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김영롱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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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는 치매를 앓고 있는 94세 할머니와 손녀의 따뜻한 일상을 담은 유튜브 채널 '롱롱TV'의 첫 에세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재밌는 걸 해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한 유튜브는 그야말로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서먹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의 손을 잡고 온 동네를 거닐던 그 옛날처럼 가까워졌고, 할머니에게 받은 상처가 많았던 엄마의 마음에도 시린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세상과 단절되어 흐릇해져가던 할머니의 일상이 다채로워졌다는 것이다. 14만 구독자의 응원을 받으며 매주 웃을 일이 생겼다.

이 책에는 그간 영상에서 볼 수 있었던 유쾌하고 따스한 일상뿐만 아니라 서로를 지금처럼 사랑하기 위해 이들이 겪어야 했던 포기와 화해, 눈물의 순간들이 빼곡하게 담겼다. 이 책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돌보는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방법을 잊은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낯선 이들에게 그저 한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기만 해도 서로의 진심이 전해질 수 있음을 말하는 책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외면했던,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볼 용기를 주는 책이다.

이 책은 '1장 할머니라는 섬, 2장 기억이 사라져도 기억되는 사랑, 3장 할머니의 장례식의 초대합니다'라는 3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의 환시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할머니가 사랑한 사람들이자 현실에서 더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온 우주였던 할머니의 외로움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환영이 나타날 때 할머니를 가만히 안아준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이 깊은 공감을 전한다.

"이제 나는 할머니의 눈앞에 그리운 사람의 환영이 나타날 때면 가만히 안아준다. 할머니가 잠이 들 때까지 옆에 누워서 어깨를 토닥인다. 특별히 말을 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 대신 눈 맞춤과 체온, 손짓으로 마음을 전달한다. 할머니의 환시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결코 사라지지 않을 내가 곁에 있으니 이제는 외로워하지 말라고. 다음번에 어린 영롱이가 할머니 방에 또 오게 된다면 할머니 곁에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잠들었으면 좋겠다."

저자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유튜브에 올릴 첫 영상을 찍던 날, 침대 맡에 걸터앉은 할머니가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좋으면 좋은 대로 살다 보면 당신들도 이렇게 오래 살아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말이 지독한 슬픔도, 넘치는 기쁨도 결국에는 한데 섞여 하나의 삶이 된다는 말로 들린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살아온 끔찍한 세상에서 숨 쉬고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방법이 '흘러가는 대로 산다'였나 보다. 어쩌면 흐릿해진 기억 덕분에 이렇게 무덤덤하게 자신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자신과 엄마, 할머니라는 삼대의 일상을 담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아빠가 너그러워서라던가, 엄마가 할머니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지만, 모두 다 보기 좋게 틀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대한 고마움과 비록 서투르지만 남은 날들은 과거와 다르게 살아보고자 한 엄마의 결심 덕분이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자신의 우울증과 할머니의 우울증은 다가오고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나 달랐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우울증은 관계 속의 좌절과 외로움에서 비롯되어 큰 사건들과 함께 요란스럽게 찾아왔지만, 할머니의 우울증은 적막함 속에서 아주 천천히 찾아왔다고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더니 어느새 작은 섬과 같아졌고, 할머니의 치매는 세상과의 소통이 멈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던 뇌가 웅크리면서 시작된 병이자 지독한 외로움에 시작된 병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내가 그동안 쌓아뒀던 상처들을 눈물로 다 폭발시키고 난 후에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면, 할머니의 아픔은 조용히 속으로 삼켜지는 것 같았다. 결말도 달랐다. 나는 할머니와 엄마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점차 나아졌지만, 할머니는 누군가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조차 거부했다. 슬픈 일은 쓰레기통 비우듯이 확 치워버리는 게 할머니가 곁뎌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할머니의 우울증을 눈치챈 엄마가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늙음을 이유로 들며 거기에는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듯 욕설과 신경질로 엄마를 밀어냈다. 할머니는 자꾸만 더 가라앉았고, 불 꺼진 방에서는 홈쇼핑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저자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보다 엄마를 더 걱정했다고 말한다. 저자 자신 또한 할머니가 피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할머니에게 자주적인 행동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치매 노인 타이틀을 받은 순간부터 할머니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우리는 치매가 사소한 것 하나부터 열까지 엄청난 세심함과 관찰이 요구되는 병이라는 걸 예쌍하지 못한 채, 치매 간병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저자는 유튜브에 할머니와 자신의 일상을 영상으로 만들어서 올리면 매주 할머니와 뭘 할지를 고민하게 될 테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다 보면 활력이 생길 거 같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나중에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할머니와 첫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면서 할머니가 치매를 진단받고 4년이 지나도록 치매 증상들을 할머니의 전부라고 생각해 버린 게 실수였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가족이 겪은 힘듦의 해결책은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 되는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는 저자의 글은 독자에게 치매라는 질환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일상의 힘든 모습을 최대한 배제하려다 보니 무엇을 찍어야 할지, 찍을 수 있을지 더 생각이 복잡해졌다. 결국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이 되어줄 수 있는 영상을 만들자는 커다란 틀만 정해놓은 채 첫 촬영을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치매는 할머니의 일부일 뿐인데, 나는 치매만 쳐다보다가 '우리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할머니의 정체성과 감정은 내가 보고자 하면 언제든 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내 신경이 온통 이상행동과 실수에 몰려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그게 바로 문제였다."

저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에 대한 유튜브 촬영을 시작하면서 4년간 묵혀왔던 갈증이 조금씩 해소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일과는 영상 편집까지 더해지면서 더욱 바빠졌지만, 신기하게도 피로감과 갑갑함은 더 이상 자신을 짓누르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할머니에게 필요했던 것은 곧 기억에서 사라질 경고와 주의가 아니라 사는 걸 재미있게 만들어줄 활력, 자존감을 높여줄 칭찬과 대화, 우울감을 낮춰줄 움음이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모든 영상은 기획이라 할 것도 없이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큰 주제로 두고, 할머니의 말과 반응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우리의 대화를 촬영했다. 꾸밈없는 영상들은 내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같은 장면만 수십 번 보다 보니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할머니의 작은 몸짓과 눈빛,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편집은 할머니가 내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 일상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저자는 유튜브를 시작하고 자신의 가족에게 생긴 값진 변화는 할머니와 엄마, 자신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연민의 감정이 스며들며 관계의 변화를 시작한 저자의 여성 가족 삼대의 이야기가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우리 삼대가 지금처럼 웃으며 지낼 수 있게 된 건, 자신의 아픈 상처만 들여다보던 이들이 서로의 상처로 시선을 돌리면서 '저 사람도 얼마나 아팠을까?'를 헤아려보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몇 십 년에 걸쳐 생겨버린 상처가 아물기까지 우리에겐 분명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우리 가족은 동화의 한 장면에서 튀어나온 사람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도 아니다. 우리는 태어난 김에 만나 서로를 어느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가족이자, 함께 성숙해져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세 명의 여성들이다."

저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에게 신우요관암이라는 병이 함께 찾아오면서 다가올 이별을 생각하며 일상이 더욱 소중해졌다고 말한다. 아직 할머니를 만질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저자의 글에서 뭉클한 감정이 전해진다.

"할머니의 삶이 죽음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 해도 할머니에게서 퍼지는 따뜻한 온기와 사랑은 여전히 내 곁에서 나를 품어주고 있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엄마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가족을 감싸고 있는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할머니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저자는 유튜브를 통해서 할머니가 직접 구독자의 고민 상담을 해주는 영상을 만들어보기로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타인의 아픈 사연에 과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공감과 진심을 아끼지 않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인데, 할머니는 사람들의 이야기게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어느새 얼굴을 모르는 이들부터 옆에 앉은 자신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나대로 고민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져 좋았고,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내게 조언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 고민을 듣는 순간마늠은 치매로부터 멀어지는 할머니를 보며, 어쩌면 할머니의 치매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건 그동안 애써 시도해왔던 낱말 퍼즐 맞추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활동보다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보고 들으며 함게 섞이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우리가 한 사람에게 치매라는 단어가 붙었을 때 그 단계가 초기인지 중기인지 말기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모든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쉽게 간주하게 된 이유는 치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퍼뜨린 매스컴에 8할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치매 환자들 각각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증상도 다양하며, 그들의 존엄성과 고유함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나의 할머니가 치매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된다. 매스컴에서도 마찬가지다. 치매 말기 환자의 모습을 함부로 치매의 이미지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치매에는 다양한 모습과 증상, 단계가 있고, 환자의 개별성이 존재한다. 그 다양성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면 치매 인식은 개선되기 시작할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의 저자는 치매 환자의 마지막을 똑같은 프레임으로 씌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꾸만 어두워지는 삶에서 위태롭게 빛나고 있는 그 반짝임을 어떻게 지켜줘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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