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정판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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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 그르니에 선집 1 <섬> 개정판은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새로이 한 것 뿐만 아니라 김화영 역자가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지 사십 년 만에 완전히 새로 번역하며, 장 그르니에 특유의 절제된 문장의 기품과 비밀을 살리기 위하여 과도한 설명적 번역 문장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장 그르니에 선집 1 <섬>은 카뮈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된 인생의 책으로 화제가 되었다. 1930년 알제의 고등학교에 철학 교사로 부임한 그르니에는 그곳에서 졸업반 학생이던 알베르 카뮈를 만났고, 1933년에 그르니에가 발표한 에세이집 <섬>을 읽으며 스무 살의 카뮈는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고, 몇 년 뒤 출간된 자신의 첫 소설 <안과 겉>을 스승에게 헌정했다.

장 그르니에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는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외발로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이 움직임의 보상을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고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장 그르니에는 "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뎌 내려면 무엇이라고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해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 사랑하는 고양이 물루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하는 장 그르니에의 글도 눈길을 끈다.

장 그르니에는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어야 마땅할 것들이 마음속에 무한한 공허를 파 놓는다고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명승지와 아름다운 해변에 무덤들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장 그르니에의 글에 공감한다. 이 책은 회의적이고 관조적인 철학으로 일상의 미학을 섬세하게 바라본 장 그르니에의 아름다운 글을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생각들의, 그의 마음의 무(無)가 현실이 되어 있음을 본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

"바위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나는 또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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