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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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일곱, 우리 나이로 열아홉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세상을 배워 나갈 나이의 미아가 격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스스로 그 것을 결정하여야 하는 대략 한 시간정도의 기록이다. 사고로 부모와 동생을 모두 잃어버린 미아는 중환자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가늘게 붙어있는 자신의 생명선을 바라보며 삶을 선택하여야 하는지 죽음을 선택하여야 하는지 갈등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보며 옛 추억을 떠올린다. 가족과 그리고 동생과의 행복했던 시간들 첼로를 처음 배우고 가족과 연주를 하면서 느꼈던 그 벅찬 감동을 회상한다. 그 행복한 순간들은 가족의 상실을 매워주지 못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애덤과 킴은 끊임없이 의식 없는 미아의 몸에 세상에 남아 주기를 바란다. 그 들은 미아의 또 다른 가족이 되었을지 모른다.




미아의 생각과 병실의 상황이 번갈아 가면서 전개되는 동안 한참의 우울한 감정과 행복한 기억의 교차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고 현실의 고마움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의 말처럼 한 가족이 없어지는 일이 더 슬프고 아프더라도 세상은 따뜻함이 남아 있을 것 같은 말이다. 애덤 그 어린 친구에게 삶의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따뜻함을 전달 받은 미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슬픈 이야기를 참 아름답게 그려 내었다. 누군가 아니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한 번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저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의 모든 것을 버리는 선택을 할 것인가?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면서 다른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것 같다. 게일 포먼은 그래도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아의 삶에 빛을 뿌려 주기위한 많은 사람들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등장 시켜 결국 미아의 선택을 받아내니 말이다. 그 선택은 어떤 순간이 될지 모르지만 과거의 행복한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다. 힘들고 어려운 과거가 그에게 짐이 되었다면 아름다운 선택을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을 것 같으니 말이다.




너무 어린 주인공이어서 읽는 동안 많이 마음이 아팠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나라면 어떤 조언을 하여 줄 수있을까를 고민하였다. 내 삶이 아니기에 조언자의 입장에서 내 삶을 돌아보며 과거의 삶을 고민하였다. 정말 사는 것이 지금의 아픔보다 더 행복한 일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입장인가를 고민하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지 모르겠다.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말이 미아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스스로 결정을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무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표제의 말처럼 사는 게 힘들다는 것은 어쩌면 그 많은 것을 느끼고 보면서 아픔을 감싸 안아야 하기에 힘들 것이다. 평안한 문체에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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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전염된다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 제임스 파울러 지음, 이충호 옮김 / 김영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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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지고 싶은 욕망은 모든 인간의 본능적 추구 영역인 듯 하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지고 싶은데 행복해 지고 싶은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사람이 더 불행해져 보이는 것은 모순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를 바라는 세상에 비교가 일상화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고독하고 외로워지는 것 같다.  이런 인간의 습성이 유전적인 요소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인간이 발전해오면서 사회학적으로 학습되어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과 사람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에 좀더 접근 할 수 있을 것 같다.




외딴 곳에 홀로 살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혼자 살고 있다는 가정하게 그 사람의 행복지수를 상상하기 보다는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고하고자 하는 생존에 더 급급한 나머지 행복이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많은 놀이 공원에 가게 되면 사람들이 웃음을 보이고 나도 모르게 얼굴 하나 가득 미소가 번진다. 아찔한 놀이기구를 타면서 소리를 지르는 괴성을 들으면서, 솜사탕을 입에 물고 즐거워하는 어린이의 얼굴을 보면서, 신기한 동물들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이 생기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놀이공원을 선택할 것이다. 왜? 라는 질문에 답을 하여 주는 책이 있다. 행복은 전염 된다 라는 제목이 말하여 주듯이 놀이공원에서 혹은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장소에 내가 있다면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행복감 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우울함도 마찬가지고 질병도 마찬가지로 전염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곳에서 자신이 심통난 얼굴로 화를 내고 있다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잘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몸 속에는 혼자서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그런 학습 효과가 있음이 아닐까?




굳이 행복에 관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현대 사회는 직접적 접촉뿐만 아니라 온라인 혹은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접촉에도 민감한 세대이다. 지하철에서 추한 모습이 온라인에 떠오르면 온 국민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연결 고리는 막대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공감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결 고리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연결이 되어있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나는 이런 연결고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졌다.




모든 일상에서 나는 나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나고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의 범주에서 사회적 공감 혹은 사회적 결정이 나의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금기하더라도 너그러운 부분이 있다면 내 건강과 상관없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위안을 받고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라는 질문과 나의 실생활을 비교하여 보았더니 꼭 맞는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연결된 고리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고리의 흐름에 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하여야 할까? 누군가와 연결하고 싶어하는 유전자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결국 인간은 모든 분야에서 자신과 유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즉 내가 행복해 지고 싶으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한 기분이 들게 만들면 된다. 지금 외롭다고 느낀다면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많이 만들어 보는 것도 행복에 다가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나의 행동의 변화를 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영향을 주기도 영향을 받기도 한다. 우울한 연결고리 보다는 밝은 연결고리에 주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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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의 거울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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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는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카산드라의 거울은 아마도 사람의 의지를 말하고 있지 않을까? 환경문제, 소외된 사람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세상의 소외된 혹은 상처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고민하고 걱정하는 미래를 고민하는 그런 발상은 아마도 우리에게 거울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미래에 대한 현재인들의 고민을 이야기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상상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꽤 많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고 싶은 이야기를 글의 간결함으로 대신하였고, 그로 인해 가져오는 나만의 상상력은 베르베르 베르나르가 만들고 싶었던 소설 속의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의 상상력에 읽는 사람의 상상을 더하여 더 큰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그만의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그가 만든 세계에서 사람은 어떤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은 버리고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제안을 한다면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단 그 미래는 자신의 미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인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입니다. 주인공인 카산드라는 그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에 의해 선택되어 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그로 인하여 행복하였을까요?




연재는 누군가가 꿈꾸던 세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카산드라가 막으려 하였던 미래의 재ㅇ앙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만 그 모습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눈을 갖는 것을 원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표지의 시계 바늘이 없는 시계 그 속의 주인공의 얼굴 그 것은 그 사람이 만들어 가야할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김예빈이라는 한국인 주인공이 나온다는 점에서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인기를 실감합니다. 혹자는 프랑스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 있는 작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한국의 인기가 프랑스의 한 작가에게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역할까지 만들었다고 봅니다. 많은 세상의 독자들을 모두 만족할 수는 없지만 읽는 중간 중간 김예빈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마다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전작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것 역시 그의 소설의 특징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는 많은 독자들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합니다. 표지의 디자인이나 삼화의 어우러짐이 어쩌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도 두껍니 닪은 책을 만들어 낸 출판사의 종이 선정 역시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이 상상력에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온 인류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주는 재미 보다 담겨 있는 의미를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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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의 거울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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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의 저주가 아닌 카산드라의 거울이다. 카산드라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폴론의 구애를 거절하여 미래를 볼 수 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는 저주를 받은 여인이다. 베르베르 베르나르는 고대의 이 여인의 설화를 제목으로 가져왔다. 저주가 아닌 거울이라는 이름으로 이 여인을 현대에 부활 시켰다. 거울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분명 저주 받은 그의 예지능력을 그는 현대의 17살 주인공의 이름으로 차용하면서 거울 즉 그의 저주를 반사하여 돌이키는 그런 모습을 가져온 것일까?




베르베르 베르나르가 주목한 부분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이지만 우리가 전혀 준비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다. 분명 이 지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 테러보다 살인사건 보다 더 중요하지만 아무도 그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지만 우리는 그 것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베르베르 베르나르는 주인공들을 쓰레기 집합소에서 찾았다. 세상과 등지고 그 오물투성이에서 살아가는 네 명을 끌어들여 예지자 카산드라의 협조자로 창조하였다. 모두 자신의 과거에 소모품으로 사용된 인생 그리고 버려지듯이 쓰레기하치장으로 굴러들어 올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인생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곰곰이 따라가다 보면 인위적인 미래 예측을 하려는 사람과 확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현실이 있다. 현실은 미래를 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되지만 그 가늠자는 너무 작아서 노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 작은 구명으로 세상을 보기에는 너무 좁다. 이렇게 카산드라의 말은 세상의 울림이 되어 자신들만의 세계에 한정되어 진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불안하지 않을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주면서 너의 과거를 잊으라고 한다면 나는 그 거래에 응할까?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나의 가족을 희생할 수 있을까? 소설은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작품임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원초적 질문을 사람이라면 가지고 싶은 욕망과 그리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인 부분과의 상쇄를 요구한다. 둘 다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를 물어 보면서 말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미래는 그렇게 행복하거나 밝은 인류가 아니라면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오히려 재앙이 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된다. 그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는 힘이 없다. 조력자를 구해야 한다. 그 것도 상처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더 재미를 얻는다.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느낀다. 희망 속에서 미래에 대한 긍정적 희망을 바라는 마음이 한 구석에서 조금씩 싹이 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되고 싶다.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우리나라에 많은 팬은 확보한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글의 매력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그의 상상력이 때로는 반어적인 말로 때로는 모순된 상황으로 독자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이 말하는 미래에 당신들은 어느 위치에 있을 것인가 하고 말이다. 누군가의 예언처럼 그 멸망의 날이 온다 하여도 우리는 사과나무를 심을 만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거울 안의 나는 분명 미래를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조언을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렇게 우리의 현실과 미래 과거를 짚어 보도록 하자. 소설의 그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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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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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나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나를 비웃기도하고 동정도하지만 바보 같은 이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바보라 비웃어도 언젠가 내가 나를 찾을 그 날을 생각하며 나는 이일을 하고 맙니다.




시즈토는 그런 사람입니다. 애도하는 사람은 시즈토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지만 시즈토를 텍스트로 삼지 않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과, 그를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과, 그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귀로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더 절실하게 시즈토를 그리며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내가 이루지 못한 저 마음 한구석에 가두어 놓았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상념을 더 끌어 올리게 만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사람을 위해 그는 애도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그 사이사이에 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은 조용히 글 속으로 나를 빨아들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애도하는 시즈토를 보면서 내 옆을 지키고 생각해 주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그려 봅니다. 이런 상념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조금씩 더 강한 이미지로 남아서 어느 순간 나는 지금은 내 옆에 없지만 내 옆을 지켜주었던 사람의 모습을 하나 둘 씩 그려봅니다. 그리곤 숙연해 집니다. 그리곤 다시 그의 흔적을 더듬어 봅니다. 그렇습니다. 시즈토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더욱 만만치 않은 분량의 소설 속에서 시즈토의 마음에 일체화되고 혹은 시즈토의 자세를 흉내 내게 만듭니다. 그런 내 보습이 조금은 어색해 보입니다. 가식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나의 모습에 조금은 씁쓸한 미소도 던져 봅니다. 책을 읽는 중간에 나를 떠난 친구의 무덤 언저리도 그려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어색합니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행동에 이렇게 많은 상념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마도 공감이라는 강력한 글의 힘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습니다. 그 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느 산골에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을 찾아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나라도 이해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시즈토는 그 사람을 애도한 것일 까요? 자신의 죽음 뒤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위안을 받기 위한 행동을 한 것일까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을 위해 애도하는 일도 소홀한 세상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평안하고 치유를 주는 듯한 글 속에서 저는 스스로의 질문을 받으며 고민을 해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굴레에서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에는 다른 하나의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적절한 중간을 찾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쉽게 잊고 쉽게 지치며, 쉽게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글은 제 자신을 더욱 채찍질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며 살았든 그 중심에 나 자신이 있었는지를 다시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글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글에서 야단을 맞은 아이처럼 조용해지고 혼자 골방에 숨어서 나를 돌아보는 일을 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내 모습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새 삶을 잉태하는 순간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은 정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순리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 그 것으로 위안을 받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그 위안이 부끄럽지 않은 삶이되기를 생각해 봅니다. 진실이 숨어 있다고 하지만, 숨은 진실 보다 더 값진 일은 제가 보는 저의 모습의 당당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길가의 무덤 하나가 이제는 예사의 일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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