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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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무슨 묵시록적이고 뻔한 광신적 살인마가 나오는 시시한 팩션같은 선입견이 들었다. 그러나 부제인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을 보자, 이거이거 무언가 나오겠는걸,하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건축 비평가이자 역사 컬럼리스트라는 저자의 프로필을 보고 나니 내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믿는 친구 블로거가 추천한 책이라니, 오호라, 이 책이 내게 온 날이야 말로 운명의 날이 아닐 수 없구료!

 

진정하고, 이 책은 1755년 11월 1일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이 어떻게 유럽의 근대화를 이끌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로 그 과정을 이끈 폼발 후작 카르발류의 재건과 개혁 과정을 서술한다.

 

처음에는 지진 당일을 묘사하지만, 곧 저자는 1000년 이전으로 눈을 돌려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인 점령과 카톨릭 군주들의 레콩키스타 과정부터 서술하여 유태인 추방에 따른 국내 산업 손실을 보여주어, 포르투갈의 기형적 경제구조의 근원을 밝힌다. 그리고, 브라질 등 식민지 개척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제대로 국가 경제 발전에 이용하지 못하고 왕족,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층의 배만 채워서, 말로만 해양강국이지, 사실은 중세낙후 상태에 처해있던 대지진 당시 포르투갈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그려 낸다. 결국, 브라질의 막대한 황금은 포르투갈 민중의 삶의 질 향상이나, 전체 국가의 산업발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광신적으로 삶에 개입하는 종교의 문제였다.

 

그러나, 신의 심판이라는 대지진 결과, 종교 재판소와 성당까지 허물어진 상태에서, 일부 사람들은 더욱 광신적으로 종교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를 통해 낡은 구제도를 개혁하여 포르투갈을 근대적 각성 상태로 재건하려는 정열을 갖고, 실행하게 된다. 포르투갈 밖의 볼테르, 루소 등의 계몽주의 철학자들도 이들과 같은 의견으로 유럽의 사상사를 바꿀 저작들을 집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리스본 대지진은 포르투갈 국내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근대적 각성상태로 이끌었으며, 리스본 재건 도시계획은 이후 수많은 유럽 도시설계의 모범이 되었다.

 

재앙으로 리스본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재앙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기도 했다. 건전한 의심과 이성이 독단적인 종교 교리를 대신했으며 하느님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주입된 체념적 삶은 인간이 자유롭게 개척하는 주체적 삶에 자리를 내주었다. (중략)

"이런 재해를 통해 제국을 갉아먹는 노후한 제도들이 뿌리째 뽑히기도 한다,,,, 포르투갈 전역이 황폐해지고 도시들이 파괴된 것을 우리들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국가를 혁신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재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 본문 136쪽

 

위에 인용한 카르발류의 말에서, 결국 이 책의 제목인 '운명의 날'은 신이 리스본을 지진으로 심판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의미로서의 '운명의 날'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피달구(지역 유지) 출신으로 후작 작위까지 받은 카르발류의 인생과 정치 행보에는 비판, 논란 거리가 많다. 그러나 그가, 비록 권력남용에 공포정치를 펼쳤지만 최소한 권력 자체를 위해 권력을 추구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진정 원한 것은 중상주의 국가, 부강한 조국 포르투갈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 역시 시대가 낳은 영웅인듯.

 

아쉬운 점은, 카르발류가 건설한 바이샤 지구나, 카르발류의 동상 등에 관련한 사진이 없는 점이다. 그림으로 남은 대지진 이전의 리스본 시가와, 현대에 사진으로 찍은 리스본 시가를 비교해 주는 도판이 있다면,,,하는 아쉬움이 든다.

 

여하간, 건축비평가의 역사서여서 그런지, 지진 이전 역사 배경 설명보다 리스본 재건 과정 설명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즐거운 독서였다.

 

* 사족 : 지난 역사를 통해 오늘날 삶의 교훈을 얻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 이 책은 정말 유용하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을 겪었을 때, 운명이나 신에게 매달리고, 팔자 탓하며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냉철한 사태 판단으로 그 곤란을 극복해 나가면, 이 또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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