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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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거 고대 그리스와 같은 폴리스에서 교육이란 사교육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까지 이어져 오는데 근대에 이르러 프러시아와 같은 강력한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교육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공교육[의무교육/무상교육]으로 재탄생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국민이 고르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들을 위한 성실한 인력을 만들어내는 장치인 이 공교육이라는 교육제도는 오늘날 학교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다.1)

 

국가가 주도해서 모든 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은 국가가 국민의 교육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일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가 일률적으로 교육에 관여하는 것은 학생의 개성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즉, 일반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학교구조도 문제지만 통제와 일률적인 주입식 학습으로 상징되는 학교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해낸 학생들이 교사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사 자신들이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곱게 보기 힘들다. 그 결과 나중에 에디슨이나 아이슈타인2) 같은 인물로 성장 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토토와 같은 천덕꾸러기, 전학 갔으면 하는 아이가 되버린다.

 

학교가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문제 푸는 훈련을 시키는 훈련기관에 가깝지 않을까? 훈련기관의 질로 따지자면 국가의 간섭과 부여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학교보다는 학원이 더 우월할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교육기관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학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3)

 

이번에 읽은 <창가의 토토>란 책은 일본에서 대안학교의 열풍을 일으킨 책이다. 토토는 이 책의 저자인 데츠코의 어린 시절 아명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토토가 성장하는 도모에 학원이라는 이 작품의 배경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교장인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다. 개인적으로 이 분이야말로 이 책의 숨은 주인공이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학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교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교사로서 부족하다는 결론도 낼 수 있었다. 하나하나 이 책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토토와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의 첫 만남 장면을 보자. 토토와 이 분의 만남은 정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무리 인내심 강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아이의 이야기를 4시간 동안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토의 이야기를, 맞장구치고 질문도 던져가며 약 4시간동안 듣고 나서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 이제부터 넌 이 학교 학생이다.”라고 말한 것은 뭐랄까 가슴 찡한 장면이었다. 주인공 토토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교장선생님의 태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아이에 대한 책임감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하고 긴 시간동안 제지 없이 듣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책임감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놀라운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그분이 아이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심리와 그 필요에 대해서도 잘 알고 토토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또한 토토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교육은 배려라는 점이다. 도모에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서로를 배려한다. 토토는 미유[교장의 딸]가 샘을 내기 때문에 리본을 학교에서 하지 말아달라는 교장선생님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 든다.4)

그리고 퇴학당한 이야기를 20년동안 하지 않은 토토의 엄마, 토토가 착한 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도록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라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내 말해준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말썽을 피우는 아이에게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억지로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그릇이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에 대한 선입견을 떨쳐내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 번째로 아이들의 인격과 능력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와 교사의 관계는 분명히 우열 관계가 존재한다. 우열 관계가 전혀 없다면 교사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우열 관계는 능력의 차이지 인격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과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아동 역시 인간이므로 그에 걸 맞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비록 아이가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하다 해서 아이를 자기 밑의 존재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교사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열등한 존재는 아니다. 먼저 인생이라는 길을 걷는 자로서 안내하고 도와주고 때로는 엄격해야 하는 게 교사지만 과거 유교문화의 군사부일체처럼 권위적인 인식을 버리지 못하면 곤란하다.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생각이며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지갑을 찾는 토토를 꾸짖지 않았다. 도와주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원 상태로 돌려놓으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아이들을 꾸짖기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아이들을 지나치게 도와주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이든 부모, 교사가 도와주는 아이가 무슨 책임감을 가지겠는가? 아이들 역시 토토가 숙녀도 대접받는 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자신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먼저 개입하는 것은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네 번째로 교육은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수업은 일반적으로 교과서와 교사, 그리고 학생에 의해 이루어진다. 흔히 이를 수업의 3주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런 수업은 일반적으로 교과서 내용의 이해와 교사의 설명, 여기에 잘 된 수업의 경우 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런 수업이 ‘진짜’냐는 것이다.

가령 농사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할 때 교사가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교대 커리큘럼에 농사는 들어있지 않다. 또한 교과서의 삽화와 설명만 가지고 아이들이 농사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교과서, 교사의 설명은 복제품에 불과하다. 교육은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도모에 학원에서 토토는 농부 선생님께 직접 밭을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벌레, 새, 나비, 날씨 등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학교 밖 사람의 힘을 빌리고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매우 인상 깊었다. 20명이 넘는 학급이 39개 있는 도통에서는 아무래도 무리겠지만5) 언젠가 이런 경험을 아이들과 같이 나누는 것도 하나의 꿈이 될 만하다.

 

다섯 번째로 아이들 문제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좋아하는 것을 잘 이해한다 해도 아이들을 자기 원하는 데로 살아가게 둘 수는 없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친구와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교사의 숨은 뜻을 모르고 불평과 불만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특히 경력이 짧은 교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당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장 닥친 권위 손상의 불안 때문에 보통 강경하게 대응하기 마련이다.

물론 강경하게 대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강경한 대응은 가급적 정말 필요할 때 사용해야 그 가치가 있다. 항상 강경하게 대응하면 아이들은 교사의 꾸지람을 한 귀로 듣고 흘릴 가능성이 높고 교사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아이들의 관점을 바꿔주는 것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채소를 운동회 상품으로 받은 아이들이 불평하자 이를 꾸짖지 않고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채소를 집에 가져가서 저녁반찬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채소는 더 이상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운 물건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얻은 저녁반찬거리가 된다.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응방식이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여유가 만들어낸 감각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는 조금 떨어진 감은 있지만 다문화에 관한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한국 사회가 어려워지면서 한국으로 이민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 보통 이들이 그렇잖아도 부족한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공사장 인부 임금을 동결시킨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가 가미되어 있다.

공사장 인부 임금 문제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가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 감정적인 화풀이에 불과하다. 일단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일은 애초에 한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이른바 3D업종이다. 그리고 이 직종은 애초에 월급이 짜다. 공사장 인부들의 임금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존재가 임금을 올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윤을 내기 위해 인건비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기업의 생리 때문이다. 그리고 실업이 큰 문제로 대두된 지금 외국인 노동자가 빠진다고 해서 인건비가 오를지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외노자, 다문화에 대한 증오의 문제점은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특히 차별받고 있는 재일동포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데 있다. 책 163-166쪽을 보면 마사오가 조센진이란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사오가 사실 조선인 출신인데 항상 조센진이란 말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듣다 보니 이를 욕 중 하나로 알게 된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더 슬픈 것은 이 당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상태였는데 이후 한국과 일본이 수교하고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된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일본의 한국인 차별에 분노한다면 그 분노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옳다. 물론 차별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한국인’이라는 것에 분노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 민족주의 관점이 만들어낸 재앙들을 생각해보면 최근에 커지고 있는 다문화, 외노자에 대한 분노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알아간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알아가고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갑이 두둑할수록 너그러워지는 것처럼 여유가 있어야 아이들을 너그럽게 넓게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복제품이 아닌 ‘진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복제품으로는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피상적으로 주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교육 본연의 모습을 도모에 학원은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제도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로서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도모에 학원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가 불타자 대학생 아들에게 “얘야, 이번에는 무슨 학교를 만들까?”라고 말한 고바야시 선생님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교사상을 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이런 모습에 가까워지기를 나 스스로에게 간절히 바란다.

 


1) 학교장이 기관장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학교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특이한 측면이 있다.

2) 이 둘도 학교에서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존경받는 CEO들도 학교 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솔직히 날라리(?)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3) 그러나 위에 계신 분들은 학력만을 중시하여 일제고사라는 학력으로 줄세우기 제도를 만들었다. 같은 정당 후보가 당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고사를 폐지하겠다는 것은 이 제도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 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경쟁이 지나치면 모든 학생이 잘 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난다.

4) 물론 50년도 더 된 시절의 이야기이고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5) 작은 학교도 쉽지 않다. 도모에 학원은 특수한 경우고 또한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 교장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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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소녀 가출기 상상하는 아이 창작동화 시리즈 12
최미경 지음, 이승연 그림 / 리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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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인 박지우는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다. 그런데 사실 사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우가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다. 집안은 기초생활수급자인 것 같고 밑의 동생은 정신지체등급을 받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린 여자아이가 견디기는 아마 힘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우는 필사의 노력으로 공부도 잘하고 상도 많이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우의 노력은 부모님의 사정으로 부산에서 포항으로 전학가면서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셋째를 임신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우는 어머니한테 평소 억눌렀던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면서 가출하게 된다. 

지우가 노력도 안하고 불량한 학생이었으면 이야기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우는 학원도 안 다니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노력파 학생이다. 개인적으로 지우 부모님이 지우에게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버지야 자주 등장하지 않으니 논외로 하고 어머니의 경우 지우의 마음을 어루만지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찬우가 학교에 못가도록 막는 거 외에는 지우가 야무지다면서 걱정할 것 없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말의 이면에는 지우에 대한 신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우 입장에서 어디 그런 생각이 들겠는가? 지우는 셋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고등학교도 못가고 돈 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였다. 아무리 야무진 소녀라 해도 결국 어린 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우의 입장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책에서 묘사된 지우의 부모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즐겁게 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감은 있지만 이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제목은 폭풍소녀 가출기지만 사실 지우의 가출일은 1~2일 정도로 가출이라기에는 좀 민망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동안 지우는 다양한 경험을 겪는다. 도서관에서 남진우와의 만남을 통해 정신지체도 노력하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경이의 몰랐던 다른 모습도 보게 된다. 그리고 평소 싫어했던 찬우를 위해 남자애들과 부딪히기도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와 재회하는 모습은 꽤 감명깊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지우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는 민수와 미경이와 만남이 있는데 여기서 민수는 미경이와 지우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삶의 배경은 천지차이지만 두 소녀는 더욱더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자기주관이 뚜렷다하는 점에서 비슷하하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집안이 안 좋아도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집안이든 사춘기 소녀끼리는 공감하는게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까?

이 책에서 가출은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지우가 성장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하고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우가 좀 특별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심한 무기력에 빠져 있다.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탈출할 수 없는 가난 앞에서 어른들도 절망에 빠지지만 아이들도 절망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게 동화의 매력이지만 현실로 돌아올 때 어떻게 하면 지우와 같은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결국 가정이다. 제도는 한계가 있다. 공산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평등주의를 취하지 않은 이상 도울 수 있는 것에 한계는 있으며, 미경이와 같은 부유한 집 아이도 가출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가정에서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가정이 든든한 받침대가 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5~6학년 여학생들에게 좋은 책인 것 같다. 너무 집안 환경이 두드러지게 어렵기 때문에 사춘기라는 이름이 바랜 느낌은 있지만 지우가 가출까지 결심하게 된 것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 때문일 것이다. 아마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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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생 사이 우리 사이 시리즈 3
하임 기너트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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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에서 교육학은 물론이고 수업지도안을 어떻게 짤지, 아이들이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아왔다. 내가 얼마나 성실했는가는 제쳐두더라도 교대 4년 동안 초등교사가 되기 위하여 다양한 교육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이 현장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내가 배운 아동심리, 교육방법들은 나 자신을 옭매는 하나의 율법의 역할을 했을 뿐 당장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수업을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내 자신의 자질이 일천했던 까닭도 있겠지만 교대에서 아이들에 대한 너무 이론적인 내용만을 배웠던 까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교대에서 배운 내용이 틀렸던 것은 아니다. 분명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존재였다. 단 내가 그들이 배우기를 원했던 내용, 즉 교과내용만 제외하고. 그들은 내 주변잡기는 물론 주변 환경과 그 외 내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영역에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아동의 흥미보다는 학문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교육내용이 문제일 수 있다. 학문적 관점으로 교과서는 만들어놓고 어떻게든 아동의 흥미를 끌어내라는 어려운 과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교과내용을 하나라도 더 알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반복한 것이 전부였을까?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염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아가 나 역시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왜 아이들은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배우려 들지 않는 것일까 몇 번이고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아이와 만남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그 관계의 토대위에서 같이 지식을 찾아가야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고 주어진 교과내용을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전달하는데 급급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진도는 급해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사라져 교직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 교사와 학생 사이가 나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교사들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교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교실 분위기가 어떻게 확 바뀌는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는 내 자신이 그동안 사용했던 언어에 대해 반성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대강 시절과 작년 도통 시절에 아이들에게 폭언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름 아이들이 바로서기 바라는 마음으로 한 것이지만 결국 폭언은 폭언일 뿐이었다. 그것으로 아이들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교사에 대한 불신과 학교에 대한 회의만 더 커졌을 것이다.

 

교사는 선생, 즉 먼저 난 사람이다. 우리가 어른을 어른대접해주는 것은 그에 맞는 성숙함을 기대하기 때문이고 이를 닮아가기 원해서다. 아이들이 싸우지 않길 바란다면 나부터 아이들과 싸워서 안 된다. 아직도 속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날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갖자고 생각하니 요즘은 그래도 거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따라오니 한결 맘이 편하다. 이번 한 해 동안은 아이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아이들이 닮아갔으면 하는 모습으로 비쳐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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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센의 읽기 혁명 -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가 들려주는 언어 학습의 지름길
스티븐 크라센 지음, 조경숙 옮김 / 르네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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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언어 습득 방법

  요즘 읽기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말이 많다. 저 미국에서도 문맹자들에 대한 미디어의 방송이 있었다 하니 읽기능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지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아예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한국 역시 의무교육의 힘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기초적인 것이다. 오늘날 현대사외에서 요구되는 읽기능력, 흔히 문해능력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은 문맹을 면하는 것보다 더 고등능력을 의미한다.

  기초적 문맹이 거의 사라진 한국에서 이제 문맹의 기준을 한층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학교에서 추구해야할 것이기도 하다.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한국 사람들 중 몇이나 문맹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복잡하거나 긴 글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상당수가 문맹이 아닐까 싶다. 한국이 독서 수준은 처지지만 인터넷 강국이 된 것은 어쩌면 짧은 글과 단순함을 좋아해서 아닐까?

  물론 짧고 간단하게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어려운 내용을 지나치게 간추리게 되면 그 내용이 손상된다. 글 쓰는 입장에서는 최대한 내용의 손실 없이 독자를 배려하기 위하여 노력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짧고 단순한 글만 읽을 줄 아는 것은 큰 문제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공교육 학교들은 그동안 학생들의 언어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문법을 배우게 하고 이를 꾸준히 연습하여 읽히게 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는 외국어 습득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에야 경향이 달라졌다지만 내가 받았던 학교 교육에서 영어 공부란 부지런히 어휘를 외우고 문법을 배우고 이를 계속 공책에 되풀이하는 연습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내 영어 실력은 좋지 않다. 더불어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가지게 되었다.

  전통적인 언어 습득 방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강사를 둔다 하더라도 문법실력이 언어능력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무슨 문법을 고려해가며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문법이란 필요할 때 잠깐 보고 교정하는데 사용된다. 그리고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납득이 가면 순식간에 그 문법을 사용하게 된다.

  언어를 배우는데 중요한 것은 연습이 아니라 이해 아닐까? 연습과 이해를 구분 짓는 것이 어색한 것은 인정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해오던 낱개 낱말과 문법을 계속 외우고 쓰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우리가 기존의 언어 습득 방법을 버린다면 그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자발적 읽기의 힘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 크라센은 남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외국어 습득 이론을 정립한 언어학자로 유명하다. 또한 자연 접근법의 공동 창시자이며 이민자 학생들을 위한 영어 교수법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자발적 읽기라는 방법을 제안한다. 읽기는 독서를 의미하고 자발적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책을 선정해서 하는 독서가 아니라 학생이 자발적으로 책을 선택함을 의미한다. , 학생이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선택하여 수행하는 독서를 의미한다. 이는 분명 그동안 학교에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학교만 보더라도 양서를 구분하여 권장도서목록을 만들어 배포하고 최근에는 독서이력서를 작성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는 입학사정관제를 고려한 정책이기도 한데 분명 크라센이 주창하는 자발적 읽기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책에서 나오는 통계자료와 논문은 자발적 읽기를 할 때 학생들의 리터러시 능력이 다른 어떤 경우보다 높게 상승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책의 내용만 가지고는 분명하게 파악하기 힘들지만 간단히 말하면 반복훈련과 연습만으로 언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를 하나하나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너무 힘들 일이라는 이야기는 누가 봐도 합리적일 것이다.

  그가 내세운 근거들은 대개 미국 학교를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과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화책과 TV

  흔히 만화책과 TV는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나 역시 아이들이 만화책만 읽는 모습을 보면서 만화책을 금지시켜야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었고 아침시간에는 만화책을 금지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크라센은 이 책에서 만화책은 가벼운 읽기로서 더 깊이 있는 책 읽기로 가는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외국어 역시 만화책 읽기로 해결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확실히 만화책에 나오는 어휘나 문장들은 일반 그림책이나 아동문학과 비교해 봐도 그렇게 뒤처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한국 만화책의 경우 학교 공부에 초점을 맞춰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내용의 것이 많고 또 아이들도 만화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그냥 그림을 보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만화책을 어떻게 읽힐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TV의 경우도 저자의 말에 따르면 부정적인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고 한다[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책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면 독서를 덜하게 되는 것은 맞지만, 책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TV를 더 많이 보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몇몇 연구에서는 TV를 시청하면 학업성취도가 약간 증가한다고도 한다. , 이 상관관계는 하루에 약 2시간 정도 TV를 시청할 때만 나타난다.

  TV는 과도할 때만 부정적인 영향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TV를 탓하기보다는 흥미 있는 책을 아이들이 접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나만 하더라도 TV만 계속 보지는 못한다. 독서를 더 흥미 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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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쇼 선생님께 보림문학선 3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이승민 그림, 선우미정 옮김 / 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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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체적인 이야기와 구조

  이 책은 리 마커스 보츠라는 아이가 헨쇼라는 동화 작가에게 편지를 쓴 후 받은 답장에 있는 10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다. 마치 글쓰기 치료과정을 보는 듯싶지만 이 책은 주인공의 내면을 직접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깊은 감명을 던져준다.

  주인공의 내면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는 1인칭 또는 전지적 시점을 사용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1인칭 시점을 사용하였으며 특이하게도 편지일기라는 형식을 이용하여 리 보츠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보여준다. 편지라는 형식과 1인칭 시점이 아주 잘 어우러져 감동을 주었다.

  처음에는 헨쇼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노란색 페이지)형식으로 나중에는 편지 형식의 일기(하얀색 페이지)에서 일반적인 일기 형식(하얀색 페이지)으로 바뀌는데(81, 리 보츠는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표현하는 법을 배웠으니 굳이 편지처럼 일기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리 보츠가 헨쇼 선생님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에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외로움과 돌봄

  리 보츠의 부모님은 현재 이혼한 상태이다. 이 책에서 리 보츠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계속 표현하고 있으며 외롭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67, 53. 53쪽은 엄마의 말이다)

  이 책에서 리 보츠는 중반까지 외로운 소년으로 어머니하고 대화하는 거 외에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왜 이 소년이 이렇게 외롭게 지내는지는 정확하게 추측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우리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집에 없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보통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뭔가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리 보츠의 경우 부모가 싸워서 헤어진 것은 아니고 둘 다 애정이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좀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부부가 이혼할 때는 큰 싸움이 있기 마련이고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다.

  거기에 이혼 후의 부모 중 한 명의 부재는 상처를 더욱 아리게 만든다.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관심을 받고 있는 존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언을 해줘도 한계가 있는 것이 바로 아이들은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중에서도 리 보츠는 아빠가 통화가 끝날 때 작별인사로 엄마 잘 도와드리고 말 잘 들어라. 애야!” 하는 식의 말이 짜증이 난다고 말한다. 왜 아빠는 자신이 보고 싶다고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의문을 표한다.(33, 77)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고상한 말이나 지시, 충고 따위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행위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원론적 이야기는 한두 번으로 끝내야 한다. 매일 들으면 지겨운 그런 이야기보다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관심이 필요하다.(42. 리 보츠는 자신한테 관심을 갖고 지켜봐 준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 같다. 이혼율이 높아지는 사회현실에서 이런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필 것인가는 이제 학교가 회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물론 학교의 존재 의의는 교육이다. 보살핌 또는 돌봄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무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은가 싶다.

  그 고민에 답을 던져줄 만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프리들리 아저씨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인 프리들리 아저씨는 리 보츠의 표현에 따르면 공평하고 너그럽고 자상한 분이다. 담임 교사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선생님도 없다는 리 보츠가 좋아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유일한 인물이다. 선생님보다 학교를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는 리 보츠의 이야기에서 돌봄이라는 것도 교사가 가져야할 덕목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배려와 관계

  글을 잘 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잘 듣기라고 리 보츠는 말한다. 동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많이 읽고 생각하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이 채워지게 되면 어느 순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좋은 문장이 나오게 된다고 한다.

  ‘잘 듣기는 경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꼭 좋은 글을 떠나서 삶의 기본적인 태도로 삼을 만하다. 경청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표현이다. 가정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이 둘이 처음 만날 때는 뜨거운 열정으로 사소한 결점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고 있다하더라도 무시한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뜨거운 사랑이라도 3년이 지나면 식는다는 속설처럼, ‘결혼은 연애와 다르다라는 말처럼 애정만 가지고 가정이 유지될 수는 없다.

  이 책에 나오는 리 보츠의 부모도 어렸을 때 뜨거운 감정에 치우쳐 결혼을 했지만 결국 현실상의 문제 때문에 헤어지게 된 경우다. 지금도 애정은 남아있지만 리 보츠의 엄마는 다시 합치는 것에 회의적이다. 결혼 생활의 유지를 위해서는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타자의 문제를 의식해야 한다. 나와 통하는 나의 파트너가 아닌 나와 다른 존중받아야 할 타자임을 인식해야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배려일 것이다.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배려가 부족한 것, 즉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상대방을 말을 들을 것이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야릴 수 있으므로 가족의 해체까지 이어지지 않게 된다. 리 보츠의 부모가 서로 애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선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아빠 쪽이 더 큰 문제가 있다.

  리 보츠의 엄마는 아빠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하지만 동시에 왜 아빠랑 다시 결혼하지 않느냐는 리의 질문에 네 아빠는 결코 어른이 되지 않을 테니까(123)라고 답한다. 여기서 어른이란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 속한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른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나이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많은 어른들을 안다. 반면 어린나이에도 철이 들어 자기 동생들을 잘 돌보는 어린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교사는 자신도 물론이려니와 학생들을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책임과 배려는 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vs공동체 의식

  그러 리 보츠네 가족의 이야기는 한편으로 개인의 자유와 가족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충돌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족에 대한 배려가 아쉽지만 리 보츠의 아빠가 트럭을 좋아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69, 72) 오히려 그의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데 있다.

  무한정한 자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지만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 한 부분이 제한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리 보츠의 아빠처럼 가정을 이룬 남자라면 과거 자신의 생활패턴을 계속해나갈 자유는 제한된다. 하지만 리 보츠의 아빠는 자신의 파트너가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는 공동체의 파괴였다.

  역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서 누릴 수 있게 되는 자유도 있긴 하다. 만약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치자. 그 사람은 대기업이라는 공동체에 속함으로서 자신의 생활패턴을 고쳐야 할 수도 있고 시간에 쫓겨 자신의 취미를 누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면 대기업이라는 공동체에 기대어 만약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원하던 것을 쟁취할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집단은 필연적으로 긴장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드문 확률로 개인과 공동체가 딱 맞아 떨어져 이러한 긴장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공동체 집단에 자신을 맞추느라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역으로 공동체 집단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누리지 못할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공동체 집단에 의한 자유의 제한은 최소한으로 국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러지 못한다는데 있다. 공동체 집단의 목적에 필요하지도 않음에도 불구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 집단에 의한 개인의 자유 제한은 인정되지만 그 제한은 최소한으로 국한되어야 하다 볼 수 있다.

 

 

마음과 표현

  책 96~7쪽을 보면 리 보츠는 아빠의 편지에 분노를 표한다. 엄마의 말처럼 아빠가 아이스크림으로 산적을 잃어버린 일을 퉁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산적을 소중한 친구로 생각하는 리 보츠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공자는 한 마음은 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에게 란 문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그 사회 구성원 공용의 것이다. 리 보츠의 아빠는 표현이 서툴렀고 리 보츠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자신만의 표현 방법은 자신에게나 옳은 것이다. 타인에 휘둘려 자신을 잃어서는 곤란하겠지만 자신만의 방법을 고수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다.

 

 

회복적 정의

  이야기 전체의 한 축을 차지하는 사건이 리 보츠의 도시락에 있는 맛있는 음식이 사라지는 일이다. 리 보츠는 계속해서 이에 대해 화가 난다고 표현하고 이를 막기 위해 도난방지장치를 만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도둑이 누군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그만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최근에 흉악한 범죄사건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 범죄의 정도에 따라 처벌의 강도를 높여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이러한 강력한 처벌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사형을 집행하는 미국 텍사스 중의 범죄율이 순위권이라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강력한 처벌보다는 그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 분위기, 경제구조가 범죄율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학교폭력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학교마다 담당경찰 배치, 학교폭력위원회 기구 조직 등 대책이 수립되고 있지만 이는 한계가 있고 여전히 학교폭력은 큰 문제다. 때문에 회복적 정의라는 말이 대두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생각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지라 확언하기 힘들지만 기존과는 다른 범죄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기대가 크다. 또한 학교 차원에서는 생활지도와 연관시켜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듯하다.

 

 

좋은 글이란?

  리 보츠는 안젤라 배저(소녀들이 좋아하는 작가)와의 만남에서 그가 쓴 <아빠 트럭을 탄 날>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리는 여기서 결국 이야기로 꾸미지는 못했다며 자신을 낮추지만 안젤라 배저 작가는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 네 자신 그대로, 가장 너답게 글을 썼다며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안젤라 배저 작가의 격려는 이오덕 선생의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수사와 화려한 언변으로 가득찬 글이 아니라 아이의 삶에서 아이답게 쓴 글을 더 높이 평가했던 이오덕 선생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맞다. 글은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 그 자신은 아닐지 몰라도 글은 작가의 삶에서 나온다. 어떤 형식과 사회의 시선에 맞춘 글을 상업성이 우수하다 평할 수는 있어도 좋은 글이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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