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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20.12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샘터 12월호에서 내일을 여는 사람 코너에서는 '걸크러시 래퍼가 삶의 장애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제목의 래퍼 치타의 인터뷰가 소개되어 흥미롭다. 원하는 것을 실현시키려는 의지가 강했던 래퍼 치타는 여성 래퍼의 불모지였던 국내에 힙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독보적인 래퍼로 자리매김했다.
"얘기하고 싶은 내용이 명료해지면 머릿속에서 계속 표현을 생각하다가 준비가 됐다 싶을 때 가사를 써요. 잘 써지지 않을 땐 데드라인을 미뤄서라도 기다려요.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되지 않은 제 속의 말들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싶지 않거든요. 대신 가사뿐만 아니라 무대연출에 있어서도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욕구가 일단 생기면 꼭 시도하려고 노력해요."
샘터 12월호에서 지구별 우체통 코너에 실린 '전염병 시대의 커피 한 잔'이라는 제목의 김민주님의 글이 인상적이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에서 시작된 일종의 커피 나눔 캠페인인 카페 소스페소는 커피를 주문할 때 두 잔의 비용을 내서 한 잔은 마시고 남은 한 잔은 커피 한 잔 값을 내기에도 버거운 이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김민주님은 카페 소스페소는 타인을 위한 대표적인 연대 행위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들은 힘겨운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슈퍼에소 장을 보고 물품의 일부를 남겨두는 장보기 소스페소를 실천했다. 지난 시간이 쓰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짙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김민주님의 글에서 연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묵직한 슬픔과 무거운 불안을 감당하며 버텨가던 나날이었다. 그러나 타인에게 에스프레소 한잔을 남겨둘 수 있는 여유와 나보다 더 가난한 이를 도우려는 마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힘겨운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샘터 12월호에서 느린 여행자의 휴식 코너에는 '호숫가에서 맞이한 공백의 시간'이라는 번역가 박여진님의 글이 인상적이다. 차갑고 푸른 공백의 시간이 지나가고 호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반짝였다는 박여진님의 글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공백은 늘 서먹하다. 침범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서먹함이 있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필연적으로 공백과 마주해야 한다. 먼 곳에서 출발한 언어들이 내 몸을 통과해 모국의 언어로 도착할 때도, 일관성 없이 먼지처럼 떠돌던 관념들이 더듬더듬 문장으로 모일 때도 반드시 이 공백을 지나야 한다."
"여행에도 공백의 순간이 있다. 투명한 하늘을 매끈하게 비행하는 매에, 머리카락 사이로 스르륵 지나가는 바람에,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려고 웅크리고 앉은 바위에, 잠시 기댄 늙은 나무에, 마른 풀이 타는 냄새에,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짙고 비릿한 흙내음에 문득 찾아오는 공백은 말갗게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때론 너무 빨리 사라져 아쉬울 때도 있고 때론 너무 오래 머물러 암담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아쉬움이나 암담함과는 무관하게 공백은 제 시간을 텅 비우고 사라진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