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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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한 소시민을 둘러싼 세계

아일랜드는 대체 어떤 땅일까? 조너선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 내가 아는 아일랜드 작가들은 다 엄청난 문제적 작가들이다. 이제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클레어 키건.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들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 11)

'이 소설의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해 클레어 키건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p. 127) -옮긴이의 글 中-'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 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독자가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전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첫 문단이 적절하게 느껴지고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주문과 설명을 담은 저자의 긴 메일을 이 책 번역을 시작할 때 출판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p. 128, 129) -옮긴이의 글 中-

소설은 첫문장이 중요하다던데 이 작품은 특히나 그 부분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짧은 이 소설을 천천히 읽으며 옮긴이의 글을 읽기 전부터도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내가 읽은 책 또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옮긴이의 설명을 읽고나니 꼭 그래야 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 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p. 129) -옮긴이의 글 中-' 그렇다. 이 소설은 시에 가까웠다. 사용한 문장 자체가 상징적이라던가 암시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장들은 길지 않고 평범하며 평이했다. 하지만 그 문장들로 알게 된 상황들과 심리들을 이해하기에는 한번 더 곱씹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보일듯 말듯 베일에 가려진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내듯 이 소설은 어렴풋이 짐작하다 마침내 깨달아지는 그런 멋이 있었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 24)

소설은 목재상 빌 펄롱의 일상과 삶의 궤적을 따라 이야기된다.

펄롱은 성실한 노동자였고 온정있는 이웃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였고 믿음직스런 남편이었다. 무엇보다도 펄롱은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 44)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p. 15)'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p. 22)'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p. 29)'

펄롱의 어머니는 열여섯살에 미혼모로 펄롱을 낳았고, 펄롱이 열두살때 사고로 세상을 뜰때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펄롱이 산타할아버지께 받고 싶었던 선물은 받은 적 없지만 그렇다고 선물을 아예 못받고 자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때에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딸들을 보며 펄롱은 이유모를 심란함에 빠져들었다. 이 심란함은 수녀원에 뗄감 배달을 하고 온 이후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춥고 건조해지자 사람들은 수녀원이 자아내는 모습이 그림 같다고,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다고 말했다. 주목과 상록수에 서리가 곱게 내려앉은 데다가, 어째서인지 수녀원에 있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새들이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늙은 정원사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목자수녀회는 기초 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했다. 또 수녀원에서는 세탁소도 겸염했다. 직업학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지만,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다. (p. 48)

그곳에 관한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알려진 것처럼 학생이 아니라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 하기도 했다. (...)

다른 사람들은 그곳이 그냥 모자 보호소라고,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미혼모를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부유한 미국인에게 입양시키거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고 그렇게 외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 그게 수녀원에서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p. 49)

카더라 통신은 늘 무성한 뒷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펄롱이 사는 마을에 있는 수녀원은 그런 뒷말들의 중심에 있었다. 아무도 내놓고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소문이 흘러나오는 곳이 그곳이었다. 펄롱은 '그런 말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지만 (p. 50)' 늘 외상 없이 결제를 제때 해주는 고마운 거래처로만 수녀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평소보다 이른 배달을 갔을 때 처음으로 보게 된다. 소녀를. 소녀들을. 그리고...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어디가 되었든 나는 데려갈 수 없어"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 해줘요?"

여자아이에 관해 뭔가 묻고 싶었던 마음이 솟았다가 결국 사라졌고 펄롱은 그냥 수녀가 달라는 대로 영수증을 써주고 나왔다. (p. 51, 52, 53)

하지만 펄롱은 수녀원을 나와서 길을 잃었다. 늘 다니던 곳이었는데도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고 최고 속도로 차를 운전하다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한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 (p. 54)

그날 밤 펄롱은 어쩌다 아내 아일린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게 됐는데, 아일린은 긴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우리 딸들? 이 얘기가 우리 딸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냐"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미시즈 윌슨이 우리처럼 생각하고 걱정할 게 많았겠어? 그 큰집에서 연금 받으면서 편히 지내는 데다가 농장도 있고 일은 당신 어머니하고 네드가 다 해줬는데. 세상ㅇ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 아니었냐고." (P. 55, 56, 57)

다시 수녀원에 배달을 가게 됐을 때, 펄롱은 고요한 새벽녘임에도 평화로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날 한 소녀를 만났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p. 81)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p. 93)

펄롱은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우직한 사람이라 자신의 감정 조차 제때 잘 파악하지 못하곤 그냥 넘겨버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펄롱은 끊임없이 생각하곤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일상에 대해 삶에 대해 그리고 자주 바라봤다. 주변의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을 둘 다를 끌어냈다. (p. 102)

생판 남을 통해 알게 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새삼스레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해 보며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p. 111) 라는 생각을 하게 된건 펄롱에게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p. 117) 느꼈으면서도 펄롱은 선택했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 119)

그 선택으로 인해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p. 119)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p. 120)' 펄롱의 삶이 그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이 소설이 펄롱의 삶을 표면적으로 서술한 이유일 것이다. 그 삶으로 암시적으로 전달하고 했던 것...

펄롱은 미스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p. 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p. 120)' 하지만 또한 펄롱은 알았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자신의 사소한 선택들도 결국엔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 121)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이나 수십년간 가톨릭교회와 아일랜드 국가가 함께 운영한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120쪽)'의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언어가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구조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도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위태롭다. (p. 130)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도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p. 131) -옮긴이의 글 中-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12월에 세상 모든 교회와 성당에 이 책이 읽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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