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 배운다 - 비틀린 문명과 삶, 교육을 비추는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깊은 지혜와 성찰 나무에게 배운다 1
니시오카 쓰네카즈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최성현 옮김 / 상추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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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학교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공교육은 근대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사교육이 있을 뿐 공교육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 국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국가와 민족의 기치 아래 사람들을 재탄생 시켜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공교육, 바로 학교다.

 

   이러한 역사성이 기반이기 때문에 학교는 국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돈을 지급하는 주체이니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교육이란 활동이 하나의 국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간섭을 교사가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학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획일화된 인력으로 만드는 일종의 공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역할은 다양성과 창의성, 개성이 강조되는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물론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기본 교양과 일정 수준의 지적 능력은 모든 사람이 필요한 것이기에 보편성을 갖는다. 따라서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내용과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학교와 교사의 입장에서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공교육이 지탄을 받고는 있어도 기여한 점은 분명히 있다. 문맹률이 이렇게 낮은 국가는 전 세계를 둘러봐도 드문 편이다. 이는 분명 학교가 자랑으로 삼을만한 자랑거리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처럼 모든 학생이 하나의 진로를 향해 미친 듯이 순위 경쟁을 펼치는 것은 문제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이범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문제제기만 있을 뿐 뾰족한 해결책이 그다지 없다는 데 있다.

 

   푸코는 학교가 감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가끔 교사로서 하는 일이 교도관, 경찰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무래도 다인수 학급에서 교사가 수업과 학급운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통제와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제도적 관리와 통제는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 특별히 잘못하고 있다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육이란 활동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고 관리와 통제를 하다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앞에서 떠들어대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수업을 하는 것인지 조용히 시키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정신이 멍해지는 때가 요즘 들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나무에게 배운다란 이 책을 읽은 것은 나름 시의적절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과거 대목장이었던 니시오카 스네카즈씨가 구술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그의 경험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일본인이 쓴 책이라 잘 모르는 부분도 있지만 대목장으로서 그의 나무에 대한 태도와 목수로서 대목장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저자는 나무도 성깔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니 나무 역시 인간처럼 개성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다. 다만 나무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이 없다보니 잘 느끼지 못했다.

 

   성깔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이는 사용하는 방법에 달린 문제다. 성깔이 있는 나무를 쓰자면 번거롭지만 잘 사용하면 그쪽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성깔이 있는 나무는 생명력 또한 강하다.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나름 다 한 성깔 한 사람 아닌가? 성깔을 살려 나무를 사용해야 비로소 천년을 버틸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편리한 도구들이 등장했고 굳이 나무를 제련할 때 그 성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나무의 성격이 아예 나오지 않도록 합판으로 바꿔버리고 다루기 쉬운 나무를 찾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마치 말 잘 듣는 학생을 찾고 학생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획일화된 교육내용을 전달하는데 급급한 내 모습과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어떤 유행에 따라 획일화된 방법론을 적용하는데 급급한 학교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방법의 획일화는 다양한 목재의 성질을 제거하여 합판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무를 대하는 것과 학생들을 대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나무가 개성이 있다 하더라도 목수와 나무의 관계는 주체과 객체가 명확한 편이다. 반면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비록 학교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제약을 바고 있긴 하지만 주체와 객체가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때로는 교사가 학생에게 배울 때도 있고 학생 역시 교사를 능동적으로 대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넘어선 교육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대목장으로서 저자의 경험 역시 많은 생각과 과제를 던져준다. 대목장은 다른 목수들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녀야함은 물론이고 다른 목수, 미장이, 석수장이들을 조화시켜 건물을 완성시켜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떠올리게 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교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교사는 이 대목장의 모습 아니겠는가? 다양한 학생들의 개성을 조화시켜 하나의 학급을 꾸려나가고 그들을 길러내는 것은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다. 거기에 학생들이 갖추어야할 보편적 교양 역시 가르쳐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애정과 사명감이 없다면 걸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대목장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저자는 주로 절 건축물을 상대로 솜씨를 발휘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 불교 경전을 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수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자료를 찾고 멋진 수업기법을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명의 수업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개성을 길러주고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이러한 노력에 다양한 독서와 경험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다.

 

   교컴지기 함영기 선생님은 새학기를 맞이하여 어떤 연수를 듣는 다던가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을 가다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스킬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가다듬는 것, 이른바 수신이 교사의 전문성을 기르는 데 꼭 필요한 것 아닐까? 우리학교가 독서모임을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기술적 측면만 보면 책 읽고 독서모임 했다 해서 수업이 변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번에 읽은 이 책은 목수의 삶과 자세 이야기기 때문에 당장 적용할만한 뭔가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것은 바로 수신을 위해서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자로서 나는 아무래도 애들의 의견에 좀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허용해야지 하는 생각이라 그렇다. 그게 내 문제점인 것 같다. 아직 아이들은 독립된 개인이 아니다. 민주시민으로서 준비된 존재도 아니다. 그 과정에 있는 아직은 보살핌과 교육을 받아야하는 존재다. 아이들의 개성을 잘 길러주면서도 가르쳐야 할 것을 잘 구분하여 반드시 가르칠 수 있도록 자신을 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아이의 인권에는 자유권도 있지만 교육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의미에 대해 더 고민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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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29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쓰신 느낌글을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읽혀 보아도
여러모로 서로 좋은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바바라 쿠니 그림책 <바구니 달>을 보면,
이 그림책에서도 '숲(나무)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비로소 숲에서 무언가를 얻고 살아갈 수 있다는 대목이 있어요.

교사는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교사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 마음으로 사귈 때에
교육이 이루어지겠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