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 감독이 참여한 첫 공식 도서 - 첫 작품부터 현재까지, 놀란 감독의 영화와 비밀
톰 숀 지음, 윤철희 옮김, 조 퍼글리스 사진, 전종혁 감수, 크리스토퍼 놀란 대담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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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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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 감독이 참여한 첫 공식 도서 - 첫 작품부터 현재까지, 놀란 감독의 영화와 비밀
톰 숀 지음, 윤철희 옮김, 조 퍼글리스 사진, 전종혁 감수, 크리스토퍼 놀란 대담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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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평론가 톰 숀이 4년간 직접 크리스토퍼 놀란을 만나 그가 20년간 만든 10여 편의 영화를 한 권의 책에 모두 집성한 책이다. 이 책은 놀란 감독이 직접 그린 미공개 스토리보드, 스케치, 사진, 스틸샷 등 200장이 넘는 컬러 시각자료와 함께 여태껏 밝혀지지 않았던 제작 뒷이야기, 숨겨진 의도와 고민 등 놀란이 오랫동안 벼려온 천재적인 사유를 책에 담았다.

이 책은 구조, 방향, 시간, 지각, 공간, 환상, 혼돈, 꿈, 혁명, 감정, 생존, 지식, 결말이라는 13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놀란 감독의 영화 미행, 메멘토, 인썸니아, 배트맨 비긴즈, 프레스티지, 다크 나이트, 인셉션,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과 관련된 주제의 이야기를 보여주어 흥미롭다.

이 책에서 저자가 놀란의 모든 영화는 구조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구조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집어 삼켜졌다는 걸 깨닫는다는 내용의 알레고리라고 말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놀란의 다양한 작품의 구조와 인물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다.

"<인셉션>에서 파리의 길거리에 완전히 포위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말이다. "그게 중요해. 저 먼 바깥세상에 있는 구조가 우리를 지켜주는 데 실패했을 때."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경찰국장 짐 고든은 말한다. "법이 더이상 무기가 아니라 족쇄가 되어 나쁜 놈들이 활개 치도록 만들 때." 자신의 장갑차에 갇힌 배트맨이나, 한때 그들을 안전하게 수송해준 선박과 비행기에 갇힌 <덩케르크>의 군인들처럼, 그들은 그것들을 벗어던지거나 아니면 목숨을 내놔야 한다."


놀란 감독은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크레디트에서 챈들러의 이름을 처음 접했다. 이후 놀란은 대학 시절은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챈들러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의 첫 장편영화 세 편, <미행>과 <메멘토>, <인썸니아>의 씨앗을 뿌렸다. 챈들러의 성장기는 놀란 자신의 성장기를 반영했다.

"어렸을 때는 세상만사를 바깥쪽에서만 들여다봤습니다. 굉장히 누아르다운 시점이죠. 챈들러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얻은 게 무척 많습니다. 챈들러의 위대한 재능은 내밀함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이 캐릭터들과 그들의 개인적인 버릇, 음식과 의복에 대한 취향 같은 내밀한 부분까지 매우 가까워집니다. 나중에 나온 이언 플레밍의 작품에서도 접할 수 있는 생생한 특징이 담겨 있죠.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인셉션>에도 그런 느낌이 있지만, 챈들러의 영향력이 더 많이 느껴지는 작품은 <메멘토>라고 생각합니다. 무척 내밀한 시점이 <미행>과 <메멘토>, <인썸니아> 세 영화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이어지죠."



저자는 놀란이 UCL을 떠나 6년이 지난 후 대학에 다니는 동안 누렸던 자원과 영향력, 장비에 많이 의존해서 만든 <미행>은 놀란이 십 대 초반에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자신이 영국의 퍼블릭 스쿨 학생인지 아니면 하트퍼드셔에 있는 미국인인지를 정의하지 못한 채 씨름했던 정체성에 대한 의문들을 조명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한 데 따른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품게끔 만드는 영화 <미행>은 변신할 수 능력을 지닌 <피그말리온>이라고 이야기한다.



놀란은 <메멘토>를 철저히 주인공 레너드의 시점에서 집필했다고 말한다. 놀란은 "그의 입장에서 생각했죠. 기억하는 과정과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을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검토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일단 시작하고 나면, 작업이 조금 힘들어집니다. 우리가 눈으로 지각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죠.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광경은 실제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은 극히 일부만 정확합니다. 기억도 비슷하죠. 레너드가 채택한 시스템은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걸까?'라는 물음에 대한 진실하고 단정적인 반응입니다."라며 <메멘토> 시나리오 집필 방법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놀란의 영화들은 우리가 시간을, 시간의 쇄도와 미끄러짐을, 수축과 수렴을 느끼는 방법을 항상 정확하게 장악한다.

"<메멘토>는 내가 완전히 길을 잃게 되는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 때문에 어떤 신 앞에 나온 신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과 싸우는 문제로 회귀하게 되죠. 우리는 절대적인 일직선 형태로 사건을 전개하는 영사기의 독재를 깨트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놀란은 <메멘토>에서 감각에 대한 레너드의 기억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주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놀란은 가이 피어스의 대사 중 '나는 이 나무를 두드리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아. 이 유리를 집어들면 어떤 느낌인지 알아.'라는 대상에서 세상에 대한 그런 지식, 세상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무척이나 소중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여전히 기능하고,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놀란은 <프레시티지>를 통해 마술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그 본질 안에 뭔가가 더 있음을 사람들이 믿도록 만드는 방법에 대해 관객에게 전한다. 이 책에서 놀란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철저하게 보증하는 영화들을 만든다고 말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자 빌어먹으리만치 더 열악하고, 우리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내용 말입니다. 우울한 얘기일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우울해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이 지금보다 더 복잡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얘기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니까요. 우리는 우리 세계의 한계를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이게 전부라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신체적 장애나 이형, 기형이 있는 사람을 구경거리로 삼는 '프릭 쇼'에 관객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는 광대에 대한 영화 <웃는 남자>의 얼굴은 아버지의 적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영원히 웃음 짓는 얼굴이 됐다. 서커스에서 유래한 이 캐릭터의 특징은 그의 얼굴이 그렇게 된 사연과 함께 할리우드에 고착되면서 거듭 재사용됐다. 그런데 놀란은 이와 같은 시각을 채택하는 대신에, 그 캐릭터를 아나키스트로 봤다. 저자는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영화 전편이 소요될 정도로 기나긴 사연으로 구동되는 첨단 스위스군 만능 칼이라면, 조커는 혼돈을 빚어내려는 욕망 외에는 어떤 것에서도 에너지를 얻지 못하는 냉정한 사이코의 칼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진실이 결코 승리하지 않는 타락한 우주, 즉 선한 이들이 희망할 수 없는 최선이 고작 부패한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우아한 탈출밖에 없다는 타락한 우주를 챈들러 분위기로 이끌어낸 <다크 나이트>의 훌륭한 엔딩에 대해 언급한다.

"별다는 설명 없이도 시종일관 막강한 위력을 유지하는 <조스>의 상어나 연솨 살인범, 자연의 힘처럼 스토리를 유유히 이동해가면서 오로지 혼돈의 씨앗을 뿌리려는 욕망만이 모든 행동의 동기인 아니키스트로 본 것이다."


"조커의 본성에서 보면 그건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사실은 상당히 통제된 상태죠. 달리 말해, 조커는 엉망진창인 캐릭터가 아닙니다. 혼돈에 대해 얘기를 하고 그 혼란스러운 상태를 즐기지만, 그가 주력하는 것은 혼란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가 혼란을 빚어내는 방식은 꽈나 정밀하고 매우 통제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놀란이 <다크 나이트>의 성공 덕에 마침내 실현하게 된 <인셉션>은 감독의 인생에 존재했던 모든 주요한 지점(학창 시절, 대학생 시절, 할리우드 초짜 시절, 성공담, 아버지)을 중요 요소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인셉션>은 놀란이 <메멘토> 이후 처음으로 단독 집필한 시나리오였다. 다만 공동 시나리오 작가라 할 만한 존재는 주연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그는 로케이션 헌팅을 다니는 사이사이에 놀란을 만나 시나리오를 점검하며 수정했다. 저자는 <다크 나이트>가 가장 신랄한 수준에 오른 놀란의 양가적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라면, <인셉션>은 그 대척점을 제공하며, 세상만사가 정반대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인간사의 비전, 감옥이 되어버린 꿈, 꿈의 풍경이 되어버린 본드 영화, 무너져버린 중력의 마법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인터스텔라>는 놀란의 굉장히 사적인 공간에서 탄생한 영화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놀란은 열한 살인 딸 플로라에 대한 생각과 그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 아이 곁을 떠날 때마다 느꼈던 심적인 고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인터스텔라>의 가제는 '플로라의 편지'였다. 놀란은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사람의 딜레마에 무척 많이 공감했다고 말한다. <인터스텔라>는 놀란에게 있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루는 영화로 인상적이다. 또한 놀란은 <인터스텔라>는 전형적인 서사 생존담으로, 우리가 우주의 광활한 공허 속으로 들어간다는 아이디어에는 외로움과 직면하고 자신의 자아와 맞닥뜨린다는 상황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놀란은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때 느껴지는 큰 슬픔은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느끼는 사랑을 커다란 규모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가 맺은 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그 유대 관계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나는 내 직업을 굉장히 사랑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믿기 힘들 정도로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렇지만 이 일을 하는 데에는 상당한 죄책감이 따릅니다. 큰 죄책감이요. 나한테는 그 캐릭터와 동갑내기인 딸이 있습니다. 동생이 쓴 시나리오에서 그 캐릭터는 아들이었지만, 나는 딸로 바꿨어요. 그 영화를 만들 때 플로라의 나이가 그쯤이었거든요.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과거를 그 자리에 꽉 붙들어두고 싶은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 과거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상당히 우울해 집니다."



이 책에는 놀란의 영화에서 음악을 만든 한스 짐머와의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놀란은 한스가 음악이 영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칠하는 페인트 같은 게 되기를 원한적이 없으며, 다만 영화음악이 화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벗겨낸 것이 캐릭터들의 배경 사연이었다고 말한다.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캐릭터가 소개되는 순간을 보거나, 나중에 그 캐릭터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품게 되면서 공감한다. 하지만 놀란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실화이거나 실제 사건을 표현하고자 애쓴다는 걸 일단 느끼고 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무척이나 작위적인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요소들을 점점 더 많이 벗겨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던 <덩케르크>의 배후에 있는 아이디어는 그 영화가 개별적인 영웅적 행위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영화는 영웅적 행위가 넘쳐나는 공동체를 다룬 작품이죠. 그 철수 작전은 굉장히 독특한 작전으로, 그 작전은 많은 면에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좀 더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덩케르크 이야기에는 우리가 활용하고 싶었던 보편적 의미를 가진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생존입니다. 그 영화는 살아남고 싶은 개인적인 본능을 다루죠. 두 번째는 집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심정입니다."

끝으로 놀란은 자신은 아날로그 세계에 살면서 일하며, 객석에 앉아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관객들이 집에서 나올 때 볼 준비를 하는 건 영화관에서 하는 체험이며, 그건 텔레비전에서는, 집에서는, 휴대폰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경험이고, 실생활에서 접하는 것보다 큰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는 놀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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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 - 정채봉 산문집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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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첫 마음>은 2001년 짪은 생을 마감한 정채봉의 산문집이다. 이 책은 정채봉 20주기를 맞아 그의 산문집 네 권(<그대 뒷모습>,<스무 살 어머니>,<눈을 감고 보는 길>,<좋은 예감>) 중 여전히 아름다운 글을 한 권으로 엮어 샘터사에서 출간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동화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에세이스트로서 손색이 없었던 정채봉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 산문집이다.

정채봉 작가는 어린 날에는 무릎을 깨면서까지 먼 데를 향하던 시선이 날개가 퇴화해 버린 타조 같은 삶에 머무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늘상 대하고 있는 것에서도 새로움을 찾을 수 있으며, 묵힌 채로 사는 우리들의 눈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나의 눈은 그저 보이는 것만을 볼 뿐 새로움을 볼 줄 모른다. 저것은 전신주이고 저것은 가로수이고 이것은 풀이고 하는 것이나 가리는 카메라의 렌즈와 다를 것이 없는 무감각한 이 눈.

그러나 어렸을 적에는 소나기 살줄금만 지나가도 산빛의 다름을 알아보았었다. 풀물이 한 켜 더해진 것도, 덜어진 것도 가늠했었다. 심지어 눈물 한번 흘리고 나서 바라보아도 새롭게 보이던 풍경이었지 않은가."

정채봉 작가는 법화경의 한 대목인 "쇠의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이지만 차차 쇠를 먹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 마음에서 생긴 잘못이 자신을 먹어 버린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음을 사나운 황소에, 교활한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고 그 어떤 고문과 폭력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것,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과 하늘나라가 바뀔 수 있다는 주제의 글을 쓰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는 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음이 나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에 한정되어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독사와 독수리도 살지만 해독초와 펠리컨도 있고, 투우도 살지만 투우사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기생한 녹이 쇠를 먹어 버리듯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사욕에 오염되어 버린데 있다."

이 책에서 정채봉 작가가 성철 스님과의 이야기를 전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성철 스님은 도는 우주의 근본이며 만물의 자체이니 시공을 초월하고 시공을 포함한 절대자이며 인간이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도를 깨치면 망상이 영영 소멸되어 소멸된 그 자취도 없게 되니 이것을 무심이라고 해. 망상이 소멸되어 무심이 되면 목석과 같으냐, 그게 아니야. 큰 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항상, 한결같이 영영 변함이 없어. 이것을 일여라 하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깊은 잠이 들면 정신이 캄캄히 어둡지만 깨친 사람은 광명이 항상 일여하므로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마음은 밝아 있으니 이것이 깨친 증거야."

"그러니까 눈을 뜨고 보란 말이야. 자기의 본모습은 광대무변한 바다와 같고 물질은 바다 위에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거품과 같은 것이네. 바다인 자기 가치를 알면 거품인 물질에 따라가지 않을 거 아닌가."

정채봉 작가는 수도자들에게 늘 강조되는 것이 '첫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수도에 막 입문하던 날의 그 열렬한 마음이 지속되지 않고서는 험난한 세파에 쉬 휩쓸리게 되듯 첫 마음의 온전함이 아닌 한 순간의 방심한 헛눈팖으로 우리의 생이 금방 끝나게 될지도 모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정채봉 작가는 간암이 발병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이야기하여 인상적이다.

"자연만 푸르게 칠할 것이 아니다. 당신한테 있어 퐁퐁 뛰는 생동감 있는 시간을 푸르게 칠해 보라.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내 것이 되지 못한 시간을 저 죽음의 회색으로 칠해 보라. 당신의 시간대는 사막의 띠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초원의 띠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금 '순간'이라는 탄환을 발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순간이 푸름을 관통하는 탄환인지, 허망을 관통하는 탄환인지는 당신이 알고 있다."

"어떠한 순간에도 정신을 놓치지 않는 사람, 꽃잠이 오는 새벽녘에도 깨어 있는 사람, 작은 꽃 한 송이에도 환희를 느끼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풀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몸태가 죽은 아이들이 하늘에서 날다 말고 잠시 지상에서 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정채봉 작가의 따뜻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속되지 아니하고 거짓됨이 없이 주어진 계절을 온전히 온몸으로 살아가는 풀꽃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정채봉 작가의 아름답고 진실한 글들은 그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 온기와 위안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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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20.12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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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12월호에서 내일을 여는 사람 코너에서는 '걸크러시 래퍼가 삶의 장애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제목의 래퍼 치타의 인터뷰가 소개되어 흥미롭다. 원하는 것을 실현시키려는 의지가 강했던 래퍼 치타는 여성 래퍼의 불모지였던 국내에 힙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독보적인 래퍼로 자리매김했다.

"얘기하고 싶은 내용이 명료해지면 머릿속에서 계속 표현을 생각하다가 준비가 됐다 싶을 때 가사를 써요. 잘 써지지 않을 땐 데드라인을 미뤄서라도 기다려요.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되지 않은 제 속의 말들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싶지 않거든요. 대신 가사뿐만 아니라 무대연출에 있어서도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욕구가 일단 생기면 꼭 시도하려고 노력해요."

샘터 12월호에서 지구별 우체통 코너에 실린 '전염병 시대의 커피 한 잔'이라는 제목의 김민주님의 글이 인상적이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에서 시작된 일종의 커피 나눔 캠페인인 카페 소스페소는 커피를 주문할 때 두 잔의 비용을 내서 한 잔은 마시고 남은 한 잔은 커피 한 잔 값을 내기에도 버거운 이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김민주님은 카페 소스페소는 타인을 위한 대표적인 연대 행위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들은 힘겨운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슈퍼에소 장을 보고 물품의 일부를 남겨두는 장보기 소스페소를 실천했다. 지난 시간이 쓰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짙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김민주님의 글에서 연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묵직한 슬픔과 무거운 불안을 감당하며 버텨가던 나날이었다. 그러나 타인에게 에스프레소 한잔을 남겨둘 수 있는 여유와 나보다 더 가난한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힘겨운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샘터 12월호에서 느린 여행자의 휴식 코너에는 '호숫가에서 맞이한 공백의 시간'이라는 번역가 박여진님의 글이 인상적이다. 차갑고 푸른 공백의 시간이 지나가고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짝였다는 박여진님의 글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공백은 늘 서먹하다. 침범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서먹함이 있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필연적으로 공백과 마주해야 한다. 먼 곳에서 출발한 언어들이 내 몸을 통과해 모국의 언어로 도착할 때도, 일관성 없이 먼지처럼 떠돌던 관념들이 더듬더듬 문장으로 모일 때도 반드시 이 공백을 지나야 한다."

"여행에도 공백의 순간이 있다. 투명한 하늘을 매끈하게 비행하는 매에, 머리카락 사이로 스르륵 지나가는 바람에,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려고 웅크리고 앉은 바위에, 잠시 기댄 늙은 나무에, 마른 풀이 타는 냄새에,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짙고 비릿한 흙내음에 문득 찾아오는 공백은 말갗게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때론 너무 빨리 사라져 아쉬울 때도 있고 때론 너무 오래 머물러 암담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아쉬움이나 암담함과는 무관하게 공백은 제 시간을 텅 비우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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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판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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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 선집 1 <섬> 개정판은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새로이 한 것 뿐만 아니라 김화영 역자가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지 사십 년 만에 완전히 새로 번역하며, 장 그르니에 특유의 절제된 문장의 기품과 비밀을 살리기 위하여 과도한 설명적 번역 문장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장 그르니에 선집 1 <섬>은 카뮈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된 인생의 책으로 화제가 되었다. 1930년 알제의 고등학교에 철학 교사로 부임한 그르니에는 그곳에서 졸업반 학생이던 알베르 카뮈를 만났고, 1933년에 그르니에가 발표한 에세이집 <섬>을 읽으며 스무 살의 카뮈는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고, 몇 년 뒤 출간된 자신의 첫 소설 <안과 겉>을 스승에게 헌정했다.

장 그르니에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는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외발로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이 움직임의 보상을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고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장 그르니에는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뎌 내려면 무엇이라고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해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 사랑하는 고양이 물루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하는 장 그르니에의 글도 눈길을 끈다.

장 그르니에는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어야 마땅할 것들이 마음속에 무한한 공허를 파 놓는다고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와 아름다운 해변에 무덤들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장 그르니에의 글에 공감한다. 이 책은 회의적이고 관조적인 철학으로 일상의 미학을 섬세하게 바라본 장 그르니에의 아름다운 글을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생각들의, 그의 마음의 무(無)가 현실이 되어 있음을 본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바위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나는 또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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