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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고통에 관하여>는 <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국내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작가 정보라의 신작이다. 이 책은 붉은 칼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정보라 작가 특유의 치밀하고 치열한 설정과 서늘하게 파고드는 문장, 어둡게 번뜩이는 사유가 더욱 돋보인다. 이야기는 고통을 무력화시킨 진통제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와, 고통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단체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정보라 작가는 소설이라는 매혹적인 가능성의 도구를 통해, '고통'이라는 감각의 뿌리까지 낱낱이 해부하며, 독자들에게 철학적 통찰과 내면을 집요하게 찌리는 이야기의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중독성이 없고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의 등장. NSTRA-14가 보편적인 진통제가 되자, 고통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지자, 오히려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흥 종교 '교단'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며, 제약회사를 테러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테러 사건 후, 잠잠해진 교단에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온몸이 고문 흔적으로 가득하고, 체내에서 다량의 약물이 검출된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교단의 지도자들이다. 형사들은 진범을 밝히기 위해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어 있던 테러 사건의 범인 '태'를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태'의 기억은 교단에서 시작된다. '태'는 형인 '한'과 교단의 시설에서 자랐다. 고통을 섬기며, 고통의 무게를 모든 사람들에게 지우려 했던 '태'의 신념은 무고한 피해자를 낳았을 뿐이다. 제약회사를 경영한 '경'의 부모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태'의 도움으로 형사들은 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은거 중인 '한'을 붙잡지만, 어떤 진실도 밝히지 못한 채로 풀어준다. 호수 근처, 제약회사가 철수하며 사람이 모두 떠나 폐촌이 된 황무지를 조사하던 형사들은 그곳에서 불법 약물 제조 시설과,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숨어 있던 '한'을 발견한다. '한'은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태'도 형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무수한 증거가 '한'을 범인이라고 가리킨다. 한은 다시 유치장에 갇힌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친다며 기후 경보가 울리던 때,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한'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CCTV는 고작 3분 동안 작동을 멈췄고, 그 3분을 전후로 유치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에 설치된 CCTV를 모조리 뒤지며 조사해 보아도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는 완벽하다. 단 한 명, '태'의 담당 정신과 의사 '엽'을 빼고. 형사들은 CCTV를 돌려 거기 찍힌 의사를 찾으려 하지만, 그 순간 불어닥친 토네이도에 경찰서 건물이 정전된다. 한참이 지나 토네이도가 물러가고,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유치장에 혼자 남겨진 '태'는 그를 떠올린다. 테러에 관한 질문, 교단을 향한 냉철한 태도, 고통에 관한 특별한 통찰력. '태'와 그를 둘러싼 '고통'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던 '엽'의 정체와 교단과 제약회사의 싸움에서 그는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고통에 관하여>는 인간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는 내내 삶의 일부로서 고통을 느끼고 삶의 끝으로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고 결국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어떠한 존재 방식인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이유에서 그 고통을 견디는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건네며 고통에 대한 삶의 통찰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의사가 신증 종교 고단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절대적이고 큰 믿음을 갖도록 길어진 태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삶의 의미와 믿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글로 흥미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요. 뭘 크게 믿기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 닥치는 상황들에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의미는 그 뒤에 찾는 거죠.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게 없어도 살아갈 수 있어요."
이 책에서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경험한 욱이 삶의 의미를 직접 찾기 위한 과정에서 신흥종교 교단에서 활동하며 파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 통증이라는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들로 인한 외로움을 경험하는 욱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욱을 떠났다. 욱이 겪은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욱의 투병과 회복을 경험할 수 없었으므로 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했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욱을 매료시킨 것은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한 뒤에 혹은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해야만 초월을 얻을 수 있다는 교단의 주장이었다. 한의 설명에 따르면 욱의 삶과 경험이야말로 초월에 가장 가까운 형태였다. 고통에 의미는 없으며 고통을 겪고 나면 사람은 초월이나 경험이나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과 마음이 지쳐 쇠약해질 뿐이라는 욱의 절망을 한은 의미와 목적으로 바꾸어주었다. 욱은 한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을, 자신이 경험한 방식 그대로 혹은 그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오로지 고통만을 통하여, 절망만을 통하여."
여기에 더해 이 책에서 고통을 무력화시킨 진통제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를 만든 부모로부터 실험 대상이 되며 자라온 '경'이 고통에 관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를 통해 깊은 공감을 느낀다. 경은 부모가 이룩한 세계로, 경을 가루었던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서 점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경은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다르며,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경은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고 말한다. 경은 태가 상처 입은 방식은 자신과 유사했으나 같지 않았고, 회복의 과정과 고통의 기억을 이해하는 자신의 방식과 달랐다고 이야기한다. 고통과 공포가 지배하던 과거를 지나 사랑하는 현과 함께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삶을 나아가고자 선택한 경의 모습이 독자에게 위안을 선사한다.
"흉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 경이 탐색했던 것, 탐색해서 되찾으려 한 것은 그 기억이었다.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존재를 그녀는 찾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도 성욕도 아니었다. 사랑이나 성욕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었다.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이었다."
"고통스럽지 않은 기억으로 삶을 채우고 흉터가 아닌 증거들로 남은 생을 함께 축복하고 기념하기를 원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경은 알지 못했고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시도는 해봐야만 했다. 현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경은 현을 사랑했으므로 최대한 노력을 해봐야 했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보라 작가의 '작가의 말'의 깊인 여운을 선사한다. 정보라 작가는 의미 없는 고통은 거부해야 하며, 힘들고 괴로운 일이 모두 다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충분히 잘 먹고 충분히 잘 쉬고 내 몸을 잘 돌보았을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러면 괴로운 상황을 탈출할 길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탈출할 길이 있어야 한다.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야 한다.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탈출해서 잘 살 수 잇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을 나는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좀 더 구제척으로 배웠다. 그래서 나는 계속 떠들고 글 쓰고 집회하고 행진하고 요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