들에게 부담을 주어 해결하자는 발상을 버리고 인공지능 시대의 강점을 살려 극복해 나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령화 저출산이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성장지향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공지능이 발달되면 고령의 사람들은 육체적 어려움을 덜 수 있고, 고출산으로 사람만 많아지면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인구수가 적절하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발상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 은 이 책의 핵심이다. 성장이 아닌 공존!


또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은 일자리도 양극화되어 중산층의 기반이 되는 중간직 일자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가장 많이 대체될 것이라는 점이다. 비용의 측면에서 인공지능으로의 대체효용성이 낮은 하위직 일자리와 리더들의 자리인 고위직 일자리는 그대로인데 중간직 일자리만 주로 줄어들면서 직장인들도 양극화에 내몰리게 될 것이라는 점은 직장인이 대다수인 우리 현실에 가장 큰 충격이 아닐까? 저자는 부의 양극화를 방치하면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에 의해 창출되는 부가 단순히 자본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사회전체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게 될런지...


인공지능은 공감 능력이나 직관력이 없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나 의사소통이 필요한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한다. 산업사회에서 중요했던 어떻게 Know-How 즉 효율을 높이는 일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소바자에게 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결국 그로 인해 기업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 Know-What 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치창출과 이익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인 '콘텐츠 창출 능력' 그것만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큰 전제조건이라고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동급이 아니고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과거형 인간이 이러한 인공지능 패러다임에 익숙해 지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아직 어떤 가치를 창출해본 경험이 없는 소극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뭔가 어떻게 하는 지를 파악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시대에 살다가,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는 것은 참 부담스런 일이다.


대장장이를 예로 한 직업 변천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농경사회의 대장장이는 자영업자에 가까웠지만, 산업사회의 대장장이는 출퇴근하여 공장에서 기계만 상대하는 월급쟁이일 확률이 높다. 반면에 인공지능 시대의 대장장이는 플랫폼에서 주문받은 맞춤형 상품을 3D프린터로 제작하는 프리랜서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겉은 모두 대장장이지만, 일자리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장장이의 숫자로만 따지면 일자리가 줄었네 늘었네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변화로만 보니 신선하고 괜찮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창의성, 유연성, 판단력, 상식을 필요료 하는 기술 분야의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앞으로는 능력있는 사람의 조건으로 지식보다는 얼마나 인간다운지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늘어나는 일자리, 아니 최소한 사라지지 않는 일자리는 인간다움을 지키면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일이고 그 모든 논의 중심에 인간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산업시대의 일꾼 들은 기계처럼 일만 했다면 앞으로는 기계처럼 해야 할 일은 기계가 하고 인간은 좀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도 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서 어느 정도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어느 정도의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마가 없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다만 이렇게 인공지능이 중요시 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업 자본이 인공지능으로 인한 이익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기업가의 편에 서서 미래를 보지 못한체 무식한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에 새삼 분노가 느껴진다. 제대로 된 법안하나 안만들고 당쟁만 일삼을 시간에 이런 책이라도 좀 읽으시지들...에혀...


산업사회 초기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 데 반감을 품어서 일어났던 러다이트 운동이 실패했듯이, 지금 인공지능에 의해 내몰리고 있는 직업군에서의 반발은 당연할 수 있지만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다. 개인의 문제로만 단기적인 관점에서만 파악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패러다임을 봐야 한다. 주식 투자자들을 위한 단기적인 수익 지향이 기업의 주요 경영 전략을 좌우하여 생산적 투자를 자제하고 장기 투자가 필요한 기술혁신을 주저하는 지금 이대로 기업이 법인으로서 독립적인 권리만 누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모순을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기성세대가 과거 '한강의 기적' 이라 불리는 성공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실은 바뀔 수 없다. 위에서부터 알아서 해줄리가 없다. 직장인들이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사회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한 후 정치가와 기업을 압박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노동 관련 제도와 복지는 임금노동을 전제로, 그것도 정규직 기반의 산업사회를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 시대에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자들도 산재보험,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에 통합하는 등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한다. 단순히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공공 성격의 규제를 폐지해 일부 기업의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규제로 바뀌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주주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소유와 경쟁' 이었다고 한다. 인류가 생존을 걱정하는 수준이었던 산업사회 초기에는 소유와 경쟁의 논리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인류 전체의 부를 늘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부가 생존의 차원이 아니라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시대에도 소유와 경쟁의 패러다임이 지속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한다. 넓게 생각해서 생산과 소비를 줄이면서도 인간생활이 오히려 풍족해진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라는 저자의 의견에 그건 그렇긴 하지 싶다.


'사람들은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밀려나지 않을까 많이 걱정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하는 선택도 인간이 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중요한 패러다임은 '공유와 상생' 이다. ... 인공지능에겐 힘든 노동을, 인간에겐 행복한 일과 삶을, 공유와 상생의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인공지능 시대를 기원한다' 고 저자는 책을 마무리 한다.

나또한 위와 같은 저자의 기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다 함께 잘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사회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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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2019-03-09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