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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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전원을 매료시킨 신인 작가 현호정의 첫 소설

작년에 현호정 작가의 <고고의 구멍>이란 작품을 읽고 참 독특한 서사구성을 하는 신인작가로구나 싶어 이름을 기억해두었었다.

지인들과 <단명소녀 투쟁기>라는 연극을 보기로 했는데 원작이 현호정 작가의 <단명소녀 투쟁기> 라는 소설이라고 한다. 원작 소설이 있는 공연은 원작을 보고 가는 것이 제맛! 알고보니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소설이자 첫 수상작이었다.


책 뒤표지에 실린 심사위원들의 멘트가 심상찮았다. 구병모, 이기호, 정소현 소설가의 심사평이 짧게 실려 있는데 이 작가들이 이렇게 칭찬을 하는 작품이라니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등단작부터 이런 인정과 호평을 등에 업은 작품은 과연 어떤 소설일까? 그런 작품을 쓴 작가는 과연 어떤 성향일까?


구수정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의 이름은 북두다.

북두칠성의 북두를 쓰는 그는 근방에서 가장 용한 입시 전문 점쟁이였다. 종이에 사주를 풀어 확률을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진실을 선언하는 반신이었다.

방석에 엉덩이를 대기도 전에 합격할 대학을 말해 준다던 북두였으나 수정이 자리에 앉아 왠지 부정하게만 들리는 부스럭 소리를 내 가며 가방에 지난 달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낼 때까지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p. 9)

표제의 단명소녀 이름은 구수정이다. 열아홉살의 소녀 수정이가 혼자 입시 전문 점쟁이를 찾아갔다는 설정부터 작가가 경험한 세대는 아직 한창 자라고 있는 세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어린?! 작가의 작품세계는 생각보다 굉장히 구수하다. 마치 전래동화 같달까.

야, 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싫다면요? (p. 12)

공부도 곧잘 하고 점쟁이를 혼자 찾아갈 정로 대담한? 소녀가 자신의 '단명'예언에 '싫다면?'이라는 대꾸를 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캐릭터적 성격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쉽게 짐작했을때 사실 뻔한 반응은 아니다. 이 뻔하지 않은 서사진행방식이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하는 매력인 것 같다. 결코 재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난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한 이야기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장을 덮을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아지지는 않았다.

북두는 '죽음은 소나기처럼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지평선에서 먹구름과 비가 솨아아 달려오는 모양으로 죽음도 다가온다고. 그러므로 만약 구름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린다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듯이, 죽음과 반대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면 죽음을 조금,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늦출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죽음의 이동 속도가 구름의 이동 속도보다 훨씬 느리다는 것이었다. 원망스러운 점은 비구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소멸하는 데 반해 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p. 12, 13)

북두는 수정에게 남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간다면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북망산을 등지고 걷는 길, 차갑고 딱딱한 달 대신 따뜻하고 무른 해를 향해 가는 길, 전 생애에 걸친 길이 될 것이다. (p. 13)

수정은 그렇게 갑작스레 길을 떠나게 된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죽는다니 당장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달까. 입시 점을 보러 왔다가 갑자기 죽음을 거스르는 길을 떠나게 된 수정에게 북두 옆에서 도우미를 하던 은주는 백설기 백개를 가방에 담아주었다. '백설기가 백개니까, 만수무강하라'는 거라며 가방 가득 담아준 떡을 바라보며 수정은 '불경스럽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교복을 입은채 떡을 가득 지고 길을 떠난 수정이 가장 처음 맞닥뜨린 사람은 '술집과 숙박업소들 틈에 자리한 떡볶이집에서 선 채로 떡볶이를 먹던 양복 차림의 남자' 였다. 그가 거칠게 수정의 가방을 잡아당기며 세웠을때 울음이 터진 수정을 구해준건 사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한 커다란 개 한마리였다. 개는 수정의 목덜미를 문 채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러자 개의 옆구리에서 날개 한 쌍이 터져 나오며 펼쳐졌다. 다른 말에는 반응이 없다가 '내일'이라는 단어에만 반응하는 개를 보며 수정은 개를 '내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낯선 들판에서 떡을 나눠먹던 수정이와 내일앞에 누군가 걸어왔다. '이안' 이었다.

훗날 수정은 이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누구와 나눌 수 있는 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순간이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보는 첫 순간. 아직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순간. 각자의 마음속 상처에 관하여 서로가 완전히 무죄인 유일한 순간. 이안과의 '순간'은 근사했지만 좀 긴 편이었다. 상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일에 이안은 수정만큼이나 능한 아이였기에. (p. 24)

'이안은 수정처럼 열아홉 살.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왜요?" "죽으려고요" (p. 27)' 자신이 가려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친구를 만난 수정은 '혹시 살러 가요?' 라는 이안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부끄러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싶을 정도 였다. 게다가 수정은 딱히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p. 29)' 그래서 수정은 '딱히 살고 싶다기보다는 죽고 싶지가 않아서' '싫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좀 억울하다고 해야 할까, 이해를 못했다고 해야 할까' 라고 답했다. 늙은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수정에게 이안이 말했다.

물어는 봤어요?

네?

그쪽 사인요. 그쪽한테 죽는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그 점쟁이한테든 스님한테든 왜 죽는지 물어봤냐고요.

... 물어보지 않았다. (p. 29, 30)

그러고보니 느닷없이 '단명'을 예언받은 순간부터 나름 휘몰아치던 전개는 순식간에 독자를 일시정지 시킨다. 그러네? 왜 죽는다고 했을까? 어떻게 죽는다고 했을까? 왜 묻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독자는 수정보다 더 무겁게 질문을 떠안고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수정은 왜 '단명소녀'였을까? 라는...

살러간다는 대답을 하기 싫은 수정에게, 딱히 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스무 살에 덜컥 죽기는 억울한 수정에게 '단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수정이 떠난 길은 살기위해서 였을까 그저 갑자기 죽는 다는 말에 싫다고 대꾸하고 싶은 어린 치기 같은 반항이었을가...

아니면... 성인이 된다는 의미의 스무살을 코앞에 둔 나이에 자신이 직면해야 할 세상에 대한 마지막 준비같은 어쩌면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같은 것이었을까...

어떻게 하겠느냐고 스님이 물었어. 나는 잠시 고민했어. 뭔가 더 물어도 스님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내 엄마인지, 애인인지, 어디 있는지 그런 걸 물으면 스님이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말이야. 그래서 나는 별로 구체적이지 않은 질문을 했어. '그 사람도 저를 사랑했나요?' 스님은 잠시 생각하다 그렇다고 했어. 고개도 끄덕이셨어. 하지만 곧 반성하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어. 그때 스님은 좀 이상했어. 분명 내 입에 물그릇을 대 줄 때까지만 해도 아주 늙은 노스님처럼 보였는데, 한편 우리 도래의 어린 스님으로도 보였던 거야. 그러나 나는 그 현상에 관해 묻지는 않았어. 스님은 계속 말했어.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사랑한 적 없다고, 그러나... 네가 있어서 분명 좋았을 거라고... 수정아, 바로 그때 내 마음속에 죽겠다는 결심이 서게 된 거야. 나를 사랑한 적 없는 사람, 그러나 나로 인해 기쁘고 좋았던 어떤 사람에게 복수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비록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원하던 일일지라도. (p. 38)

이안은 기억이 없다. 오늘 산 중턱에 있는 절에서 눈을 떴다. 이안을 구해준 스님은 북두였다. 북두는 이안에게 알려주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요즈음 나를 심하게 학대했고, 결정적으로 오늘 나를 이 산으로 데려와 떠밀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눈을 떴다고' (p. 38) 이안은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결심했다고.

이 책은 두번 읽으면 좋을 책이다. 마지막 장면을 알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새롭게 이해되어지는 것들이 참 많다. 처음 읽을 땐 온통 물음표였던 구절들이 두번째 읽을 땐 그럭저럭 이해되어져 갔다. 그러다 이 대화쯤부터는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 있었다. <데미안>.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는 수정과 이안의 관계를 되짚어 보게 한다. 뭐... 나는 그랬다.

수정과 이안 그리고 내일이 빈집에서 떡을 나눠먹으며 하룻밤 휴식을 취하던 밤 누군가 문을 열었다. 일곱명의 어린 아이들 이었다. 배고프다는 아이들에게 떡을 나눠주었지만 먹다가 싸움이 난 아이들은 가방을 통째로 들고 가버렸다. 그런데 누군가 또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일곱 노인들 이었다. 떡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에 죽을 끓이기로 한다. 그렇게 죽을 나눠먹은 노인 중 한명이 빠르게 늙어가더니 자연사했다. 내일은 나머지 여섯 노인의 뒤를 따라 가버렸다. 그런 '내일'을 보며 '수정은 작은 바위처럼 단단해진 심장을 꺼내 내일에게 던지고 싶었다. 그런 방식으로 내일과 자신을 동시에 아프게 하고 싶었다. (p. 46)' 그런 수정과 이안 앞에 '북두'가 다시 나타난다.

갈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서로 다른 것을 원하는 둘이 가야 할 곳은 같다.

도망치는 자는 붙잡히게 되지만, 쫓는 자는 붙잡게 된다.

함께 저승으로 가거라. 힘을 합쳐 문 앞에서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렴. (p. 48, 49)

수정과 이안은 저승의 신을 사로잡게 된다. 저승의 신은 살려달라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무질서' 해진다면서. 저승신을 협박하여 수정과 이안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방법을 제안 받는다.

검은 명부는 자신을 죽게 만들 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 흰 명부는 자신을 살게 만들 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야. 하나하나 찾아가서 그들을 다 죽여. 그 순간 수정 너는 천수를 얻고, 이안 너는 영면을 얻을지니. (p. 60)

그렇게 저승신은 이안에게 바랄 희자가 새겨진 큰 칼을, 수정에게 바랄 망자가 새겨진 작은 칼도 함께 건네준다. 그런데 명부를 살펴보던 둘은 깜짝 놀란다. '두 명부의 내용이 같다. 두 명부에 적힌 자들이 같다. (p. 61)' 두 사람은 갈길이 정반대인줄 알았으나 앞으로도 내내 동행하게 될 인연이었던 것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고, 이 판타지 모험기를 한 사람의 내면으로 보자면 두 자아의 서로에 대한 발견 혹은 성찰 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희망'도 함께였다.

수정이 주머니에서 명부를 펼쳤다. 맨 앞장에 그려진 악사의 얼굴, 그 아래 적힌 이름과 대략적인 삶의 내력이 바늘처럼 수정의 심장을 찔렀다. 악사의 얼굴이 담임 교사를 닮았다는 사실을 수정은 깨닫는다. G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담임은 아직 학생이거나 막 기업에 입사한 친구들과 어울려 종종 유흥가를 배회하곤 했다. 수정은 밤에 종종 그와 마주쳤다. 그는 끝없이 무언가를 떠들어 대던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쌔액 웃으며 수정의 머리를 보란 듯이 쓰다듬었다. 취한 손길은 잘 멈춰지지 않아 종래엔 수정의 머리가 툭, 아래로 꺾였다. 그때마다 수정은 모멸과 분노를 누르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그의 가족을 상상하곤 했다. (p. 68)

소설의 앞부분에서 수정이 처음 만난 유흥가의 늙어가는 남자가 기억나는 구절일 것이다. 수정이 만난 그 남자는 어쩌면 젊은 담임의 내일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멸감을 주었던 취한 손길... 수정은 가차없이 악사를 찌른다. 악사를 묻고 난 수정과 이안 앞에 한없이 평온한 얼굴의 농부들이 등장한다. 일곱명의 농부.

그 악사는 글러먹은 놈이었거든

몰랐소? 그 악사가 부른 노래는 전부 우리 마을 사람 하나하나에 관한 추문이잖아

그가 부른 노래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야. 악사의 노래와 소문으로 명예랄지 순결을 잃은 자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그게 어디 악사의 잘못인가? 그렇고 그런 삶을 산 이들의 잘못이지. (p. 70, 71)

담임 교사의 얼굴을 한 악사... 악사가 부른 노래는 모두 마을의 소문, 소문 중에서도 추문... 어쩌면 담임은 음악 선생이었을까? 그가 내뱉은 말들 속에서는 어쩌면 추문도 혹은 그를 둘러싼 소문 중에는 어쩌면 추문이 있지 않았을까? 밤이면 유흥가를 배회하는 젊은 남선생과 여고생에 관한 어떤...

수정과 이안은 얼떨결에 자신들이 새로 온 악사라고 둘러대게 되고 환영회를 한다는 농부들을 앞서 뱃놀이를 시켜준다며 마을의 청소부가 등장한다. 셋은 함께 배를 타고 강의 한가운데 멈춰서게 되는데 청소부가 돌변한다. 청소부는 마을의 '질서'를 위해 정해진 인원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믿고 있었다.

험한 밤을 보내고 작은 섬에 닿게 된 둘은 명부에 그려진 초상과 이름이 모두 바뀐것을 알게 된다. 초상들은 이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반인반수를 모아 놓은 도감처럼, 넘겨도 넘겨도 괴물뿐' (p. 82) 이었다. 이제 둘의 여정은 괴물퇴치담이 되어간다. 수정의 사인에는 아마도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저지른 어떤 일이 있었던게 아닐까...

처음으로 맞닥뜨린 종족은 '눈-인간' 이었다.

수정은 질식과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주저앉는다. 이안이 칼을 봅아 나선다. 베는 족족, 그들은 쓰러진다.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으며 상처를 내도 반격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본다. 쳐다본다. 살펴본다. 그리고 기억한다. 몇몇은 금세 잊지만 몇몇은 평생토록... (p. 83)

수정은 어쩌면 어떤 시선으로부터 시선들로부터 죽음과도 같은 위협을 느꼈던 것일까? 수정의 사인은 어쩌면 '시선'이었을까?

수정의 등허리를 꽉 껴안고 척추 깊숙이 제 침을 꽂는다. 곧바로 수정은 무언가, 자신의 몸에서 아주 귀하고 중요한 무언가 울컥울컥 빨려 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이 모기-인간을 죽인다 해도 결코 돌려받을 수 없을 것이다. (p. 87)

두번째로 만난 괴물종족은 '모기-인간'이었다. 수정의 사인은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가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아주 귀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걸까?

남은 페이지는 단 두 장이다. 한 면에는 '허수아비-인간'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맨 뒷장은 빈 면이다. 그리고 이안은 꿈 생각을 떨칠 수 없다. (p. 91)

이안은 꿈을 꾸었다. '너무 이상한 꿈이어서 오히려 꿈이라고 믿기지 않는, 꿈에서 깬 뒤를 꿈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런 꿈' (p. 80) 이었다. 꿈에서 한 병실에 수정과 이안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기듯 들려오면서 그 속에 귓속을 파고드는 단어들이 몇 있었다. '이를테면 자살시도, 혼수상태' 같은 단어들이었다. (처음 읽을땐 그냥 정말 꿈이려니 했었는데, 두번째 읽을땐 이 구절도 한참 생각하게 된다...) 이안은 수정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만 수정은 그저 악몽이라며 무시한다. 하지만 이안은 꿈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만약 그게 현실이고 이게 꿈이면 어떡하지?

그럼 깨어나 봐.

뭐라고?

이게 꿈이고 그게 현실 같으면, 여기서 깨어나 보라고, 해 보라고, 지금 당장.

...

안 돼? 못 하겠어?

...

그럼 이게 어떻게 꿈이냐?

...

깨지도 못하는 꿈이 어떻게 꿈이냐 그건 정말 꿈이어도, 꿈이 아닌 거야. (p. 91, 92)

'수정이 저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이유를 이안은 알 수 없다. 그런 수정의 반응에 자신이 슬프고도 기쁜 느낌을 받는 이유도 알 수 없다. (p. 92)'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대화는 중요한 대화다. 어쩌면 이 대화 뒤에 바로 결말로 갔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꿈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다. 적어도 수정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렇다. 둘은 '허수아비-인간'이 가득한 논을 마주하고 의견충돌이 일어난다.


이건 꿈이야. 꿈에서 깨야 해.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있어.

너 미쳤구나.

그 끔찍한 일들을 다시 겪을 수는 없어. 이번에는 이겨내지 못할 거야.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이안이 대답한다. 회복이라는 단어에 수정의 눈이 시려진다. 앓고 있는 줄 몰랐다.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들이 깨어 있을 때에도 들리기 시작했어. 나는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려는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다한 건 최선이 아니야? 이안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끔찍한 일들이 이어지는 동안 내가 느낀 건 행복이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정말 더 이상은 싸울 수 없어. 네가 나를 위해 계속 뭔가를 죽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p. 94, 95)

수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선(눈-인간)을 베고 진을 빼가는(모기-인간) 존재들도 베었지만, 베어도베어도 끝이 없어보이는 허수아비(-인간)들이 눈앞에 산재해 있다면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는 끝이 없을 것 같다면 그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안?)로 인해 깨닫게 된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비어 있던 마지막 장에 초상화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수정의 명부에는 이안의 초상이, 이안의 명부에는 수정의 초상이 그려진다. 서로의 얼굴이다.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꿈에서 수정을 깨워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은 이안이 그런 것들을 깨닫는 중이라는 사실을, 저 아이의 착각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느꼈다. 수정은 이안의 눈에서 예전 청소부의 광기를 본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p. 96)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라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이안은 누구인가... 이안은 죽음을 향해 가는 소녀였다. 삶을 향해가는 수정과 정반대의 방향을 잡았다가 수정과 동행하게 된. 이안을 만난 순간에 대해 책의 앞부분에서 인상적으로 묘사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안은 수정에게 어떤 존재인가... 여튼, 그런 이안을 보며 수정은 변해간다.

수정은 두렵다. 저리 힘없이 베어질 것이 두렵고, 아플 것이 두렵고, 이안의 눈을 보며 죽어 가게 될 것이 두렵다. 자신이 죽은 뒤 자결할 이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두렵다. 두렵고 싶지 않다. 떨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p. 102)

자신을 향해 장검을 휘두르는 이안에게 수정은 결국 단검을 휘두르지만, 이안이라는 죽음의 위협앞에서 결국 삶을 선택했달까... 혹은 이안이라는 죽음을 구하기 위해 삶을 얻어냈달까... 수정 앞에 내일이 다시 나타난다. 내일을 올라타고 수정은 이안을 업고 달려가는 저승신의 뒤를 쫓아간다. 저승에는 그동안 수정과 이안이 베었던 존재들이 가득하다. 눈-인간들, 모기-인간들, 허수아비-인간들.

우리를 풀어 주면 우리가 살아날 텐데.

우리가 살아나면 다른 이들을 풀어 줄 텐데.

모든 이가 되살아나면 질서가 무너질 텐데.

그럼 저승의 신이 죽을 텐데.

그럼 저 아이는 죽지 않을 텐데. 갈 곳이 없으니까. 데려갈 이가 없으니까. (p. 106, 107)

수정의 선택은!

무너져가는 저승에서 저승신이 말했다. '깨끗이 쓸어버린다...라고들 하지. 그러나 내 오랜 경험에 미루어 보건대 '깨끗이' 쓸어 낸 자리란 없지.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들을 다 죽이고 나면 언제나 그들의 잔해가 남지. 부서진 조각들과 흘러나온 액체들로 그 '어딘가'는 오히려 더 엉망이 되곤 하지.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망치게 되는 경험. (p. 108)' 그러나 자신의 단명예언에 '싫다'라고 응수했던 수정이다. 이러한 저승신의 말을 그대로 들을리 없다.

망친 게 아니야.

구한 거야. 이룬 거야.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야.

나에게 그런 것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실제로 바꾸어 부르겠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 그러면 그건 더이상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 (p. 108, 109)

수정은 결국 이안을 구했다.

그렇게 자신을 구했다.

하지만...

잃었다... 무언가를... 그래서 얻었다... 달라진 무언가를...

이안이 말하던 진짜 수정은 여기 있는데, 진짜 이안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이 이해될 리 없었다. 나는 뒤늦게 소리치고 울고 발작했다. 이런저런 약들이 투여되고, 나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만 이번에는 꿈속에서도 이안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한 시간쯤 기절해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p. 119)

전래동화처럼 읽히던 글줄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현실을 묘사하고 있을때 순간 적응이 되지 않아 다시한번 잠시 멈춰야 했다.

수정의 모험담을 되짚으며 꿈인듯 아닌듯한 이야기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했다.

무수한 허수아비-인간들을 베어내고서야 죽음을 향한 길로부터도 삶을 향한 길로부터도 벗어나 자신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던 수정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사인'은 '질서'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 집 개, 새끼 낳았어.

네?

오늘 낳았어. 그래서 이름이 오늘이.

네...

저희 애는 개를 무서워해요.

엄마, 나 개 안 무서워해. 나 개 좋아해.

너 아주 어릴 때 집채만 한 개한테 쫓긴 이후로 개라면 벌벌 떨었잖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아니, 내 기억은 달라. 그리고... 상관없어, 엄마.

이 강아지, 네가 데려갈래?

병실에서 다른 침대 할머니가 수정에게 '오늘이'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수정은 생각했다. '개를 무서워했던 건 이안이다. (p. 121)' 라고. 할머니는 오늘이를 데려가 돌보게 해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래? (p. 122)' 라며 수정에게 제안했다.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개를 무서워하던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p. 122)' 한밤중 화장실에 가던 할머니는 수정의 탁자에 불쑥 백설기를 놓고 갔다.

어떤 이별은 서로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발생한다.

칼은 나를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살리거나 죽이지만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 (p. 125)

소설을 읽고나서 글로 정리할때 (내 글을 뭐 몇사람이나 보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결말을 스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작고 얇은 책을 이토록 길게 정리하면서 거의 결말까지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 그나마 정리가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래도 딱히 걱정이 되진 않는다. 설사 결말을 안다해도 나의 어설픈 해석이 마치 이 책의 요약을 읽었다는 느낌을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말을 알고 읽어야 오히려 한번의 독서로 이 책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 읽기를 추천한다)

'작가의 말'은 '앞서간 이들이 지금은 더없이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p. 127)'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수정의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수정이들의 '사인'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말이다.

책의 말미에 윤경희 평론가의 긴 해석이 덧붙여져 있는데, 개인적으로 평론가들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글은 꽤 흥미롭게 읽혀졌다. '연명담의 현대적 재구성과 재해석' 이라는 제목에 맞게 다양한 '연명담' 이야기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고.

각별하고도 대등한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떠나 목숨을 걸고 온갖 기이한 모험을 겪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자연의 생의 원리와 영생의 신성성 사이 어딘가에서 단순히 수명 연장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으로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색한다는 점에서,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으며 한반도의 연명담뿐만 아니라 약4800년 전의 고대 수메르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p. 148)

개인적으로 <길가메시 서사시>를 좋아하는데, <단명소녀 투쟁기>를 이 서사시와 연결짓다니... 음... 좀 과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여하튼 흥미로운 평론이었다. '<단명소녀 투쟁기>는 대부분 참여자들 사이의 비밀로 남는, 단명하는, 그러나 참여 주체의 진심 어린 몰입과 창작의 의지만큼은 다른 어떤 이야기 장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오늘날의 주요한 서사적 활동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덧없이 공중에 흩어지는 이야기의 기억들이 조금 더 오래 생존하도록 한다. 이야기의 목숨이 늘어난다. (p. 150)' 라는 평론가의 (바람을 담은) 넘치는 칭찬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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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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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한 소시민을 둘러싼 세계

아일랜드는 대체 어떤 땅일까? 조너선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 내가 아는 아일랜드 작가들은 다 엄청난 문제적 작가들이다. 이제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클레어 키건.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들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 11)

'이 소설의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해 클레어 키건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p. 127) -옮긴이의 글 中-'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 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독자가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전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첫 문단이 적절하게 느껴지고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주문과 설명을 담은 저자의 긴 메일을 이 책 번역을 시작할 때 출판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p. 128, 129) -옮긴이의 글 中-

소설은 첫문장이 중요하다던데 이 작품은 특히나 그 부분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짧은 이 소설을 천천히 읽으며 옮긴이의 글을 읽기 전부터도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내가 읽은 책 또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옮긴이의 설명을 읽고나니 꼭 그래야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 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p. 129) -옮긴이의 글 中-' 그렇다. 이 소설은 시에 가까웠다. 사용한 문장 자체가 상징적이라던가 암시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장들은 길지 않고 평범하며 평이했다. 하지만 그 문장들로 알게 된 상황들과 심리들을 이해하기에는 한번 더 곱씹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보일듯 말듯 베일에 가려진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내듯 이 소설은 어렴풋이 짐작하다 마침내 깨달아지는 그런 멋이 있었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 24)

소설은 목재상 빌 펄롱의 일상과 삶의 궤적을 따라 이야기된다.

펄롱은 성실한 노동자였고 온정있는 이웃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였고 믿음직스런 남편이었다. 무엇보다도 펄롱은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 44)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p. 15)'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p. 22)'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p. 29)'

펄롱의 어머니는 열여섯살에 미혼모로 펄롱을 낳았고, 펄롱이 열두살때 사고로 세상을 뜰때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펄롱이 산타할아버지께 받고 싶었던 선물은 받은 적 없지만 그렇다고 선물을 아예 못받고 자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때에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딸들을 보며 펄롱은 이유모를 심란함에 빠져들었다. 이 심란함은 수녀원에 뗄감 배달을 하고 온 이후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춥고 건조해지자 사람들은 수녀원이 자아내는 모습이 그림 같다고,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다고 말했다. 주목과 상록수에 서리가 곱게 내려앉은 데다가, 어째서인지 수녀원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새들이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늙은 정원사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목자수녀회는 기초 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했다. 또 수녀원에서는 세탁소도 겸염했다. 직업학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지만,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다. (p. 48)

그곳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알려진 것처럼 학생이 아니라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 하기도 했다. (...)

다른 사람들은 그곳이 그냥 모자 보호소라고,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미혼모를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부유한 미국인에게 입양시키거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고 그렇게 외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 그게 수녀원에서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p. 49)

카더라 통신은 늘 무성한 뒷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펄롱이 사는 마을에 있는 수녀원은 그런 뒷말들의 중심에 있었다. 아무도 내놓고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소문이 흘러나오는 곳이 그곳이었다. 펄롱은 '그런 말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지만 (p. 50)' 늘 외상 없이 결제를 제때 해주는 고마운 거래처로만 수녀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평소보다 이른 배달을 갔을 때 처음으로 보게 된다. 소녀를. 소녀들을. 그리고...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어디가 되었든 나는 데려갈 수 없어"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 해줘요?"

여자아이에 관해 뭔가 묻고 싶었던 마음이 솟았다가 결국 사라졌고 펄롱은 그냥 수녀가 달라는 대로 영수증을 써주고 나왔다. (p. 51, 52, 53)

하지만 펄롱은 수녀원을 나와서 길을 잃었다. 늘 다니던 곳이었는데도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고 최고 속도로 차를 운전하다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한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 (p. 54)

그날 밤 펄롱은 어쩌다 아내 아일린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게 됐는데, 아일린은 긴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우리 딸들? 이 얘기가 우리 딸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냐"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미시즈 윌슨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걱정할 게 많았겠어? 그 큰집에서 연금 받으면서 편히 지내는 데다가 농장도 있고 일은 당신 어머니하고 네드가 다 해줬는데. 세상ㅇ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아니었냐고." (P. 55, 56, 57)

다시 수녀원에 배달을 가게 됐을 때, 펄롱은 고요한 새벽녘임에도 평화로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날 한 소녀를 만났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p. 81)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p. 93)

펄롱은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우직한 사람이라 자신의 감정 조차 제때 잘 파악하지 못하곤 그냥 넘겨버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펄롱은 끊임없이 생각하곤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일상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자주 바라봤다. 주변의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을 둘 다를 끌어냈다. (p. 102)

생판 남을 통해 알게 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새삼스레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해 보며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p. 111) 라는 생각을 하게 된건 펄롱에게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p. 117) 느꼈으면서도 펄롱은 선택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 119)

그 선택으로 인해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p. 119)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p. 120)' 펄롱의 삶이 그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이 소설이 펄롱의 삶을 표면적으로 서술한 이유일 것이다. 그 삶으로 암시적으로 전달하고 했던 것...

펄롱은 미스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p. 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p. 120)' 하지만 또한 펄롱은 알았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자신의 사소한 선택들도 결국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 121)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이나 수십년간 가톨릭교회와 아일랜드 국가가 함께 운영한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120쪽)'의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언어가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구조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도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위태롭다. (p. 130)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도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p. 131) -옮긴이의 글 中-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12월에 세상 모든 교회와 성당에 이 책이 읽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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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 데일 카네기 에센스 DALE CARNEGIE ESSENCE
김범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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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인간관계 고전에서 정제한 24가지 관계 법칙

저자는 10여년 전 관계에서 힘들었던 때 데일 카네기의 저서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으며 하는 일마다 되지 않는 날이 거듭되는 와중에 첫 책을 준비하고 있었어서 좌절과 불안 그리고 걱정만이 가득했던때였는데 그때 만난 데일 카네기의 조언은 저자에게 큰 힘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채을 펴내게 되었다고.

"데일 카네기의 훈련 과정을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당장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데일 카네기의 저서를 읽고 정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10년 이상 서른여 권의 커뮤니케이션 스킬, 인간관계 개선 등의 자기 계발 관련 도서를 출간한 바 있는 제가 데일 카네기의 책과 훈련 과정을 토대로 최우선적으로 읽고 또 실생활에 적용할 만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 관계가 이상해졌을 때, 사회 속에서 혼자만 멈춰진 느낌을 받았을 때 필요한 데일 카네기만의 인간 관계이론을 깔끔하게 재정리한 것이 이 책입니다." (p. 11)

<인생의 오후에는 적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라는 제목은 어찌보면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인생의 오후가 아니어도 인생의 전반에 걸쳐 적보다는 친구가 더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제목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사실 자기계발서라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읽어보면 새롭다기 보다 당연한 말들인 것 같은데, 그렇게 당연한 말들로부터 인생의 어느 순간엔 큰 힘을 얻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내 눈길이 갔던 구절들도 분명 최근의 내 상황에 비추어져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들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입에서 "아니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순간 인간관계의 파탄은 시작된다. (p. 21)' 라든가

'자기보다도 똑똑한 사람들을 주변에 둘 수 있었던 자, 이곳에 잠들다 (p. 35)' 라는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라든가

'논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p. 231)' 같은 말들.

그러니 이 책은

평소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 이들에겐 평소처럼 따듯한 조언들을

평소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지 않는 이들에겐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조언들을

건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보가 하는 짓의 목록입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렸다.

둘째, 그래서 그들을 비난한다.

바보가 되겠습니까?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현자가 되고 싶을 겁니다. 현자가 되는 방법은? 바보가 하는 짓을 반대로만 하면 됩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생각은 옳다.

둘째, 그래서 그들을 인정한다. (p. 221~222)

  • 본 리뷰는 21세기북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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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것들은 어떻게든 진화한다 - 변화 가득한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 생태의 힘
마들렌 치게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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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가득한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 생태의 힘

저자의 전작 <숲은 고요하지 않다> 를 흥미롭게 읽었었기에 신작에 대한 소식을 듣고 궁금했었다. 이번엔 어떤 책일까.

전작이 제목을 읽고 숲에 대한 책이려니 예상했다가 막상 읽고보면 음~?! 하며 저자가 동물생태학자라는 사실에 새삼 눈길이 갔던 것처럼, 이번책이 제목을 읽고 '진화'에 대한 책이려니 하는 섣부른 예상을 했다면 그 예상 고이접어 넣어두기를. ㅎ

2010년에 나는 의욕이 하늘을 찌른 젊은 생물학자로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도시토끼를 연구할 생각이었다. (...) 그러나 단 4년 만에 나는 의욕과 젊은 패기를 모두 소진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p. 7)

저자는 베를린에서 생활하다가 연구를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생활은 적응되지 않았고 나날이 불행해져가는 가운데 번아웃으로 정신을 잃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에서 토끼들은 저자와 달리 몹시 행복해보였다. 왜 저자는 적응을 하지 못하는 도시에서 토끼들은 잘 적응하게 됐을까? 이 책은 이른바 '토끼 딜레마'에 대한 저자의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는 비자카드만큼 유용하고 코카콜라만큼 만족스러운 단어다. 그런 만큼 확정적이지 않고 확정할 수도 없다" -리처드 슈웨더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에서 토끼들의 행복한 삶과 저자의 그렇지 못한 삶의 차이에는 '스트레스'가 핵심적 요소였기에 저자는 이 스트레스에 대한 탐구부터 집중적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들만 가득 안고 있던 저자였지만 '진화생물학의 안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보았더니 새로운 의미가 열렸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얘기를 나누려고 한다. (p. 35)' 다시말해보자면 이 책은 '스트레스'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시각으로 토끼와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셀리에는 스트레스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을 바로잡으려고 오래도록 노력했다. 자신이 발견한 사실 즉 Stressor라고도 부르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처하는 자연의 반응이 얼마나 중요하고 긍정적인지 거듭 강조했다. 아무리 단순한 형태라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레스가 없는 생명체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p. 51)

스트레스 연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셀리에는 자신이 발견한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 결과물을 발견하여 세상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나 연구할 수록 부정적이기만 한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은 스트레스의 긍정적 효과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최근 들어 그 긍정적 효과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나타났고 진화생물학 분야에서도 연구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그 긍정적 효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그 결과가 제시된 두괄식이고,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원제는 다음과 같다.

DIE UNGLAUBLICHE KRAFT DER NATUR. Wie stress Tieren und Pflanzen den Weg weist

자연의 놀라운 힘. 스트레스가 동물과 식물에게 길을 알려주는 방법

도시 고유의 논리 이론은 결국 생태계 속성을 드러낸다. 다시말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도시는 제각기 그곳에 정확히 잘 맞을 법한 특정 행동 방식과 사고방식을 낳는다. 아울러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해본다는 얘기도 내가 스트레스 연구에서 이미 살펴본 내용이다. 우리 몸이 매일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p. 126)

토끼는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의 특성에 잘 맞출 수 있었고 저자는 그렇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어떤 곳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살아가면서 유기체는 스트레스 요인에 스트레스 반응으로 대처한다. 이 스트레스 반응은 적응으로 이어져 언젠가부터는 서식지에서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진다. 스트레스 반응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스트레스 반응은 외부의 스트레스 요인이 있더라도 높은 적합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자연의 놀라운 힘이다. (p. 154)'

오랫동안 생물학자들은 구조가 더 복잡한 동물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모든 생명체는 일정 수준의 적합성을 지닌다.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그러지 못하고, 유전물질을 다음 세대에 얼마간 물려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외부의 영향으로 적합성이 떨어질 수 있고, 그 결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p. 156)

유기체 라고 하면 지적 능력을 가진 동물을 연상하기 쉽다. 이 책에서 줄창 나오는 토끼처럼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예로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달팽이를 예로 든다. 달팽이 뿐만 아니라 물고기, 식물도 이어서 등장한다. 그러다 발견한다. '한마디로, 식물은 스트레스 요인을 관리하는 데 진정한 고수다. (p. 178)' 이런 전개는 전작 <숲은 고요하지 않다>와 비슷한 서술 방식인 것 같다.

페니키아인이 기원전 1100년경에 최초로 에스파냐에 사는 야생토끼를 보고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에는 토끼들은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에서만 발견되었다. 에스파냐라는 이름은 이 시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에스파냐에 처음 상륙했을 때, 페니키아인은 그곳에 사는 야생토기가 어쩐지 낯익었다. 에스파냐 토끼들은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바위너구리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바위너구리는 크기가 토끼만 하고 외모는 마멋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페니키아인은 에스파냐를 '이쉬판인'이라고 불렀는데, 대략 '바위너구리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쉬판인'은 나중에 라틴어로 '히스파니아'가 되었다. 그러나 페이키아인이 틀렸다. 야생토끼와 바위너구리는 가까운 친척이 아니다. (p. 192)

저자가 다양한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다양한 사례들을 예로 들다보니 방만하게 읽히는 느낌도 없잖아 있는데, 덕분에 얻어걸리는 지식도 있어 재밌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기원이 야생토끼였다니. ㅎㅎ

셀리에는 끊임없이 스트레스가 삶의 양념이요 수프에 뿌리는 소금이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스트레스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사실 스트레스를 피할 수도 없다. 당신이 무엇을 하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계속 살아 있으려면, 그리고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하려면 항상 에너지가 필요하다. 긴장을 싹 풀고 잠을 푹 자더라도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장은 계속 피를 펌프질해야 하고, 위장은 음식을 소화해야 하고, 근육은 당신이 호흡할 수 있게 가슴을 움직여야 한다. 당신이 꿈을 꾼다면 뇌조차 좀처럼 쉬지 않는다." 셀리에의 말이 옳다면, 최고의 적합성을 위한 완벽한 장소는 있을 수 없다. (p. 214)

그렇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식물과 동물에게 새롭게 살 길을 찾도록 해주었고 그렇게 그 결과들을 바탕으로 이 책이 쓰여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책 제목을 '동물과 식물의 회복 탄력성'이라고 붙이지 않도록 출판사에 내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왜냐고? 조사한 뒤로 생태적 회복 탄력성 개념에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회복 탄력성은 개별 생명체가 아닌 전체 생태계에 있다. 생태적 회복 탄력성 원리를 알고 나니 항상성이 떠올랐다. 항상성은 생명체의 최상위 균형이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몸의 전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한다. 건강한 생태계에서는 흙, 공기, 물과 상호작용이 균형을 유지하는 모든 생명체가 바로 이런 기관이다. 생태적 회복 탄력성이 클수록 생태계는 마침내 균형이 깨지기 전까지 더 많은 스트레스 요인을 견뎌낼 수 있다. 기관들이 생태계의 손상을 신속하게 복구하기에 모든 것이 평소처럼 작동할 수 있다. (p. 256)

위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 이 책의 원제는 DIE UNGLAUBLICHE KRAFT DER NATUR. Wie stress Tieren und Pflanzen den Weg weist 이고 이것을 번역기에 돌리면 '자연의 놀라운 힘. 스트레스가 동물과 식물에게 길을 알려주는 방법' 이라고 나온다. 알다시피 한국어판 제목은 <숨 쉬는 것들은 어떻게든 진화한다> 이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데, 그러면 내 삶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나의 재능은 무엇일까? 나아가 이 재능을 어떻게 발달시며야 하고, 다른 생명체도 모두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자신이 어떤 '동물'이고 행복하려면 어떤 조건을 채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생명체를 괴롭히는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p. 280)

뒷표지에 보면 '긴장과 불안, 스트레스 가득한 하루를 살아가는 도시의 우리들에게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생물이 전하는 다정한 위로' 라고 되어 있는데,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이 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프랑크푸르트를 행복하게 뛰어다니던 토끼들은 녹지관리 '정원사'들에 의해 개체수가 거의 남지 않았고, 저자는 프랑크푸르트에 결국 적응하지 못하여 다른 도시로 떠났다. 게다가 매일 아침 저자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기도 하다. 하지만 바라게 되긴 한다. 우리의 삶과 야생의 삶이 너무 다르고 너무 멀어지는 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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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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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거리

그 막막한 우주에서 '너'를 사랑하는 일

배명훈이 선보이는 새로운 차원의 스페이스 오페라

SF소설을 읽으며 배명훈 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지는 꽤 됐지만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작년 <미래과거시제>라는 책이 처음이었다. 읽고나서 어찌나 놀랐던지. SF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이런 작품세계를 이제야 읽게되다니 싶어서.

지난번에 읽은 책이 단편집이라 이번엔 장편을 읽기로 하곤 어찌나 기대가 되던지 ㅎㅎㅎ. (장편 이라기엔 짧지만 그래도 책 한권에 한 작품인 책이니까 장편으로 부르기로;;;;)

아, 이래서 UES(지표면연합)나 궤도연합군 사령부가 나 같은 우주 출신을 경계하는 거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 건 아니야. 왜 우리는 서로의 우주를 배우려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손쉽게 상대방의 우주로 날아갈 수 있게 된 시절이 또 언제 있었다고?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지금도 웃음이 나. 너를 만나러 지구에 갔을 때 내가 지구 중력을 견디지 못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반쯤 기어다녔던 일 말이야. (p. 14)

서간문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우주군 장교로 우주함대에서 살고 있는 '나'가 지구에 살고 있는 연인 '너'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고백이자 일기이다.

지구인이지만 아마도 우주선에서 나고 자라 무중력 상태에서의 생활이 더 자연스러운 '나'는 지구에서 나고 자라 중력이 없다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너'를 비롯한 지구인들과의 차이에 대해, 다양한 상황속에네 내내 그렇게 '나'와 '너'의 차이에 대해 내내 생각하게 된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서로에게 서로는 '외계인' 같았달까.

"자네가 반란군 사령관이라면서?"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요"

"그럴 만도 해. 감찰군 사령관은 함대를 무슨 해병대쯤으로 생각하더라고. 아, 그러게 자꾸 우주선을 배라고 부르지 말자니까. 함대라는 말도 쓰지 말고"

"함대가 해병인가요? 해병이 뭐죠?"

"아무튼 우리가 해병은 아니니까"

"그럼 뭔데요?"

"공군이지. 당연히" (p. 24, 26)

함대 작전 장교 모임 이름으로 '반란군'이란 사교 모임에서 사령관인 '나'는 감찰군에게 그 모임에 대한 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냥 만나서 술이나 퍼마시는 모임'에 트집을 잡는다고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럴만도 한 상황이었다. 바야흐로 30여년에 걸친 우주함대의 전쟁준비가 완료되었고 '예언'에서 언급된 '적'이 나타날 시기가 다가왔던 것이다. 더구나 지구에서 '감찰군'이 대거 파견되어 오면서 내부적으로도 혼란과 예민이 증폭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소설적 상황들보다도 '해병'과 '공군'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무척 재미있었다. 우주선을 배로 보느냐 비행기로 보느냐에 대한 관점도. ㅎㅎㅎ

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금쪽같은 휴가를 받자마자 170시간을 날아가서 40시간 동안 너와 함께한 다음 다시 180시간을 날아서 복귀하려는 나에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아. 한 번 더 휴가가 생긴대도 또 그렇게 할거야.

"보고 싶었어"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나도"하고 네가 나에게 대답해주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사랑한다는 너의 말에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44초가 걸리고 그 말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또 다시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 까지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이야. (p. 35~36)

우주 함대가 우주 전쟁을 벌이는 이 때에도 가장 빠른 속도는 광속이었고, 광속으로 간다해도 우주적 먼 거리는 서로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 소통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 붙어 있을 때에도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달랐지. 내가 하는 말을 자꾸만 못 알아듣는 거야.

"알아들었다니까, 나도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뭘 확인하고 싶은 건데? 심장이라도 꺼내달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봤어. 그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기만 했지만,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런 거였어. 그냥 사라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날아온 거리만큼, 그 지긋지긋한 우주 공간만큼 사랑하는 거라고. 그래서 너를 한자리에 매어두고 싶다고.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었어. 정말로 너를 매어두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부분이 애매했지.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어. 그건 버글러의 모순을 해결한다고 전달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영혼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p. 37)

새삼 이 책의 제목이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청혼> 이고 그래서인지 자꾸 두 연인 간의 소통과 감정에 대해 초점을 두고 읽게 되는데, 사실 이 작품의 재미는 그보다 '우주 전쟁'이었고 이 작품의 핵심은 서로 다른 두 진영간의 입장차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뭐고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음에 나타났을 때 저들이 뭘 노릴지는 대강 알고 있었거든. 그래, 우리 함대 말이야. 적어도 어디서 싸우게 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지. (p. 55)

정체모를 적들이 불시에 나타나 공격하는 상대는 '나'가 속한 함대의 대장 '데 나다 장군' 이었다. 그들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어쨌든 전해내려오는 '예언서'의 내용과 몇가지가 맞아떨어지면서 감찰대는 더욱 '데 나다 장군'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교모임 반란군이 아니라 진짜 반란군의 수괴로서.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싸움이었어. 소리라도 들렸으면 좀 달랐을 텐데,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밖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해. 아무 예고도 없이, 별 긴장감도 느끼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거야. 중간 과정도 없이 그냥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 변론도, 죽음을 피하려는 몸부림도, 정의의 칼을 받으리라는 외침도, 전부 생략된 채 신속하게 진행되는 최후의 즉결심판. (p. 64)

우주선과 우주선의 무기와 전술과 우주전쟁의 직접적 교전 등에 관한 서술을 읽다보면 우주적 정적이 느껴지면서 엄청난 전쟁인데도 굉장히 고요하게 읽혀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잔혹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빛을 나르는 악마들의 무도회처럼' (p. 65) 잔혹 과 아름다움, 빛과 악마 등 서로 안 어울리는 요소들이 한 문장으로 묶여 있듯 그렇게 전쟁과 고요는 함께 느껴진다. 그렇다고 우주가 고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지던 무렵에 말이야.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했어. 궤도에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에서 방사선 같은 걸 검출하게 하면 지상에서 발생한 핵폭발의 흔적을 바로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어느 나라에서 어떤 규모로 핵실험을 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지 않겠어? 그 생각이 받아들여져서, 마침내 인공위성을 띄우게 됐어. 그런데 그 인공위성이 가동되고 첫 관측 결과가 지상에 있는 기지로 전송된 순간 사람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대. 여기저기 너무 많은 곳에서 핵폭발 신호가 감지됐거든. 벌써 핵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어지러운 신호가 말이야. 알고 보니 그 신호는 대부분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거였대. 우주 어디에선가는 늘 끊임없이 대폭발이 일어나니까. 어떤 건 수백억 년 전부터 날아온 거고, 또 어떤 건 몇십만 년을 날아온 거였겠지. (p. 87)

책속에 나오는 우주의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재미있긴 하지만 저자가 뒤에 작가의 말에서 말했듯 이 책을 과학책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곤 했다. 우주가 이렇다고? 하면서. 이렇게 우주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적응해가고 있지만, 우주전쟁은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혹시 지금 적 함대 뒤쪽에 중력렌즈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p. 107)

"그게 뭐죠? 설마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있었다는 건가요?" (p. 108)

한 가지는 분명했어. 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적 함대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 (p. 109)

SF소설이고 우주전쟁 이야기이긴 하나 마냥 공상적이고 상상적이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지는 소설이라 그런지, 블랙홀을 통한 이동이라든가 타임슬립이라든가 평행세계라든가 하는 (지금으로선)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 함대에 대한 과학적 추정도 무척 현실적으로 읽혀졌다. 하지만 이게 또 재밌는 것이 이러한 과학적 추정이 소설 속 예언서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설정이다. 동시에 또 재밌는 것이 그렇게 과학과 비과학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인의 감정까지도 자연스레 연결된다는 점이다.

거기에 너의 중력장이 남아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내 눈에만 보이는 중력장이.

너는 모르겠지. 그런 건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함대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지구 출신과 나 같은 우주 태생 사이에 가로놓인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수도 없이 봐왔어. 그건 말이야, 사소해 보여서 더 본질적인 그런 차이야. (p. 115)

'나'와 '너'의 차이,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사이에 '중력'을 바탕으로 한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감찰단과 우주함대의 입장차이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차이와도 닮아 있었다. 여튼, 그러는 사이 적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는데..

"예언서에는 다른 차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주의 저편이라고"

"그렇지, 그렇게 믿어왔지. 물론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우리 때는 예언서를 외우게 했으니까. 그런데 UES에 새롭게 떠오르는 가설은 말이야. 그 너머에 있는 게 우주 저편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시간의 저편, 말하자면 저 함대는 다른 차원에서 온 게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왔다는 거지" (p. 123)

같은 함선, 같은 무기, 같은 전술 ... 적들은 누구일까? 외계인일까 아닐까? 아니, 적군이긴 한 걸까?

마지막 교전 이후, '나'는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곧 궤도연합군 조사단이 여기로 올 거야. 아니, 조사단이 아니라 조사군이라더군. 그리고 진실이 아닌 진실 하나를 만들어낼 거야. 반란군 사령관 데 나다에 관한 이야기. 그래도 너만은 끝까지 나를 믿어줘야 해.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말이야. (p. 149)

'인류가 만들어낸 첫 번째 우주 함대가 깨부수려 했던 건 외계에서 날아온 정체 모를 함대가 아니라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그 두 인류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거리의 장벽이었으니까' (p. 150) '나'는 지구출신 감찰단장 보다 우주태생 데 나다 장군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고 말할 생각이었어. (p. 152)' 그걸 아는 장군은 '나'를 마지막 교전 때 다른 함선에 옮겨 타게 했다. 그러니 '나'는 더욱 이렇게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p. 154)' 라고 '너'에게 마지막 안녕을 적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

2013년에 이 책이 출간됐을 때는 작가의 말을 따로 넣지 않았다. 많은 독자가 사랑하게 된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나에게도 마음에 드는 표현이어서, 그 뒤에는 아무 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사이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 개정판에는 나만 기억하는 발표 당시의 맥락에 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p. 155) -작가의 말 中-

무척이나 신선하게 읽은 소설이었는데 이 책이 십년 전의 작품이었다니~! '작가의 말'을 생략하는 이유가 마지막 문장 때문일 수도 있었구나! 개정판으로 이번에 새로 내면서 거의 모든 문장을 다시 쓰는 정도로 표현을 고쳐 썼다는데, 처음의 작품이 어땠을 지 궁금해졌다. 시간을 따로 내어 언젠가 꼭 초판본으로 찾아 읽어봐야 겠다.

여하튼 소설에서도 그러했듯 작가의 말에서 중요한건, 맥락에 대한 두 입장에 대한 '차이' 였다. 이 작품 발표 당시 문학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SF작가에 대한 평이 그렇게 상반되었었다니...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는 '순문학을 주로 다루는 잡지의 주목받는 지면에 우주 전쟁 이야기를 실을 수 있는 소설가'같은 것이었는데, 그 우주 전쟁 이야기가 바로 이 작품 <청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개의 문학장 사이에 놓은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어느 쪽 문학장에서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p. 156)' 작가의 말이 작품해설은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 '해설'에 들어맞는 내용들이었다.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도 신기했던건, 순수 문학과 SF 문학 사이에서의 '차이'를 이런 작품으로 소설적으로 형상화낼 수 있는 작가의 작가적 능력이었다. 그 작가적 능력을 발휘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만큼이나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도 훌륭했는데... '함대가 나아갈 우주를 채우는 건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 속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새 독자들의 몫이다. (p. 162)'

ps. <미래과거시제> 라는 책도 표지가 소설들의 내용을 함축적이면서 온전히 다 담고 있어서 신선했는데 이번 책도 그랬다. 표지가 참으로 작품의 내용과 잘 어울려서 그또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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