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지 못한 존재 - 19세기 영국 노동계급여성의 삶과 재현
정미경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세한 책 소개도, 리뷰도 없지만 빅토리아 시기 영문학 속 여성들을 분석하는 글에서 많이 접해봤던 저자여서 믿고 주문했다. 책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주로 당대 문학작품을 통해 성적, 계급적 이중으로 억압받던 19세기 노동계급 여성의 삶과 사회적 지위를 분석한 글이다. 제목은 '필자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이들이 그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냉혹한 사실이었다.'라는 책 머리 글에서 유래한 것 같다.

 

책은 19세기에 대한 배경 지식이 될 수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역사, 철학적 배경을 기본으로 서술하면서 산업화 이후 여성 노동자들의 위상 변화를 논한다. 흥미로운 책이다. 공장 노동자, 하녀, 가정교사, 창녀 등 경제 활동에 나선 다양한 여성들의 현실을 바람직한 논평과 함께 보여준다. 노동 시장에서의 여성 노동자들의 착취(성적 착취 포함)와 저임금 노동이 부르주아 남성, 노동계급 남성과의 밀접한 상호관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은 해지만 전문가의 시선으로) 알게 되어 좋았다.

 

산업현장에서 부르주아들이 지지한 가정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중류계급의 이해를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에게 적용하기는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노동계급가정의 경우, 기술이 있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남성노동자는 전 노동자의 10~20%를 넘지 않았으며 특히 19세기 초 어린이의 노동이 점차 줄어들자 여성의 임금은 노동계급 가정경제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노동계급가정은 남성부양자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노동계급의 현실은 여성을 피부양자로 정의하는 가정이데올로기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대의 정부 보고서에는, 노동계급의 엄연한 현실을 무시한 채, 노동하는 아내와 어머니는 여전히 부자연스럽고 부도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가난한 가정주부와 부적절한 어머니로 혹평되었으며, 기혼 여성의 임금노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이들 여성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노동을 독립의 수단이 아닌 수치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 본문 165쪽에서 인용

 

사실, 남자는 밖에서 일해서 돈 벌어오고,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하며 아이를 양육한다는 개념은 산업화 이후에 생겨났다. 가부장제 역사와 함께한 오래된 전통관념이 아니다. 전통적 가족에서 여성은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가정 경제에 공헌했으며 가정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졌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고용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은 여성들은 점차 남성 부양자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족 부양자로서 남성, 이란 이데올로기는 이 시기의 산물이다. 남성 부양자 운운한다고 자본가들이 남성 노동자들에게 가족 부양에 충분한 임금을 준 것은 아니다. 고용주들은 저임금 여성노동자를 선호했다. 대부분 기혼 여성들은 집을 나서서 임금노동을 해야만 했다. 일자리를 빼앗긴 남성노동자들은 자본가와 여성 둘다 증오했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의 역할을 집안 살림과 아이 양육에 국한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권을 주장했다. 반면 여성들은 피부양자가 아닌 자신들의 역할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차별과 저임금, 찌질한 남성의 공격에 순응하도록 강요받았다. 경제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품행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편견을 감수해야했다. 미혼인 여성들은 그녀들에게 노동 시장이 닫혀 있기에 결혼 시장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노동계급 여성들은 억압받았다. 자본가는 물론 같은 노동 계급 남성에게서도, 높은 계급에 있지만 같은 여성에게서도.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장 여성 차별이 심했던 시기는 중세가 아니라 근대이다. 바로 지금까지인 것이다!

 

서양 여성사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 비하 논쟁 등등은 우리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와, 급격히 닫혀버린 계급 이동의 문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서구에서 200여년에 걸쳐 일어난 일을 우리는 30여년만에 압축하여 겪지 않았나. 이런 근대 여성사 쪽 읽다보면 내가 어릴적이던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 앞에 펼쳐진다.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한담.

 

여튼, 강추할만한 책이다. 단, 책에서 예로 드는 영국 소설들을 안 읽어본 분들에게는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가 계속 인용되고, 해나 컬윅이란 실존 인물의 일기도 인용되니 그리 문학 비평같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참, 해나 컬윅이란 인물을 알게 되어 기쁘다. 더 파 보리라.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때는 이 인물에 관심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