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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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전원을 매료시킨 신인 작가 현호정의 첫 소설

작년에 현호정 작가의 <고고의 구멍>이란 작품을 읽고 참 독특한 서사구성을 하는 신인작가로구나 싶어 이름을 기억해두었었다.

지인들과 <단명소녀 투쟁기>라는 연극을 보기로 했는데 원작이 현호정 작가의 <단명소녀 투쟁기> 라는 소설이라고 한다. 원작 소설이 있는 공연은 원작을 보고 가는 것이 제맛! 알고보니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소설이자 첫 수상작이었다.


책 뒤표지에 실린 심사위원들의 멘트가 심상찮았다. 구병모, 이기호, 정소현 소설가의 심사평이 짧게 실려 있는데 이 작가들이 이렇게 칭찬을 하는 작품이라니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등단작부터 이런 인정과 호평을 등에 업은 작품은 과연 어떤 소설일까? 그런 작품을 쓴 작가는 과연 어떤 성향일까?


구수정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의 이름은 북두다.

북두칠성의 북두를 쓰는 그는 근방에서 가장 용한 입시 전문 점쟁이였다. 종이에 사주를 풀어 확률을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진실을 선언하는 반신이었다.

방석에 엉덩이를 대기도 전에 합격할 대학을 말해 준다던 북두였으나 수정이 자리에 앉아 왠지 부정하게만 들리는 부스럭 소리를 내 가며 가방에 지난 달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낼 때까지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p. 9)

표제의 단명소녀 이름은 구수정이다. 열아홉살의 소녀 수정이가 혼자 입시 전문 점쟁이를 찾아갔다는 설정부터 작가가 경험한 세대는 아직 한창 자라고 있는 세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어린?! 작가의 작품세계는 생각보다 굉장히 구수하다. 마치 전래동화 같달까.

야, 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싫다면요? (p. 12)

공부도 곧잘 하고 점쟁이를 혼자 찾아갈 정로 대담한? 소녀가 자신의 '단명'예언에 '싫다면?'이라는 대꾸를 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캐릭터적 성격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쉽게 짐작했을때 사실 뻔한 반응은 아니다. 이 뻔하지 않은 서사진행방식이 이 소설을 단숨에 읽게하는 매력인 것 같다. 결코 재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난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한 이야기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장을 덮을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아지지는 않았다.

북두는 '죽음은 소나기처럼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지평선에서 먹구름과 비가 솨아아 달려오는 모양으로 죽음도 다가온다고. 그러므로 만약 구름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린다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듯이, 죽음과 반대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면 죽음을 조금,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늦출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죽음의 이동 속도가 구름의 이동 속도보다 훨씬 느리다는 것이었다. 원망스러운 점은 비구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소멸하는 데 반해 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p. 12, 13)

북두는 수정에게 남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간다면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북망산을 등지고 걷는 길, 차갑고 딱딱한 달 대신 따뜻하고 무른 해를 향해 가는 길, 전 생애에 걸친 길이 될 것이다. (p. 13)

수정은 그렇게 갑작스레 길을 떠나게 된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죽는다니 당장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달까. 입시 점을 보러 왔다가 갑자기 죽음을 거스르는 길을 떠나게 된 수정에게 북두 옆에서 도우미를 하던 은주는 백설기 백개를 가방에 담아주었다. '백설기가 백개니까, 만수무강하라'는 거라며 가방 가득 담아준 떡을 바라보며 수정은 '불경스럽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교복을 입은채 떡을 가득 지고 길을 떠난 수정이 가장 처음 맞닥뜨린 사람은 '술집과 숙박업소들 틈에 자리한 떡볶이집에서 선 채로 떡볶이를 먹던 양복 차림의 남자' 였다. 그가 거칠게 수정의 가방을 잡아당기며 세웠을때 울음이 터진 수정을 구해준건 사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한 커다란 개 한마리였다. 개는 수정의 목덜미를 문 채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러자 개의 옆구리에서 날개 한 쌍이 터져 나오며 펼쳐졌다. 다른 말에는 반응이 없다가 '내일'이라는 단어에만 반응하는 개를 보며 수정은 개를 '내일'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낯선 들판에서 떡을 나눠먹던 수정이와 내일앞에 누군가 걸어왔다. '이안' 이었다.

훗날 수정은 이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누구와 나눌 수 있는 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순간이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보는 첫 순간. 아직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순간. 각자의 마음속 상처에 관하여 서로가 완전히 무죄인 유일한 순간. 이안과의 '순간'은 근사했지만 좀 긴 편이었다. 상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일에 이안은 수정만큼이나 능한 아이였기에. (p. 24)

'이안은 수정처럼 열아홉 살.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왜요?" "죽으려고요" (p. 27)' 자신이 가려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친구를 만난 수정은 '혹시 살러 가요?' 라는 이안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부끄러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싶을 정도 였다. 게다가 수정은 딱히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p. 29)' 그래서 수정은 '딱히 살고 싶다기보다는 죽고 싶지가 않아서' '싫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좀 억울하다고 해야 할까, 이해를 못했다고 해야 할까' 라고 답했다. 늙은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수정에게 이안이 말했다.

물어는 봤어요?

네?

그쪽 사인요. 그쪽한테 죽는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그 점쟁이한테든 스님한테든 왜 죽는지 물어봤냐고요.

... 물어보지 않았다. (p. 29, 30)

그러고보니 느닷없이 '단명'을 예언받은 순간부터 나름 휘몰아치던 전개는 순식간에 독자를 일시정지 시킨다. 그러네? 왜 죽는다고 했을까? 어떻게 죽는다고 했을까? 왜 묻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독자는 수정보다 더 무겁게 질문을 떠안고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수정은 왜 '단명소녀'였을까? 라는...

살러간다는 대답을 하기 싫은 수정에게, 딱히 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스무 살에 덜컥 죽기는 억울한 수정에게 '단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수정이 떠난 길은 살기위해서 였을까 그저 갑자기 죽는 다는 말에 싫다고 대꾸하고 싶은 어린 치기 같은 반항이었을가...

아니면... 성인이 된다는 의미의 스무살을 코앞에 둔 나이에 자신이 직면해야 할 세상에 대한 마지막 준비같은 어쩌면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같은 것이었을까...

어떻게 하겠느냐고 스님이 물었어. 나는 잠시 고민했어. 뭔가 더 물어도 스님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내 엄마인지, 애인인지, 어디 있는지 그런 걸 물으면 스님이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말이야. 그래서 나는 별로 구체적이지 않은 질문을 했어. '그 사람도 저를 사랑했나요?' 스님은 잠시 생각하다 그렇다고 했어. 고개도 끄덕이셨어. 하지만 곧 반성하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어. 그때 스님은 좀 이상했어. 분명 내 입에 물그릇을 대 줄 때까지만 해도 아주 늙은 노스님처럼 보였는데, 한편 우리 도래의 어린 스님으로도 보였던 거야. 그러나 나는 그 현상에 관해 묻지는 않았어. 스님은 계속 말했어.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사랑한 적 없다고, 그러나... 네가 있어서 분명 좋았을 거라고... 수정아, 바로 그때 내 마음속에 죽겠다는 결심이 서게 된 거야. 나를 사랑한 적 없는 사람, 그러나 나로 인해 기쁘고 좋았던 어떤 사람에게 복수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비록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원하던 일일지라도. (p. 38)

이안은 기억이 없다. 오늘 산 중턱에 있는 절에서 눈을 떴다. 이안을 구해준 스님은 북두였다. 북두는 이안에게 알려주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요즈음 나를 심하게 학대했고, 결정적으로 오늘 나를 이 산으로 데려와 떠밀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눈을 떴다고' (p. 38) 이안은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결심했다고.

이 책은 두번 읽으면 좋을 책이다. 마지막 장면을 알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으면 새롭게 이해되어지는 것들이 참 많다. 처음 읽을 땐 온통 물음표였던 구절들이 두번째 읽을 땐 그럭저럭 이해되어져 갔다. 그러다 이 대화쯤부터는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 있었다. <데미안>.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는 수정과 이안의 관계를 되짚어 보게 한다. 뭐... 나는 그랬다.

수정과 이안 그리고 내일이 빈집에서 떡을 나눠먹으며 하룻밤 휴식을 취하던 밤 누군가 문을 열었다. 일곱명의 어린 아이들 이었다. 배고프다는 아이들에게 떡을 나눠주었지만 먹다가 싸움이 난 아이들은 가방을 통째로 들고 가버렸다. 그런데 누군가 또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일곱 노인들 이었다. 떡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에 죽을 끓이기로 한다. 그렇게 죽을 나눠먹은 노인 중 한명이 빠르게 늙어가더니 자연사했다. 내일은 나머지 여섯 노인의 뒤를 따라 가버렸다. 그런 '내일'을 보며 '수정은 작은 바위처럼 단단해진 심장을 꺼내 내일에게 던지고 싶었다. 그런 방식으로 내일과 자신을 동시에 아프게 하고 싶었다. (p. 46)' 그런 수정과 이안 앞에 '북두'가 다시 나타난다.

갈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서로 다른 것을 원하는 둘이 가야 할 곳은 같다.

도망치는 자는 붙잡히게 되지만, 쫓는 자는 붙잡게 된다.

함께 저승으로 가거라. 힘을 합쳐 문 앞에서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렴. (p. 48, 49)

수정과 이안은 저승의 신을 사로잡게 된다. 저승의 신은 살려달라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무질서' 해진다면서. 저승신을 협박하여 수정과 이안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방법을 제안 받는다.

검은 명부는 자신을 죽게 만들 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 흰 명부는 자신을 살게 만들 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야. 하나하나 찾아가서 그들을 다 죽여. 그 순간 수정 너는 천수를 얻고, 이안 너는 영면을 얻을지니. (p. 60)

그렇게 저승신은 이안에게 바랄 희자가 새겨진 큰 칼을, 수정에게 바랄 망자가 새겨진 작은 칼도 함께 건네준다. 그런데 명부를 살펴보던 둘은 깜짝 놀란다. '두 명부의 내용이 같다. 두 명부에 적힌 자들이 같다. (p. 61)' 두 사람은 갈길이 정반대인줄 알았으나 앞으로도 내내 동행하게 될 인연이었던 것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고, 이 판타지 모험기를 한 사람의 내면으로 보자면 두 자아의 서로에 대한 발견 혹은 성찰 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희망'도 함께였다.

수정이 주머니에서 명부를 펼쳤다. 맨 앞장에 그려진 악사의 얼굴, 그 아래 적힌 이름과 대략적인 삶의 내력이 바늘처럼 수정의 심장을 찔렀다. 악사의 얼굴이 담임 교사를 닮았다는 사실을 수정은 깨닫는다. G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담임은 아직 학생이거나 막 기업에 입사한 친구들과 어울려 종종 유흥가를 배회하곤 했다. 수정은 밤에 종종 그와 마주쳤다. 그는 끝없이 무언가를 떠들어 대던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쌔액 웃으며 수정의 머리를 보란 듯이 쓰다듬었다. 취한 손길은 잘 멈춰지지 않아 종래엔 수정의 머리가 툭, 아래로 꺾였다. 그때마다 수정은 모멸과 분노를 누르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그의 가족을 상상하곤 했다. (p. 68)

소설의 앞부분에서 수정이 처음 만난 유흥가의 늙어가는 남자가 기억나는 구절일 것이다. 수정이 만난 그 남자는 어쩌면 젊은 담임의 내일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멸감을 주었던 취한 손길... 수정은 가차없이 악사를 찌른다. 악사를 묻고 난 수정과 이안 앞에 한없이 평온한 얼굴의 농부들이 등장한다. 일곱명의 농부.

그 악사는 글러먹은 놈이었거든

몰랐소? 그 악사가 부른 노래는 전부 우리 마을 사람 하나하나에 관한 추문이잖아

그가 부른 노래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야. 악사의 노래와 소문으로 명예랄지 순결을 잃은 자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그게 어디 악사의 잘못인가? 그렇고 그런 삶을 산 이들의 잘못이지. (p. 70, 71)

담임 교사의 얼굴을 한 악사... 악사가 부른 노래는 모두 마을의 소문, 소문 중에서도 추문... 어쩌면 담임은 음악 선생이었을까? 그가 내뱉은 말들 속에서는 어쩌면 추문도 혹은 그를 둘러싼 소문 중에는 어쩌면 추문이 있지 않았을까? 밤이면 유흥가를 배회하는 젊은 남선생과 여고생에 관한 어떤...

수정과 이안은 얼떨결에 자신들이 새로 온 악사라고 둘러대게 되고 환영회를 한다는 농부들을 앞서 뱃놀이를 시켜준다며 마을의 청소부가 등장한다. 셋은 함께 배를 타고 강의 한가운데 멈춰서게 되는데 청소부가 돌변한다. 청소부는 마을의 '질서'를 위해 정해진 인원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믿고 있었다.

험한 밤을 보내고 작은 섬에 닿게 된 둘은 명부에 그려진 초상과 이름이 모두 바뀐것을 알게 된다. 초상들은 이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반인반수를 모아 놓은 도감처럼, 넘겨도 넘겨도 괴물뿐' (p. 82) 이었다. 이제 둘의 여정은 괴물퇴치담이 되어간다. 수정의 사인에는 아마도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저지른 어떤 일이 있었던게 아닐까...

처음으로 맞닥뜨린 종족은 '눈-인간' 이었다.

수정은 질식과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주저앉는다. 이안이 칼을 봅아 나선다. 베는 족족, 그들은 쓰러진다.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으며 상처를 내도 반격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본다. 쳐다본다. 살펴본다. 그리고 기억한다. 몇몇은 금세 잊지만 몇몇은 평생토록... (p. 83)

수정은 어쩌면 어떤 시선으로부터 시선들로부터 죽음과도 같은 위협을 느꼈던 것일까? 수정의 사인은 어쩌면 '시선'이었을까?

수정의 등허리를 꽉 껴안고 척추 깊숙이 제 침을 꽂는다. 곧바로 수정은 무언가, 자신의 몸에서 아주 귀하고 중요한 무언가 울컥울컥 빨려 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이 모기-인간을 죽인다 해도 결코 돌려받을 수 없을 것이다. (p. 87)

두번째로 만난 괴물종족은 '모기-인간'이었다. 수정의 사인은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가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아주 귀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걸까?

남은 페이지는 단 두 장이다. 한 면에는 '허수아비-인간'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맨 뒷장은 빈 면이다. 그리고 이안은 꿈 생각을 떨칠 수 없다. (p. 91)

이안은 꿈을 꾸었다. '너무 이상한 꿈이어서 오히려 꿈이라고 믿기지 않는, 꿈에서 깬 뒤를 꿈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런 꿈' (p. 80) 이었다. 꿈에서 한 병실에 수정과 이안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기듯 들려오면서 그 속에 귓속을 파고드는 단어들이 몇 있었다. '이를테면 자살시도, 혼수상태' 같은 단어들이었다. (처음 읽을땐 그냥 정말 꿈이려니 했었는데, 두번째 읽을땐 이 구절도 한참 생각하게 된다...) 이안은 수정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만 수정은 그저 악몽이라며 무시한다. 하지만 이안은 꿈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만약 그게 현실이고 이게 꿈이면 어떡하지?

그럼 깨어나 봐.

뭐라고?

이게 꿈이고 그게 현실 같으면, 여기서 깨어나 보라고, 해 보라고, 지금 당장.

...

안 돼? 못 하겠어?

...

그럼 이게 어떻게 꿈이냐?

...

깨지도 못하는 꿈이 어떻게 꿈이냐 그건 정말 꿈이어도, 꿈이 아닌 거야. (p. 91, 92)

'수정이 저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이유를 이안은 알 수 없다. 그런 수정의 반응에 자신이 슬프고도 기쁜 느낌을 받는 이유도 알 수 없다. (p. 92)'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대화는 중요한 대화다. 어쩌면 이 대화 뒤에 바로 결말로 갔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꿈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다. 적어도 수정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렇다. 둘은 '허수아비-인간'이 가득한 논을 마주하고 의견충돌이 일어난다.


이건 꿈이야. 꿈에서 깨야 해.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있어.

너 미쳤구나.

그 끔찍한 일들을 다시 겪을 수는 없어. 이번에는 이겨내지 못할 거야.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

이안이 대답한다. 회복이라는 단어에 수정의 눈이 시려진다. 앓고 있는 줄 몰랐다.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들이 깨어 있을 때에도 들리기 시작했어. 나는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려는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다한 건 최선이 아니야? 이안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끔찍한 일들이 이어지는 동안 내가 느낀 건 행복이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정말 더 이상은 싸울 수 없어. 네가 나를 위해 계속 뭔가를 죽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p. 94, 95)

수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선(눈-인간)을 베고 진을 빼가는(모기-인간) 존재들도 베었지만, 베어도베어도 끝이 없어보이는 허수아비(-인간)들이 눈앞에 산재해 있다면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는 끝이 없을 것 같다면 그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안?)로 인해 깨닫게 된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비어 있던 마지막 장에 초상화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수정의 명부에는 이안의 초상이, 이안의 명부에는 수정의 초상이 그려진다. 서로의 얼굴이다.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꿈에서 수정을 깨워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은 이안이 그런 것들을 깨닫는 중이라는 사실을, 저 아이의 착각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느꼈다. 수정은 이안의 눈에서 예전 청소부의 광기를 본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p. 96)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라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이안은 누구인가... 이안은 죽음을 향해 가는 소녀였다. 삶을 향해가는 수정과 정반대의 방향을 잡았다가 수정과 동행하게 된. 이안을 만난 순간에 대해 책의 앞부분에서 인상적으로 묘사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안은 수정에게 어떤 존재인가... 여튼, 그런 이안을 보며 수정은 변해간다.

수정은 두렵다. 저리 힘없이 베어질 것이 두렵고, 아플 것이 두렵고, 이안의 눈을 보며 죽어 가게 될 것이 두렵다. 자신이 죽은 뒤 자결할 이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두렵다. 두렵고 싶지 않다. 떨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p. 102)

자신을 향해 장검을 휘두르는 이안에게 수정은 결국 단검을 휘두르지만, 이안이라는 죽음의 위협앞에서 결국 삶을 선택했달까... 혹은 이안이라는 죽음을 구하기 위해 삶을 얻어냈달까... 수정 앞에 내일이 다시 나타난다. 내일을 올라타고 수정은 이안을 업고 달려가는 저승신의 뒤를 쫓아간다. 저승에는 그동안 수정과 이안이 베었던 존재들이 가득하다. 눈-인간들, 모기-인간들, 허수아비-인간들.

우리를 풀어 주면 우리가 살아날 텐데.

우리가 살아나면 다른 이들을 풀어 줄 텐데.

모든 이가 되살아나면 질서가 무너질 텐데.

그럼 저승의 신이 죽을 텐데.

그럼 저 아이는 죽지 않을 텐데. 갈 곳이 없으니까. 데려갈 이가 없으니까. (p. 106, 107)

수정의 선택은!

무너져가는 저승에서 저승신이 말했다. '깨끗이 쓸어버린다...라고들 하지. 그러나 내 오랜 경험에 미루어 보건대 '깨끗이' 쓸어 낸 자리란 없지.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들을 다 죽이고 나면 언제나 그들의 잔해가 남지. 부서진 조각들과 흘러나온 액체들로 그 '어딘가'는 오히려 더 엉망이 되곤 하지.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 망치게 되는 경험. (p. 108)' 그러나 자신의 단명예언에 '싫다'라고 응수했던 수정이다. 이러한 저승신의 말을 그대로 들을리 없다.

망친 게 아니야.

구한 거야. 이룬 거야.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야.

나에게 그런 것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실제로 바꾸어 부르겠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 그러면 그건 더이상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 (p. 108, 109)

수정은 결국 이안을 구했다.

그렇게 자신을 구했다.

하지만...

잃었다... 무언가를... 그래서 얻었다... 달라진 무언가를...

이안이 말하던 진짜 수정은 여기 있는데, 진짜 이안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이 이해될 리 없었다. 나는 뒤늦게 소리치고 울고 발작했다. 이런저런 약들이 투여되고, 나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지만 이번에는 꿈속에서도 이안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나는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한 시간쯤 기절해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p. 119)

전래동화처럼 읽히던 글줄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현실을 묘사하고 있을때 순간 적응이 되지 않아 다시한번 잠시 멈춰야 했다.

수정의 모험담을 되짚으며 꿈인듯 아닌듯한 이야기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했다.

무수한 허수아비-인간들을 베어내고서야 죽음을 향한 길로부터도 삶을 향한 길로부터도 벗어나 자신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던 수정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사인'은 '질서'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 집 개, 새끼 낳았어.

네?

오늘 낳았어. 그래서 이름이 오늘이.

네...

저희 애는 개를 무서워해요.

엄마, 나 개 안 무서워해. 나 개 좋아해.

너 아주 어릴 때 집채만 한 개한테 쫓긴 이후로 개라면 벌벌 떨었잖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아니, 내 기억은 달라. 그리고... 상관없어, 엄마.

이 강아지, 네가 데려갈래?

병실에서 다른 침대 할머니가 수정에게 '오늘이'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수정은 생각했다. '개를 무서워했던 건 이안이다. (p. 121)' 라고. 할머니는 오늘이를 데려가 돌보게 해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래? (p. 122)' 라며 수정에게 제안했다.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개를 무서워하던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p. 122)' 한밤중 화장실에 가던 할머니는 수정의 탁자에 불쑥 백설기를 놓고 갔다.

어떤 이별은 서로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발생한다.

칼은 나를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살리거나 죽이지만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 (p. 125)

소설을 읽고나서 글로 정리할때 (내 글을 뭐 몇사람이나 보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결말을 스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작고 얇은 책을 이토록 길게 정리하면서 거의 결말까지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 그나마 정리가 되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래도 딱히 걱정이 되진 않는다. 설사 결말을 안다해도 나의 어설픈 해석이 마치 이 책의 요약을 읽었다는 느낌을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말을 알고 읽어야 오히려 한번의 독서로 이 책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 읽기를 추천한다)

'작가의 말'은 '앞서간 이들이 지금은 더없이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p. 127)'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수정의 '사인'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수정이들의 '사인'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말이다.

책의 말미에 윤경희 평론가의 긴 해석이 덧붙여져 있는데, 개인적으로 평론가들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글은 꽤 흥미롭게 읽혀졌다. '연명담의 현대적 재구성과 재해석' 이라는 제목에 맞게 다양한 '연명담' 이야기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고.

각별하고도 대등한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떠나 목숨을 걸고 온갖 기이한 모험을 겪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자연의 생의 원리와 영생의 신성성 사이 어딘가에서 단순히 수명 연장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으로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색한다는 점에서,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으며 한반도의 연명담뿐만 아니라 약4800년 전의 고대 수메르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p. 148)

개인적으로 <길가메시 서사시>를 좋아하는데, <단명소녀 투쟁기>를 이 서사시와 연결짓다니... 음... 좀 과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여하튼 흥미로운 평론이었다. '<단명소녀 투쟁기>는 대부분 참여자들 사이의 비밀로 남는, 단명하는, 그러나 참여 주체의 진심 어린 몰입과 창작의 의지만큼은 다른 어떤 이야기 장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오늘날의 주요한 서사적 활동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덧없이 공중에 흩어지는 이야기의 기억들이 조금 더 오래 생존하도록 한다. 이야기의 목숨이 늘어난다. (p. 150)' 라는 평론가의 (바람을 담은) 넘치는 칭찬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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