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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의 여름
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평점 :
올해 읽은 책 가운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에티의 여름>을 최고의 작품으로 선택할 것 같다.
책을 읽었다기보다 미술관을 천천히 걸으며 서로 다른 그림들을
한 점씩 감상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그만큼 시각적인 충족감이 대단한 소설이다.
젊은 영국인 기자 조지프는 은둔 화가 에두아르 타르튀프가 머무는
프로방스를 찾아온다. 그는 전설적인 화가 타르튀프, 일명 ‘타타’를 인터뷰하고
그의 그림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경력을 쌓으려 한다.
그러나 인터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조지프가 타타의 새로운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타는 조카 에티와 함께 살고 있다. 에티는 삼촌이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는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하며 화구를 챙기는 것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다.
에티는 새롭게 나타난 조지프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를 관찰한다. 다른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기회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때로는 쌀쌀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프로방스의 풍경과 타타의 그림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과 달리,
소설은 세 인물의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조지프는 전쟁에 참전한 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형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마음에 묻은 채 살아간다. 에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품고 있지만,
삼촌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그 마음을 억누른 채 고립된 삶을 이어간다.
천재 화가 타타 역시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채 프로방스에
숨어들듯 머물고 있다.
조지프는 타타의 천재적인 그림을 과연 글로 온전히 옮길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에티의 여름>이야말로
‘그림 같은 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 루시 스티즈는
아름답고 우아한 문체와 생생한 묘사로 1920년대 프로방스를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올리브나무와 눈부신 햇볕, 따뜻한 공기와 복숭아 향기,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물감의 질감까지 손에 잡힐 듯하다. 활자를 읽는다기보다
문장 위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차례로 감상하는 느낌이다.
작가가 실제로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색채와 빛, 형태와 질감을 표현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특히 에티의 시선을 통해 묘사되는 조지프의 모습은 예술 작품이 따로없다.
에티의 눈길이 조지프의 얼굴과 몸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한 인물의 초상화가
서서히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듯하다.
소설의 초반부는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작가는 사건을 서둘러 진행하는
대신 타타와 조지프, 에티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과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천천히 쌓아 올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것은 조지프와 에티가 서로에게 품게 되는 열망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애쓰지만, 무심한 시선과 섬세한
몸짓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역시 감정은 말보다 침묵과 관찰, 눈길과 감각을 통해 표현될 때
더욱 생생해지는 것 같다. 느리게 타오르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사실 전반부는 그림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여러 의문을 품게 한다.
아무리 여성의 활동이 제한되던 시대라고 해도 타타는 왜 에티가
그림 그리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가. 에티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타타는 왜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에 정착했고,
어째서 에티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는가.
처음에는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후반부에는
그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단단히 묶인 보자기를 단숨에 펼쳐 보이듯 수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에 놀라면서도, 지나온 장면들을
되짚어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재이지만 괴물 같은 화가 타타, 출생의 비밀을 품은 채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망을 떨쳐내지 못하는 에티, 그리고 전쟁과 죽음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프로방스에서 달래려는 조지프. <에티의 여름>은
이 세 사람을 통해 창작과 예술, 억눌린 욕망과 자유, 전쟁과 인간관계가 남긴
내면의 상처를 섬세하게 탐구한다.
아름다운 문장과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살아있는 풍경
천천히 무르익지만 강렬한 끌림이 있는 로맨스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 <에티의 여름>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