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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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의 책은 언제나 읽기 편하다. 물론 그러한 점이 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반 대중들도 읽기 쉽게 풀어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신주 교수는 정말 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강신주 교수의 이번 저작은 그의 전작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편이다. 전작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 책은 크게 그가 그동안 다루어온 타자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시와 관련된 철학자의 사상을 이용하여 재미있으면서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마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라면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짐멜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종교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 자본은 곧 신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주장을 검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돈 그 자체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돈만 있다면 더 행복할거라고 생각하고 돈이 많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려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생각이 어느 정도 맞다는 사실이다. 돈만 있다면 예쁜 여자랑 놀 수도 있고, 명예도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의 기회도 보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보장은 미래의 더 나은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그 결과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지게 된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종교의 위치를 점하게 된 자본주의는 기존 종교들에게까지 스며들어 자본의 생리를 억제해야할 그들을 변질시키고 있고,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이라고 부른 대중문화의 유혹을 통하여 사람들의 연대와 대화를 막고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제에서 비롯한 것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적하더라도 사유재산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의 재산이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 하에서 과연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게, 즉 사회양극화를 극복하는 게 가능한가?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뜻한 자본주의란 말을 난 허황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부자들의 기부나 재산세, 상속세 세율을 증가시켜 양극화를 완화시키고 사회 경제 정의를 바로 세워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복지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걱정 근심을 완화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재산세, 상속세 세율이 아무리 오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기회를 잡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제도도 독점이나 과점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한 그 한계는 명확하다. 이미 돈의 쾌락을 맛보고 돈의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생활만족을 보장한다 한들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명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말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도나 사회구조의 개선만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불가능하다. 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공산주의는 도리어 독재로 흐르면서 더 큰 악으로 변질된 바 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융합을 토대로 한 강력한 복지제도를 자랑하던 유럽은 그리스의 사례를 보듯이 몇몇 국가들은 재정운영의 파탄으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강력한 복지제도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란 이야기다. 국가라고 땅파서 돈 나오는게 아니고, 재정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복지제도는 화근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가장 단순한 해답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의 연대와 협력, 상생의 정신만이 자본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인간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는 물론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겠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신의 가호가 자신에게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자라면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이 신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래야 한다. 자본주의는 좋은 종교는 아니다. 종교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경제제도이고 신을 자본으로 대체한 어떻게 보면 매우 불순한 이단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종교들이 하는 이야기, 인의예지, 사랑, 자비 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는 곧 인간과 인간의 대화, 타자에 대한 배려, 인류애로 이어지며 비로소 경제원리에 의한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삶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강신주 교수가 타자에 대한 접근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책에는 자본주의에 관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생리와 타자에 대한 철학이 상충되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칸트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 타자란 질적인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가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점수가 몇점인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가 얼마인지가 중요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량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제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 일어난 일이지, 근본적으로 타자는 우리가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는 존재다. 물론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있어 타자이고 그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존재다.

 인류는 이제 다시 한번 도약해야 한다. 비지니스적 관계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며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상대를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강신주의 이 책은 그동안 그가 해온 작업들의 한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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