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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ㅣ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평점 :
어린 시절, 나는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대던 소녀였다.
언니들이 친구들과 골목을 뛰어다닐 때, 나는 책 속의 세계에서
상상의 존재들과 함께 뛰어놀았다. 책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전혀 구분되지
않았고,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되어 주인공과 함께 웃고
울었던 것 같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읽는 자가 곧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란 읽는 사람과 창조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며,
서로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주인공 바스티안은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소년이다. 어느 날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들어간 고서점에서 주인이
읽고 있던 책을 훔쳐 나온 바스티안. 아버지에게 혼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학교
창고로 숨어든 그는 그곳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끝없는 이야기>는 거의 7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임에도 정말 술술 읽힌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모험과 기상천외한 존재들,
끝없이 펼쳐지는 환상적인 세계 때문에 밤잠까지 설쳐가며 읽었다.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는 책이다.
바스티안이 읽는 <끝없는 이야기> 속 환상 세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에 의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 세계의 중심인 어린 여왕 역시 병든 상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미션 수행자로
‘아트레유’라는 용감한 소년이 선택된다.
아트레유는 슬픔의 늪을 지나고, 죽음의 산맥에서 괴물 위그라물을 만나며,
하얀 행운의 용 푸후르와 함께 수많은 모험을 겪는다. 그런데 아트레유가 모험을
계속할수록 바스티안과 환상 세계 사이에도 이상한 연결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바스티안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색의 글자로 보여준다. 이런 장치 덕분에 나 역시 바스티안이 된 것 같은
묘한 독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신비로운 존재들이 살아가는 환상 세계에
푹 빠져 있다가 현실의 바스티안으로 돌아오면 춥고 배고픈 창고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상처 받은 아이가 보인다.
사실 독서에 깊이 빠져본 사람이라면 엄마가 불러도 모를 정도로 책 저 너머의
세상에 한 발을 담가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끝없는 이야기>에서는 읽는 자와
읽히는 텍스트가 더 이상 동떨어져 있지 않다.
애초에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의 모험을 바라보는 제3의 존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환상 세계가 책 바깥의 바스티안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독자와 이야기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스티안은 경계를 넘어 자신이 읽던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라는 존재였다. 환상 세계의 존재들은
죽는다기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환상 세계를 죽이는
‘무’란 현실에만 몰두하면서 점점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름을 붙이고 기억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존재를 만들어낸다면,
아무도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세계는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어린 여왕의 표지인 아우린에 적혀 있으며, ‘다채로운 죽음’이라 불리는
사자 그라오그라만이 바스티안에게 전해준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라는 말도
의미 있게 들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뜻인가 싶었다. 그러나 환상 세계에
들어간 바스티안은 아름다운 외모와 용기, 힘, 명성, 권력 등 자신이 원했던
것들을 하나씩 얻게 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친구와 멀어지는
시행착오도 겪는다. 그리고 수많은 욕망을 지나 마침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마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끝없는 이야기>는 소심하고 약했던 소년이 환상 세계를 여행하는
거대한 모험담이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이하면서도 신비로운 환상 세계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책을 덮고 난 뒤에 생각해 보니 그 세계가 결국 우리의 현실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를 읽던 소년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창조하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삶의 모습과도 닮아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책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었던 나 역시 현실로 돌아와
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살아왔다. 상상하고, 욕망하고, 실패하고, 다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끝없는 이야기>는 바스티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하루하루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끝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독서 내내 감탄하며 읽었던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책 <끝없는 이야기>를 팍팍한
삶에 지쳐서 상상할 공간까지 소진해버린 우리 모두에게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