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 정채봉 산문집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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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첫 마음>은 2001년 짪은 생을 마감한 정채봉의 산문집이다. 이 책은 정채봉 20주기를 맞아 그의 산문집 네 권(<그대 뒷모습>,<스무 살 어머니>,<눈을 감고 보는 길>,<좋은 예감>) 중 여전히 아름다운 글을 한 권으로 엮어 샘터사에서 출간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동화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에세이스트로서 손색이 없었던 정채봉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 산문집이다.

정채봉 작가는 어린 날에는 무릎을 깨면서까지 먼 데를 향하던 시선이 날개가 퇴화해 버린 타조 같은 삶에 머무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늘상 대하고 있는 것에서도 새로움을 찾을 수 있으며, 묵힌 채로 사는 우리들의 눈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나의 눈은 그저 보이는 것만을 볼 뿐 새로움을 볼 줄 모른다. 저것은 전신주이고 저것은 가로수이고 이것은 풀이고 하는 것이나 가리는 카메라의 렌즈와 다를 것이 없는 무감각한 이 눈.

그러나 어렸을 적에는 소나기 살줄금만 지나가도 산빛의 다름을 알아보았었다. 풀물이 한 켜 더해진 것도, 덜어진 것도 가늠했었다. 심지어 눈물 한번 흘리고 나서 바라보아도 새롭게 보이던 풍경이었지 않은가."

정채봉 작가는 법화경의 한 대목인 "쇠의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이지만 차차 쇠를 먹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 마음에서 생긴 잘못이 자신을 먹어 버린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음을 사나운 황소에, 교활한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고 그 어떤 고문과 폭력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것,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과 하늘나라가 바뀔 수 있다는 주제의 글을 쓰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는 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음이 나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에 한정되어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독사와 독수리도 살지만 해독초와 펠리컨도 있고, 투우도 살지만 투우사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기생한 녹이 쇠를 먹어 버리듯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사욕에 오염되어 버린데 있다."

이 책에서 정채봉 작가가 성철 스님과의 이야기를 전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성철 스님은 도는 우주의 근본이며 만물의 자체이니 시공을 초월하고 시공을 포함한 절대자이며 인간이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도를 깨치면 망상이 영영 소멸되어 소멸된 그 자취도 없게 되니 이것을 무심이라고 해. 망상이 소멸되어 무심이 되면 목석과 같으냐, 그게 아니야. 큰 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항상, 한결같이 영영 변함이 없어. 이것을 일여라 하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깊은 잠이 들면 정신이 캄캄히 어둡지만 깨친 사람은 광명이 항상 일여하므로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마음은 밝아 있으니 이것이 깨친 증거야."

"그러니까 눈을 뜨고 보란 말이야. 자기의 본모습은 광대무변한 바다와 같고 물질은 바다 위에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거품과 같은 것이네. 바다인 자기 가치를 알면 거품인 물질에 따라가지 않을 거 아닌가."

정채봉 작가는 수도자들에게 늘 강조되는 것이 '첫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수도에 막 입문하던 날의 그 열렬한 마음이 지속되지 않고서는 험난한 세파에 쉬 휩쓸리게 되듯 첫 마음의 온전함이 아닌 한 순간의 방심한 헛눈팖으로 우리의 생이 금방 끝나게 될지도 모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정채봉 작가는 간암이 발병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이야기하여 인상적이다.

"자연만 푸르게 칠할 것이 아니다. 당신한테 있어 퐁퐁 뛰는 생동감 있는 시간을 푸르게 칠해 보라.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내 것이 되지 못한 시간을 저 죽음의 회색으로 칠해 보라. 당신의 시간대는 사막의 띠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초원의 띠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금 '순간'이라는 탄환을 발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순간이 푸름을 관통하는 탄환인지, 허망을 관통하는 탄환인지는 당신이 알고 있다."

"어떠한 순간에도 정신을 놓치지 않는 사람, 꽃잠이 오는 새벽녘에도 깨어 있는 사람, 작은 꽃 한 송이에도 환희를 느끼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풀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몸태가 죽은 아이들이 하늘에서 날다 말고 잠시 지상에서 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정채봉 작가의 따뜻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속되지 아니하고 거짓됨이 없이 주어진 계절을 온전히 온몸으로 살아가는 풀꽃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정채봉 작가의 아름답고 진실한 글들은 그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 온기와 위안을 선물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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