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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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이라는 작품을 통해 애나 번스 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북아일랜드 분쟁을 배경으로 작가만의 독특한 여성서사를 보여주었던 <밀크맨>은 여러면에서 인상적인 작품이었기에 첫 장편 소설이라는 <노 본스>에 관심이 갔다.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받은 가제본은 비록 본문의 50% 정도 분량이었지만 애나 번스 특유의 표현은 여전했다.

첫 페이지의 주석에서 대문자로 시작하는 트러블은 벨파스트 분쟁에 있어 알아두어야 할 단어인 것 같다.

the Troubles -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약30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둘러싼 혼란기. 영국 본토인 북아일래드 내에서 친영국 진영과 친아일랜드 진영이 무력 충돌을 일으키며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3,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트러블이 있을 거야"

"오늘밤에 시작한대. 데리에서는 벌써 시작했고. 엄청 위험해진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우리가 여기 나와서 놀 수가 없다는 말이야" (p. 4)

어린 아이들이 골목에 모여서 놀고 있다. 새로운 소식을 나르며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트러블'에 대해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친구들에게 전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게 정말로 일어날지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다. 그저 평소대로 골목에서 놀 뿐이었다.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와 반겼다. 차와 빵을 대접받고, 차와 케이크, 차와 비스킷, 차와 감자칩, 차와 레모네이드, 차와 담배를 대접받았다. 어딜 가든 차가 나왔다. (p. 17)

제임시가 다음번 파견을 나왔을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제는 영국군이 아도인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어쨌거나 아도인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영국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쓰레기통 뚜껑을 쾅쾅 치고 호루라기를 불고 주먹을 휘둘렀고 밤이면 '살인자아아'하고 부르짖기도 했다. (p. 29)

1969년 영국군이 처음 벨파스트에 도착했을때 사람들은 군인들을 반겼다. 군인들이 순찰할 때면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건네주곤 했다. 하지만 곧 분위기는 바뀌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작가는 그저 계속 현재 시점으로 그 순간을 표현할 뿐이다. 긴 시간의 북아일랜드 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긴 시간 동안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은 소설속에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이유는 몰라도 폭력에 또 폭력이 이어지는 장면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1971년이었고 아무 동기도 없어 보이는 범죄가 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시체가 많이 나왔고 일부 신문이 뒤쪽 면에 기사가 부지런히 실렸다. (p. 30)

"아니 안돼. 가라. 넌 잉글랜드 놈이잖아. 이제 오지 마" (p. 40)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벌어지는 동기 없는 범죄 가운데 또 하나가 일어났을 뿐. (p. 41)

북아일랜드의 아도인 이라는 마을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톨릭계와 개신교가 길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곳에서는 친척관계일지라도 적일 뿐이었다. 너무 쉽게 목숨이 없어지곤 했지만 마을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모두가 보았어도 영국군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핸래티 선생만큼이나 못생긴데다 병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도 매한가지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다르게 창조하시므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미쳤는데, 방금 일어난 엄청난 시간 낭비가 기가 막히다는 듯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p. 44)

주요 화자는 어밀리아 이다. 어밀리아의 네댓살 시절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어밀리가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한 여자의 인생사로 읽혀지도 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라서 그랬을까? 소설 속엔 제정신인 어른이 단 한명도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학교 선생님은 애들을 때리고 욕하며 머저리 취급하고 부모는 자식을 죽일 만큼 패거나 형제자매사이엔 폭력을 넘어 강간까지 이루어진다. '하지만 엄마는 절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은 도무지 아무것도 이해를 못한다. 어리석고 늘 딴 데에 정신이 팔려 있고 생각이 없는 족속들이다. 아무것도 모른다. 항상 뭐든 엉뚱하게만 받아들인다. (p. 72)' 도무지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너무나 폭력적인 환경에서 어밀리아만이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하기 까지 할 지경이었다.

언니한테는 그저 재미있는 일이기만 하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는 정말 끔찍한 사람이 있다. 언니하고 나는 세상을 사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언니가 어떤 일들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게 나에게는 놀랍기만 했다. 언니 세계에서는 폭력이 비타민제를 먹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나하고는 정반대였다. (p. 105)

그렇게 어밀리아는 어쨌든 성장했다. 성장할수록 폭력이 너무나 끔찍할 따름이라서 어떻게든 피하며 살고 싶었다. '모두가 다 그쪽 성향인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서든 당연히 그랬다. 소요에 참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있었다. 종교적이거나 뭔가 영혼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 그러니까 사이에 낀 사람들, IRA는 아니어도 이런 시기에는 늘 동참하는 특수한 동조자들도 있어서, 이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나는 안한다고 말하기는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p. 111)' 어밀리아는 그 어느 쪽에도 서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한 태도는 공격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었다. 개인적 감정이 안 좋아도 대의적으로는 다른 명분을 내세우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였다.

"무슨 일이야?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대?" 하며 숙덕거렸다. 자기들끼리 사라진 아이들의 수와 정체를 헤아리면서 죽은 소년의 미스터리를 순식간에 풀었다. 당연히 목격자는 한명도 없었고, 경찰이 사람들을 붙들고 신문을 했지만 대개, 늘 그러듯이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p. 138)

'결투나 개인적 원한에 대해서는 아무 일 않고 묻어두는 게 최선이었다. (p. 146)' 딱히 큰 사건이 없어도 사람들은 수시로 죽어나갔다. 하다못해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으로도 죽었고 소년들의 장난에도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영국군 이나 경찰 모르게 폭력을 묻고 장례식을 치를 뿐이었다.

다들 첨한 일이다, 끔찍한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영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다음의, 새로운, 과격한 죽음에 묻혔다. (p. 147)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일상에서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수 없이 마주치더라도 따로 떨어져 서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갈등시키고 폭력을 부르게 하는지는 알수 없다. 그저 폭력들이 나열 또 나열되는 소설을 읽으면서, 비록 절반을 읽었을 뿐이지만 나머지 뒷부분의 절반은 점점더 증폭된 폭력이 점점더 잔혹한 죽음이 나오리라는 것이 예상되는 바 그저 마음이 저릿해져옴을 참을 뿐이었다.

<노 본스>는 <밀크맨>으로 2018년 부커상을 수상한 애나 번스의 첫 번째 소설이다. (중략) 이 소설은 1969년 영국인이 처음 북아일랜드에 왔을 때부터 1994년 정전 선언 때까지, 벨파스트 안의 아도인이라는 작은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을 한 장면 한 장면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형식으로 한줄기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형태가 아니라 분절된 단편들로 이루어졌다. (p. 236)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는 보통 남자들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주도하는 군사적 움직임을 따라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노 본스>는 어밀리아를 비롯해 가장 약한 존재들이 폭력의 무게를 가장 무겁게 짊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략) <노 본스>는 17년 뒤에 <밀크맨>이라는 독창적 문체와 강력한 목소리의 완성도 높은 소설로 재탄생할 토대와 씨앗을 고스란히 갖춘 소설이다. '노 본스'(No Bones)라는 원제를, '본'(Bone)이 소설에서 여러가지 중의적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그대로 음차해서 제목으로 삼았다. 소설에서 '본'은 아도인에 있는 어떤 장소의 이름이기도 하고, 여러차례 등장하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라는 뜻의 숙어 'no bones about it'에서 가져온 말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 '뼈'(bone)는 이 소설에서 여자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앙상한 몸, 욕구도 희망도 없는 몸, 섹슈얼리티가 거세된 몸을 뜻하기도 한다. (p. 238~239) -옮긴이의 말 중-

가제본에서 소설은 비록 원문이 절반 정도만 실렸으나 '옮긴이의 말'은 전문이 실린 듯 하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소설의 뒷부분도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어밀리아는 거식증이 걸릴 정도로 자신의 신체적 상태를 통해 폭력을 상징했는데 후반부에 가서는 정신적 상태마저 무너지는 것 같다. 그럴만한 시대였을 것 같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시대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었다.

ps. 뒷표지의 구병모 작가의 추천사가 너무 훌륭하다. 소설을 잘 쓰는 작가는 추천사도 이렇게 잘 쓰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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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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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없이 당도하는 불안에 ___ 대비하는

조용히 무너져가는 세계에 대한 ___ 상상

'녹색갈증' 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환경에 대한 소설인가 지구재난SF인가 뭐 그런 예상을 했었다. 썩 멋진 제목으로 보여서 책에 대한 궁금증이 더 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났는데도 왜 제목이 '녹색갈증'인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검색해보니, 헐, '녹색갈증' 이라는 전문용어가 있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감정으로, 미국의 생물학 박사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이 주장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을 말한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본능이라... 그래서 소설속에서 여주는 그토록 '산'을 이야기했던 것인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별 탈 없이 재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바라는 바도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음을 되새겼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다시금 윤조를 생각하지 않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의 사랑 윤조. 너는 나를 흥미진진하고 두근거리게 만들지만 사랑은 언제나 나를 망쳐왔다. 나는 오랫동안 문득문득 윤조를 불러내고 다시 없애버리는 일에 시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윤조가 내 머릿속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에 몰두했다. 최대한 윤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건 생각보다 쉬웠다. (p. 11~12)

프롤로그 中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13번째 작품인 이 책은 역시나 세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앞에 <프롤로그> 가 있다. <프롤로그>도 하나의 단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뒤에 이어지는 세편의 작품은 제목은 각각이지만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서술로 <프롤로그>가 소설속의 소설임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프롤로그>가 이 책을 대표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윤조'라는 인물을 '산'에 대입시켰을 때 등식이 성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먹어봐야 아는 사람' 중에 '똥'역할이었다. 사람들은 어딘가 독특한 기척을 맡고 내게 다가왔다. 특별한 능력도 매력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망설임 없이 떠났다. 그런 경험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나는 스스로 특별한 축이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사실은 별게 아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하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으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만은 잘해내고 싶었으나 마음 먹은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창 밖의 날씨가 바뀌었다. 특별한 사람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범한 줄 알았으나 이상한 사람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서처럼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어 윤조야. 내 업보 였다.

윤조와 항상 붙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던 건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윤조와 함께 있으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땀이 솟은 팔과 등, 그 위로 부는 바람,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 같은 게. 윤조만 바라보는 동안 가족, 다른 친구 등 인간관계는 단절되었다. 성적도 살아가는 모양도 엉망이었다. 윤조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거워서 내게 미래라는 시간이 있다는 걸 잊어 버렸다. (p. 13)

나는 훌륭하게 살 생각은 없었지만,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살고 싶었다. 윤조와 그냥저냥 지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윤조와 연을 끊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윤조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안하고 지루한 삶이 적성에 맞는 듯 했다. 잊고 있던, 혹은 잊었다고 믿었던 윤조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쯤이었다. (p. 14)

프롤로그 中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소설가 지망생인듯 하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결국 이도저도 아닌 지루한 삶을 살고 있다. '윤조'는 '나'에게 소설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나'의 소설 속 주인공인 '윤조'를 생각하면 신나고 설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삶에는 일상이라는 것이 필요했고 꿈은 밥먹여주지 않으니까 윤조와 이별한다는 것은 글쓰는 것을 접은 것과 같았다. 그렇게 '편안하고 지루한 삶'에서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윤조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글을 쓰고 그 작품이 최고일것만 같던 기분이 어린 시절 꿈이었고 그 꿈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 쳇바퀴돌듯 그저그런 일상을 살아내는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제대로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쓰여진 '나'의 이야기가 프롤로그 뒤에 이어지는 세 편의 이야기들이다. 설탕으로 만든 사람 - 빈뇨 감각 - 뒷장으로부터

땀이 잔뜩 났다. 동시에 소변이 마려웠고 목이 말랐다. 나는 눈을 감고 눈 안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은 곧 바람과 벌레들의 울음, 나뭇잎이 단체로 흔들리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리를 불러들였다. 산으로 가는 법을 알려준 건 윤조였다. 그리고 그 전에는 윤조의 할머니가 윤조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지루한 삶을 견디기 어렵단다" (p. 25)

프롤로그 中

'나'는 생각으로든 실제로든 그래서 '산'에 간다. 동네뒷산 같은 산에 올라가는 것도 등산이고 계절을 느끼러 유명한 산에 가는 것도 등산이다. 등산이라는 활동은 땀이 나고 목이 마르고 숨통이 트이는 그런 것이었다.

윤조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내 마지막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어떻게 결말을 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중략) 나갈 준비를 하면서 소설을 쓰려고 애썼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고 비참한 예감이 들었다.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p. 41)

설탕으로 만든 사람 中

<설탕으로 만든 사람> 에서 '나'는 예전 애인 명을 다시 만나게 되고 '산'에 가게 된다. 명은 '나'가 '윤조'의 이야기를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코로나19이후 국경일처럼 되버린 추모일이었고 사람들은 마스크와 떠난 사람들의 옷가지들을 태웠다. '나'는 명과 [설탕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그림책 이야기를 했다. 야산에서 마스크와 옷가지들을 태우는 연기를 보며 명은 울적해했고 '나'에게 말했다.

너 설탕으로 만든 사람을 녹인다고 했잖아. 왜 녹이려고 했어? 이유 같은 거 없이 그냥 녹이고만 싶은 거잖아. 우리 그래서 헤어졌던 거야. (p. 69)

설탕으로 만든 사람 中

'산'에 다녀온 후 명은 '나'에게 말했다. '네가 설탕으로 만든 사람을 어찌하든지 말든지 이건 기억해야 할 거야. 너도 그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거. 넌 자꾸만 그걸 까먹어. 아니, 자각한 적이 없지. 나는 이제 오지 않을 거야. (p. 73)' '나'는 안다. 이제 명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나'는 일기를 쓰든 소설을 쓰든 무언가를 쓰는 것에 열중했던 때가 있었지만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갈망하고 원하는 것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 (p. 73)' 을 이제는 안다. '나'는 명이 떠난 후 자신이 글을 쓴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나왔던 집으로 돌아간다. 허구의 세계인 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인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집은 고요하고 어떤 의미로는 평온했다. 일정한 균열감과 스트레스가 시야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의 안개처럼 낮게 깔린 나날이었다. (p. 87)

집에 온 뒤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낮과 밤 상관없이 아무리 소변을 봐도 잔뇨감이 들었고 금방 또 소변이 마려워졌다. 자다 깨고 화장실에 가고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고 물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가 깨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아무리 물을 덜 먹으려 해도 엄마와 언니를 보면 목과 가슴을 지나 배 깊은 곳까지 찬물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의식적으로 물을 입에 대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p. 88)

빈뇨 감각 中

세 모녀는 한집에 살지만 서로에 대해 알려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가 왜 그토록 자꾸 사랑을 하고 이별한 후 그토록 울고 또 우는지, 언니가 왜 또다시 방 안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지 알수가 없지만 묻지 않는다. '자꾸만 물을 마시게 되는 건 목이 말라서라기보다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웃긴 상황에서 웃음이 나는 것과 비슷했다. 목에 생선가지사 걸리면 밥을 한 숟가락 삼켜 가시를 밀어넣는 것처럼 나는 물과 함께 다른 걸 목구멍으로 삼켰다. 그렇게 믿으니까 정말 목이 마른 것도 같고 물을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p. 98)' 하지만 생선가지가 목에 걸렸을 때 밥 한 숟가락 푹 퍼서 삼킨다고 가시가 삼켜지던가? 빠질듯 말듯 걸린 가시는 계속 따끔거리고 밥을 떠 먹어도 켁켁 거려도 가시는 시원스레 빠지지 않곤 한다. 그러니 '나'가 아무리 물을 마셔도 삼켜지지 않는 것은 아무리 화장실에 가도 잔뇨감이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빈뇨 감각'이 '나'가 살아있다는 증명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겐 '윤조'가 필요하다.

대충 닫아 튕겨져 나온 두 번째 칸을 제대로 닫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 익숙한 보석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열어볼까 말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슬며시 뚜껑이 열렸다. 윤조가 보석함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당면처럼 쫄깃하고 흐물거리는 형태로 좁아터진 보석함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형상으로 굳어지는 모습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물함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윤조가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마치 내게 꿰어진 실을 감듯이. 나는 그 손가락에 이끌여 윤조 앞에 섰다. (p. 111)

빈뇨 감각 中

프롤로그 에 나왔던 '윤조'가 다시 등장했다. 프롤로그 에서 '윤조'가 '나'에게 보여주려 했던 할머니의 보석함은 '나'가 가지고 있던 보석함과 같은 것이었다. 열고 싶지 않아서 열지 않았던 보석함이 스르르 열리고 '윤조'가 왔다. 프롤로그에서 '나'가 윤조를 다시 만났을 때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던 것처럼 윤조는 '나'를 다시 만나자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마치 내게 꿰어진 실을 감듯이' 갑작스레 끝난 느낌의 프롤로그가 왜 그렇게 끝났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프롤로그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뒷장으로부터. 윤조가 다시 등장한 순간, 이 책의 마지막 작품명은 '뒷장으로부터' 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목이 말랐다.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윤조가 입을 열었다.

생선 가시가 걸린 채로 밥을 넘기면 목에 빵꾸 나. (p. 112)

빈뇨 감각 中

윤조는 '나'의 집에 원래 있던 식구처럼 자연스레 어울린다. 엄마도 언니도 윤조가 늘 거기 있었다는 듯이 군다. '보석함에서 기어 나온 게 윤조가 아니라 나인 것만 같았다. 엄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낮잠을 자는 엄마 곁에는 쪼그려 앉아 책을 읽는 윤조가 있었다. (p. 116) 해는 점점 길어지고 겨울방학을 누리는 아이들만 있는 것처럼 집은 평화로웠다. 어느날 새벽에는 언니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문을 열어보니 언니와 윤조가 맥주를 마시며 유투브를 보고 있었다. (p. 117)' '나'가 하지 못했던 행동을 윤조는 스스럼 없이 한다. 엄마를 위로하고 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는 그런 윤조를 보며 기이하게 여기지만 엄마와 언니는 오히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본다. 그럴때마다 윤조는 '나'를 보며 웃는다.

너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어?

웃기니까. 설마 내가 너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네가 쓴 소설 성장드라마 아니었잖아.

나는 윤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멀거니 그 애의 못된 표정만 쳐다볼 뿐이었다. 내 손안에서 썬캐처가 엉망으로 꼬여갔다.

나는 네가 설정해놓은 대로 자랐어.

윤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쏘아붙이듯 말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p. 119)

뒷장으로부터 中

'나'는 윤조의 등장과 윤조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윤조가 속한 곳에서 이렇게 말도 안되는 해피 엔딩이 이어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 셋이서 한 번도 착착 맞아떨어지게 살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이상해. 윤조 하나 나타났다고 옳다구나 하고 평범하게 돌아가는 게. 엄마는 울지 않고 언니는 혼자 침잠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 나는 괴로울까. 나는 나를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인 걸까. (p. 122)' 윤조는 '나'에게 함정인 것일까? 윤조와 함께 한 이 짧은 며칠이 윤조가 가져온 해피엔딩인 것일까? '아무리 걸어도 위로 향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p. 143) 뒤로 걷기는 쉬웠다. 뒷걸음질 치는 건 내 특기니까. 뒤로. 더 뒤로. (p. 145)' 그렇게 '나'는 프롤로그의 뒷장으로 간다.

윤조는 버릴 것과 남겨둘 것, 버리고 싶으나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버릴 생각 없어. 윤조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상자와 옷가지를 발로 밀면서 걸어왔다. 두 손에는 벽돌만한 크기의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그 안에 무수히 많은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p. 145~146)

뒷장으로부터 中

읽을 수록 황정은 작가 생각이 났다. 빈천하고 지난한 삶임에도 꾸역꾸역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자 윤조 라는 (그림자이던 유령이던) 허구적 인물의 활용과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결말이. 아니나다를까, 세 편의 작품 뒤 이어지는 작가의 <에세이 - 내 어깨 위의 도깨비>라는 글에서 최미래 작가는 황정은 을 언급한다.

나는 어쩌면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순자 씨의 도시락은 황정은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것으로, 소라와 나나와 나기의 뼈를 길러냈다.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건 꽤 오래된 소망이었다. 계란프라이 하나에 양념간장을 뿌리거나, 밥에 오이지만 수북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순자 씨의 도시락. 나는 여전히 순자 씨의 도시락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p. 154)

에세이 - 내 어깨 위의 도깨비 中

<계속해보겠습니다> 였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느껴졌던 황정은 작가에 대한 오마주 같은 기분이 <계속해보겠습니다> 에서의 순자씨 도시락 때문이었구나... 황정은 작가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것이 <계속해보겠습니다> 였는데... 그런 지난한 삶을 대체 왜 계속해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다가 결국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버리게 된 그 시작점이 된 작품이었는데...

1994년생으로 2019년에 등단한 이 신인작가의 작품은 사실 처음 읽었을 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문학평론가의 작품해설은 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역시 나는 평론가의 해설과는 맞지 않는듯;;;). 그래서 다시 읽으며 정리하다보니 그제야 이 책이 꽤 잘 쓰여진 작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에 대한 감상은 스포일러가 될 까봐 최대한 덜 자세히 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 책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수 밖에 없었다. 자세히 써도 어차피 줄거리가 스포될 것 같진 않은 작품이라서 ㅎ. 여하튼 그래야 이해가 되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그러니 이 작고 얇은 책을 처음 한번 읽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면 다시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처음에는 엮이지 않던 앞뒤가 보이고 엮이며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름 해피엔딩이라 (황정은 작가의 작품들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산'에 가보고 싶어질지도... 녹색갈증을 해소하러...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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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엄마 2022-07-0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고 갑니다~ ^^ 사실 책을 읽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어요 ㅠㅠ LILY 님의 서평을 읽고 나니 다시 책을 찬찬히 뜯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

LILLY 2022-07-02 11:15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북바이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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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만들고 소비하는가?

고전을 만든 시대와 사람에 관한 진실파헤치기

이 책의 제목이 왜 '책의 정신'인지 모르겠다. '정신'이라기 보다는 '사실' 이라던가 '정정'에 가까운 내용들이었다. 부제인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본문의 내용들을 더 잘 표현해주고 있다.

뒷표지 문구를 보면 '고전'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알려주는 책인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본문에 언급되는 책들 중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은 별로 없다.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책들에 대한 기준이 나와 달라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제목에 대한 의아함과 추천문구에 대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들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익숙하게 알려진 책과 그 책의 내용들이 사실은 왜곡되고 편협하고 의도적인 산물이었다는 프레임의 전환은 분명 중요한 포인트였다.

초판과 개정판의 가장 큰 변화는 2013년이 아니라 2022년이라는 출간 시기이다. 기본적인 내용이나 이야기 전개의 틀은 초판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문장을 다시 한번 더 고쳤다. 그 과정에서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한 개정 내용이다. (p. 4)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이다. (p. 5) -들어가는 말 中-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유명한 책이 사실은 그 정도의 가치가 없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치있는 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나를 다른 책들과 비교대조하여 정정해주는 책이다. 따라서 참고자료로서의 다른 책들이 무수히 필요하다. 저자는 '메타북'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쓰며 읽었던 메타북들을 소개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책을 자주 읽는데 한 권의 역사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참고자료들이 무수히 필요하곤 했었기에 '메타북'의 중요성에 백퍼 동의한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책 한권 제대로 읽는 데는 더 많은 메타북들이 필요한 법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지식의 세계에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읽어야 할 책의 세계는 확장되어 간다.

책은 다섯 가지의 주제로 이야기되고 있다.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 '과학혁명과 읽히지 않는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싱거운 논어' '본성과 양육의 갈등' '책의 학살' 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이중에서 '본성과 양육' 의 학자간 입장 차이에 대한 변화를 다룬 내용은 이 책에서 가장 분량이 긴 부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입장정리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짧고 굵게 아~! 하고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이런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평등이라는 낱말에 깊은 의미를 담지 못했을 것이며 정치적 성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전공한 문화사학자인 린 헌트는 그런 공감이 인권을 발명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만들어주었다고 설명한다. 그 배경에 음란한 소설의 독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의 발명에 특별히 영향력을 발퓌했던 세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 그리고 영국작가 리처드슨의 <파멜라> 와 <클라리사 할로> 이다. 세 작품은 모두 서간문으로 쓰인 연애소설이다. (p. 36)

중세말이라고 해야하나 근대초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프랑스대혁명 이전 시기에 사람들은 연애소설에 깊이 공감하며 열광했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계몽학자들도 당대에 인기있던 그런 연애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래서 '포르노소설이 프랑스대혁명을 일으켰다' 라는 문장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뒷받침한다. 당시에 일상적으로 읽히던 연애소설이 당대 사람들에게 평등의식을 고취시키던 공감의 소설이 지금은 포르노소설로 불리며 언제부턴가 배척되고 평가절하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보면 포르노그래피라는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p. 41)' 자연스러웠던 것이 부자연스러워지게 된 배경에는 항상 권력과 통제가 있었다. '국가권력은 왜 포르노그래피를 부정하는가? (p. 55)' 라는 저자의 질문은, 쾌락의 가치를 부정하고 노동의 가치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혁명의 시작을 대표하는 저작물로 꼽힌다. (중략)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역사상 가장 덜 팔린 책'으로 꼽힌다. (p. 78) 가장 큰 이유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p. 79)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측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 본격적인 작업의 결과가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였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일반인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쓰였다. 그것도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학술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속어로 썼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p. 89)

저자는 갈릴레오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실은 '상당부분 영웅화되었으리라고 봐야 한다. (p. 109)' 라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뉴턴의 <프린키피아> 도 설명한다. 뉴턴은 '뻔한 사실을 그대로 알아볼 능력도 없어 보이는 (p. 115)'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한 이후 <프린키피아>는 일부러 어렵게 썼다고 한다. 너무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을 위한 해설판이 필요했는데 이 해설판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먼저 등장했고 이후 프랑스 과학은 영국을 앞서기 시작한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프랑스어판의 표준으로 쓰인다는 이 해설판을 쓴 사람은 '볼테르의 애인이었던 에밀리 뒤 샤틀레라는 불세출의 여성 과학자 (p. 117)' 이다. 하지만 그녀는 갈릴레오처럼 영웅화되지 못했다. 영웅화는 커녕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당대에 새로운 이론에 대해 세상에 알려야 겠지만 읽히면 위험하기에 많이 읽히지 않도록 어렵게 쓴 책들, 그 책들을 대중화하기 위해 해설판을 쓴 사람들, 하지만 너무나 다른 결과들을 보며 읽고 읽힌다는 것은 다시한번 지배논리와 권력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누가 무엇이 읽혀지길 바라는지 생각해 보며 읽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망각하고 읽고 있는게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 문제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p. 132)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대단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론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 유명한 고전에는 재판에 대한 쌍방의 입장이 아닌 소크라테스의 일방적 입장만이 들어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닌데, '악법도 법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한 적 없는데 등등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그러니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문제를 만들었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소크라테스를 만들어냈을까.

이 오래된 고전들은 모두가 '편집된' 저작물이다. 편집의 원래 의미는 자료를 모아 좋은 것을 추려내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임의로 내용을 '누가'하거나 원래 문장을 '조금' 고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인쇄술이 시작되기 전에는 베껴 쓰는 방식으로 책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필사본이 그런 것이다. 필기도구가 원시적이었던 고대에 많은 글자를 정확하게 베껴 쓰는 일은 대단히 힘든 노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글자가 몇 자 빠지거나, 다른 글자를 써넣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을 슬쩍 고치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때로는 내용을 뭉텅이로 빼거나 넣기도 했다. (p. 141, 145)

플라톤이 만들어낸 소크라테스 관련 저작물 뿐만 아니라 공자의 <논어> 그리고 <성경> 또한 위와 같은 '편집된 고전'의 왜곡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오래된 고전들은 원래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가진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필요한 만큼 적당히 변형되어 오늘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변형시켜 살려낸 이들은 그 주인공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그 성인의 입을 빌려 민중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을 강요했던 것이다. (p. 146)' 라는 저자의 말은 지금껏 전해져 온 '고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는 듯 하다. 원본이 없는 고전은 고전 그 하나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저자가 서두에서 말한 메타북의 중요성은 고전읽기에는 특히 더 필수적이다.

고전은 작품 그 자체보다 맥락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텍스트보다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저작물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전과 관련한 현대의 저작물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그 텍스트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쓰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p. 165) 그 당시의 언어를 느낄 수 있도록 역주가 자세히 달린 텍스트가 최선일 것이다. 또한 의역보다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 좋은 면이 있다. 그래야 번역자의 주관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p. 168)

한글로 쓰이지 않은 책들을 번역본으로 읽으며 늘 고민스런 부분이긴 하지만 고전읽기에서는 누가 번역했는가가 더욱 상당히 중요하다.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고전을 읽으며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고전이 왜 살아남았을까, 누구의 의도로 어떤 목적에서 누구에게 읽히길 바라며 전해졌을까.

본성과 양육을 다루는 책들은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p. 193)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면 우생학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양육을 중시하면 누군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지는 수동성에 천착하게 될 수 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어느쪽이든 위험하다. 본성과 양육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리는 과학의 논리라기 보다 정치의 논리가 되기 일쑤 였다. 그 과정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학살하는 큰 이유인 이 두 가지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책은 적의 상징물이었고, 피통치자에게 자기 권리를 깨치게 하는 것이어서 통치자에게는 성가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책은 통치자에게 더 잘 통치하기 위한 지혜를 주는 생명과 영혼의 샘물 같은 것이었고, 잘만 활용하면 피통치자를 길들이는 데에도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p. 306)

과거 역사에서 책이나 도서관은 지배권력층이 달라질때마다 번갈아가며 불살라지고 파괴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값진 책과 문화재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던 것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책이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도서관과 책은 파괴의 대상이면서도 약탈의 대상이었다. (p. 311)' 완전히 없어진 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책을 고전이라 부르며 우리가 그러한 책들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데이터의 시대가 되었고 전자책이 흔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종이책을 고집한다. 책이 주는 물성을 애정한다. 불태우자고 마음만 먹으면 종이만 불태워지겠는가? 데이터센터도 화재가 발생하면 기록들은 다 사라진다. 불태워짐과 사라짐은 종이냐 데이터냐 존재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내용들을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고 '시간'이다. 과거에 비해서 다양한 정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 행운을 걷어차고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만을 고집하려한다는 건 큰 어리석음일 것이다.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긴 하지만, 넘쳐나는 책들 속에 우리가 읽어야 하고 남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계속 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자 의무이고 행복이자 행운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 책들이 우리의 '정신'을 바르게 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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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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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진 사람들과

이름 없는 땅에너 자라난 무섭고 아름다운 이야기

<나인>으로 관심이 생겼고 <천 개의 파랑>으로 홀딱 반했으며 <어떤 물질의 사랑>으로 돈독해진 팬심을 품게 된, 천선란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노랜드>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소설집인데 발표 지면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2021년 작품들이다. 등단하자마자 왕성한 활동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그야말로 쏟아내듯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시한번 놀랐다.

김초엽도 그렇고 천선란도 그렇고 등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와 문학상을 휩쓸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내는 것이 신기하면서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기대되는 젊은 두 작가이다.

[흰 밤과 푸른 달]

뿔은 그저 창이었고, 이겨야 하는 건 창을 쥔 몸, 총도 뚫지 못하는 두꺼운 가죽과 인간의 운동력으론 잡을 수 없는 속도, 그리고 당해낼 수 없는 힘의 차이, 인류에게 필요한 건 힘이었다. 크람푸스의 목을 비틀어 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의, 반은 염소, 반은 악마인 뿔 달린 외계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서는 총칼이 아닌 머리를 뜯어낼 힘이 필요했다.

"시술의 안정성은 보장되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강압적인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원들은 전부 가족을, 그러니까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선택을 했습니다. 모두가 잘 적응했고, 비극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는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왔으니까요" (p. 13)

크람푸스라는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인류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갈 때 인류의 과학은 늑대인간 유전자를 만들어냈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전사들은 크람푸스를 물리쳤으나 그들의 강인함은 또다른 위협이 되었다. '진화는 침략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희생이었지만 인류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착한 미래는 통로 같았다. 머물지 못하고 지나가야만 하는 단계 (p. 23)' 명월은 늑대인간전사가 되었다. 강설은 그런 친구의 모습이 낯설고도 두려웠다.

싸우는 게 아니라 지킨 거야.

싸운 게 아니라 지킨 거라고.

나는 이게 지키는 수단이야. 나는 이렇게 해야 지킬 수 있었어. (p. 22)

한때 영웅이었다가 이젠 불가해한 위협이 된 늑대인간전사들은 우주로 나가려 한다. 가족과 지인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려 센터를 방문했다. 명월은 강설을 초청했다. 강설은 혼란스럽다. 고아원 동기이자 절친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둘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그때 센터에서 만난 한 사람이 강설에게 묻는다. '강설씨,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두려운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갔는데, 강설씨가 두려워하는 건 뭐에요? (p. 52)' 명월이 지키고자 하는 것 강설이 두려워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바키타]

문명이 멸망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비슷하게 파멸이나 괴멸, 몰락, 함몰, 종말 같은 단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한다면 애석하게도 저는 번영이라 말하겠습니다. (p. 60) 조금만 생각해봤다면 정말 이상한 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한 행성을 한 종이 절반 가까이 정복하고 있었다는 게 소름 끼칩니다. (p. 61)

바키타 라는 외계 종족에 의해 인간은 멸망직전? 다른 행성으로 이주겸탈출을 한 듯 하다. 어느정도 자리잡은 후 지구에 남겨두었던 배아통을 회수하러 지구에 온 '나'는 그동안 변한 지구에 대한 보고를 하며 현재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진화한 것으로 보였다. 바키타와 함께 사는 인간 그리고 바키타와 떨어져 숲속에 숨어사는 인간, 그들은 외형부터 문화까지 판이하게 다른 진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시대는 통행권이 없으면 바깥 외출을 할 수 없었고 무장한 군인만이 텅 빈 거리를 활보할 만큼 극도로 예민한 시대였다는 걸 기억합니다. 오래가지는 않았죠. 바키타가 인간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걸, 그리고 바키타가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화합물을 먹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냈으니까요. 우리가 몇천년 동안 쌓아둔 쓰레기를, 그 골칫거리를, 인류의 죄를 주식으로 먹어 화합물의 흔적이 남지 않는 분비물로 배출한다는 걸 알아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바키타가 어떤 무기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p. 69)

바키타와 두 인간종족을 관찰하다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떠나게 된 '나'는 마지막 보고에 이런 말을 한다. '저는 벌써 고민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첫 번째 지구에 대한 기록을 남길 것인지에 관해.' 그리고 '우리가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p. 79)' 라고. 그동안 아니 지금 아니 앞으로 인류가 지구에게 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푸른 점]

시에라, 너는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정말 언젠가 네가 그렇게 끄트머리이자 시작점인 곳에 서게 된다면 네가 믿는 것을 잃지 않기를 바라. 네가 믿고 있는 것이 답이야. 그걸 잃지 마. 가끔은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니까, 알겠니? (p. 86)

시에라가 어린 시절 엄마가 했던 말을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시에라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후 엄마가 일하던 연구소 직원 전체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후 연구소에서 예측했던 데로 옐로스톤 화산이 폭발했고 지구는 다시 화염과 빙하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류는 지구와 똑같은 행성을 찾아 우주선들을 출발시킨다. 시에라는 그 마지막 우주선의 선장이었다.

폭동은 절망에서 옵니다.

"폭동은 희망에서 와" (p. 103)

태양계를 떠나기 직전 지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깨어나야 할 시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냉동수면상태에서 깨어난 시에라는 '우주의 푸른 점'을 보기 위해 우주선 밖으로 나간다. AI 가 그토록 말렸건만... 그렇게 시에라가 본 것은...

[옥수수밭과 형]

초등학교 첫 등교 날 자폐아라는 단어와 천재라는 단어가 내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었다. 고등학생이던 형은 수업을 듣다 코피를 쏟으며 병원에 실려 갔다. (p. 113)

푸코와 형의 사이는 각별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형은 푸코를 바쁜 부모대신 업어주고 놀아주며 존재 자체로 사랑해 주었다. 푸코네는 유전자변형 옥수수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푸코와 형은 그 옥수수밭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책도 읽고 간식도 먹으며 놀곤 했다. 하지만 형이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 푸코는 차가워진 형 옆에서 새벽을 보냈기에 형의 죽음을 확실히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옥수수밭에서 형을 만났다.

"형이 상상해봤는데, 만약 푸코랑 다르게 생긴 애가 본인이 푸코라고 하면서 푸코의 기억과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애를 푸코라고 생각할 거 같아. 사람이든 로봇이든 강아지든 기억이 같으면" (p. 117)

[제, 재]

내가 재 할게, 너는 제 해. 헷갈리잖아.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재미있지 않겠어?

나는 그애가 남긴 쪽지를 보고 좋아했다. 그것이 나를 뺏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는 내게 이름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애초에 나도 재 였는데.

모든 기사는 '해리성 인격 장애가 있는 천재 아이'라는 제목으로 퍼졌다. (p. 131)

한 몸에 서로 다른 두 인격체가 산다. 잠이 들고 나면 다른 인격체가 깨어난다. 하나의 인격체가 오래 존재하기 위해선 최대한 잠을 덜 자야 했다. 두 인격 중 한 명은 천재과학자였고 한 명은 평범했다. 모두들 천재소녀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 선은 '제'에게만 웃었다. 평소와 다르게 깨어났다고 느끼던 제에게 재의 계획을 알려준 것도 동생 선 이었다. 하나의 몸 두개의 영혼, 하나의 몸에 하나의 영혼만 남기려면 누구를?

[이름 없는 몸]

너는 내 친구이다. 너는 내 죽은 친구이다. 너는 나보다 2개월 뒤에 태어났으며 그때부터 열아홉 살의 마지막 날까지 나와 이곳에서 함께 살았던, 그렇지만 죽은 내 친구이다. 너는 1년 전에 죽었다. 내 쌍둥이 같던 친구이다. 그런데 나는 총을 가지고 있고, 너를 겨누고 있다. 나는 1년 전에 죽은 내 친구를 다시 죽여야 한다. (p. 171)

영화 <부산행>이라던가 드라마 <킹덤>을 보지 않았다면 쉽사리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을 것 같은 작품이었다. 좀비를 소설로 읽게 되다니 그런데 하염없이 슬프고 짠한 이야기라니 독특한 소설이었다. '나'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일하다가 엄마의 부음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간다. 절대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그 곳에. 죽음이 가득한 그 곳에. 거기서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 (p. 219)

'나' 는 '이름 없는 몸' 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나보다더 친구를 더 '이름 없는 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총을 들었다.

[ㅡ에게]

이름을 불리지 못한 영혼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곳에서 성불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 그게 귀신이지 뭐예요,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차사는 아니라는 말도 해주지 않고 이름이 기억나면 부르라며 떠났다. (p. 263)

작품을 그냥 읽었을 땐 그저 짠하게 읽히는 단편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뒷장에서 [수록 작품 발표 지면] 리스트를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르포 매거진 <추적 불꽃 - 우리, 다음> 2021 수록]

단 5페이지의 이 짧은 작품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이 되다니... 울컥했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누군가의 한없는 다정함과 친절함은 가라앉은 슬픔 위에 떠 있는 돛배와 같아서 그 안에 타 있는 이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침몰하지 않을 수 있다. (p. 284)

지구가 환경재앙으로 또 멸망직전에 있다. 2주 후면 마지막 운송선이 지구를 빠져나간다. 전등사에 있던 스님과 동자승들도 출발했다. 효원과 효종 스님만 남았다. 효종스님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효원의 선택에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날, 멸종됐다던 저어새가, 한쪽 눈 아래만 노란 저어새 한 마리가 법당에 날아들었다. 과거에 효종스님이 살려주었다던 그 새일까 효원이 궁금해 하며 보살폈는데, 그 새가 날아가고 효원에게 날아온 것은

[ 두 세계 ]

"유진이 좀 어려웠지?"

어려웠다. 그건 그 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유라뿐만 아니라 그 애의 부모도 동의했던 부분이었고 같은 반 친구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그 애를 표현했다. 맞추기 어렵다거나 성격이 비틀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애에게 붙은 어려웠다란 의미는 조금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유라만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애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기운의 출처는 '죽음'이었다. 항상 밝고, 항상 역동적이었으나 그 애의 에너지는 전부 죽음이 원동력이었다.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 하나. (p. 310)

유진과 유라는 쌍둥이였다.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달라서 본인들이 말해주기 전까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만큼 쌍둥이 같지 않은 자매였다. 유진은 몇 년 전 자살했다.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더라도 유라에겐 슬프고 황망한 사건이었다. 유진의 세계를 유라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유라의 세계를 유진이 원하지 않았던 것 만큼.

유라는 원래부터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직접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책이라는 물질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학생 시절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서점에 찾아가 아무 책이나 샀다. 구매한 책을 전부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글자와 글자가, 단어와 문장이 서로 얽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게 늘 신기했다. 유라에게 책은 소비재라기보다 소장품에 가까웠다. 그래서 되도록 어떤 형태든 책이 주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그런 유라를 기가 막히게 찾아 스카우트 한 사람이 노랜드의 현 대표이다. 대표는 소설 기반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개발해 책을 보다 현실감 있게, 오감으로 읽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p. 315)

대표가 꿈꿨던 지금의 '노랜드'의 것은 여타의 영상물과 달랐다. 노랜드에서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감각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다. (중략) 무엇보다 노랜드의 가장 큰 핵심은 소설 속 인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의 인공지능화가 이루어지고, 그 인물은 자신이 속한 소설 속의 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독자는 등장인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짐에 따라 소설을 더 심도 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된다. (p. 316)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노랜드'의 등장이다. 나는 단편모임집이더라도 표제작의 이름을 따온 책보다 소설집 자체의 제목을 가진 책을 좋아하는데 <노랜드>에 [노랜드]라는 소설이 없어서 좋았다. 그래서 제목에 생각해보게 되고 그러다 이렇게 딱 맞는 소설속 '노랜드'를 알게 되고 나니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노랜드 라는 제목은.

유라는 노랜드에서 일하고 있다. 유진의 기일이 지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랜드 에서 서비스 중이던 한 작품에 문제가 발생한다. [아락스]라는 작품의 결말이 달라졌다고 독자에게 항의가 들어온 것이다. [아락스]는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꿈많고 진취적이었던 아락스가 남장을 하고 승선에 성공하여 모험에 떠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결말이 바뀐 것이다. '아락스가 죽었다. (p. 319)' 원인을 파악하던 유라는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 유라의 세계와 달랐던 유진의 세계,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그 역관계가 성립할 서로 다른 두 세계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저는 전쟁의 중심지로 왔어요. 이곳으로 오며 박원사에게 물었어요. 무엇을 알아냈나요? 아니. 그들은 누구인가요? 몰라. 목적이 무엇인가요? 몰라. 어디에서 왔나요? 몰라. 우리는 왜 공격하나요? 몰라.

몰라.

몰라.

마지막으로 정말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서 묻지 못했어요. 지금도, 물을 수 없죠. 누구에게도.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니까요. 그냥 저는 궁금했어요. 그들이 정말 싸움을 원했나요? 우리가 먼저 공격한 건 아니죠? (p. 368)

이인은 특수부대군인이다. 외계인과의 전쟁이 한창인 곳에 파견나와 있다. 그들과의 싸움터엔 늘 안개가 자욱했고 어떤 병사들은 살아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병사들은 시체가 되어 오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어느날 '109일간 우주 생명체와의 전쟁 종료 (p. 379)' 가 되었다. 이인은 마지막 인원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추모를 꼭 하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 간 해변에서 사고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존재를 만났다.

인간이 이 행성에 첫 발을 내딛기 훨씬 이전에, 몇 번의 생명체의 멸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있었다. 북대서양, 그 아래, 인간이 발견했던 문명. 모든 것이 다 떠나도 이 행성은 끝내 흔적을 끌어안는다. 자신들이 떠났어도 이 행성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듯, 인간이 사라져도 이 행성은 수세기 동안 인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p. 411) 아주 오래전 이 행성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의 꿈으로, 서로의 생각으로, 서로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모든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매개는 이곳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소리로 퍼져나가듯 그들의 대화는 안개처럼 뿌였게 퍼져나간다. (p. 411~412)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서 환경재앙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이 예견되고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의 모습이 묘사되거나 지구를 떠나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 소설로 읽혀지기도 했다. 더구나 매 작품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의 죽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죽음속에서 내내 삶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들이기도 했다. 살아돌아 오라고, 살아 존재하라고, 그런 모습으로라도 다른 세계에서라도 살아나가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소설들이기도 했다. 어둡고 슬픈 데서 느껴지는 묘한 희망이었다.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떠나보낼 예정인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한 나머지 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살던 시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나 매 순간 곁의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마음이 퍽 지칠 때면 나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을 본다.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주를 떠올릴 때마다 고요한 그곳에 홀로 시끄럽게 돌고 있는 지구가 좋았다. 밖은 저토록 조용한데 이 안은 지나치게 시끄럽고, 지나치게 피곤하고, 지나치게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평생 좋아하는 노래만 듣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주의 시간으로 내 삶은 노래 한 곡 같아서, 한 곡 정도면 내내 행복해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나는 불안으로 꽉 찬 나를, 나만 한 크기가 아니라 좁쌀만 한 크기로 만들고 싶어서 우주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2년 동안 청탁 받은 소설들을 모으고 모아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으며, 한 단어를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분명 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아놓고 보니 소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여전히.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실집을 이렇게 엮어 당신께 보낸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길게 한 것 같지만. (p. 417~428) -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 하나의 작품 같아서 몇 문장만 끊어 옮겨 올 수가 없었다. 10편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을 때도 어디서 멈춰야 할지 알수 없어 하나의 작품을 다 읽고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편이지만 스릴러 소설처럼 긴박하게 읽히는 묘미가 있었다. 설정이 비슷해보여도 다른 인물과 다른 사건들이 등장할때마다 빨려들어갔고 비슷한 결말에 도달한것 같아도 한명한명 다른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름없는 땅, 노랜드는 지금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미래 어딘가에서 발견될 수도 있지만 천선란 세계에서의 노랜드는 슬프면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방금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도 다시 가보고 싶어진다. 이 이름없는 땅에 다시 발디뎌볼 수 있을 작품들을 또 기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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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스테판 에노.제니 미첼 지음, 임지연 옮김 / 북스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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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역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을 보면서 '세상 참 좋아졌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역사책을 즐겨 읽는 편이라 이런저런 종류의 역사책들을 읽어왔는데 갈수록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역사는 보고 또봐도 볼때마다 새롭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음식의 역사가 아니라 짤막한 프랑스 역사가 아니라, 프랑스 통사를 음식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들로 엮어내다니, 그래서 한입씩 크게 베어물면 한 시대를 번쩍 훑어볼 수 있다니 이역시 구미가 당기는 책이었다. 그러니 크게 한입 베어먹는 수밖에. ㅎㅎ

이 책의 저자는 2명인데 부부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자란 남편은 영국에서 식품 분야의 광범위한 경력을 쌓다가 지금은 독일의 고급 치즈 상점에서 일하고 있고, 미국에서 국제 문제 연구원 겸 편집자로 일하다가 영국으로 공부하러 왔던 부인은 런던에서 현 남편을 만나 결혼 후 전쟁학 박사를 취득 후 강사로 재직 중이다. 연애시절에 음식의 기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던 남편에게 부인은 본격적인 프랑스 역사로 엮어볼 것은 제안했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남편이 정말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 이 책이라고나 할까.

프랑스에 대한 끝도 없는 이야기를 빛내는 한 가지 특징을 꼽자면, 숭고함과 터무니없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역사의 많은 기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계몽된 국가라는 명성을 누리면서도 기이한 관습과 정치, 미식 습관으로 방문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이면 당신도 장엄함과 재기발랄함, 유쾌함과 지독함의 조합이 이처럼 강렬하고 때로는 황당하게 느껴지게도 하는 프랑스의 특징을 만들어냈다는 데 동의하기를 바란다. (p. 7) -들어가며 中-

저자는 역사전공자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위해 학자들의 책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의외로 덕후들의 책이 더 훌륭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책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두루 거치며 살았지만 그 역사의 바탕이 프랑스 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음식의 기원이 프랑스에서 비롯된 것이 많아서인지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프랑스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무엇보다도 (최근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프랑스내에서 순.수.프랑스인 이라던가 프랑스민.족.주의 같은 우파적 의견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걱정하며 이에 대해 반론을 역사로 풀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시 말해 '순혈의' 정통 프랑스 요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사실상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앞으로 밝혀내도록 하겠다. (p. 10)' 이러한 태도는 결코 반프랑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재 프랑스내에서 퍼지고 있는 우려스러운 사회분위기에 대해 역사를 바탕으로 쓴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한편으론 멋있기도 했다.

책에서 한 입 크기씩 먹기 좋게 잘라놓은 역사는 51조각이다. 골족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의 시대를 두루 훑으면서 그 시대별로 중요한 사건들과 얽혀 있는 음식들 이야기를 함께 읽다보면, 그냥 역사로 읽었을 땐 몰랐던 프랑스인들의 문화를 좀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와인과 치즈와 빵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과 식습관을 좀더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며 이해하게 됐다. 나로선 이해하지 못했던, 그 음식들에 대해 정말 진심인 프랑스의 문화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달까. ㅎㅎ

와인은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기원전 600년 무렵 포카이아 출신의 그리스인 해운업자들이 세운 유서 깊은 프랑스 도시이자 항구인 마르세유 주변에서 작은 규모로만 생산되었다. (p. 17) 프랑스 교육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골족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첫째, 그들이 '프랑스인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p. 18) 두번째 사실은 마법의 물약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드루이드가 만든 이 물약을 마시면 굉장히 강해진다고 한다. (p. 19) 이 시대의 와인은 현대인의 입맛에는 그리 맞지 않을 것이다. (중략) 와인은 그 맛이 아닌 사교 행사와 종교 의식에 유용하다는 차별화된 특징으로 인해, 그리고 깨끗한지 의심스러운 물을 대신할 소독제로 알려지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p. 21)

골족의 기원에 대한 첫 장에서 포카이아, 와인, 마법의 물약 등의 단어들을 읽다보니 최근에 읽었던 <불멸의 열쇠>라는 책이 생각났다. 저자의 역사탐구가 최신 정보들로 다양하게 이루어졌구나 싶기도 했고 열심히 공부했겠구나 싶은게 책을 읽는 내내 느껴져서 재미와 유익을 동시에 잡은 역사대중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역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골족부터 시작한 내용은 '콩팥의 성모'라던가 '여성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라데군트 이야기등으로 기독교가 정착되던 시대를 빠르게 지나간 후 중세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폭넓게 풀어놓는다. 아마도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음식들이 혹은 그 기원을 알 수 있는 음식들이 그 시대를 많이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것 같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던 사람들은 평민들보다는 귀족이라던가 성직자들 같은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더욱 권력층의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역사읽기를 좋아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역사내용들 위주로 읽게 되긴 했지만 매번 등장하는 음식들의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수도사들의 치즈, 성전 기사단의 자두, 엘레오노레의 와인, 카타리파와 채식주의, 흑태자와 카술레(스튜의 하나), 흑사병과 식초, 식민지와 초콜릿, 프랑스의 사탕무, 초승달과 페이스트리, 루이14세와 완두콩, 루소의 음식에 대한 계몽주의식 접근법, 카페에서의 혁명, 빵의 평등, 감자와 기근, 나폴레옹의 다섯번째 크레프, 혁명 연회, 철도와 굴, 녹색요정 압생트, 땅콩의 비애, 군인반란과 웃는소 치즈, 사회주의자의 바게트, 레지스탕스와 키르 칵테일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프랑스 역사의 현재시점에 와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끔 현대를 오가며 음식에 대한 추이를 환원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대순으로 역사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특정음식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 읽으면 야사를 읽는 듯한 신선함이 있었고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역사를 좀더 편하고 쉽게 접근하게 할 수 있는 서술이라서 부담없이 읽히는 것이 좋았다.

지구상 가장 낭만적인 나라에서 낭만을 없애는 일이 가능할까? 아마도 힘들겠지만 우리 책이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에 대해 계속 전해져 온 신화를 해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 많은 프랑스 사람이 지역 시장에서 현지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사지만 교외의 기업형 대형 마트에서 장을 잔뜩 보기도 한다. (p. 423)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분열과 불평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p. 424) 프랑스 전역의 다양한 요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획일적이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용한 예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요리 또한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p. 426) 우리는 이렇듯 확대된 역사 이야기를 통해 꼭 집어 말하면, 국민전선 같은 극우 단체의 주장이 처음 접했을 때보다 얼마나 어이없는지 이해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p. 427)

먹고살기 힘든 시대일수록 선동가들은 자신들의 무책임을 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탓으로 돌리는데 능수능란해진다. 하지만 잘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의 몫을 줄이고 있는 것이 과연 누구인지를.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우리만의' 무언가는 허상일 때가 많다. 역사는 한번도 멈추거나 섞어지 않았던 때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말한다 . 요리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이지만, 미식가들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이지만, '순수한 프랑스 미식은 없다. (p. 427)' 고. 외국인 혐오, 타종교 혐오, 타집단에 대한 혐오를 추동하는 이들의 선전문구에 현혹되지 말자. '순수한' 것은 없다. '순수한' 것이 옳은 것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현혹되려 할때 역사를 읽자. 비록 한 입 크기의 역사이더라도 배부르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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