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범우희곡선 35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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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이다. 1947년 초연되었으며 1951년 말론 브랜도, 비비안 리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스탠리와 블랑쉬(이 책에는 '블랭취'로 표기되었지만 난 내게 익숙한대로 블랑쉬로 표기함), 두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낸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남부 몰락한 대농장주의 딸인 블랑쉬가 뉴올리언즈에 사는 여동생 스텔라의 집에 찾아온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고 적힌 전차로 갈아탄 다음 '극락'에서 내려 찾아온다.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는 블랑쉬를 달갑잖게 여긴다. 이후 극은 두 남녀 주연 배우의 팽팽한 연기 대결로 이어진다. 농장을 판 돈을 탕진한데다가 자신을 천하게 여기는 것에 분개한 스탠리는 미치와 결혼해 새출발하려는 블랑쉬를 방해한다. 그 과정 줄거리는 이 책 읽으실 분을 위해 생략. 끝내 블랑쉬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 블랑쉬는 정신 병원으로 가며 마지막으로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연극이나 영화 대사에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대사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 저는 언제나 낯선 분의 친절에 의지하여 살아왔어요."

 - 본문 216쪽에서 인용 

 

희곡에는 등장인물 각자의 욕망이 득실득실 거린다. 활자로만 봐도 배우들의 땀내가 느껴지는 듯하다. 전등갓, 블랑쉬의 옷과 장신구들, 포커 판, 스탠리의 폭로와 병행되는 블랑쉬의 "나를 믿으면 거짓말도 진실이야"라는 노래 가사,,,, 정교한 장치들이 배치된, 잘 짜인 희곡이다. 대가가 쓴 명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단번에 든다.

 

역시나, 내가 관심갖은 부분은 시대 배경. 나쁜 방향으로 단점만 극대화된 스카렛 오하라같은 캐릭터를 가진 블랑쉬.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문학이나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남부 출신 여자들 중에는 이런 인물들이 꽤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지만 이곳은 원래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의식에 쩔어있는 인물. 과거의 영화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면서 상실감에 젖어 현재는 허영, 환상에 빠져 있는 인물. 가진 것은 자존심밖에 없기에 오히려 자아 도취를 스스로 조장하는 인물. 이는 남북 전쟁 이후 재건법에 의해 반세기 동안 북군의 군정 치하에 놓인 남부의 현실를 반영하는 것일까. 산업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북부에서 내려온 사기꾼 투자꾼에게 농장 처분한 돈까지 날리곤 했던 농장귀족들의 모습이 이랬을까. 반면에 무기력하게 현실적인 힘에 순종하여 생존한 남부인은 스텔라였을까. 남부인들이 보기에 무식하고 천한 노동자로 여겨지던 북부인의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이 스탠리였을까. 스탠리는 폴란드 이민자의 후손이고 성은 코발스키(대장장이, 말하자면 스미스 씨)이다. 지구 전체에서 코발스키 성씨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폴란드에 있지 않다. 미국 디트로이트이다,,, 란 폴리쉬 유머가 있다. 그 이유는 가난한 폴란드 이민들이 오대호 부근 자동차 공장에 대거 취직했기 때문이다. (영화 <그랜토리노>의 주인공 할아버지를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스탠리는 북부 상징? ,,, 시대 배경, 역사 쪽으로 내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희곡이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해적판으로 읽은 희곡을 오랫만에 다시 찾아 읽었다. 최근에 어떤 책에서 블랑쉬의 마지막 대사를 친절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랐다. 예전의 내 기억이 잘못 되었던가 아니면 예전의 내가 무식해서 이 희곡을 오해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전 희곡을 찾아 통독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희곡 전체의 주제는 물론이거니와, 그 마지막 장면만 떼어 놓고 봐도 전혀 그 대사는 순수하게 친절을 받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감사하는 대사가 아니다. 본문에 이런 대사도 있다.

 

저는 낯선 사람들하고 수많은 정사를 가졌지요. 앨런이 죽은 후에는 - 낯선 사람들의 애무를 받는 것 말고는 공허한 마음을 메울 수 없었으니까,,,,,, 난 공포에 질렸던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도 날 몰아넣고 보호를 구했던 거예요.

- 본문 177쪽, 블랑쉬의 대사.

 

위 대사만 보아도 마지막 대사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마지막 대사가 나오는 상황은, 간호사가 힘으로 끌어내여 병원에 데려가려 하자 안 가려고 버티는 블랑쉬를 의사가 모자를 벗어들고 신사처럼 행동하여 블랑쉬가 스스로 나서게 만드는 장면이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블랑쉬는 의사의 팔에 안기며 친절하다고 아양을 떤다. 미치와의 결혼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새로운 타겟을 만난듯.

 

그런데 그 마지막 대사만 떼어 놓고 보면 너무도 훈훈하고 교훈적이어서, 연극을 보거나 희곡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맥락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자신의 말이나 글에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이번에 내가 접한 케이스는 좀 심했다. 아아, 할말은 많지만 문제의 도화선이 되고 싶지 않으니,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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