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긴박함이 끝이 없이 말벌처럼 달려든다. 작은 산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 현재 내가 앉아 있는 이 공간 어디에선가 윙윙거리며 달려 들것 같은 환상이 들릴 정도로 묘사의 조밀함이 가득하다. 아주 단순한 설정 그리고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벌의 등장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의 소행임을 짐작하게 한다. 작가는 이렇게 처음부터 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같이 추리해 보자는 말을 던지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말벌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누구도 도와 줄 사람이 없으며 산장 밖은 추위로 10분을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말벌을 처치하면서 나를 보호해야 하는 이 긴박감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누군가는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 진 이 소설은 책속의 나를 읽고 있는 나로 만들어 버린다. 어느 순간 같이 샤워기를 들고 말벌을 향해 뜨거운 물을 분사하고 있으며, 스키복과 스키화를 신고 핼맷을 쓰고 이상한 복장으로 말벌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추워서 벌벌 떨고 있으면서 켜지지 않는 성냥에 불안함을 같이 느끼고 재발 불이 붙기를 바라며 성냥을 통째로 쏟아 부으며 그 불길을 초이며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이런 소설에서 일인칭 시점은 그렇게 더 감정이입을 잘 시킬 수 있는 고리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사건을 해결하고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되면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사건은 미궁인데. 만일 이상한 결말이 나면 좀 재미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읽고는 조금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진다. 글을 옮긴 사람으로 부터는 작가의 반전이라고 말하는 데 일상적인 설정에서는 조금 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반적인 설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책을 읽은 스피드는 빨랐고 많지 않은 분량이었기에 마무리도 금방 볼 수 있었다. 일인칭 시점에서 쓰여 진 글이기에 주인공의 심리와 몸의 변화를 독자의 것인 양 끌어 들이는 작가의 치밀한 묘사와 감정의 전달이 빼어나 긴장감을 배가 시킨 반면, 결말에서 등장하는 이 사건의 전말은 약간의 의아함을 남긴다. 자신이, 자신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내가 타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나와 동화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고민해 볼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 것을 따라가지 못해서 일까?

 

말벌과 사투를 벌이는 한 인간을 묘사한 책 속에서 잠깐 잠깐 사회와 비교하며 거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강요당하는 인간 사회를 벌들의 사회와 비교하며 자신을 공격하는 벌들의 행위를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부분은 차라리 이어지는 사건의 스토리에 의미를 담고 싶은 작가의 의도 인 것 같은데, 말벌의 긴박한 윙윙거림의 공격 속에서 잠깐의 느슨함을 제공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현장 묘사가 더 긴박한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 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 노릇 아이 노릇 - 세계적 그림책 작가 고미 타로의 교육 이야기
고미 타로 글.그림, 김혜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에게 어른 노릇을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하는 책입니다. 자신은 하기 싫어서 힘들어 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일을 우리는 아이에게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일이 있고, 규정화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 것을 강요하고 받아들이라고 하면서도, 창의성이 없다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일관성 없고 어쩌라는 것인지 모를 말들을 던지고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은 잎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저자인 고미 타로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던지고 있습니다.

 

고미타로의 잔소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무심코 읽어 주는 그림책 읽어 주기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 권고입니다. 아이마다 책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다르고 보고 싶어 하는 장이 다른데 어른의 높이에서 페이지를 넘어가고 그림을 설명하고 그 것에 맞춰 아이들의 세상을 가두는 것이라고 하네요. ‘집중력을 강조하면서 아이들이 게임에 집중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다면 집중력은 어떤 집중력일까요? 오롯이 공부할 때만 필요한 집중력인가요? 당근을 싫어하는 아이는 편식을 한다고 잔소리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만일 어른이 그랬다면요, 그들에게도 잔소리를 할 까요? 만일 그랬다면 우수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고 또 자신이 선호하는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어른에게는 다양성을 요구하면서 아이에게는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도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고요. 남들에게 면목 없다는 말로 아이를 구속한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웃는 것이 주된 일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읽는 동안 어른 노릇이라는 것이 정말 상식적인 일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른으로서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규율이나 도덕, 규범 같은 것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는 변명을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렇고 많은 어른 들이 그렇고 자신이 하기 싫은 일 어쩌면 자신은 못해 본 일을 아이들에게 권유하고 좋은 것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더하기보다 빼기를 더 잘 하는 아이에게 더하기 문제만 풀게 만들고 곱하기 보다는 나누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곱하기만 권해 주는 사회는 아닌지 그리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사회에서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학교는 또다른 획일성만을 강요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개성과 꿈을 펼치라고 구호로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모로서 제가 무심코 던진 말을 내가 듣는다면 하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을 때 책의 공감은 더 높아질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하기 싫은 일을 아이가 좋아한다고 해서 혹은 제가 좋아하는 일을 아이가 싫어한다고 해서 강요하거나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때가 되면 걷고 뛰고 말하고 자신을 생각하고 인지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조금 늦는다고 조급해 하지 않듯이 아이들의 생각도 행동도 그리고 사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배우며 자신을 찾아가지 않을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 후기 초상화 - 옛 초상화에서 찾은 한국인의 모습과 아름다움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여행을 다니다 보면 사당이나 서원에서 초상화를 보곤 합니다. 물론 박물관에도 있죠.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붓이 주가 된 시대에 어떻게 저렇게 정밀하게 그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사진이 흔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남긴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책을 읽다 보니 초상화를 남긴다는 것은 그 당시의 지도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리는 것이 화가들에게는 신분상승과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것 역시 이해가 가게 하는 부분입니다. 조선시대 선조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까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림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화가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최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화가들은 그림에 여러 가지 기교를 들여왔고 그 것이 지금 전해지는 초상화를 통해서 선조들의 피부병을 연구하는 자료로 쓰일 만큼 사실적이며 정밀하게 묘사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만큼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초상화는 그 시대에 살아있는 인물의 최대한 근접한 모습 즉 사진과 같은 묘사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 정말 사진과 비교한 초상화가 등장합니다. 놀랄 만큼 정밀하고 똑 같다는 것에 감탄을 금할 길 없는데요. 황연의 초상이었습니다.

 

책은 초상화의 미술적 가치와 기법 그리고 그 발전사에 대하여 여러 초상화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상화를 통해 조선시대 관복과 의복의 변천에 대한 이야기와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으며,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받았을 보상 그러니까 지금의 임금과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합니다. 초상화를 한번 그리려면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하며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한 노고를 생각하게 하고 그림의 주인공인 초상화의 인물에 대한 생각도 하게합니다.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이 최고의 화가들의 작품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는 몇 점 남아있지 않게 된 안타까운 사연도 있고 한꺼번에 48점을 유실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여인의 초상이 드문 것에 대한 의문은 조선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선 초기에는 부인과 같이 초상을 그렸다고 하는 데 성리학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고 조선 후기에는 일반 여성의 초상을 찾기 힘들 정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조선시대의 초상들을 보고 그림이야기 시대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합니다. 그린사람의 이야기,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진이 없던 시절 자신의 모습을 남기기 위한 초상화 속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에 감탄도 있었고, 그 그림에 담긴 역사적 의미도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동차 첨단기술 교과서 - 전문가에게 절대 기죽지 않는 마니아의 자동차 혁신 기술 해설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다카네 히데유키 지음, 김정환 옮김, 임옥택 감수 / 보누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도 차를 타고 움직입니다. 차가 없다면 세상은 조금 더 느리게 움직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운전도 하고 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을 하면서 차가 고장이 나면 난감해 질 때가 있습니다. 편리하게 카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리를 하거나 조금 괜찮으면 그냥 몰고 다니기도 하는 데요. 차에 대해 이런 것 저런 것 이야기할 때면 좀 막막해 집니다. 공학을 전공한 저에게도 차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들어오지 않거든요. 이것도 바꿔야 하고 저것도 바꿔야 하고 이것이 문제가 있는데 예방 차원에서 미리 교체 하라고 하면 그냥 돈만 있으면 처리가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알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책을 잡고 읽어 보기 시작한 것은 요즘 유행하는 하이브리드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전기차가 나오고 하이브리드 차가 나오면서 연비는 급격하게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불황인 경우 기름 값 조금이라도 더 아끼면 좋잖아요, 제가 알고 있는 하이브리드의 대표는 프리우스였습니다. 10년 전쯤에 프리우스 초창기 모델일 때 지인이 장난삼아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하더군요. 저는 계속 키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어도 서툴고 시동이 왜 안 걸릴까 그러면서 계속 키를 돌리는 저에게 웃으면서 시동이 걸린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많은 차들이 하이브리드라는 이름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네요. 책은 이 방식의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동력을 전달하는 지, 그리고 그 방식에 따른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래 기술로 전기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데 아마도 배터리의 발전 속도와 충전 속도 등이 전기차의 성장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LG와 삼성이 이 사업을 한다고 알고 있는데 전기차 시장이 빨리 열리면 환경 문제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온 차들이 가지고 있는 안전기능에 대한 설명도 있습니다. 후방 감지, 측면 감지, 에어백의 여러 기능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이 쓰여 진 것이 좀 되어서인지 지금 출시되는 자동차에는 많은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서 이 책이 쓰여진 시점보다 지금에서야 더 효율적으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이 책이 처음 쓰여 진 시기에는 미래 기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책을 다 읽었음에도 아직 구동장치나 엔진 부분에는 조금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네요. 일본인 저자가 본국의 차종을 중심으로 서술하였기에 저희가 쉽게 접하는 차가 아니어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고요. 일반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국내용 차들에 대한 설명이었다면 직접 뜯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책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자동차 깜깜이에서 조금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약용의 고해 -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지막 고백
신창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이켜 보면서 글을 쓴다면 어떤 말들을 남기고 가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남기고 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해온 업적을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떨까 고민을 해 보았는데 아마도 가족 이야기를 많이 남기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묘지에 남기고 싶은 글을 자신이 직접 쓰고 그 것을 저자가 해석하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일반적으로 묘지의 비석을 들여다보면 뒷면과 옆면에 쓰여 있는 글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런 글을 자신이 썼다고 해서 <자찬 묘지명> 이라고 명명하는 것 같습니다. 다신이 남긴 글에는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표현하고 일생을 정리하였을까요? 제가 남기고 싶었던 글과 달리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가족과 그리고 자신의 화려했던 정조 시대의 활기찬 활동과 유배 시절에 자신이 공부했던 많은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후세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산의 일생을 역사 혹은 인물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보면 반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학문을 갈고 닦은 사람으로 기억을 하게 되는데 이 자찬 묘지면 속에서는 그에 대한 회한도 조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사대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당시의 명성은 관직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었던 사회구조상에서 다산은 그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결국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천되고 물러나게 되면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확실하게 된 것은 임금 즉 조선시대의 왕의 정책에 따라 그리고 그의 선택에 따라 삶이 변하게 되는 시대상도 같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정조 시대의 그렇게 많은 활약상을 보인 다산이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주요 관직에서 탄핵되고 물러나게 되면서 자신의 재능을 학문과 책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던 회한 같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 것은 아마도 인생을 살면서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싶었던 다산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그 인생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에서 그의 깊은 회한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찬묘지명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먼저 가족관계에 대한 자신의 위치, 족보를 중요시하던 조선 시대에서 빼 놓을 수 없었던 그런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곤 자신의 화려했던 관직 시절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암행어사로 활동하고 그리고 자신의 학문을 인정해 주었던 정조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고 할까요. 그리곤 학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논어, 맹자, 예기, 시경, 서경 등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설명이 있기는 하나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고 글의 맥락으로 보았을 때 다산이 생존하던 시절 선비들이 같은 책을 보면서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이고 그 것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고전을 공부하는 자세를 생각해 봅니다. 다산이 받아들인 학문이 전통 성리학만이 아니라는 것을 바탕지식으로 하였을 때 포괄적 관점 즉 현실에 맞게 받아들여야 하는 학문의 개방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고전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근간은 두고 현실에 맞게 응용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는 유교문화의 뿌리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 것이 맞을까 하는 것에 대한 다른 질문을 해 봅니다.

 

다산은 그렇게 자신의 생을 정리하고 남기고 떠났습니다. 자찬묘지명을 해석만 한 것이 아니라 저자는 여기에 설명을 붙이고 있어서 다산의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 약간의 혼동이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산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역사적 관점 보다는 다산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관점으로 바라보기에는 이 묘지명이 남긴 글이 더 다산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산을 다시 바라보는 그런 시각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