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과거 고대 그리스와 같은 폴리스에서 교육이란 사교육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까지 이어져 오는데 근대에 이르러 프러시아와 같은 강력한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교육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공교육[의무교육/무상교육]으로 재탄생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국민이 고르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들을 위한 성실한 인력을 만들어내는 장치인 이 공교육이라는 교육제도는 오늘날 학교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다.1)

 

국가가 주도해서 모든 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은 국가가 국민의 교육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일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가 일률적으로 교육에 관여하는 것은 학생의 개성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즉, 일반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학교구조도 문제지만 통제와 일률적인 주입식 학습으로 상징되는 학교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해낸 학생들이 교사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사 자신들이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곱게 보기 힘들다. 그 결과 나중에 에디슨이나 아이슈타인2) 같은 인물로 성장 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토토와 같은 천덕꾸러기, 전학 갔으면 하는 아이가 되버린다.

 

학교가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문제 푸는 훈련을 시키는 훈련기관에 가깝지 않을까? 훈련기관의 질로 따지자면 국가의 간섭과 부여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학교보다는 학원이 더 우월할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교육기관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학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3)

 

이번에 읽은 <창가의 토토>란 책은 일본에서 대안학교의 열풍을 일으킨 책이다. 토토는 이 책의 저자인 데츠코의 어린 시절 아명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토토가 성장하는 도모에 학원이라는 이 작품의 배경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교장인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다. 개인적으로 이 분이야말로 이 책의 숨은 주인공이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학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교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교사로서 부족하다는 결론도 낼 수 있었다. 하나하나 이 책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토토와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의 첫 만남 장면을 보자. 토토와 이 분의 만남은 정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무리 인내심 강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아이의 이야기를 4시간 동안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토의 이야기를, 맞장구치고 질문도 던져가며 약 4시간동안 듣고 나서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 이제부터 넌 이 학교 학생이다.”라고 말한 것은 뭐랄까 가슴 찡한 장면이었다. 주인공 토토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교장선생님의 태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아이에 대한 책임감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하고 긴 시간동안 제지 없이 듣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책임감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놀라운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그분이 아이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심리와 그 필요에 대해서도 잘 알고 토토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또한 토토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교육은 배려라는 점이다. 도모에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서로를 배려한다. 토토는 미유[교장의 딸]가 샘을 내기 때문에 리본을 학교에서 하지 말아달라는 교장선생님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 든다.4)

그리고 퇴학당한 이야기를 20년동안 하지 않은 토토의 엄마, 토토가 착한 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도록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라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내 말해준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말썽을 피우는 아이에게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억지로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그릇이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에 대한 선입견을 떨쳐내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 번째로 아이들의 인격과 능력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와 교사의 관계는 분명히 우열 관계가 존재한다. 우열 관계가 전혀 없다면 교사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우열 관계는 능력의 차이지 인격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과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아동 역시 인간이므로 그에 걸 맞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비록 아이가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하다 해서 아이를 자기 밑의 존재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교사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열등한 존재는 아니다. 먼저 인생이라는 길을 걷는 자로서 안내하고 도와주고 때로는 엄격해야 하는 게 교사지만 과거 유교문화의 군사부일체처럼 권위적인 인식을 버리지 못하면 곤란하다.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생각이며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지갑을 찾는 토토를 꾸짖지 않았다. 도와주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원 상태로 돌려놓으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아이들을 꾸짖기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아이들을 지나치게 도와주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이든 부모, 교사가 도와주는 아이가 무슨 책임감을 가지겠는가? 아이들 역시 토토가 숙녀도 대접받는 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자신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먼저 개입하는 것은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네 번째로 교육은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수업은 일반적으로 교과서와 교사, 그리고 학생에 의해 이루어진다. 흔히 이를 수업의 3주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런 수업은 일반적으로 교과서 내용의 이해와 교사의 설명, 여기에 잘 된 수업의 경우 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런 수업이 ‘진짜’냐는 것이다.

가령 농사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할 때 교사가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교대 커리큘럼에 농사는 들어있지 않다. 또한 교과서의 삽화와 설명만 가지고 아이들이 농사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교과서, 교사의 설명은 복제품에 불과하다. 교육은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도모에 학원에서 토토는 농부 선생님께 직접 밭을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벌레, 새, 나비, 날씨 등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학교 밖 사람의 힘을 빌리고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매우 인상 깊었다. 20명이 넘는 학급이 39개 있는 도통에서는 아무래도 무리겠지만5) 언젠가 이런 경험을 아이들과 같이 나누는 것도 하나의 꿈이 될 만하다.

 

다섯 번째로 아이들 문제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좋아하는 것을 잘 이해한다 해도 아이들을 자기 원하는 데로 살아가게 둘 수는 없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친구와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교사의 숨은 뜻을 모르고 불평과 불만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특히 경력이 짧은 교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당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장 닥친 권위 손상의 불안 때문에 보통 강경하게 대응하기 마련이다.

물론 강경하게 대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강경한 대응은 가급적 정말 필요할 때 사용해야 그 가치가 있다. 항상 강경하게 대응하면 아이들은 교사의 꾸지람을 한 귀로 듣고 흘릴 가능성이 높고 교사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아이들의 관점을 바꿔주는 것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채소를 운동회 상품으로 받은 아이들이 불평하자 이를 꾸짖지 않고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채소를 집에 가져가서 저녁반찬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채소는 더 이상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운 물건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얻은 저녁반찬거리가 된다.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응방식이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여유가 만들어낸 감각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는 조금 떨어진 감은 있지만 다문화에 관한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한국 사회가 어려워지면서 한국으로 이민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 보통 이들이 그렇잖아도 부족한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공사장 인부 임금을 동결시킨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가 가미되어 있다.

공사장 인부 임금 문제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가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 감정적인 화풀이에 불과하다. 일단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일은 애초에 한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이른바 3D업종이다. 그리고 이 직종은 애초에 월급이 짜다. 공사장 인부들의 임금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존재가 임금을 올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윤을 내기 위해 인건비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기업의 생리 때문이다. 그리고 실업이 큰 문제로 대두된 지금 외국인 노동자가 빠진다고 해서 인건비가 오를지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외노자, 다문화에 대한 증오의 문제점은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특히 차별받고 있는 재일동포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데 있다. 책 163-166쪽을 보면 마사오가 조센진이란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사오가 사실 조선인 출신인데 항상 조센진이란 말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듣다 보니 이를 욕 중 하나로 알게 된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더 슬픈 것은 이 당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상태였는데 이후 한국과 일본이 수교하고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된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일본의 한국인 차별에 분노한다면 그 분노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옳다. 물론 차별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한국인’이라는 것에 분노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 민족주의 관점이 만들어낸 재앙들을 생각해보면 최근에 커지고 있는 다문화, 외노자에 대한 분노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알아간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알아가고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갑이 두둑할수록 너그러워지는 것처럼 여유가 있어야 아이들을 너그럽게 넓게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복제품이 아닌 ‘진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복제품으로는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피상적으로 주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교육 본연의 모습을 도모에 학원은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제도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로서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도모에 학원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가 불타자 대학생 아들에게 “얘야, 이번에는 무슨 학교를 만들까?”라고 말한 고바야시 선생님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교사상을 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이런 모습에 가까워지기를 나 스스로에게 간절히 바란다.

 


1) 학교장이 기관장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학교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특이한 측면이 있다.

2) 이 둘도 학교에서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존경받는 CEO들도 학교 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솔직히 날라리(?)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3) 그러나 위에 계신 분들은 학력만을 중시하여 일제고사라는 학력으로 줄세우기 제도를 만들었다. 같은 정당 후보가 당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고사를 폐지하겠다는 것은 이 제도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 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경쟁이 지나치면 모든 학생이 잘 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난다.

4) 물론 50년도 더 된 시절의 이야기이고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5) 작은 학교도 쉽지 않다. 도모에 학원은 특수한 경우고 또한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 교장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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