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자 - PM 4:00 여기는 이타카
송호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그동안 내가 쓰고 버린 물건이 어느 정도 되는가? 아마도 꽤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건 글을 읽는 본인이 낭비벽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고 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조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소비’를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막스 베버가 ‘생산’과 ‘자본의 축척’을 중시했던 것과 상반되는 이 주장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된다.


공급이 있다고 해서 꼭 수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없는 물건이 악성재고로 창고료만 축내는 상황은 꽤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수요가 생기면 공급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지 꽤 되었지만 마약사범이 끊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반면 네덜란드의 경우 어떻게 보면 위험한 선택을 했는데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허가하였다. 물론 정부의 개입 하에 이루어졌고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음이 입증되었다. 결국 과거 생활필수품이 모자랐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소비’가 생산을 이끈다는 이야기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160c4bf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00pixel, 세로 231pixel문제는 이러한 ‘소비’위주의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침해한다는데 있다. 대량 소비가 가능해지면 기업은 당연히 이득을 위해 그에 맞춰 생산하려고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계와 분업화다. 기계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분업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만들어버린다. 또한 기업가들이 가장 줄이고 싶어하고 줄이기 편한 비용이 바로 인건비다.


정리하자면 분명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가지고 원하는 만큼 소비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하게 드리우듯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해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다수 노동자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지적과 찰리 채플린의 묘사처럼, 하나의 공장부품이 되어 과거 노예와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학에서 긍정적으로 바는 싸고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편하게 얻고자 하는 합리적인 경제 행위가 역설적으로 노동자의 삶과 행복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각국 정부의 헌법에서 보장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그 빛은 바랜지 오래되었다. 반면 소비와 물질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다. 이미 하나의 우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말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돈 앞에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대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제도적, 사회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이런 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도가 바뀐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지 의문이다. 신자유주의1)라 불리는 경쟁시스템이 한국에 이렇게 잘 정착된 것이 제도만의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본가들이 의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하튼 그 의도에 그렇게 쉽게 쓸려간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그 시스템과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부동산 폭증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데리고 부동산 정책을 아무리 손질한들 뭔 소용인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자 시장이 얼어붙고 전세값만 오른 사실을 기억하자. 애초에 문제를 바라보는 철학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저자 송호창[현 무소속 국회의원]2)3) 씨가 직접 다녀오고 책으로 출간까지 한 이타카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곳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느냐에 따라 삶이 질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증언한다.


그가 갑작스럽게 오게 된 이 이타카는 현대 소비 사회와 정 반대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몇 십년된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정말 충격에 가깝다. 한국에 이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돈만 된다면 보통 10년이 지나고 나면 차를 바꾸는 게 일반적이다.


이타카 사회는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타카 사람들의 경우 그 의무를 자연에까지 발휘한다는 점4)에서 특이하다. 게다가 노동자들을 위해 지역 마트를 이용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공동체는 그저 사업적인 비인간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사상누각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이타카를 보면 과거 한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1년에 한 사람이 최소한 50권을 읽는다는 이타카.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비극은 더 높은 시민의식을 갖출 때 극복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시민의식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시민의식을 길러주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노르웨이의 스톨텐베르크 총리의 말을 되새겨 보자. 그는 반다문화주의자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로 인한 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더 강한 민주주의와 더 큰 관용의 정신으로 보복하겠다”


또한 담화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충격받은 상태지만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원주민성이 절대 아닙니다.”


무릇 품격이란 이런 고통과 시련에서 보여 지는 것이다.


1) 우리나라에 도입된 신자유주의는 그 주창자인 하이예크의 생각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쟁찬양, 기업의지 찬양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2)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민변 소속으로서 그가 한 일들은 훌륭한 것이지만 한 정당의 공천을 받아 무혈입성으로 국회의원이 되고서 8개월 만에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당을 성토하고 탈당한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그런 당 공천을 왜 받았데? 8개월 전 민주당은 뭐가 달랐나? 그는 탈당하기 전까지 자신이 탈당한 일은 없을 것이라 주장했으며 정작 그 주장 후 몇일 만에 탈당하고 나서 자신에게 비난이 빗발치자 안철수와 문재인은 서로 한 식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간 것 뿐 이라는 괴상한 변명을 했다. 안철수는 기존 정당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개인적으로야 문재인과 안철수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당 소속으로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관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일련의 어이없는 사태에 대해 문재인은 마음이 아프다고 트윗으로 남긴 바 있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민주당은 사실 ‘송호창’이 아니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반면 ‘송호창’은 민주당 간판이 없었다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었다. 이걸 개인 의지문제로 격하시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도 열린우리당 분당 때문에 까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3) 다음은 문화일보 칼럼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송 의원은 이후 민주당을 버린 데 대한 가혹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박선숙 공동선거대책본부장 등 다른 민주당 출신 인사와 달리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현역의원이고 지역구에서 선거를 오래 준비한 사람들을 경쟁 없이 제치고 전략공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안 후보 캠프행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송 의원 측이 보여준 태도는 그의 잘못된 처신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새정치를 하려는 정치인의 태도는 아니었다.”

4) 동물에게 He, She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 우리 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 강좌
심상정 엮음 / 양철북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 광고가 유행하던 당시는 주식, 펀드, 부동산 등의 자산이 급등하던 시기였다. 아마 그래서 이런 말들이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양극화는 심해지고 사람들의 관계는 삭막해졌다. 부자를 꿈꾸며 빚까지 내가며 부동산에 투자 라고 쓰고 투기라 읽는다 했던 사람들은 지금 빚더미에 올라앉아 허덕이며 정부의 도움만 바라보고 있다. 불과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내 생각에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칼빈의 말처럼 열심히 일한 결과인 ’, 그러니까 청부는 도리어 칭찬받을 일이다. 문제는 부자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 외 것들을 모두 부자라는 꿈에 쏟아 붓고 도외시한다는데 있다. 쉽게 말하자면 부자만 될 수 있다면 그 어떠한 일도 한다는 풍습이 문제란 이야기다.

 

부자가 되면 선택의 여부가 더 많아지기는 하지만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부는 행복의 척도이자 숭배의 대상이다. 재벌들을 욕하면서도 재벌들의 부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여기에 남과 비교하기 좋아하는 국민성이 더해져 상황은 계속 악화일로에 있다.

 

이제는 사람들도 눈치를 챈 것일까? 멈추지 않고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파국이라는 것을 상당수의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인정은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안은 아직 부실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망한 후 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빠르게 차지한 것과 달리 이미 많은 문제점을 보인 신자유주의는 무너지기는커녕 그 기세를 더하고 있다. 대다수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보정하거나 임시방편으로 대책을 내놓을 뿐 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꾀하지 못하고 있다. 딱히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거대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우리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강좌>와 같은 책은 메마른 사막에 단비처럼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메마른 한국 사회에 단비와 같은 존재다. 이 책은 시민교양 프로그램에서 강연된 9개의 강좌를 심상정(현 진보정의당 대표) 씨가 엮은 것이다. 이런 강좌가 있었다는 사실은 따져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찾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이 책은 황금만능주의에 경도된 물신이란 단어로 대변되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를 인간이라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존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공동체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각자 분야에 따라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근본은 위와 같다.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에서 탈피하자는 이야기다.

 

물질에만 집착하다보니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타인이 누려야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이전 세대와 화려한 문명에 빠져 더 소중한 것을 무시한 지금 세대 모두의 잘못이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진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이다. 공부하지 않는 시민은 정부의 신민으로 전락한다. 이런 강좌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긍정적이다. 시민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많은 시민들이 공부를 하는 그런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진경문고
정민 지음 / 보림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책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심지어 이제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책이라는 매체에 접근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자신의 폰을 켜고 터치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는 사람은 꽤 드문 편이다. 세계 출판률 7위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읽는 사람만 읽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출판사가 영세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벼리라고 부르는 자녀에게 마치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쓰여 졌다. 과거 책에 미치고 책만 알고 살아간 사람들의 옛이야기를 통하여 독서가 무엇이며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독서광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자극하고 독려한다.

 

물론 옛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보다 책을 안 읽는다고 비판한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실용적 관점으로만 접근해 수험서 위주의 책이 제일 잘 팔리는 현실에서 이 책에 주는 울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과거 독서가들은 독서를 어떻게 했을까? 독서는 크게 다독과 정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독이란 고래가 마치 한 번에 물고기를 빨아들이듯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밀도가 떨어지는 책들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을 때 적합한 방법이다.

 

정독은 소가 여물을 먹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듯이 읽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의 밀도가 높아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을 읽을 때 적합하다. 주로 사서오경과 같은 기본 경전, 오늘날로 치자면 고전이 이에 해당된다. 고전보다 가볍고 물렁물렁한 책이 인기를 끄는 지금 깊이 생각해볼 말이다.

 

다독과 정독, 둘 다 독서가에게 필요하다. 특히 고전의 반열에 든 중요한 책의 경우 정독과 다독을 병행해야 한다. 정독을 여러 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황, 이익, 박지원, 정약용, 특히 김득수와 같은 독서가들은 기본 경전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들이 암기력이 뛰어나서 외운 것이 아니다. 정말 하루에 규칙적으로 여러 번 외워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거의 우공이산 수준으로 책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금씩이든 시간나는 데로 꾸준히 읽는다면 한 책을 만 번 이상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암기보다는 이해가 강조되는 시기고 무조건 암기의 부작용을 겪어봤기 때문에 외우기에 대한 찬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든 최소한의 암기는 필요한 법이고 책에서 암기만 했다고 경전을 제대로 읽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외우기는 과거 선비들의 학습 방법 중 하나로 경전에 대한 그들의 열심의 결과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무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저자가 왜 그렇게 썼는지 따져봐야 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책을 읽음으로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 독서가들의 독특한 독서법이 더 있는데 바로 낭독 또는 음독이다. 오늘날 낭독은 시라는 장르에서 국한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 외에서 낭독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마도 한자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 문자를 쓰던 시기를 벗어낫기 때문 아닌가 싶다. 여하튼 책을 읽을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설령 옆에 누가 있더라도 낭독보다는 묵독을 하는 것이 대다수 현대 독자들이다.

 

그러나 낭독의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고, 비록 입을 열지 않더라도 어감과 같은 말의 맛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는 입을 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는 마치 입을 열어 읽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 과거 종로담베가게 살인사건만 보더라도 낭독의 힘은 분명하며 과거 서구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가끔은 옛 선비들처럼 입을 열어 책의 글귀를 직접 읽는 것도 나쁘지 않는 듯 싶다.

 

위편삼절이란 말이 있다. 공자가 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 그 가죽끈이 3번 끊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다. 오늘날에는 많이 읽는다고 책의 끈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공자 흉내를 낼 수는 없다. 게다가 너무 많은 책이 출판되는 지금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왠지 미련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도 다시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듯 이미 읽었던 책도 특히 고전의 경우 다시 읽으면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 천성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진 못하지만 꾸준히 읽어야겠다. 그렇다면 나도 과거 독서가들에 버금갈 수 있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진경문고
정민 지음 / 보림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책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심지어 이제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책이라는 매체에 접근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자신의 폰을 켜고 터치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는 사람은 꽤 드문 편이다. 세계 출판률 7위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읽는 사람만 읽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출판사가 영세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벼리라고 부르는 자녀에게 마치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쓰여 졌다. 과거 책에 미치고 책만 알고 살아간 사람들의 옛이야기를 통하여 독서가 무엇이며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독서광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자극하고 독려한다.

 

물론 옛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금물이다. 게다가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보다 책을 안 읽는다고 비판한 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실용적 관점으로만 접근해 수험서 위주의 책이 제일 잘 팔리는 현실에서 이 책에 주는 울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과거 독서가들은 독서를 어떻게 했을까? 독서는 크게 다독과 정독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독이란 고래가 마치 한 번에 물고기를 빨아들이듯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밀도가 떨어지는 책들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을 때 적합한 방법이다.

 

정독은 소가 여물을 먹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듯이 읽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의 밀도가 높아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을 읽을 때 적합하다. 주로 사서오경과 같은 기본 경전, 오늘날로 치자면 고전이 이에 해당된다. 고전보다 가볍고 물렁물렁한 책이 인기를 끄는 지금 깊이 생각해볼 말이다.

 

다독과 정독, 둘 다 독서가에게 필요하다. 특히 고전의 반열에 든 중요한 책의 경우 정독과 다독을 병행해야 한다. 정독을 여러 번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황, 이익, 박지원, 정약용, 특히 김득수와 같은 독서가들은 기본 경전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들이 암기력이 뛰어나서 외운 것이 아니다. 정말 하루에 규칙적으로 여러 번 외워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거의 우공이산 수준으로 책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조금씩이든 시간나는 데로 꾸준히 읽는다면 한 책을 만 번 이상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암기보다는 이해가 강조되는 시기고 무조건 암기의 부작용을 겪어봤기 때문에 외우기에 대한 찬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든 최소한의 암기는 필요한 법이고 책에서 암기만 했다고 경전을 제대로 읽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외우기는 과거 선비들의 학습 방법 중 하나로 경전에 대한 그들의 열심의 결과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때 무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저자가 왜 그렇게 썼는지 따져봐야 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책을 읽음으로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과거 독서가들의 독특한 독서법이 더 있는데 바로 낭독 또는 음독이다. 오늘날 낭독은 시라는 장르에서 국한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 외에서 낭독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마도 한자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 문자를 쓰던 시기를 벗어낫기 때문 아닌가 싶다. 여하튼 책을 읽을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설령 옆에 누가 있더라도 낭독보다는 묵독을 하는 것이 대다수 현대 독자들이다.

 

그러나 낭독의 효과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고, 비록 입을 열지 않더라도 어감과 같은 말의 맛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는 입을 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는 마치 입을 열어 읽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 과거 종로담베가게 살인사건만 보더라도 낭독의 힘은 분명하며 과거 서구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가끔은 옛 선비들처럼 입을 열어 책의 글귀를 직접 읽는 것도 나쁘지 않는 듯 싶다.

 

위편삼절이란 말이 있다. 공자가 주역을 너무 많이 읽어 그 가죽끈이 3번 끊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다. 오늘날에는 많이 읽는다고 책의 끈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공자 흉내를 낼 수는 없다. 게다가 너무 많은 책이 출판되는 지금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왠지 미련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도 다시 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듯 이미 읽었던 책도 특히 고전의 경우 다시 읽으면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 천성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진 못하지만 꾸준히 읽어야겠다. 그렇다면 나도 과거 독서가들에 버금갈 수 있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자연과 문명


동양과 달리 서양은 자연과 인간을 공존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이원론으로 구분하여 이를 정복 또는 지배해야할 대상으로 본다. 이는 그들 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두 기둥,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공통의 생각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존을 강조하는 동양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현대과학문명을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송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우월했던 동양의 과학이 서양에 추월당한 것은 그들이 자연을 객체로 보고 관찰하고 연구하고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들은 서구 열강에 짓밟힌바 있고 그 기억은 우리나라가 서양문명에 받아들이고 서양의 사고에 맞추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 들어서 서양에서는 동양의 노자, 장자와 같은 사상가를 연구하고 자연의 공존에 대해 관심이 가지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문명의 고도화가 자연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분리시켜 인간을 자연의 우위로 놓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헤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거에 비해 늘어난 자연재해와 상승하는 대기 온도는 자연의 변덕인 것도 있겠지만 인간의 문명에 영향 받은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연과 문명을 인간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문명을 만들고 그 혜택을 받아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연의 자식으로서 그 품을 그리워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나 역시 인간의 문명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자연의 장엄함과 웅장함, 그리고 다양함에 마음을 빼앗긴다. 모순적인 인간이다.

 

이 책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의 저자 호시노 미치오는 일본인으로 알래스카에서 장기 거주하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다. 물론 단순한 사진작가라고 보기에는 그의 글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은 동양이지만 서구의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전적이 있고 최근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이다. 현대문명을 향유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래스카를 동경하여 그곳 사람들과 연을 맺고 그 삶을 관찰한 이 남자는 확실히 별종이다.

 

그는 많은 사진과 깔끔한 글로 알래스카라는 아직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이야기해주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노래한다.

 

이에 따르면 알래스카라는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지금 매장되어있는 세계 최대급인 유전을 개발하려는 세력과 그곳의 아직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보호하려는 세력이 맞부딪히고 있는 모양이다. 이는 인간의 문명과 자연이 그 힘을 겨룬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물론 시간은 근대에 들어와서 항상 문명의 편이었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은 호시노 미치오의 시간에서 이미 파괴되고 있는 중이고 유전개발은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니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원주민들의 삶이 최선이라는 보장이 없는 이상, 그들 전통이 무너져가는 것이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사회복지제도1)처럼 분명 미국의 개발과 개입으로 그들이 얻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고 미국의 자본주의적 삶이 최선이라는 보장 역시 없다. 땅을 개인이 소유하고 자연을 개발하는 행위가 인간의 삶을 항상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집을 구하기 힘들어 결혼을 포기하는 남녀가 늘어나는 지금 땅의 사유화가 옳은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경제논리로 재단하여 불법침입 운운하는 것은 전에 읽었던 나무소녀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과연 땅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이와 대조적으로 알래스카 사람들의 삶은 자연친화적이다. 그들은 자연을 경이로 대하고 땅을 소유하지 않는다. 고래를 잡으면서 고래에 대한 감사제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2)은 그들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불교 용어를 차용하면 인드라망 사상이다.3) 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같이 어우러져 살아가야할 존재로 보는 것이다.

 

최근에는 문명의 폐해가 큰 탓인지 이들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 역시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이 자연이 없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임을 알고 있으며 자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케니스 누콘처럼 기존의 삶을 고수하는 것도 나름 멋진 일이긴 하지만 인간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그 생존을 위해 탄생한 것이다. 과연 문명이 사라지면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멋진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케니스 누콘과 같은 사람도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고 집이라는 인간이 쉴 수 있는 곳을 만든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아내라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보자.

 

우리는 자연 속에 살아가지만 결코 자연과 같진 않으며4)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자연은 변덕스럽기도 하며 언제든지 인간의 삶을 침범할 준비가 되어있다. 사실 보통 우리가 예찬하는 자연은 이미 우리 손에 길들여진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즐길 수 있는 자연으로 동물원에 있는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이 자연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인간이 자연을 정복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을 다룰 능력이 있는 특별한 존재다. 또한 동시에 자연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또한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우리가 자연과 타협할 수 있는 여지를 의미한다. 자연의 변덕에 대해서는 맞서야겠지만 자연의 질서에 대해서는 순응하는 것이 문명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

 

지금처럼 자연의 질서를 아예 붕괴시키는 것은 문명의 근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다. 알래스카 원주민처럼 자연을 경이로 보는 샤머니즘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자연에 예의를 갖추는 그들의 정신은 배울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의 만든 많은 발명품은 자연에서 따온 것이 많다. 인간이 만든 사회질서가 동물들의 사회질서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 아직도 우리는 자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젊은 원주민의 삶


한편으로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호시노 미치오가 이 책을 낼 무렵 이미 그들의 삶은 전통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하긴,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코카콜라를 먹는다고 하는데 미국 땅임이 분명한 알래스카가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한 원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저자의 친구 미러처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원주민들이 많은 모양이며, 동시에 자살률도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원주민들은 미국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되니 아마 차별도 받을 것이다.

 

과거 인디언 문제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는 듯 하다. 정치적 알력 문제가 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보호구역을 설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원주민의 삶을 보장해줄 수 없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그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곧 있으면 사회에 나오게 된다. 한국 사회는 과연 이들을 품을 수 있을까?

 

개인의 노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것이 긍정심리학의 한계다. 기본적인 사회구조가 모든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의 노력만 강조하는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다. 그들이 드는 사례들은 다 일부로 그와 비슷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 중에 실패한 사람들도 상당수라는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미국의 동화정책에 의해 그들의 전통과 문화는 해체된 상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미국 사회에 그들이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정신적 아노미 현상에서 알래스카 젊은이들은 방황한다. 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교육이다. 또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기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책 96쪽에 따르면 서로 다른 부족들이 손을 잡고 조금씩 일어서려 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미미한 움직임이지만 이는 분명 희망의 씨앗이 싹트는 것이다.

 

최근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을이 혼자서 갑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자신이 을이라면 다른 을과 연대해야 할 것이다. 자기 몫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1) 책에 따르면 이 사회복지제도가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한다.

2) 비뚤어지게 보면 악어의 눈물이긴 하다. 그리고 굳이 잡을 필요가 없는 고래를 관습에 의해서 잡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말 자연친화적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그냥 과거에 해왔던 데로 하는 것일 수도?

3)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라고 해야 옳다. 식물은 다른 생물에 의존하지는 않으니까.

4)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