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2001년 판으로 읽었는데 절판이어서 개정판에 리뷰 남긴다. (개정판에 있는 하성란, 허병두 두 분의 추천사는 못 읽었지만, 그 사실이 이 리뷰 쓰는 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이 책을 읽으며, 헬렌 켈러보다 한 저자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1988년 출간된 이 책이 있었기에, 우리는 헬렌의 삶 전체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지 않았나. 저자 도로시 허먼은 20대 시절의 장애 극복 업적으로만 평가되는 '성녀같은 위인 헬렌 켈러'를 평생 장애와 대중들의 편견, 온갖 억압과 싸워온 '욕망을 가진 인간 헬렌'으로 독자에게 되돌려 준다. 그 사이 사이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서술이 번득인다. 한번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펜을 든 사람이라면, 시대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저자라면 마땅히 이정도 책은 써야하지 않을까!

 

헬렌 켈러의 유명한 자서전도 20대 대학시절의 위업으로 끝난다. 대부분의 전기도 그랬다. 사람들은 그녀가 80대까지 산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성인이 된 이후 사회주의자가 된 헬렌, 사랑에 빠져 연인과 야간도주를 계획했던 헬렌, 설리반이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했던 헬렌, 가족을 위해 보드빌 쇼에까지 나가 장애 극복담을 팔아 돈벌이를 해야했던 헬렌, 자신을 성녀로 포장하는 헬렌 켈러 기업의 비서에게 반항했던 노년의 헬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와 50년을 같이 보낸 설리번 선생도 성스럽고 희생적인 스승의 모습만 보여주지 않는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메이시와의 결혼과 파경, 애정결핍 증세로 인해서인지 장애를 지닌 헬렌이 자신을 평생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헌신하고 지배한 면모,,, 등등을 다 보여준다. 읽고나면 그냥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만이 남는다. 나처럼, 당신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렌의 이미지를 소비한 대중들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그녀를 세팅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반감은 남는다. 하지만 나 역시 이런 시선에서 무죄는 아님을 안다. 아아, 우리가 유명 여성들에게 원하는 역할은 '치어 리더'가 아니었던가. 혹은 '국민 여동생' 정도. 의식을 갖고 사회참여 발언을 하고 자신의 사랑과 성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영향력 있는 여성은,,,, 지금도 다들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난 그녀의 장애극복담보다 이런 모든 세상의 면면에 더 관심이 간다. 게다가 헬렌이 많은 후원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외모도 한 몫했다니.

 

애니는 이 무렵부터 헬렌을 쉽게 교육시킬 수 있었다. 헬렌이 난폭한 행동을 할 때마다 애니는 손의 움직임을 딱 멈추고 아이가 바른 행동을 보일 때까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잘못할 때마다 아이를 어둡고 고요하면서도 무척이나 외로운 무덤 속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 본문 107쪽에서 인용

 

장애가 몹시 심한 탓에 자기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없었던 세상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던 아이는 가끔 천사로 변장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했다.

- 본문 111쪽에서 인용

 

헬렌 켈러는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었다. 새로운 간수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헬렌이 바깥 세상과 이야기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헬렌이 희귀종이라도 되는 양 헬렌을 독차지하려 싸웠다.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는 진짜 희생자인 헬렌은 어둡고 고요한 지하 감옥에서 나와 사회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회는 모든 장애인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생김새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불행을 이겨낸 영웅적인 장애인만을 선별해서 받아들였다.

- 본문 184 ~ 85쪽에서 인용

 

하지만 헬렌은 남몰래 사랑을 꿈꾸었다. 그녀는 선생님처럼 결혼하고 싶어 했다. 어렸을 때부터 헬렌은 여자보다 남자에게 끌렸고, 나중에는 스스로 털어놓은 것처럼 강한 성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애니와, 그 누구보다 금욕적이고 죄의식이 강한 어머니는 그 누구와도 절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놓았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성관계를 삼가야 한다. 장애가 있으면서 보통 사람들처럼 성생활을 즐기는 남성들이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가 있는 여성들은 이중 잣대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것은 사회가 여성들을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고통이다. 사회는 여성들의 근본적인 역할을 양육자와 어머니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헬렌처럼 장애가 심한 여성들의 생각에는 본인이 결코 성취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 242쪽에서 인용

 

책은 뜨거운 찬사를 받았고 상당히 잘 팔렸지만, 헬렌은 문학적 글쓰기를 이어가는 문제를 늘 불안하게 여겼다. 이즈음 헬렌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과 시각장애인에 관한 얘기만을 쓰기를 바란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볼모로 삼아서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체제와 이에 대한 그녀의 정치적 견해나, 프란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 희곡의 진짜 작가라는 문학적 견해를 쓰려고 할 때면 편집자들이 그 글을 정중하게 거절하곤 하는 것이다.

- 본문 332쪽에서 인용

 

생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헬렌은 기금 모금 연설을 할 때마다 되도록 사회적 신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활동도 점차 줄어들었다. 1922년 이후에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찬양은 세계관이 같은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만 드러난다.

- 본문 458쪽에서 인용

 

헬렌의 가족들과 미국 시각장애인 협회는 헬렌이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 본문 543쪽에서 인용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려 할 때 헬렌은 그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헬렌이 연설을 마치자 여섯 명의 경찰이 2천명의 열렬한 군중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던 사실은 어디에도 담겨 있지 않다. 헬렌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들을 자본에 더욱 예속시키려는 자본주의의 계략이라고 일갈하여 청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평생토록 헬렌 켈러의 대외적 이미지는 천사 같고, 성인과 같은 시각-청각장애 여성으로 남았다. 무릎 위에 점자책을 펼쳐 놓고 장미꽃 향기를 맡는 모습으로.

- 본문 640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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