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Labyrinth (Hardcover) - Designs and Meanings over 5,000 Years
Hermann Kern / Prestel Pub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Hermann Kern(1941 ~ 1985)의 1982년작 <Labyrinthe. Erscheinungsformen und Deutungen. 5000 Jahre Gegenwart eines Urbilds>의 영어번역본이다. 독어로 나온 초판에 영어판 편집자들과 감수자들이 최근 20년간의 미궁 연구 역사를 간략히 더한 내용이다. 각 장의 반 정도에는 끝에 Addendum이 달려 있어 케른의 입장을 정리하거나 반론을 소개하기도 한다.

       

뮌헨의 박물관 큐레이터로서 다수의 성공적인 전시회를 기획한 헤르만 케른은 오랜 기간 미궁을 연구하여 198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전시회를 연다. 여기에서 선보인 카탈로그는 무려 434쪽이었고 550편의 도판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 카탈로그를 바탕으로 독일 뮌헨에서 출판한 이 책은 전세계 미궁연구자들의 기본 필독서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이 책의 저자인 헤르만 케른, 칼 케레니, 얀 피퍼가 거의 미궁학의 3대 거장인 듯. 

     

책은 전체 19장으로 나뉘어 있다. 미로Maze와 미궁Labyrinth의 개념 차이 등 미궁 관련 기초 사항이 워밍업으로 나오는 1장을 지나면 2장에서 크레타의 미궁 이야기가 나온다. 에반스 경의 발굴로 크노소스의 복잡한 궁전이 미궁이다,,,, 라는 상식 아닌 상식이 퍼져있지만 미궁이 크노소스 궁전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나는 사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전설을 아테네와 크레타의 역사에서 풀어가는 부분이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많지 않았다. 저자는 미궁이 실재한 건물이 아니라 크레타의 미노스 왕을 물리친 테세우스가 춘 학춤의 모양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실은 그 춤의 대형을 땅바닥에 그려 놓은 선이었다고. 저자는 프레이저의 설을 빌려, 9년마다 아테네의 처녀총각을 바쳐야한 이유를 9년마다 왕권 갱신 의식을 치르며 도전자를 받아야했던 미노스 왕의 의식에서 찾는다. 흥미롭다.

 

 

이어 3장에서는 이집트 등 고대의 미궁을 소개하고 4장에서는 청동기시대 미궁 암각화를, 5장에서는 트로이 미궁을, 6장에서는 로만 모자이크에 나타난 미궁을 소개한다. 도판 자료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각 도판 아래에도 깨알같은 설명이 달려 있어서, 화보가 많다고 휙휙 넘겨 쉽게 읽을 수만은 없는 책이라는 것이 함정. 

 

7장과 8장에서 또 내가 관심가진 부분이 나온다. 중세 유럽 필사본에 그려진 미궁과 교회 미궁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이다. 고대 그리스의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도상은 이교적이지만 민중들의 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에 카톨릭 교회의 달력과 교리 설명에 사용된다. 미궁은 죄 많은 현세, 도시에 비유된다. 어두운 중앙에 있는 미노타우로스는 사탄, 테세우스는 악을 물리치고 부활하는 그리스도다. 신도들은 교회 바닥에 그려진 미궁도를 따라 걸으며 신앙인의 자세를 묵상하고 재생을 경험하게 된다.

 

이어  9장부터 15장까지는 미궁의 역사와 관련한 짤막한 이야기들이 도판과 함께 소개된다. 잔디미궁이나 개인 상징으로 사용한 미궁, 정원 미궁, 사랑의 미궁, 게임, 미로로의 변화 등등. 전반적으로 미궁이 세속화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Troy Town과 Maiden's Dance를 설명한 16장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등 서북부 유럽에 많이 보이는 치석 미궁, 이를 이용한 구혼 과정, 풍년을 비는 의식에서 유래한 처녀의 춤 등등이 소개되어있다. 기독교 전래 이전 태양 숭배나 유럽 농민들의 샤머니즘을 엿볼 수 있어 내겐 재미있었다. (소설 <테스>에서 엔젤과 테스가 스쳐가는 그 오월제 축제의 춤 장면과 관련해서,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파 봐야겠다. )

 

17장 역시 만만찮게 흥미롭다. 저자는 미궁 도상이 지중해 연안이나 유럽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도 마하바라타에 등장한 차크라 비유하라는 진형이나 미궁을 자궁과 연관시켜 주술로 사용하는 것, 필사본 삽화나 사원의 부조는 물론 타투 도안까지 인도에서 미궁은 무궁무진하게 발견된다.  저자는 지중해의 미궁 이미지가 인도에 등장하는 이유를 알렉산더에서 찾고 있다. 뭐 간다라에서 헬레니즘,, 그런 이치다. 이어 미궁 도상은 동진하여 아프가니스탄, 자바, 수마트라 등 인도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에서도 여러 문양으로 등장한다. 버들고리 바닥의 문양 같은 것에서도. 그런데 미궁 도상은 놀랍게도 태평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보편적이지는 않다. 미국 서남부에서만 발견된다. 저자는 그 이유를 유럽 선교사의 영향으로 추측하고 있다. 여튼, 호피 족의 경우 인도와 마찬가지로 미궁을 자궁으로 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장 마지막에 붙은 Addendum은 케른 사후 20년간 더 진행된 전세계 미궁 연구를 추가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페루 나스카 평원의 미스테리 도형까지 소개한다. 어이쿠,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강강술래는 없을까? 테세우스의 Crane Dance와 비슷한데?)

 

18장과 19장에서는 청동기 시절부터 5000년의 역사를 가진 미궁 도상이 놀이동산의 미로 공원이나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창조되는 오늘날을 소개한다. 제주도의 김녕 미로공원을 디자인한 세계적인 미로 디자이너 애드리언 피셔도 비중있게 소개된다.

 

전체적으로 그리 무시무시하게 어려운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는 역사책은 아니다. 역사, 신화, 고고학, 도상학 쪽 기본 용어 몇 개만 처음에 사전 찾아보면 이후부터는 술술 읽을 수 있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여기 있는 내용이 배경 자료로 필요하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길. 그동안 읽은 책 들 중, 미궁 관련 지식을 다루는 부분은 거의 이 책을 통째로 번역만 해서 베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게 되실 것이다. 

  

책은 꽤 크다. 펼치면 A3 용지 크기 정도인데 한 쪽에 58행이 깨알같이 인쇄되어 있다. 총 369쪽이다. 다 읽고 나니 노안이 온 것 같다. 그러니, 다들 읽으시라. 나만 늙을 수는 없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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