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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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의 책은 언제나 읽기 편하다. 물론 그러한 점이 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반 대중들도 읽기 쉽게 풀어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신주 교수는 정말 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강신주 교수의 이번 저작은 그의 전작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편이다. 전작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 책은 크게 그가 그동안 다루어온 타자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시와 관련된 철학자의 사상을 이용하여 재미있으면서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마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라면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짐멜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종교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자본은 곧 신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주장을 검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돈 그 자체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만 있다면 더 행복할거라고 생각하고 돈이 많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려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생각이 어느 정도 맞다는 사실이다. 돈만 있다면 예쁜 여자랑 놀 수도 있고, 명예도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의 기회도 보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보장은 미래의 더 나은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그 결과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지게 된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종교의 위치를 점하게 된 자본주의는 기존 종교들에게까지 스며들어 자본의 생리를 억제해야할 그들을 변질시키고 있고,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이라고 부른 대중문화의 유혹을 통하여 사람들의 연대와 대화를 막고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제에서 비롯한 것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적하더라도 사유재산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재산이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 하에서 과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게, 즉 사회양극화를 극복하는 게 가능한가?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뜻한 자본주의란 말을 난 허황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부자들의 기부나 재산세, 상속세 세율을 증가시켜 양극화를 완화시키고 사회 경제 정의를 바로 세워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복지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걱정 근심을 완화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재산세, 상속세 세율이 아무리 오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기회를 잡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제도도 독점이나 과점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한 그 한계는 명확하다. 이미 돈의 쾌락을 맛보고 돈의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생활만족을 보장한다 한들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명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말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도나 사회구조의 개선만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불가능하다. 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공산주의는 도리어 독재로 흐르면서 더 큰 악으로 변질된 바 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융합을 토대로 한 강력한 복지제도를 자랑하던 유럽은 그리스의 사례를 보듯이 몇몇 국가들은 재정운영의 파탄으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강력한 복지제도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란 이야기다. 국가라고 땅파서 돈 나오는게 아니고, 재정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복지제도는 화근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가장 단순한 해답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의 연대와 협력, 상생의 정신만이 자본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인간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는 물론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겠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신의 가호가 자신에게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자라면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이 신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래야 한다. 자본주의는 좋은 종교는 아니다. 종교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경제제도이고 신을 자본으로 대체한 어떻게 보면 매우 불순한 이단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종교들이 하는 이야기, 인의예지, 사랑, 자비 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곧 인간과 인간의 대화, 타자에 대한 배려, 인류애로 이어지며 비로소 경제원리에 의한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삶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강신주 교수가 타자에 대한 접근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책에는 자본주의에 관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생리와 타자에 대한 철학이 상충되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칸트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 타자란 질적인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가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점수가 몇점인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가 얼마인지가 중요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량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제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 일어난 일이지, 근본적으로 타자는 우리가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는 존재다. 물론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있어 타자이고 그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존재다.

 인류는 이제 다시 한번 도약해야 한다. 비지니스적 관계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며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상대를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강신주의 이 책은 그동안 그가 해온 작업들의 한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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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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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신문기사에 현대판 노예제라는 제목으로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다수의 댓글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용 일색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노예제는 고대로부터 시작된 아주 뿌리 깊은 제도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시작인 아테네 역시 노예들의 피눈물나는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 아닌가? 노예제는 그 반인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 과거에는 성직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이를 승인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제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장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노예제를 합법화하지 않는다. 이는 인류가 그만큼 성장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동시에 노예제가 더 이상 국가나 세계 경제를 이루는 근간이 아님을 나타내기도 한다.

 

문제는 언제나 법과 현실은 다르다는데 있다. 나는 이러한 현대판 노예가 극히 일부의 일이고 이런 일이 전 세계적 문제일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책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 따르면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노예제가 버젓이 존재하고 어떤 곳에서는 아예 공인까지 받는다고 한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고 책 뒷표지에 나와있는 아마존 독자의 서평에 공감하게 된다.

 

현대의 노예제에 대해서 논란은 있겠지만 일단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무임금이라면 노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예전 중세 농노보다 못한 신세 아닌가? 이러한 노예제가 유지되는 것은 노예들이 가져다주는 이윤때문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아무런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윤은 정말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수요가 있다한들 공급이 없다면 노예제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신매매나 사기와 같은 불법적 방법이 동원된다. 이러한 불법은 특히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서 벌어진다. 구소련 붕괴 후 동유럽이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 교육 수준이 낮고 경제근간이 뒤흔들리는 곳에서 이러한 불법이 자행된다고 한다. 이런 나라들은 불법을 막을 수 있는 여력이 없고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들이 부패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여성들의 경우 겪는 고통은 남성들보다 심할 경우가 많다. 고통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느냐만은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 외에 성적 착취를 당한다는 점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다. 이들은 인신매매나 사기를 당한 후 쉬지 않고 가사노동에 시달리거나 윤락가에서 성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주인들은 엉터리로 이자를 계산하여 이들을 풀어주지 않고 계속해서 부려먹는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악한 행위의 주체가 여성일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증언에 따르면 여성 포주나 여주인이 남성들보다 더 악랄하게 부려먹는 일이 꽤 있는 것 같다. 반대로 노예 상태로 전락한 이들을 구하는 여성들도 꽤 있지만 이러한 노예제를 다룰 때 에 관한 선입견으로 접근하면 안 되겠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인신매매나 사기 같은 경우 인류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더욱 내 머리를 헤집는 사실은 네팔이나 인도 같은 경우 사실상 성노예인 여사제 제도가 존재해서 노예제를 종교, 문화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복합적인 문제이며 노예제를 사람들이 아예 긍정한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이 세상에 노예는 없다는 인식이 얼마나 나이브한 것인데 새삼 깨닫게 해준다.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이유 중 무력분쟁과 환경파괴가 있다. 로마가 전쟁이 없어진 후 노예들이 급감하여 사회혼란이 일어난 것처럼 전쟁과 노예제는 가까운 관계에 있다. 현 무력분쟁이 휘말린 지역은 정부나 반군이나 모두 어린 아이들이나 성인을 사실상 노예로 만들어 전쟁에 참여시키고 있다. 인권이라는 이름과 국제사회의 중재는 이 지역들의 혼란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환경의 파괴는 그 지역 공동체의 근본을 무너뜨려 이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환경파괴야 어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지만 그 결과 노예제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이 노예들이 다시 환경의 파괴에 종사하게 되는 악순환적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경로로 노예가 되는 이들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환경, 그리고 장시간의 노동으로 인해 영양실조나 척추 불구와 같은 건강상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각종 성병에 노출되어 고통스러워한다. 대부분의 노예주들은 이들의 고통에 큰 관심이 없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의 소모품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인권에 대한 이론을 고찰하지 않더라도 노예제는 직관적으로 볼 때 폐지되어야 한다. 노예제는 범죄 네트워크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에 매우 적은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다. 노예제가 폐지되더라도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인류의 윤리적 수준 역시 노예제를 혀용하고 있지 않다. 과거와 달리 노예제를 폐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에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단위의 주체들에게 제안을 던지고 있다. 이 중 개인들이 실현할만한 것들도 꽤 있다. 먼저 우리는 퇴직 기금 같은 자산을 노예제를 이용하고 있는 회사들에게 투자하지 않을 수 있다. 국회의원들에게 탄원서를 보낸 수도 있으며 주변의 노예제의 징후를 감시할 수도 있다. 감시는 매우 중요한데 만약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앞의 신문기사의 여성이 그러한 일을 당할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주변사람들이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다면 이장문 씨와 같은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특기나 기술을 노예제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에 제공할 수도 있고 공정무역 상품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개인이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효과적인 활동이다.

 

여러 가지 이유와 경로로 노예제가 존재하며 이는 우리의 인간성을 위협한다. 비록 아주 적은 숫자나 지역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노예제를 인정한다면 인권은 위협받을 것이고 우리 역시 이러한 처지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 경우 이 책의 내용과 같은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본가가 주인이 되고 노동자가 노예가 되는 노예제에 가까운 일들은 벌어지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언제 일자리에서 쫓겨날지 걱정해야 하며 물가는 오르는데 최소임금은 아주 조금 오르고 있다. 우리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노예제가 없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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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출간 10주년 증보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 옮김 / 한문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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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경제사상은 정치, 문화, 심지어 교육에까지 침투되어 여타 물건은 물론이려니와 이제는 사람까지도 수치로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속성 중에 숫자로 파악할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봐도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조금 더 있다는 것일 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들은 숫자로 파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숫자에 집착하다 못해 견디지 못하고 자살까지 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삶과 죽음 중 죽음을 택하는 것은 이제 절대로 있을 수 없다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사회문제로 공동체 차원에서 나설 문제인 것이다.

 

교사들 역시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몇 명의 학생이 참석했는지, 부진아 숫자는 없는지, 전국에서 몇 등을 했는지 등등 많은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수치화가 꼭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필요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교육의 본질인가?

 

이러한 시달림에서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열정이나 제정신을 유지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같은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이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무리가 있다. 숫자의 압박 속에 교사들은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하나의 숫자로 대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학생과의 마주침에서 이를 억제하려 한다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태도는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교사들은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교육적 열망이 식어가고 그 자리에 회의감, 무력감이 자리 잡게 되어 현실에 함몰하게 된다.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냉소로 대하고 별 수 없는 거라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교사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보다 사회적인 문제로 봐야 옳다.

 

그러나 사회문제로만 치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사로서의 소명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저버리기에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에 너무 무겁다. 비록 버거워도 교사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교사들의 딜레마를 극복하는데 파커 J.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에서 내면의 풍경을 가꾸는 작업을 이야기 한다.

 

그는 외부의 구조적 문제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활동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외부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외부의 억압에 인간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마 현실에 냉소적인 사람들도 이러한 결론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좋은 교구와 실력있는 강사의 설명, 문제집, 질 좋은 참고서만 있으면 학업성취가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아마 교과부의 고위 관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막대한 예산을 기초학력 증진에 퍼붓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간의 역사가 증명하듯 그런 방식으로 부진아 문제는 극복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비난은 학교가 감당하고 있다.

 

물질적인, 기술적인 투자만으로는 학력을 증진시킬 수 없다. 공부란 학생이 하는 것이고 학생의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훌륭한 테크닉이 아니라 교사라는 존재 자체가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의 신뢰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의 자아를 열어 학생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교육은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미신이 아니다. 브리크와 슈나이더에 의하면 신뢰관계-교사와 행정가,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신뢰-가 일반적으로 학교의 역량을 좌우하는 최고의 결정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외적 요소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의 논문에 실린 내용에 이러한 실험결과가 나와 있는데 1994년에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 학교가 신뢰도가 낮은 학교보다 읽기와 수학 점수에서 3배나 더 급격한 향상을 보였다고 한다. 1997년에는 신뢰도가 낮은 학교들은 일곱학교 중에서 한 학교 정도가 향상된 범주로 올라선 데 반해, 신뢰도가 높은 학교들은 두 학교 중에서 한 학교가 향상된 범주로 올라섰다고 한다.(p.23)

 

이러한 신뢰 관계는 인간의 마음활동-공감, 헌신, 동정, 인내-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 활동은 우리의 마음, 즉 내면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결론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은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현 한국 교육계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바로 수업을 잘 할 수 있는 스킬, 즉 방법론이다. 과거의 경직된 수업모형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교사들은 만능열쇠를 찾듯이 어떻게? 무엇을? ? 라는 질문에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방법론적 환원주의로 교육의 경직화, 획일화를 불러올 수 있다.

 

그렇다고 파머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테크닉 역시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교사의 내면의 지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누구?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이 바로 인간의 마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나오는 결론이다.

 

혹자는 배움은 학생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교사가 아니라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교사가 필요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배우는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학생이 아무런 조건 없이 스스로 배우는가? 어른과 접촉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소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막대하게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아무런 조력 없이 학생 혼자서 습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시간낭비다. 때문에 교사의 조력이 필요하며 교사는 학생의 배움의 환경을 창조 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교사 역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교사 자신이 학생에게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이다.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이다라는 프레데릭 뷔흐너의 말처럼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 직업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소리야말로 진정한 소명의식이며 교사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다. 이러한 목소리와 자신을 단절시킨다면 무기력과 허무감,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며 결국 교육은 실패하게 된다.

 

공포는 학교의 조직을 지배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다. 외부에서 작용하는 권력이 학교를 다루기 위하여 택하는 것이 바로 공포다. 한국의 교사들은 이러한 공포에 굴복하지 않으면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한다. 특히 승진을 생각한다면 위의 권력에 굴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사들의 생태는 교실에서도 똑같이 반영되어 경력과 다른 후광으로 자신을 가리고 학생들을 공포로서 통제하게 만든다.

 

이러한 공포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교실에서 공포로서 자신을 감추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어의 권위라는 단어는 authority 인데 author은 우리말로 저자 즉, 권위의 주인을 의미한다. 권위는 권력과 다르다. 권위는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의 내면에서 비롯된다.

 

내면의 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고려해 보건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간 서구 전통에 도도하게 흐르는 객관론이라는 거대담론은 이러한 내면의 힘을 부정하는 듯하다. 객관론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은 주관에 의해 진리를 오염시키는 행위가 된다. 때문에 사물과 거리를 두고 분석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객관론은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약관화하다. 객관론의 신화는 자신만이 옳다는 전제주의나 타자의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1,2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며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객관론의 신화를 부정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철학의 작업 외에서 객관론의 신화를 뒷받침해온 과학 역시 새로운 관점을 내세우고 있다. 생물학은 과거의 약육강식의 자연관에서 탈피, 상호협력과 공존의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물리학은 기존의 원자론에서 벗어나 입자간의 관계와 전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양자론이야 말로 객관론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과학이론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식이란 주관과 관련 없는 개념 덩어리가 아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설명해야하는 대상이 있고 프로인 교사가 있으며 아마추어인 학생이 있는 객관론의 신화에 근거한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주제를 중심으로 무수한 인식자들이 의사소통하는 진리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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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참 좋다 - 세계 99%를 위한 기업을 배우다 푸른지식 협동조합 시리즈
김현대.하종란.차형석 지음 / 푸른지식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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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면 빨리 가고 여럿이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있다.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신뢰를 아주 쉽게 저버리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은 취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이익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경제 위기로 인해 그 큰 대기업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당장의 이익에 몰두하느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신자유주의 기업들의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한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폐해, 사람이 없는 차가운 경제구조.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새로운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데 있다. 기껏해야 대기업들을 규제하는게 전부인데 물론 대기업들의 탐욕을 규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대기업의 자녀들이 할퀴고 간 자리에 많은 빵집이나 기타 영세 상인들은 몰락해버렸고 대기업이 떠났다고 해서 처지가 별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보자. 이 책은 새로운 대안 경제구조인 협동조합에 대해 취재하고 조사하고 고민한 내용들이 엮어진 책으로 주식회사만이 경제지배구조의 전부라고 알고 있던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아이쿱이나 한 살림 같은 몇 안되는 협동조합만이 알려져있을 뿐이지만 세계에는 많은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는 미국의 썬키스트나 에이피 통신과 같은 매우 큰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썬키스트를 주식회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협동조합이며 미국 농민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결과물이다.

 

협동조합의 원리는 간단하다. 일반적인 주식회사와 같은 자본주의 기업은 노동자의 임금에 이윤을 더하여 물건의 가격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이윤은 투자자인 주주들이 가져간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어떠한가? 협동조합 역시 노동자의 임금에 이윤을 더한 값을 물건의 가격으로 결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이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반 주식회사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협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기 때문에 그 이윤을 물건의 가격을 더 낮추는데 사용한다던가 아니면 사회의 유익한 사업에 사용한다. 또는 자본을 축척하여 가격을 안정화시키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때문에 협동조합은 당장의 이익에 몰두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쟁보다는 협력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리고 그 협력의 힘은 이번 경제위기 때 여실히 증명된 바다.


물론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만 가지고 현 신자유주의라는 거센 물결을 대신할 대안경제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협동조합의 최대 강점은 기업의 발전이 특정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돌아간다는데 있다.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또한 조합원이 곧 투자자이자 주인이고 사용자이자 노동자이기 때문에 조합의 발전은 곧 조합원의 이득이자 사용자, 노동자의 이득이 된다.

 

특히 대표의 임금이 평직원 월급의 6배가 넘지 못한다는 원칙은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가 지나쳐 빈익빈 부익부로 일컬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극심한 우리나라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외국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에야 비로소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었다. 그동안 8개 형태의 조합 외에는 설립이 불가능했었는데 비로소 제약이 풀린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협동조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원주의 경우 의료 생협, 한 살림, 밝음신협, 원주생협, 소꿉마당 등 다양한 협동조합이 존재하며 이 협동조합끼리 서로 협동하여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법도 제정되었으니 이제 이러한 흐름이 다른 지역에도 전파되면 될 일이다.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오너가 아닌 이상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기득권층에 편입하기 위하여 스펙을 쌓고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집을 사는 투기행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많은 사례들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각 개인은 미약하지만 힘을 모은다면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출세를 위해 양심을 팔거나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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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Story -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심리 처방
티모시 윌슨 지음, 강유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스토리를 바꿔라!!

 

티모시 윌슨이 지은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심리처방 STORY는 상식에 근거한 심리처방을 벗어나서 스토리 편집이라는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심리처방 전략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미국에서는 CISD와 같은 심리처방에 많은 돈을 지원하고 시크릿 같은 자기계발서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돈을 기꺼이 내놓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실험에 의해 검증된 바가 없는 사혈사례이다. 물론 겉보기에는 정말 효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러한 상식에 근거한 정책이 과학적, 합리적 방안을 무시할 때 얼마나 많은 피해와 자금이 낭비되는지는 이 책에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바다.

 

스토리 편집의 근거는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주 양육자들과의 교감으로 형성된 핵심 내러티브, 그러니까 세계관이나 스토리 같은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나간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긍정적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것이나 부정적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그 핵심 내러티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저자는 이러한 내러티브에 긍정적인 왜곡을 가함으로서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행동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이후 행동에서는 기존의 행동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또는 사회에서 계속해서 말을 하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들이는 노력에 비해 큰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저자의 핵심주장인 스토리 편집 기법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떠한가?

 

저자의 스토리 편집 기법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기파괴적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와 자기향상적 순환고리로 전입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저자가 제시한 기법 중 인상적인 것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페니베니커의 글쓰기 요법

선행실천접근법: 선행을 실천함으로서 스스로 핵심 내러티브를 바꾼다.

스토리 프롬프팅: 바람직한 행동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는 대신 스스로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프롬프트를 주는 기법

최고의 자화상 글쓰기 요법: 미래의 밝은 비래를 상상하는 방법, 어떻게 거기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적어야 한다.

조지베일리 기법: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해보게 하여 긍정적인 사건의 신비감을 증폭시키는 기법

최소충분의 원리: 위협이나 보상을 그 자체를 이유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만 제시해야 한다는 원리

성장마인드 강조

 

개인적으로 저자의 아이디어는 효과적이며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이러한 기법들은 개인 혼자서도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매우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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