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그동안 내가 쓰고 버린 물건이 어느 정도 되는가? 아마도 꽤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건 글을 읽는 본인이 낭비벽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고 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조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소비’를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막스 베버가 ‘생산’과 ‘자본의 축척’을 중시했던 것과 상반되는 이 주장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된다.
공급이 있다고 해서 꼭 수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없는 물건이 악성재고로 창고료만 축내는 상황은 꽤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수요가 생기면 공급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지 꽤 되었지만 마약사범이 끊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반면 네덜란드의 경우 어떻게 보면 위험한 선택을 했는데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허가하였다. 물론 정부의 개입 하에 이루어졌고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음이 입증되었다. 결국 과거 생활필수품이 모자랐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소비’가 생산을 이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이러한 ‘소비’위주의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침해한다는데 있다. 대량 소비가 가능해지면 기업은 당연히 이득을 위해 그에 맞춰 생산하려고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계와 분업화다. 기계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분업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만들어버린다. 또한 기업가들이 가장 줄이고 싶어하고 줄이기 편한 비용이 바로 인건비다.
정리하자면 분명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가지고 원하는 만큼 소비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하게 드리우듯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해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다수 노동자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지적과 찰리 채플린의 묘사처럼, 하나의 공장부품이 되어 과거 노예와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학에서 긍정적으로 바는 싸고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편하게 얻고자 하는 합리적인 경제 행위가 역설적으로 노동자의 삶과 행복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각국 정부의 헌법에서 보장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그 빛은 바랜지 오래되었다. 반면 소비와 물질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다. 이미 하나의 우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말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돈 앞에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대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제도적, 사회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이런 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도가 바뀐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지 의문이다. 신자유주의1)라 불리는 경쟁시스템이 한국에 이렇게 잘 정착된 것이 제도만의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본가들이 의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하튼 그 의도에 그렇게 쉽게 쓸려간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그 시스템과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부동산 폭증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데리고 부동산 정책을 아무리 손질한들 뭔 소용인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자 시장이 얼어붙고 전세값만 오른 사실을 기억하자. 애초에 문제를 바라보는 철학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저자 송호창[현 무소속 국회의원]2)3) 씨가 직접 다녀오고 책으로 출간까지 한 이타카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곳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느냐에 따라 삶이 질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증언한다.
그가 갑작스럽게 오게 된 이 이타카는 현대 소비 사회와 정 반대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몇 십년된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정말 충격에 가깝다. 한국에 이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돈만 된다면 보통 10년이 지나고 나면 차를 바꾸는 게 일반적이다.
이타카 사회는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타카 사람들의 경우 그 의무를 자연에까지 발휘한다는 점4)에서 특이하다. 게다가 노동자들을 위해 지역 마트를 이용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공동체는 그저 사업적인 비인간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사상누각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이타카를 보면 과거 한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1년에 한 사람이 최소한 50권을 읽는다는 이타카.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비극은 더 높은 시민의식을 갖출 때 극복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시민의식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시민의식을 길러주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노르웨이의 스톨텐베르크 총리의 말을 되새겨 보자. 그는 반다문화주의자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로 인한 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더 강한 민주주의와 더 큰 관용의 정신으로 보복하겠다”
또한 담화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충격받은 상태지만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원주민성이 절대 아닙니다.”
무릇 품격이란 이런 고통과 시련에서 보여 지는 것이다.
1) 우리나라에 도입된 신자유주의는 그 주창자인 하이예크의 생각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쟁찬양, 기업의지 찬양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2)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민변 소속으로서 그가 한 일들은 훌륭한 것이지만 한 정당의 공천을 받아 무혈입성으로 국회의원이 되고서 8개월 만에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당을 성토하고 탈당한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그런 당 공천을 왜 받았데? 8개월 전 민주당은 뭐가 달랐나? 그는 탈당하기 전까지 자신이 탈당한 일은 없을 것이라 주장했으며 정작 그 주장 후 몇일 만에 탈당하고 나서 자신에게 비난이 빗발치자 안철수와 문재인은 서로 한 식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간 것 뿐 이라는 괴상한 변명을 했다. 안철수는 기존 정당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개인적으로야 문재인과 안철수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당 소속으로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관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일련의 어이없는 사태에 대해 문재인은 마음이 아프다고 트윗으로 남긴 바 있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민주당은 사실 ‘송호창’이 아니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반면 ‘송호창’은 민주당 간판이 없었다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었다. 이걸 개인 의지문제로 격하시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도 열린우리당 분당 때문에 까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3) 다음은 문화일보 칼럼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송 의원은 이후 민주당을 버린 데 대한 가혹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박선숙 공동선거대책본부장 등 다른 민주당 출신 인사와 달리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현역의원이고 지역구에서 선거를 오래 준비한 사람들을 경쟁 없이 제치고 전략공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안 후보 캠프행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송 의원 측이 보여준 태도는 그의 잘못된 처신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새정치를 하려는 정치인의 태도는 아니었다.”
4) 동물에게 He, She라는 호칭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