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자녀 싸가지 코칭 - 1318 어려운 자녀 쉬운 사용 설명서
이병준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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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처음부터 화려한 날개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에 나비는 알에서 그리고 애벌레로 태어난다. 애벌레 상태에서 열심히 먹고 자고 성장한 후 성충이 되면 스스로 뿜은 실로 고치를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가 번데기가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시 지내다가 마침내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로 세상에 나타난다.

 

인간도 가히 다르지 않다. 인간은 어린 시절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 가능성을 내보이지 못한다. 성장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세상에 펼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독립심이 약한 청년들이 사회문제가 되는 시대다. 그 독일에서도 젊은이들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지 않아 문제라고 한다.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는 대한민국의 경우 말할 것도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대학교육까지 받는 우수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의 초점은 젊은 세대가 아닌 이들을 키워낸 부모 세대에 맞춰져야 한다. 현 부모 세대는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희생한 세대다. 반면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가망이 아주 높은 세대이기도 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부모가 해주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도 막상 부모의 부양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즉,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겠다는 것인데 보통 이런 경우 싸가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지금 부모 세대는 싸가지 없는 자식 세대를 길러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요즘 아이들은 매우 자유분방하며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다. 게다가 부모를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당연한 것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족 속에 살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현상이다.

 

풍족 속에서 부모에게 말만 하면 다 해주니 아이들은 성장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돕는다 말하지만 잘 보면 돕는 게 아니라 애들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마땅히 가르쳐야할 사회규범을 애들 기죽인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니 아이들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자식 세대들이 부모를 제대로 모시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마마보이, 파파걸로 대변되는 부모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아이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나이에 맞는 행동을 가르쳐야 한다. 나이에 맞는 행동이란 곧 ‘싸가지’로 아이들에게 싸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을 옹호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며 마냥 사랑으로 감싸주면 해결된다는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는 것도 문제다.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책의 저자 이병준은 책 내용에서 닥터 지바고라는 인물로 화하여 아이들이 싸가지가 있는 나이에 맞는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이 되게 풀어내고 있다.

 

책 내용의 전개에서 두 축은 바로 경숙(민들레)과 예준이다. 예준이의 경우 ADHD로 판정을 받고 난 후 완전히 삶이 달라졌다. 나는 ADHD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준이의 경우와 같이 이를 자신의 방패막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과 나이가 들면 자연치유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를 너무 의식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경숙은 속상해하면서도 예준이의 요구에 순응한다. 닥터지바고는 이를 동반의존 관계라 설명했는데 한국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 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정말 맞는 말이다.

 

닥터 지바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ADHD가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부모는 나이에 맞는 행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또한 제2의 출생, 과거라면 성년식이라고 불렸을 과정을 통과해야만 어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요즘은 성년식이라는 과정이 없어지고 대학생이 되면 자기들끼리 자축하는 행사를 가지는데 생각해보면 성년식이라는 과정은 어른들과 함께 하는게 맞는 것 같다.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여 현실을 극복할 힘이 없는 자식 세대들에게 자발성과 자기 통제력을 길러주어 궁극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동 중심 교육학, 심리학의 영향으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맥락에 따라서 맞는 말이지만 과잉사랑으로 인한 문제일 경우 문제를 더 심화시킨다. 따라서 돌봄에서 교육으로 부모 자신도 성장할 필요가 있다. 자식을 돌보기만 해서는 자식이 성장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원리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선을 그어야 한다. 측은지심에 의해 자식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자식에게 지는 것을 떠나서 해악이 된다. 측은지심을 강조했던 맹자가 타에 추종을 불허하던 독설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음의 표현은 예라는 형식에 의존해야 한다.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앞으로 사회에 나가 도움이 될 원리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좀 의외였던 것은 명령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세한 설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닥터 지바고의 말에 따르면 길게 설명하는 것은 잔소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굵은 소리, 즉 확실한 기준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원리 원칙을 강제할 정도로 모질지 못하다. 따라서 아버지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줘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들은 보통 집안일에 잘 관여를 하지 않는데 이는 자식교육을 여자에게 떠넘긴 것으로 스스로 아버지 역할을 제한시켜 버린 것과 같다. 아버지가 부재한 아이들에게 생기는 문제점을 생각해볼 때 아버지가 돈만 벌어다 주는 역할에 만족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겠다.

 

보통 상담이라고 하면 공감을 최우선으로 둔다. 나는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라는 이야기가 옳다고 여기는 한편 가끔 불편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잘못한 사실이 엄연히 있는데 공감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의문을 해소시켜 줬다.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공감과 더불어 확실한 기준 하에 아이들의 싸가지를 바로 잡는 게 필요하다. 아이들의 요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이 책은 많은 보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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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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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같이 해온 사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다 제외 시켜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이란 것도 전쟁의 틈바귀에서 빠르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것은 인간에게 있어 떨궈내고 싶어도 떨궈낼 수 없는 그런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동안 있었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어떤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도둑질이 항상 있어왔다고 해서 도둑질을 용납해서야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비록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위험한 행위다.

 

이 책 <나무소녀>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책이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지 이 책은 고발하고 있다. 나무소녀가 겪는 책 내내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경험들은 인간이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보여준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전쟁이란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 일어난다. 평화주의자들의 일각에서 대두되는 ‘군대무용론’이 얼마나 허접한 이론인지는 상식만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군대가 있어서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있기에 군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대무용론’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무책임한 제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은 왜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 책만큼 한 국가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단위든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고 기회가 된다면 폭력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폭력에 의한 지배욕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만약 자신과 같은 평등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지배욕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보면 대다수가 강자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대다수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행한 폭력을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남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1)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의 ‘라티노’라고 불리는 기득권층은 이러한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인디오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득권을 사용하여 이들을 착취한다. 아마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니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그런데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종차별은 흔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의 수준이 높아지고 인권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차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전쟁이란 따지고 보면 인간에 대한 차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자신의 우월성을 선포하는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축약하면 ‘선민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선민사상’의 무서운 점은 이게 어떤 사상, 신념체계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데 있다. 자신의 것만 소중하다,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고 언제든지 폭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2)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에 의한 인종청소 사건이다.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독일인]이 가장 우수하며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집시, 유대인들은 쓰레기 인종으로 반드시 멸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이 아우슈비츠, 즉 홀로코스트다.

 

히틀러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럽 열강의 지배자, 시민들은 대다수가 백인들이 황인,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아직도 존재하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일제의 차별을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동남아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이 존재한다.3)

 

총칼로 이루어지는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편견과 차별로 인한 폭력은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다문화에 대한 증오 역시 편견과 차별로 인한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매우 우려되는 움직임이다.4)

 

일단 전쟁이 시작되고 지속되면 인간은 광기에 휩쓸리게 된다. 시위자들과 맞서는 전경들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단 아군이 다치기 시작하면 정의, 도덕 같은 관념들은 힘을 잃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일단 이기는 것이 중요해 진다. 평화란 말은 바닥에 쳐 박히며 생존이라는 가치 앞에 인간의 존엄은 사라진다. 가브리엘라는 그녀가 겪은 험하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많은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5)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돈 앞에 인간의 생명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것을 모른 척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휩쓸려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우습게 여긴다. 우리와 ‘라티노’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평화로운 사회란 인간의 존엄이 우뚝 선 사회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훌륭한 ‘시민’이다. 민주주의는 그에 걸 맞는 ‘시민’에 의해 유지된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소수에 의한 참주정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미 자본의 족쇄에 사로잡혀 자본을 많이 축척하고 있는 자본가를 우러러보며 자본의 먹이그물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소외받고 있으며, 문제를 제기하면 탄압받는다. 뭐, 노동자 계급[블루컬러]의 사람들도 자기 자식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차별과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대만이 사람을 차별하려는 시도와 이로 인한 비인간화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만이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연대가 차별을 위한 모든 시도를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 한국 교육은 과연 인간의 긍지와 자존심을 길러주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이 원하는 숙련된 노동자만을 ‘생산’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사상으로 이 사상의 원류인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논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발전에 초점을 둔 것은 그 당시에 획기적인 일로 오늘날까지 인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어느 사상이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사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무조건 지켜야한다는 율법주의자들처럼 현대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경쟁, 기업의지를 교리처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6) 그 결과는 양극화 및 세계경제 침체다. 경쟁이 극심해지면 사람들의 경쟁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떨궈지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들은 소비능력이 없을 것이고 가면 갈수록 소비능력이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밥을 몇 끼 먹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소비력 자체가 줄어든다는 것이고 이는 자본의 순환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종적인 결과는 대공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매력에 홀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의 위해 봉사해야하는 자본에 스스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대다수다. 과거 이라크 전쟁 당시 부시의 이라크 공격에 찬성하는 미국인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이라크 공격에 찬성한 이유는 정의 실현보다는 기름값 때문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전쟁을 지지했다는 이야기다.7)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189쪽에서 가브리엘라는 마야인들의 삶과 그링고들의 삶을 비교한다. 땅과 하늘과 자연이 주는 혜택으로 이루어진 가브리엘라의 마을과 자기들이 만들어낸 물건들로 둘러싸인 미국의 도시. 어느 것이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가? 지나친 개발로 염증이 난 현대인 입장에서 아마 전자가 더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사고의 전환은 필요하지만 극단적인 인공주의에서 다시 극단적인 자연주의로 갈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에릭 호퍼는 자연이 우리 인간을 도와주고 인도한다느니, 자연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서 그 현명한 계획을 인간이 실현하도록 북돋아주고 밀어준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왠지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것도 그럴 것이 인생의 대부분을 부두 노동자로 살았던 에릭 호퍼에게 자연은 언제나 고통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다. 자연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자연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자연이다. 이들이 자연을 찬양하는 모습은 과거 선비들이 정자에 앉아 자연이 아름답다고 시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실상 그들이 그렇게 편하게 자연을 예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일반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모른다. 자연주의도 인간의 삶에서 구현되어야지 이를 교리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소녀 가브리엘라가 겪은 전쟁도 참혹한 것이지만 이 지구상에는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군벌들의 경쟁으로 힘없는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나무소녀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와 환경에서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마리오의 말처럼 우리가 싸워야 할 적과 치러야 할 전쟁은 한 둘이 아닌 것이다. 삼성의 백혈병 노동자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고 쌍용차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 역시 현존하며 최근에는 남성연대라는 기괴한 단체도 나타난 상태다.

 

불합리와 부정의가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살펴보면 인류의 역사는 계속해서 진보해 가고 있다.

 

가브리엘라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외면한 자신을 저주하며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장 크게 저버린 행동이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책의 끝 부분에서인데 가브리엘라는 결국 부모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수용소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는 후퇴가 아니며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볼테르의 말처럼 자기 정원을 가꾸어야 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8) 그리고 언젠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1) 자신의 말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말이 옳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2) 자신의 생각에 신뢰를 보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만’ 신뢰한다는 것.

3) 반대급부로 백인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 역시 존재한다.

4) 독일에서도 새로운 세력, 네오나치가 등장했다.

5) 이것은 나치의 전략이었다. 같은 지능을 지닌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치는 고의로 유대인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수용소를 꾸몄고, 빅터 프랭클 같은 특별한 사람 외에 상당수가 희망과 인간의 존엄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즉, 짐승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6)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원류인 하이에크는 ‘공정한’ 경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기업의 부당한 행위를 경계했다.

7) 우리나라도 할 말이 없는데 아직도 베트남에 대한 사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8) 그러나 과거를 그냥 묻어두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문제지만 과거에 있었던 문제들을 그대로 묻어두는 것 역시 문제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전진하는 것은 진보라기 보다는 퇴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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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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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고대 그리스와 같은 폴리스에서 교육이란 사교육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통은 중세까지 이어져 오는데 근대에 이르러 프러시아와 같은 강력한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교육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공교육[의무교육/무상교육]으로 재탄생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국민이 고르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들을 위한 성실한 인력을 만들어내는 장치인 이 공교육이라는 교육제도는 오늘날 학교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다.1)

 

국가가 주도해서 모든 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은 국가가 국민의 교육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일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가 일률적으로 교육에 관여하는 것은 학생의 개성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즉, 일반적인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학교구조도 문제지만 통제와 일률적인 주입식 학습으로 상징되는 학교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해낸 학생들이 교사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사 자신들이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곱게 보기 힘들다. 그 결과 나중에 에디슨이나 아이슈타인2) 같은 인물로 성장 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토토와 같은 천덕꾸러기, 전학 갔으면 하는 아이가 되버린다.

 

학교가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문제 푸는 훈련을 시키는 훈련기관에 가깝지 않을까? 훈련기관의 질로 따지자면 국가의 간섭과 부여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학교보다는 학원이 더 우월할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교육기관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학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3)

 

이번에 읽은 <창가의 토토>란 책은 일본에서 대안학교의 열풍을 일으킨 책이다. 토토는 이 책의 저자인 데츠코의 어린 시절 아명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토토가 성장하는 도모에 학원이라는 이 작품의 배경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교장인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다. 개인적으로 이 분이야말로 이 책의 숨은 주인공이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학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교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교사로서 부족하다는 결론도 낼 수 있었다. 하나하나 이 책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토토와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의 첫 만남 장면을 보자. 토토와 이 분의 만남은 정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무리 인내심 강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아이의 이야기를 4시간 동안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토의 이야기를, 맞장구치고 질문도 던져가며 약 4시간동안 듣고 나서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 이제부터 넌 이 학교 학생이다.”라고 말한 것은 뭐랄까 가슴 찡한 장면이었다. 주인공 토토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교장선생님의 태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아이에 대한 책임감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하고 긴 시간동안 제지 없이 듣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책임감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놀라운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그분이 아이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심리와 그 필요에 대해서도 잘 알고 토토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또한 토토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교육은 배려라는 점이다. 도모에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서로를 배려한다. 토토는 미유[교장의 딸]가 샘을 내기 때문에 리본을 학교에서 하지 말아달라는 교장선생님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 든다.4)

그리고 퇴학당한 이야기를 20년동안 하지 않은 토토의 엄마, 토토가 착한 아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도록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라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내 말해준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말썽을 피우는 아이에게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억지로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고 그릇이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에 대한 선입견을 떨쳐내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 번째로 아이들의 인격과 능력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와 교사의 관계는 분명히 우열 관계가 존재한다. 우열 관계가 전혀 없다면 교사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우열 관계는 능력의 차이지 인격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과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아동 역시 인간이므로 그에 걸 맞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비록 아이가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하다 해서 아이를 자기 밑의 존재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교사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열등한 존재는 아니다. 먼저 인생이라는 길을 걷는 자로서 안내하고 도와주고 때로는 엄격해야 하는 게 교사지만 과거 유교문화의 군사부일체처럼 권위적인 인식을 버리지 못하면 곤란하다.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생각이며 반인권적인 발상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지갑을 찾는 토토를 꾸짖지 않았다. 도와주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원 상태로 돌려놓으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아이들을 꾸짖기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아이들을 지나치게 도와주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이든 부모, 교사가 도와주는 아이가 무슨 책임감을 가지겠는가? 아이들 역시 토토가 숙녀도 대접받는 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자신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의 요청이 있기도 전에 먼저 개입하는 것은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네 번째로 교육은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수업은 일반적으로 교과서와 교사, 그리고 학생에 의해 이루어진다. 흔히 이를 수업의 3주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런 수업은 일반적으로 교과서 내용의 이해와 교사의 설명, 여기에 잘 된 수업의 경우 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런 수업이 ‘진짜’냐는 것이다.

가령 농사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할 때 교사가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교대 커리큘럼에 농사는 들어있지 않다. 또한 교과서의 삽화와 설명만 가지고 아이들이 농사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교과서, 교사의 설명은 복제품에 불과하다. 교육은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도모에 학원에서 토토는 농부 선생님께 직접 밭을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벌레, 새, 나비, 날씨 등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학교 밖 사람의 힘을 빌리고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매우 인상 깊었다. 20명이 넘는 학급이 39개 있는 도통에서는 아무래도 무리겠지만5) 언젠가 이런 경험을 아이들과 같이 나누는 것도 하나의 꿈이 될 만하다.

 

다섯 번째로 아이들 문제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좋아하는 것을 잘 이해한다 해도 아이들을 자기 원하는 데로 살아가게 둘 수는 없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친구와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교사의 숨은 뜻을 모르고 불평과 불만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특히 경력이 짧은 교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당장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장 닥친 권위 손상의 불안 때문에 보통 강경하게 대응하기 마련이다.

물론 강경하게 대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강경한 대응은 가급적 정말 필요할 때 사용해야 그 가치가 있다. 항상 강경하게 대응하면 아이들은 교사의 꾸지람을 한 귀로 듣고 흘릴 가능성이 높고 교사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아이들의 관점을 바꿔주는 것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채소를 운동회 상품으로 받은 아이들이 불평하자 이를 꾸짖지 않고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채소를 집에 가져가서 저녁반찬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채소는 더 이상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운 물건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얻은 저녁반찬거리가 된다.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응방식이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여유가 만들어낸 감각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는 조금 떨어진 감은 있지만 다문화에 관한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한국 사회가 어려워지면서 한국으로 이민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 보통 이들이 그렇잖아도 부족한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공사장 인부 임금을 동결시킨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가 가미되어 있다.

공사장 인부 임금 문제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가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 감정적인 화풀이에 불과하다. 일단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일은 애초에 한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이른바 3D업종이다. 그리고 이 직종은 애초에 월급이 짜다. 공사장 인부들의 임금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존재가 임금을 올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윤을 내기 위해 인건비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기업의 생리 때문이다. 그리고 실업이 큰 문제로 대두된 지금 외국인 노동자가 빠진다고 해서 인건비가 오를지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외노자, 다문화에 대한 증오의 문제점은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특히 차별받고 있는 재일동포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데 있다. 책 163-166쪽을 보면 마사오가 조센진이란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사오가 사실 조선인 출신인데 항상 조센진이란 말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듣다 보니 이를 욕 중 하나로 알게 된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더 슬픈 것은 이 당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상태였는데 이후 한국과 일본이 수교하고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된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일본의 한국인 차별에 분노한다면 그 분노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옳다. 물론 차별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한국인’이라는 것에 분노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런 민족주의 관점이 만들어낸 재앙들을 생각해보면 최근에 커지고 있는 다문화, 외노자에 대한 분노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알아간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알아가고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갑이 두둑할수록 너그러워지는 것처럼 여유가 있어야 아이들을 너그럽게 넓게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복제품이 아닌 ‘진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복제품으로는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피상적으로 주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교육 본연의 모습을 도모에 학원은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제도교육에 종사하는 교사로서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도모에 학원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가 불타자 대학생 아들에게 “얘야, 이번에는 무슨 학교를 만들까?”라고 말한 고바야시 선생님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교사상을 볼 수도 있었다. 언젠가 이런 모습에 가까워지기를 나 스스로에게 간절히 바란다.

 


1) 학교장이 기관장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학교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특이한 측면이 있다.

2) 이 둘도 학교에서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존경받는 CEO들도 학교 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솔직히 날라리(?)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3) 그러나 위에 계신 분들은 학력만을 중시하여 일제고사라는 학력으로 줄세우기 제도를 만들었다. 같은 정당 후보가 당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고사를 폐지하겠다는 것은 이 제도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 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경쟁이 지나치면 모든 학생이 잘 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난다.

4) 물론 50년도 더 된 시절의 이야기이고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5) 작은 학교도 쉽지 않다. 도모에 학원은 특수한 경우고 또한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이 교장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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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소녀 가출기 상상하는 아이 창작동화 시리즈 12
최미경 지음, 이승연 그림 / 리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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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인 박지우는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다. 그런데 사실 사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우가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다. 집안은 기초생활수급자인 것 같고 밑의 동생은 정신지체등급을 받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린 여자아이가 견디기는 아마 힘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우는 필사의 노력으로 공부도 잘하고 상도 많이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우의 노력은 부모님의 사정으로 부산에서 포항으로 전학가면서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셋째를 임신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우는 어머니한테 평소 억눌렀던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면서 가출하게 된다. 

지우가 노력도 안하고 불량한 학생이었으면 이야기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우는 학원도 안 다니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노력파 학생이다. 개인적으로 지우 부모님이 지우에게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버지야 자주 등장하지 않으니 논외로 하고 어머니의 경우 지우의 마음을 어루만지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찬우가 학교에 못가도록 막는 거 외에는 지우가 야무지다면서 걱정할 것 없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말의 이면에는 지우에 대한 신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우 입장에서 어디 그런 생각이 들겠는가? 지우는 셋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고등학교도 못가고 돈 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였다. 아무리 야무진 소녀라 해도 결국 어린 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우의 입장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책에서 묘사된 지우의 부모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즐겁게 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감은 있지만 이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제목은 폭풍소녀 가출기지만 사실 지우의 가출일은 1~2일 정도로 가출이라기에는 좀 민망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동안 지우는 다양한 경험을 겪는다. 도서관에서 남진우와의 만남을 통해 정신지체도 노력하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경이의 몰랐던 다른 모습도 보게 된다. 그리고 평소 싫어했던 찬우를 위해 남자애들과 부딪히기도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와 재회하는 모습은 꽤 감명깊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지우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는 민수와 미경이와 만남이 있는데 여기서 민수는 미경이와 지우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삶의 배경은 천지차이지만 두 소녀는 더욱더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자기주관이 뚜렷다하는 점에서 비슷하하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집안이 안 좋아도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집안이든 사춘기 소녀끼리는 공감하는게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까?

이 책에서 가출은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지우가 성장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하고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우가 좀 특별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심한 무기력에 빠져 있다.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탈출할 수 없는 가난 앞에서 어른들도 절망에 빠지지만 아이들도 절망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게 동화의 매력이지만 현실로 돌아올 때 어떻게 하면 지우와 같은 아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결국 가정이다. 제도는 한계가 있다. 공산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평등주의를 취하지 않은 이상 도울 수 있는 것에 한계는 있으며, 미경이와 같은 부유한 집 아이도 가출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가정에서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가정이 든든한 받침대가 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5~6학년 여학생들에게 좋은 책인 것 같다. 너무 집안 환경이 두드러지게 어렵기 때문에 사춘기라는 이름이 바랜 느낌은 있지만 지우가 가출까지 결심하게 된 것은 사춘기 소녀의 감성 때문일 것이다. 아마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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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생 사이 우리들사이 시리즈 3
하임 기너트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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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에서 교육학은 물론이고 수업지도안을 어떻게 짤지, 아이들이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아왔다. 내가 얼마나 성실했는가는 제쳐두더라도 교대 4년 동안 초등교사가 되기 위하여 다양한 교육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이 현장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내가 배운 아동심리, 교육방법들은 나 자신을 옭매는 하나의 율법의 역할을 했을 뿐 당장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수업을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내 자신의 자질이 일천했던 까닭도 있겠지만 교대에서 아이들에 대한 너무 이론적인 내용만을 배웠던 까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교대에서 배운 내용이 틀렸던 것은 아니다. 분명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존재였다. 단 내가 그들이 배우기를 원했던 내용, 즉 교과내용만 제외하고. 그들은 내 주변잡기는 물론 주변 환경과 그 외 내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영역에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아동의 흥미보다는 학문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교육내용이 문제일 수 있다. 학문적 관점으로 교과서는 만들어놓고 어떻게든 아동의 흥미를 끌어내라는 어려운 과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교과내용을 하나라도 더 알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반복한 것이 전부였을까?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염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아가 나 역시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왜 아이들은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배우려 들지 않는 것일까 몇 번이고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아이와 만남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그 관계의 토대위에서 같이 지식을 찾아가야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고 주어진 교과내용을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전달하는데 급급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진도는 급해지고 마음에도 여유가 사라져 교직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 교사와 학생 사이가 나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교사들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교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교실 분위기가 어떻게 확 바뀌는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는 내 자신이 그동안 사용했던 언어에 대해 반성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대강 시절과 작년 도통 시절에 아이들에게 폭언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름 아이들이 바로서기 바라는 마음으로 한 것이지만 결국 폭언은 폭언일 뿐이었다. 그것으로 아이들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교사에 대한 불신과 학교에 대한 회의만 더 커졌을 것이다.

 

교사는 선생, 즉 먼저 난 사람이다. 우리가 어른을 어른대접해주는 것은 그에 맞는 성숙함을 기대하기 때문이고 이를 닮아가기 원해서다. 아이들이 싸우지 않길 바란다면 나부터 아이들과 싸워서 안 된다. 아직도 속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날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갖자고 생각하니 요즘은 그래도 거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따라오니 한결 맘이 편하다. 이번 한 해 동안은 아이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아이들이 닮아갔으면 하는 모습으로 비쳐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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