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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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진 사람들과

이름 없는 땅에너 자라난 무섭고 아름다운 이야기

<나인>으로 관심이 생겼고 <천 개의 파랑>으로 홀딱 반했으며 <어떤 물질의 사랑>으로 돈독해진 팬심을 품게 된, 천선란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노랜드>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소설집인데 발표 지면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2021년 작품들이다. 등단하자마자 왕성한 활동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그야말로 쏟아내듯 발표하는 것을 보며 다시한번 놀랐다.

김초엽도 그렇고 천선란도 그렇고 등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와 문학상을 휩쓸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내는 것이 신기하면서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기대되는 젊은 두 작가이다.

[흰 밤과 푸른 달]

뿔은 그저 창이었고, 이겨야 하는 건 창을 쥔 몸, 총도 뚫지 못하는 두꺼운 가죽과 인간의 운동력으론 잡을 수 없는 속도, 그리고 당해낼 수 없는 힘의 차이, 인류에게 필요한 건 힘이었다. 크람푸스의 목을 비틀어 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의, 반은 염소, 반은 악마인 뿔 달린 외계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서는 총칼이 아닌 머리를 뜯어낼 힘이 필요했다.

"시술의 안정성은 보장되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강압적인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원들은 전부 가족을, 그러니까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선택을 했습니다. 모두가 잘 적응했고, 비극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는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는 그렇게 발전해왔으니까요" (p. 13)

크람푸스라는 괴생명체의 습격으로 인류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갈 때 인류의 과학은 늑대인간 유전자를 만들어냈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전사들은 크람푸스를 물리쳤으나 그들의 강인함은 또다른 위협이 되었다. '진화는 침략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희생이었지만 인류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착한 미래는 통로 같았다. 머물지 못하고 지나가야만 하는 단계 (p. 23)' 명월은 늑대인간전사가 되었다. 강설은 그런 친구의 모습이 낯설고도 두려웠다.

싸우는 게 아니라 지킨 거야.

싸운 게 아니라 지킨 거라고.

나는 이게 지키는 수단이야. 나는 이렇게 해야 지킬 수 있었어. (p. 22)

한때 영웅이었다가 이젠 불가해한 위협이 된 늑대인간전사들은 우주로 나가려 한다. 가족과 지인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보려 센터를 방문했다. 명월은 강설을 초청했다. 강설은 혼란스럽다. 고아원 동기이자 절친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보냈지만 둘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그때 센터에서 만난 한 사람이 강설에게 묻는다. '강설씨,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두려운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갔는데, 강설씨가 두려워하는 건 뭐에요? (p. 52)' 명월이 지키고자 하는 것 강설이 두려워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바키타]

문명이 멸망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비슷하게 파멸이나 괴멸, 몰락, 함몰, 종말 같은 단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한다면 애석하게도 저는 번영이라 말하겠습니다. (p. 60) 조금만 생각해봤다면 정말 이상한 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한 행성을 한 종이 절반 가까이 정복하고 있었다는 게 소름 끼칩니다. (p. 61)

바키타 라는 외계 종족에 의해 인간은 멸망직전? 다른 행성으로 이주겸탈출을 한 듯 하다. 어느정도 자리잡은 후 지구에 남겨두었던 배아통을 회수하러 지구에 온 '나'는 그동안 변한 지구에 대한 보고를 하며 현재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진화한 것으로 보였다. 바키타와 함께 사는 인간 그리고 바키타와 떨어져 숲속에 숨어사는 인간, 그들은 외형부터 문화까지 판이하게 다른 진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시대는 통행권이 없으면 바깥 외출을 할 수 없었고 무장한 군인만이 텅 빈 거리를 활보할 만큼 극도로 예민한 시대였다는 걸 기억합니다. 오래가지는 않았죠. 바키타가 인간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걸, 그리고 바키타가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화합물을 먹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냈으니까요. 우리가 몇천년 동안 쌓아둔 쓰레기를, 그 골칫거리를, 인류의 죄를 주식으로 먹어 화합물의 흔적이 남지 않는 분비물로 배출한다는 걸 알아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바키타가 어떤 무기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p. 69)

바키타와 두 인간종족을 관찰하다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떠나게 된 '나'는 마지막 보고에 이런 말을 한다. '저는 벌써 고민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첫 번째 지구에 대한 기록을 남길 것인지에 관해.' 그리고 '우리가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p. 79)' 라고. 그동안 아니 지금 아니 앞으로 인류가 지구에게 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푸른 점]

시에라, 너는 언젠가 그렇게 될 거야.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정말 언젠가 네가 그렇게 끄트머리이자 시작점인 곳에 서게 된다면 네가 믿는 것을 잃지 않기를 바라. 네가 믿고 있는 것이 답이야. 그걸 잃지 마. 가끔은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니까, 알겠니? (p. 86)

시에라가 어린 시절 엄마가 했던 말을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시에라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후 엄마가 일하던 연구소 직원 전체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얼마후 연구소에서 예측했던 데로 옐로스톤 화산이 폭발했고 지구는 다시 화염과 빙하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류는 지구와 똑같은 행성을 찾아 우주선들을 출발시킨다. 시에라는 그 마지막 우주선의 선장이었다.

폭동은 절망에서 옵니다.

"폭동은 희망에서 와" (p. 103)

태양계를 떠나기 직전 지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깨어나야 할 시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냉동수면상태에서 깨어난 시에라는 '우주의 푸른 점'을 보기 위해 우주선 밖으로 나간다. AI 가 그토록 말렸건만... 그렇게 시에라가 본 것은...

[옥수수밭과 형]

초등학교 첫 등교 날 자폐아라는 단어와 천재라는 단어가 내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었다. 고등학생이던 형은 수업을 듣다 코피를 쏟으며 병원에 실려 갔다. (p. 113)

푸코와 형의 사이는 각별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형은 푸코를 바쁜 부모대신 업어주고 놀아주며 존재 자체로 사랑해 주었다. 푸코네는 유전자변형 옥수수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푸코와 형은 그 옥수수밭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책도 읽고 간식도 먹으며 놀곤 했다. 하지만 형이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 푸코는 차가워진 형 옆에서 새벽을 보냈기에 형의 죽음을 확실히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옥수수밭에서 형을 만났다.

"형이 상상해봤는데, 만약 푸코랑 다르게 생긴 애가 본인이 푸코라고 하면서 푸코의 기억과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애를 푸코라고 생각할 거 같아. 사람이든 로봇이든 강아지든 기억이 같으면" (p. 117)

[제, 재]

내가 재 할게, 너는 제 해. 헷갈리잖아.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재미있지 않겠어?

나는 그애가 남긴 쪽지를 보고 좋아했다. 그것이 나를 뺏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는 내게 이름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애초에 나도 재 였는데.

모든 기사는 '해리성 인격 장애가 있는 천재 아이'라는 제목으로 퍼졌다. (p. 131)

한 몸에 서로 다른 두 인격체가 산다. 잠이 들고 나면 다른 인격체가 깨어난다. 하나의 인격체가 오래 존재하기 위해선 최대한 잠을 덜 자야 했다. 두 인격 중 한 명은 천재과학자였고 한 명은 평범했다. 모두들 천재소녀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 선은 '제'에게만 웃었다. 평소와 다르게 깨어났다고 느끼던 제에게 재의 계획을 알려준 것도 동생 선 이었다. 하나의 몸 두개의 영혼, 하나의 몸에 하나의 영혼만 남기려면 누구를?

[이름 없는 몸]

너는 내 친구이다. 너는 내 죽은 친구이다. 너는 나보다 2개월 뒤에 태어났으며 그때부터 열아홉 살의 마지막 날까지 나와 이곳에서 함께 살았던, 그렇지만 죽은 내 친구이다. 너는 1년 전에 죽었다. 내 쌍둥이 같던 친구이다. 그런데 나는 총을 가지고 있고, 너를 겨누고 있다. 나는 1년 전에 죽은 내 친구를 다시 죽여야 한다. (p. 171)

영화 <부산행>이라던가 드라마 <킹덤>을 보지 않았다면 쉽사리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을 것 같은 작품이었다. 좀비를 소설로 읽게 되다니 그런데 하염없이 슬프고 짠한 이야기라니 독특한 소설이었다. '나'는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일하다가 엄마의 부음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간다. 절대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그 곳에. 죽음이 가득한 그 곳에. 거기서 엄마의 말을 떠올린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 (p. 219)

'나' 는 '이름 없는 몸' 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나보다더 친구를 더 '이름 없는 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총을 들었다.

[ㅡ에게]

이름을 불리지 못한 영혼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곳에서 성불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 그게 귀신이지 뭐예요,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차사는 아니라는 말도 해주지 않고 이름이 기억나면 부르라며 떠났다. (p. 263)

작품을 그냥 읽었을 땐 그저 짠하게 읽히는 단편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뒷장에서 [수록 작품 발표 지면] 리스트를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르포 매거진 <추적 불꽃 - 우리, 다음> 2021 수록]

단 5페이지의 이 짧은 작품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이 되다니... 울컥했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누군가의 한없는 다정함과 친절함은 가라앉은 슬픔 위에 떠 있는 돛배와 같아서 그 안에 타 있는 이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침몰하지 않을 수 있다. (p. 284)

지구가 환경재앙으로 또 멸망직전에 있다. 2주 후면 마지막 운송선이 지구를 빠져나간다. 전등사에 있던 스님과 동자승들도 출발했다. 효원과 효종 스님만 남았다. 효종스님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효원의 선택에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지막 날, 멸종됐다던 저어새가, 한쪽 눈 아래만 노란 저어새 한 마리가 법당에 날아들었다. 과거에 효종스님이 살려주었다던 그 새일까 효원이 궁금해 하며 보살폈는데, 그 새가 날아가고 효원에게 날아온 것은

[ 두 세계 ]

"유진이 좀 어려웠지?"

어려웠다. 그건 그 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유라뿐만 아니라 그 애의 부모도 동의했던 부분이었고 같은 반 친구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그 애를 표현했다. 맞추기 어렵다거나 성격이 비틀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애에게 붙은 어려웠다란 의미는 조금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유라만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애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기운의 출처는 '죽음'이었다. 항상 밝고, 항상 역동적이었으나 그 애의 에너지는 전부 죽음이 원동력이었다.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 하나. (p. 310)

유진과 유라는 쌍둥이였다.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달라서 본인들이 말해주기 전까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만큼 쌍둥이 같지 않은 자매였다. 유진은 몇 년 전 자살했다.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더라도 유라에겐 슬프고 황망한 사건이었다. 유진의 세계를 유라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유라의 세계를 유진이 원하지 않았던 것 만큼.

유라는 원래부터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직접 쓰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책이라는 물질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학생 시절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서점에 찾아가 아무 책이나 샀다. 구매한 책을 전부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글자와 글자가, 단어와 문장이 서로 얽혀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게 늘 신기했다. 유라에게 책은 소비재라기보다 소장품에 가까웠다. 그래서 되도록 어떤 형태든 책이 주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그런 유라를 기가 막히게 찾아 스카우트 한 사람이 노랜드의 현 대표이다. 대표는 소설 기반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개발해 책을 보다 현실감 있게, 오감으로 읽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p. 315)

대표가 꿈꿨던 지금의 '노랜드'의 것은 여타의 영상물과 달랐다. 노랜드에서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감각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다. (중략) 무엇보다 노랜드의 가장 큰 핵심은 소설 속 인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의 인공지능화가 이루어지고, 그 인물은 자신이 속한 소설 속의 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독자는 등장인물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짐에 따라 소설을 더 심도 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된다. (p. 316)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노랜드'의 등장이다. 나는 단편모임집이더라도 표제작의 이름을 따온 책보다 소설집 자체의 제목을 가진 책을 좋아하는데 <노랜드>에 [노랜드]라는 소설이 없어서 좋았다. 그래서 제목에 생각해보게 되고 그러다 이렇게 딱 맞는 소설속 '노랜드'를 알게 되고 나니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노랜드 라는 제목은.

유라는 노랜드에서 일하고 있다. 유진의 기일이 지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랜드 에서 서비스 중이던 한 작품에 문제가 발생한다. [아락스]라는 작품의 결말이 달라졌다고 독자에게 항의가 들어온 것이다. [아락스]는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꿈많고 진취적이었던 아락스가 남장을 하고 승선에 성공하여 모험에 떠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결말이 바뀐 것이다. '아락스가 죽었다. (p. 319)' 원인을 파악하던 유라는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 유라의 세계와 달랐던 유진의 세계, 몸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그 역관계가 성립할 서로 다른 두 세계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저는 전쟁의 중심지로 왔어요. 이곳으로 오며 박원사에게 물었어요. 무엇을 알아냈나요? 아니. 그들은 누구인가요? 몰라. 목적이 무엇인가요? 몰라. 어디에서 왔나요? 몰라. 우리는 왜 공격하나요? 몰라.

몰라.

몰라.

마지막으로 정말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서 묻지 못했어요. 지금도, 물을 수 없죠. 누구에게도.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고,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니까요. 그냥 저는 궁금했어요. 그들이 정말 싸움을 원했나요? 우리가 먼저 공격한 건 아니죠? (p. 368)

이인은 특수부대군인이다. 외계인과의 전쟁이 한창인 곳에 파견나와 있다. 그들과의 싸움터엔 늘 안개가 자욱했고 어떤 병사들은 살아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병사들은 시체가 되어 오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어느날 '109일간 우주 생명체와의 전쟁 종료 (p. 379)' 가 되었다. 이인은 마지막 인원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추모를 꼭 하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 간 해변에서 사고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존재를 만났다.

인간이 이 행성에 첫 발을 내딛기 훨씬 이전에, 몇 번의 생명체의 멸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있었다. 북대서양, 그 아래, 인간이 발견했던 문명. 모든 것이 다 떠나도 이 행성은 끝내 흔적을 끌어안는다. 자신들이 떠났어도 이 행성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듯, 인간이 사라져도 이 행성은 수세기 동안 인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p. 411) 아주 오래전 이 행성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매개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의 꿈으로, 서로의 생각으로, 서로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모든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매개는 이곳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소리로 퍼져나가듯 그들의 대화는 안개처럼 뿌였게 퍼져나간다. (p. 411~412)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에서 환경재앙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이 예견되고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의 모습이 묘사되거나 지구를 떠나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 소설로 읽혀지기도 했다. 더구나 매 작품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의 죽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죽음속에서 내내 삶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들이기도 했다. 살아돌아 오라고, 살아 존재하라고, 그런 모습으로라도 다른 세계에서라도 살아나가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소설들이기도 했다. 어둡고 슬픈 데서 느껴지는 묘한 희망이었다.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떠나보낼 예정인 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지속한 나머지 그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살던 시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나 매 순간 곁의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마음이 퍽 지칠 때면 나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을 본다.

우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주를 떠올릴 때마다 고요한 그곳에 홀로 시끄럽게 돌고 있는 지구가 좋았다. 밖은 저토록 조용한데 이 안은 지나치게 시끄럽고, 지나치게 피곤하고, 지나치게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평생 좋아하는 노래만 듣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주의 시간으로 내 삶은 노래 한 곡 같아서, 한 곡 정도면 내내 행복해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나는 불안으로 꽉 찬 나를, 나만 한 크기가 아니라 좁쌀만 한 크기로 만들고 싶어서 우주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2년 동안 청탁 받은 소설들을 모으고 모아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으며, 한 단어를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었다. 분명 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아놓고 보니 소설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행복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고 나면 지치는 책이 될까 봐 두렵다. 여전히.

하지만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실집을 이렇게 엮어 당신께 보낸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길게 한 것 같지만. (p. 417~428) -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 하나의 작품 같아서 몇 문장만 끊어 옮겨 올 수가 없었다. 10편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을 때도 어디서 멈춰야 할지 알수 없어 하나의 작품을 다 읽고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편이지만 스릴러 소설처럼 긴박하게 읽히는 묘미가 있었다. 설정이 비슷해보여도 다른 인물과 다른 사건들이 등장할때마다 빨려들어갔고 비슷한 결말에 도달한것 같아도 한명한명 다른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름없는 땅, 노랜드는 지금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미래 어딘가에서 발견될 수도 있지만 천선란 세계에서의 노랜드는 슬프면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방금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도 다시 가보고 싶어진다. 이 이름없는 땅에 다시 발디뎌볼 수 있을 작품들을 또 기다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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