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한국으로 떠났어요 - 조선족,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보리 청소년 7
조선족 아이들과 어른 78명 지음, 길림신문.인천문화재단 엮음 / 보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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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중 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92년 수교이후 양국 관계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한국에게 중국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국가가 되었으며, 미우나 고우나 중국인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양국 관계가 긴밀해진 만큼 재중 교포인 조선족 사회도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의 높은 경제 수준 덕분에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소수민족이 되었다는 점은 '빛'이라면,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겪어야 하는 소외와 차별 그리고 조선족 사회의 해체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엄마가 한국으로 떠났어요>는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학부형 그리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길림신문사가 주최하고 인천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백일장 대회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엮은 문집이다.

 

 

한국으로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는 조선족 아이들의 애틋한 마음과 학생수 부족과 교원난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조선족학교와 조선어 교육의 앞날을 우려하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움 그리고 돈벌이를 위해 다들 한국으로 떠나는 와중에서도 가정과 교포 사회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내는 조선족 학부모들의 솔직한 고백을 접할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너무 불쌍한 분이시다.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난 아버지가 근 10년 동안 무소식이자 어머님께서는 우리 두 형제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말할 수도 없다. 매일매일 아버지 소식을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신 어머니, 할 수 없이 오늘 또 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엄마가 기차에 오르기 전에 나는 엄마한테 매달리며,

"엄마, 아빠처럼 우리를 버리면 안 돼요, 엄마까지 없으면 우리는 못 살아요."하며 목놓아 울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두고 먼 곳으로 떠나간다. 돈이란 도대체 무엇인데 이토록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 우리는 왜 산산히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가?

 

 

 

-장춘시 이도구조선족소학교 5학년 손설화의 <엄마가 한국으로 떠났어요> 中-

하루 마지막 수업 시간이 끝났다. 담임인 나는 습관처럼 교실로 갔다. 헌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모두들 울고 있었다.

(......)

"선생님, 선생님도 우리 학교가 없어지면 우리 따라 가시지 않나요?"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 영어 선생님이 마지막 수업을 해 주신다고 하시며 또 우리 따라 가실 수 없다고 작별 인사를 했어요."

(......)

실은 이날 나도 아이들에게 마지막 수업을 하였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종일 기분은 별로였고 마음속 어딘가가 꽉 막히면서 아팠다.

돌이켜 보면 교편을 잡은 지도 벌써 옹근 27년째다. 이 학교에서 쭉 있으면서 요즘에 와서는 조선족 교육이 진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 산거 지구 조선족 사회 발전과 더불어 많은 학생, 특히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거나 가정 형편이 괜찮은 학생들이 도회지 학교로 전학해 가는 바람에 우리 학교는 점점 가련하고 썰렁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번 시간에는 무엇을 가르쳐 줄까 하고 기대하고 있는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척박한 땅에서라도 좀 더 무엇을 거두어 보려고 열심히 가꾸었는데 그 결실을 보지도 못한 채 끝장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류하현 삼원포조선족학교 김병순, <같이 울었다> 中-

 

 

내몽골 초원 가운데 우리 민족이 집중되어 사는 곳은 그래도 흥안맹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을 때는 도시에만 조선족이 5천명이 있었고 가까운 교외에 크고 작은 조선족 마을이 열 개나 되었다. 조선족 학교도 알뜰하게 만들어졌고, 민족 운동회요 친목회요 하면서 조선족 모임도 자주 가지면서 '가갸거겨'우리말 향기를 물씬물씬 풍기며 즐겁게 살아왔다.

그러던 것이 한국 붐과 도시 진출 바람이 일면서 조선족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집과 땅을 버리고 돈벌이 간 조선족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젠 그 흥겹던 굿거리장단도 희미해지고 그냥 이름만 '조선족촌'이지 실은 한족 마을이나 다름없다.

(......)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허리끈을 졸라매고 세웠던 조선족 학교가 우리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교원으로 일하는 우란호트시 조선족중학교는 내몽골에서 유일한 조선족완전중학교지만 지금은 학생이 이백 명이 되나마나 하다. 전교 교진원 마흔 두명 가운데 한족교원이 열다섯 명이고 또 조선말을 모르는 조선족 교원은 열일곱 명이고 조선어로 강의할 수 있는 교원은 열두 명밖에 안 된다. 우리 말을 하는 교원이 모자라서 조선족 교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은 하지만 오려는 조선족들이 없고 오히려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

(......)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목도 문제다. 연해 도시에서는 한족 학생들도 한국어를 배운다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중국에 살면서 한국어가 뭘 필요하냐'며 팔짱을 끼고 있다. 혹 한국 유학을 가거나 하는 막부득이한 경우에 부랴부랴 '가갸거겨'를 배우는 사람들이 잇지만 그것도 가물에 콩 나듯 한다.

이 상태로라면 내몽골에서 우리 민족 말과 글이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60년 전 조선족 어르신들은 우리 민족 말과 글만은 꼭 후대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빈주먹으로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 흥안맹 우란호트시에다 하나뿐인 조선민족학교를 일떠세웠다. 대동란 시대에도 된서리를 맞아 엉망이 되었지만 끈질긴 민족심으로 한 세대 한 세대 이어 지금까지 버텨고 오지 않았던가!

 

 

 

* 대동란: 중국 문화혁명.

 

-내몽골자치구 우란호트시 조선족중학교 김혜연, <우리말, 우리 글 지키는 초병>-

 

해외 출국 회오리 바람에 휩쓸린 둘레 사람들 때문에 나 또한 몇 번이나 담장 위의 갈대마냥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곤 했다.

어린 자식 울음소리를 등 뒤에 남기고 매정하게 떠나 버리는 사람들. 삼사 년이라고는 하지만 가고 난 다음에는 그것이 기나긴 여정이 돼 버리고, 그사이 아장아장 걸음마 하던 어린것은 초,고중생으로 훌쩍 커 버린다. 아이들 성장 과정은 눈물로 얼룩져 있고, 부모 사랑 대신 돈이 뒤따라오기 때문에 아이들은 인정과 배려심이 없고 도덕성도 심히 모자라게 된다. 매번 학부모회의 때마다 소개되는 결손가정에 대한 내용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리면서도 부모가 함께하는, 몇 명밖에 안 되는 가정 속에 내 가정이 들어 있어 다소나마 위안을 느낀다.

풍족한 돈이 없어도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아빠, 엄마 사랑을 매일매일 줄 수가 있어서, 곁에서 지켜 줄 수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

 

 

-장춘시 최초영, <작은 사랑, 작은 행복> 中-

 

 

 

 

이 책을 읽고 나면,

북한 사투리가 섞인 독특한 억양으로 한국말 아닌 한국말을 구사하는 조선족들이 더 이상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으며, 웬지 모르게 70년대식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다소 촌스러운 모습조차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린 아이들을 맡겨 놓고 돈벌이를 위해 어렵사리 한국행을 선택한 이들은 우리보다 더 못나지도 더 잘나지도 않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지금 재중 교포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야말로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동포들을 대하는 우리의 참모습이 아닐까 싶다. 역사적 비극이 만들어낸 민족 분열을 고착화시키지 않으려면 한국에 나와 있는 조선족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하루 빨리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 한창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올바른 정착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족인 조선족 동포들을 이해하고 감싸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같은 한민족도 보듬지 못하면서 어떻게 피부색도 말도 다른 타민족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조선족들은 사실 항일 독립 운동의 자손들이거나 독입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이들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에게 약간의 법률적 편의를 제공하고 경제적 도움을 주는 정책은 필요하다고 본다.

 

 

<엄마가 한국으로 떠났어요>는 일러두기를 통해 조선족 사회의 표기법을 최대한 존중하였음을 밝혀두고 있다. 예를 들면, 과당(수업) 과문(교과서 본문) 교원절(스승의 날) 등 중국어에서 영향을 받은 단어들과 '흑룡강성(헤룽장성) 길림(지린) 연길(옌지) 등등 외래어 표기법 원칙을 따르지 않고 한자 독음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한국에 나와 있는 교포들 역시 한국어와는 다른 조선어 문법으로 인해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외국어를 새로 배우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국어 문장을 자주 읽고 쓰다보면 몇 개월만에 충분히 교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한국에 나와 있는 대다수 교포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 사회에 동화되려고 하기보다는 어서 빨리 돈을 벌어 중국으로 귀국할 생각만 하는 것같아 아쉽다. 한국인에게 같은 민족으로 인정받고 대우받으려면 조선족들 역시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한국을 이해하되 중국과는 구별되는 민족적 정체감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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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푸 - 류전윈 대표소설선 글누림 비서구문학전집 4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글누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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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전윈의 단편소설집이 최근 출간되었다.

<타푸:塔铺>와 <신병중대:新兵连>은 작가가 각각 1976년도와 1987년도에 쓴 작품으로 자전적 성격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타푸>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다시 문을 연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입시 준비를 하는 70년대 중후반 중국 농촌 십대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고된 농사일과 빈곤에 내몰려 있는 농촌의 젊은이들에게 대학진학과 군입대는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으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1958년 중국 허난의 옌진(延津)현에서 태어난 류전윈 역시 문화대혁명으로 진학시기를 놓치고 제도권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세대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단편 <타푸>는 1978년 베이징 대학교에 입학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힘든 집안 형편 속에서도 자식의 대학 진학을 위해 발에서 진물이 나는 것도 모르고 수십리 길을 왕복하여 '세계지리' 책을 구해다 주는 주안공 아버지의 모습은 진한 부성애를 느끼게 한다.

 

 

몸져 누운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대학 입시 당일. 원치 않는 사람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간 리아이롄(李爱莲), 아내와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결국 대학 입학이라는 꿈을 포기하고 마는 왕취안, 깊은 밤 굶주린 배를 움켜주고 몰래 매미를 잡아 불에 구워 먹다 들킨 모주어 등등...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꿈과 이상으로 활활 타오르던 70년대 중국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는 이념도 사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다 나은 삶과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류전윈의 작품 특히 단편들은 평범한 중국인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경건함과 생존에 대한 치열함이야말로 사상과 인종을 뛰어 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위화, 쑤퉁 등과 함께 중국의 신사실주의 작가群으로 분류되는 류전윈은 작품속에서 불필요한 과장이나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하는데, 작품의 '리얼리티'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폄하하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식 리얼리즘의 한 특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한편, <신병중대>라는 작품은 대학 진학과 함께 70년대 중국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군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병중대>는 말 그대로 이제 갓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이 3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후 각 부대에 배치되기 직전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역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작가와 같은 세대들의 이야기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군단부로 배치받았다며 좋아하던 '왕디'가 장차 맡게 될 일은 중풍에 걸린 군단장의 아버지를 간호하는 것이며, 낮은 평가로 결국 남들이 꺼려하는 생산지로 발령난 위안셔우는 '절름발이 가운데 장군을 뽑는 격'으로 자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부분대장에 임명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론 예기치않은 일들이 복을 불러오기도 하고 반대로 화근이 되기도 한다.

 

 

반면,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건만 인생의 시계바늘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고 되돌이킬수도 없다.

공산당 입당을 위한 '검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조사원을 향해 총을 발사한 후 도망쳤던 리샹진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결국 15년 실형을 선고 받고 만다. 공산당에 보란듯이 입당하여 머리를 양가래로 딴 여자친구와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리고자 했던 리샹진의 꿈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군단장의 지프를 운전하는 운전병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위안셔우의 '밀고'로 퇴소조치되었던 라오페이는 결국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우물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된다. 라오페이는 비록 군복 바지를 거꾸로 입는 등 행동이 굼뜨긴 했지만 군인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곧이 곧대로'인 그의 성격이야말로 군인으로서 적격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군인이 되지 못했고 불명예를 안고 평생 살아가느니 죽음을 택하고 만다.

 

 

"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모두들 당황했다. 군단장의 인사가 참모장이 말한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참모장이 알려준 인사는 "동지 여러분, 수고가 많습니다."였다. 하지만 모두들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수장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다행이 일치된 목소리였고 모두들 마음을 놓았다. 유독 '라오페이'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수천수만의 병사들과 달리 그 혼자만 "수장님,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 사람의 다른 목소리를 군단장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중대장이 즉시 고개를 돌리더니 분노한 눈빛으로 '라오페이'를 노려보았다.

 

-류전윈, <신병중대> 中-

 

 

 

소대의 초급 간부 혹은 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명 '골간(骨干)'이 되기 위해 펼쳐지는 암투와 경쟁은 중국 사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하겠다. 권력이야말로 영혼을 갈아먹는 독충이다.

 

 

<타푸>와 <신병중대>는 류전윈 특유의 날카로운 현실비판의식은 다소 떨어지지만 20대의 풋풋함과 진솔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반면, <우두머리:头人>은 어딘지 그의 장편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古乡天下黄花>과 구성이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고향하늘 아래 노란꽃>은 분명 <우두머리>라는 단편 속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사하다. 그리고 <전언:口信>이라는 작품 역시 작자의 장편 <핸드폰:手机>의 제3장 '옌(嚴)씨와 주(朱)씨'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했다.

 

 

어찌된 영문일까?

 

아마도 작가는 <우두머리:头人>라는 단편을 탈고한 후, 미진함이 남아 살과 피를 더해 장편소설로 다시 썼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반면, <전언:口信>이라는 단편이 장편소설 <핸드폰:手机>의 뒷부분과 100%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작가가 장편소설을 쓰면서 예전에 써놓았던 자신의 단편을 <핸드폰:手机>에 첨가한 측면이 강해 보인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표절한 것도 아니므로 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자는 독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역주나 역자 후기 등을 통해 최소한 이 점을 밝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현대 소설을 집중적으로 번역하여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선봉장에 서 있는 역자라면 최소한 독자들에게 위와 같은 '예의' 정도는 지켜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야 일본소설이나 영미소설보다 훨씬 더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중국 소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으면서 서서히 열혈 독자층이 형성될터이니 말이다.

 

 

번역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언급하자면 이번 작품의 번역작업은 상당히 조급하게 진행되었고 출판 전 마무리 작업 역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의 번역 실력이야 이미 충분히 다른 작품들을 통해 '검증 '되었으니 '실력탓'을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암튼, 조사라든지 문장의 호응 관계가 부적절하거나 어색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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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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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은 1977년 작으로 1974년 <캐리>로 데뷔한 스티븐 킹의 초기 3대 호러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스티븐 킹은 <샤이닝>을 쓰기에 앞서 1975년 <세일럼스 롯(Salem's Lot)>을 출간한 바 있다.

 

 

<샤이닝> 역시 <캐리>와 마찬가지로 염력(혹은 초능력)을 갖고 있는 여섯살 소년 대니가 주인공이다.

대니의 아빠 잭 토런스는 유명작가를 꿈꾸면서 고등학교에서 작문을 가르쳤으나 학생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여 해고되고 만다. 잭은 아내 웬디, 아들 대니와 함께 생계를 위해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동절기 동안 폐쇄되는 콜로라도에 위치한 오버룩 호텔의 관리를 맡게 된다.

 

 

눈 덮인 겨울 산의 유서깊은 호텔에서 잭은 서서히 미쳐간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

 

 

그를 광기로 몰아넣은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뜻대로 쓰여지지 않는 희곡작품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아닌지 혹은 아들을 구타하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는 아내때문이었을까.

혹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한 호텔의 어두운 과거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종종 의식을 잃곤 하는 어린 아들의 존재때문이었을까.

.

.

.

잭을 광기로 인도한 건 다름아닌 소외와 환상이였다.

완벽하게 폐쇄된 공간인 오버룩(사회로부터의 소외를 상징)에서 잭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부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알콜중독에 실업자일뿐인 자신의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신뢰할 수 있는 남편이자 존경스러운 아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했다. 이런 잭의 소망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그를 둘러싼 현실은 더욱더 그를 '저 멀리' 밀어냈다.

 

 

<샤이닝>은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가족간 폭력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그리고 있다.

격리되고 소외되는 것에 따른 불안이야말로 단체생활을 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불안 즉 공포 그 자체이리라.

 

 

공포는 스스로 파멸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들을 공격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를 공격하여 죽음에 이르고 만다. <샤이닝>의 주인공 잭 토런스 역시 공포에 휩싸여 서서히 미쳐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해치고 나중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오버룩을 증기 폭발로 날려버리는 것처럼.

 

 

 

찰스 브록든 브라운과 에드거 앨런 포의 뒤를 잇는 미국 고딕 소설의 계승자로 불리우는 스티븐 킹답게 그는 자신의 두번째 장편 소설(<샤이닝>)에서 에드가 앨런 포우에 대한 '오마주'를 마음껏 선보이고 있다. <샤이닝>에서는 포우의 단편 중 구성과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붉은 죽음의 가면>의 한 장면이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붉은 사신이 모두를 덮쳤다!'

'가면을 벗으십시오! 가면을 벗으십시오!'

그러자 반짝이는 아름다운 가면 뒤에 어두운 복도를 따라 시뻘건 눈을 크게 뜨고 죽일 듯이 대니를 쫗아왔던 그 형체의 여태까지 보지 못한 얼굴이.

오, 대니는 가면을 벗을 시간이 되면 어떤 얼굴이 드러날지 두려웠다.

 

 

-스티븐 킹, <샤이닝> 中-

 

 

 

 

스티븐 킹의 또 다른 초기 호러 작품인 <세일럼스 롯> 역시 인간 소외와 그에 따른 공포를 다루고 있다.

 

 

1975년에 출간한 <세일럼스 롯>은 일견 뉴잉글랜드의 한 마을에 출몰하는 흔한 흡혈귀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 또한 인간 교류가 단절된 현대 사회에 대한 저자의 심오한 성찰과 강력한 사회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앞으로 스티븐 킹이 즐겨 소설의 배경으로 사용하게 될 주요 모티브가 등장한다. 즉, 사람들이 서로 단절된 채 살고 있는, 그래서 악의 힘이 파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뉴잉글랜드 시골의 어느 조그만 마을, 그리고 드디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악에 대항해 싸우며 다시 한번 인간 교류의 회복을 시도하는 이성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각기 다른 문제점들과 감추어진 비밀과 드러나지 않은 악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마을 전체의 분위기 또한 그러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홀연 이 마을에 나타나 사람들의 피를 빨고 파멸시키는 흡혈귀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 낸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흡혈귀는 이미 신앙을 잃어버린 신부의 십자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흡혈귀의 흡혈은 왜곡된 인간 교류의 상징이다. 진정한 교류는 남의 피를 빨아먹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남을 살리는 것일 것이다.

1983년에 저자 스티븐 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일럼스 롯>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흡혈귀들이 아니라 대낮의 텅 빈 마을입니다. 옷장에 뭔가가 숨어 있고, 침대 밑이나 트레일러들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 시체들이 들어 있는 마을 말입니다. 내가 그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가 계속되고 있었지요. 하워드 베이커는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었고, 언제 알았느냐는 것이오.' 그 말은 강박관념처럼 나를 사로잡았고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저는 내내 감추어진 비밀과 백일하에 드러난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일럼스 롯>은 텔레비전 영화(토비 후퍼 감독, 1979년)로도 제작되었는데, 원작의 음산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시청자들로 하여금 뼛속 깊은 고독과 단절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정작 무서운 것은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귀를 불러들인 마을 사람들의 완벽한 단절과 어두운 비밀이라는 저자의 말은 <세일럼스 롯>이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라, 중후한 예술적 주제를 가진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김성곤, <스티븐 킹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中-

 

 

 

 

나는 내가 이 글을 마치고 나서 <세일럼스 롯>을 읽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먼 훗날 다음과 같이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도...

 

 

스티븐 킹의 <샤이닝>과 <세일럼스 롯>을 읽고 있던 시기.

한국에서는 지하철에서 침을 뱉었다고 뭐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10여명의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일용직 근로자가 경찰에 붙잡혔고, 은둔형 외톨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슈퍼마켙 여주인을 흉기로 찔렀으며,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던 날 7살 어린 여자 아이가 가족과 함께 자고 있던 집안에서 이불째 납치되어 성폭행당했는가 하면, 아동용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던 30대 아빠가 자신의 친딸을 성폭행했다는 사건들이 연일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다고......

 

 

 

지금 우리는 더이상 흡혈귀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흡혈귀보다 우리를 더 공포로 몰아넣는 건, 다름 아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위와 같은 '묻지마 범죄'다. 스티븐 킹이 자신의 작품 <세일럼스 롯>에서 진짜 무서운 건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귀를 불러들인 마을이라고 말한 것처럼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범죄와 범죄자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불러오는 사회가 아닐까. 가족조차 서로 교류하지 않는, 인간미가 사라진 사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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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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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호러 킹'이라고 불리울 만큼 공포물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단순한 공포추리물과는 확연히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순수문학처럼 깊은 감동과 울림이다.

 

 

하여, 나는 일찍부터 스티븐 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장중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내가 처음 접한 스티븐 킹의 작품은 단편 모음집이었는데 하나같이 멋진 작품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원제가 <The body>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처녀작이자 내가 읽은 그의 첫번째 장편이다.

광신도인 엄마로부터 학대받으며 성장한 한 소녀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된 초능력으로 엄청난 '복수'를 감행한다는 이야기다. 단편 작품들에 비해 감동은 덜 했지만 위대한 '호러 킹'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한 통과 의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스티븐 킹의 장편들을 접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분량에 읽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주눅이 들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런 차에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가족의 두 얼굴>이라는 책 속에서 언급되어 부랴부랴 일게 되었다.

 

 

1992년에 쓰여진 이 작품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알콜중독인 가장과 근친상간의 위험에 노출된 십대 딸 그리고 매맞는 엄마 등등...

아침 TV 상담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 같다.

 

 

아내 구타와 술주정 그리고 아이들의 학비로 모아놓은 은행계좌의 돈까지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친딸을 성폭행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남편이 있다. 이런 남편을 둔 아내가 상담을 해온다.

 

 

일단 남편의 알콜중독을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치료를 해보라고....?

이미 그녀의 남편은 단주 클럽인 AA 회원이 된지 1년이 넘었으며 정기적으로 상담도 받고 있다.

그럼,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방법은 어떨까...?

 

남성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여전히 팽배해 있는 1960년대 미국사회는 남편이 술을 좀 과도하게 마시는 건 남성다움의 상징이고, 아내를 구타하는 건 '가정바로잡기' 정도로 인식되어 있다. 하물며,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남편을 성폭행범으로 고소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맞고소를 당하게 될 우려가 크다. 물론, 엄마에게 아빠의 나쁜 '손버릇'을 고백하며 도움을 요청한 딸의 증언이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과연 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딸에게 나쁜 기억을 되새기게 하려는 엄마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하여,

우리는 위와 같은 고통에 직면해 있는 여성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주인공인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그녀는 상담프로그램에 사연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경찰에 남편을 잡아가라고 고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운명에 맡기지도 않았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세 아이의 엄마인 돌로레스가 폭력 가장으로부터 자신과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그리고 부잣집 여주인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베라 도노반과 어떻게 교감을 나누고 우정을 쌓았는지를 고백하는 1인칭 소설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 메인주 앞바다에 떠 있는 리틀톨이라는 조그만 섬이다. 시간적 배경은 1992년 늦가을이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므로 그로부터 30년 전인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작품의 기본 배경은 바로 '일식(日蝕)'이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자연현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일식...

이런 일식을 배경으로 스티븐 킹의 위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실제로 1962년 7월20일(한국시간으로는 7월21일) 20세기 최대의 일식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생애 단 한번뿐인 일식현상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사를 연발했을 따름이지만, 스티븐 킹은 <돌로레스 클레이본>이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족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 여성을 구원해 냈다.

 

 

 

위대함과 평범함의 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인물 그리고 똑같은 사건 앞에서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아무런 감흥도 그 어떠한 영감도 일어나지 않지만 스티븐 킹과 같은 비범한 이들은 위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니 말이다.

 

 

 

태양은 남성을 상징하고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달이 태양을 가리는-삼키는- 일식현상은 남성 위주 사회에 저항하여 승리하는 소수의 용감한 여성을 상징한다. 작품의 기본 배경인 일식 현상은 그저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구현해 낸다. 스티븐 킹의 비범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티븐 킹을 한낱 대중소설작가에 불과하며 그의 작품을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공포추리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

.

작가 서문에서는 1963년 여름에 일어난 일식 현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돌로레스 클레이본> 한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점을 언급하고 있다.

 

 

1963년 여름 2016년 이전 뉴잉글랜드 북부에서 볼 수 있는 최후의 개기 일식이 일어난다. 메인주 서쪽 끝인 샤보트와 동쪽 끝인 리틀톨 섬은 모두 이 개기일식이 지나가는 길목에 포함되어 있다.

(......)

태양은 하늘에서 불타는 요정의 고리처럼 변했고, 이 비정상적인 어둠 안에 속한 세상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귀뚜라미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는 태양의 열기를 따라가는 꽃들처럼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제시 마후트 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그녀는메인 주 서쪽 끝의 샤보트에 살았다. 또 한 사람은 세 아이의 어머니로 돌로레스 세인트 조지라는 이림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메인 주 동쪽 끝의 리틀톨 섬에 있었다.

(......)

제시 마후트는 나중에 제럴드 벌링게임이라는 남자와 결혼했고, 그녀의 이야기는 <제럴드의 게임>이라는 작품에 실렸다. 돌로레스 세인트 조지는 처녀 적 이름인 돌로레스 클레이본으로 돌아갔으며, 이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두 작품은 일식의 길목에 있었던 두 여자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티븐 킹-

 

 

제시 마후트는 누구일까?

혹시, 돌로레스의 눈에 종종 '환상'처럼 그러나 선명하게 나타나곤 하는 그 소녀는 아닐까.

혹시, 돌로레스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감뿐만 아니라 3000만달러라는 엄청난 유산까지 남겨준 베라 도노반의 어릴 적 이름은 아닐까?

 

 

베라 도노반은 비록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지만 돌로레스 클레이본과 함께였기에 결코 외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못된 남자가 나쁜 사고를 당하는 것 역시 때로는 좋은 일이 될 수 있지...'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녀에게 드러나지 않은 '엄청난 과거'가 있다는 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의 여정을 놓칠 스티븐 킹이 아니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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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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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1994년이후 18년만의 폭염이라고 한다. 이처럼 더운 여름철에는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올 여름 내가 선택한 작가는 스티븐 킹과 일본의 신예 미치오 슈스케였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추리소설이 순수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발달해 있는 나라이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작가층도 두텁고 작품도 다양할뿐만 아니라 순수문학작품을 뛰어넘는 수준 높은 작품들도 많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2004년 <등의 눈>으로 등장한 미치오 슈스케의 두 번째 장편이다. 추리소설이 일반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인 것과는 달리 매우 시적이다. 8~9월에 피는 한해살이로 향일화(向日花), 조일화(朝日花)라고도 하며 꽃말은 숭배, 애모, 그리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해바라기는 강렬한 색상과 정열적인 이미지로 예술가들의 사랑을 일찍부터 받아왔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가 대표적이다.

 

 

도시화가 진행되어 더 이상 주변의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지만, 해바라기가 피어나지 않는 여름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7월20일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종업식날.

주인공 마야 미치오-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따 주인공 이름을 지었다-는 담임인 이와무라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결석한 친구 S의 집에 가게 된다. 미치오는 S의 집으로 가는 도중 두 다리가 모두 골절된 채 입에는 비누를 물고 죽어 있는 고양이 사체를 발견한다. 벌써 아홉번째다. 최근 미치오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는 개와 고양이의 사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 분명한데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한편,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S의 집에 도착한 미치오는 목을 매고 죽어 있는 친구의 모습에 기겁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즉각 이와무라 선생님께 알리지만 이와무라 선생님이 형사와 함께 S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거미로 환생한 S가 미치오를 찾아와 자신을 죽인 범인과 사라진 자신의 시신을 되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주인공 미치오와 동생 미카가 자주 찾아가던 동네 국수가게의 '도코할머니'가 어느날 비누를 입에 물고 두 다리가 절단된 채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슈스케는 상식과 비상식,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았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보면 커져만 가는 의구심에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여기에서 잠깐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의 작품 해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본격 미스터리는 1+1=2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격 미스터리에서 주관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쿄고쿠 나츠히코의 데뷔작 <우부메의 여름>(1994년)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이후의 본격 미스터리는 수수께끼를 푸는 범위 내에서 주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하게 된다. 자신에게 보이는 세계와 타인에게 보이는 세계는 반드시 동일할 수 없다는 회의가 작품 배경에 깔리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본격 미스터리 장르의 위기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세계 역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본격 미스터리의 가능성을 넓힌다는 사실을 우리는 쿄고쿠 나츠히코나 야마구치 마샤야의 뛰어난 작품에서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이 같은 미스터리 흐름에서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들, 특히 이 책은 주인공의 주관을 중시하면서 합리적인 수수께끼의 해결을 구축한 뛰어난 야심작이라 하겠다.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의 비뚤어진 주관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구성력 또한 이 소설이 본격 미스터리와 양립하는 데 일조한다. 결국 주관을 모티브로 한 본격 미스터리는 문장이나 구성 면에서도 최대한으로 기교를 부린 인위적인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소설과 현실성의 연출은 양립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두가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진부한 소설관에 반기를 든다. 그는 본격 미스터리는 인간을 그리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 '인간을 그린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일상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자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현실 세계는 항상 주관과 오해, 그리고 환상에 좀 먹히는 약한 존재일 다름이다.

 

 

-2008년 5월,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

 

 

그러니까 슈스케는 독자의 상식을 시험하고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친구가 거미로 환생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동생이 도마뱀으로 환생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걸어다닐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같은 질문에 'No!'라고 대답한다.

이 세상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걸까?

이 세상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상식적'이라면 애당초 두려움 즉 '공포'라는 감정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혹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는 걸 보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귀신에 대한 공포, 소외에 대한 공포 등등......

공포의 근원은 환상과 착각이다. 그리고 환상과 착각은 무지(無知)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인간이 모르는 무지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며 환상과 착각도 많다는 의미일 터.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은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우린 이를 '승화'라고 부르며,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가장 훌륭하게 극복한 사례이다- 통제되지 않는 일탈행위나 심지어 금지된 행동 등을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이다.

 

 

엄마의 장례식 날. 마루 밖을 바쁘게 오가며 일을 도와주던 동네 사람들.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 낯선 소리.

다이조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들이 엄마를 관에 넣을 때였다.

ㅡ뭐지?ㅡ

마루에서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던 아홉 살짜리 다이조는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당 구석에 동네 여자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

"저, 소리......"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둔하고 낮은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그들은 엄마의 두 다리를 담담히 부러뜨리고 있었다.

(......)

ㅡ설마 저 사람들이ㅡ

지금 엄마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어쩌면 엄마와 자신은 그 남편들 덕에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들이 알아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몰래 남편과 정을 통했던 다이조의 엄마에게 그녀들이 제재를 가한 것은 아닐까. 모두가 공모하여 엄마에게 독을 먹인 것은 아닐까.

(......)

다이조는 마당 한 구석을 노려보았다. 담담히 작업을 진행하는 여자들을 분노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ㅡ저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죽인 거야ㅡ

저 사람들은 엄마가 다시 살아날까봐 무서워하고 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자신들이 죽인 여자가 복수를 하러 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한 여자가 말끄러미 바라보는 다이조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다이조도 잘 아는 여자였다. 볼이 축 늘어지고 입술이 두꺼운 여자. 바로 순경의 아내였다. 이웃여자들 속에서 항상 앞장서며 툭하면 주변에 이것저것 시키는 여자. 아까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그 무서운 작업도 다른 여자들은 그녀의 지식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

다이조는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다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마당을 등지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을 빠져나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대충 꿰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 속에서 의미 없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정신없이 달렸다.

ㅡ살해된 거야.ㅡ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가면서 다이조는 가슴속으로 소리 질렀다.

ㅡ그 사람들이 엄마를 죽인 거야.ㅡ

(......)

사흘 뒤, 순경의 아내가 살해되었다. 머리를 돌로 맞고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온 얼굴을 피로 물들인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범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ㅡ어쩌면.ㅡ

사건 소식을 들은 다이조는 엄마가 묻힌 무덤으로 급히 가보았다. 그리고 산간의 해가 들지 않는 그 장소를 한 번 보고, 온 몸이 움츠러들었다. 엄마의 법명이 적힌 졸탑파(묘지에 쓰이는 나무로 된 비석)만이 딸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 엄마가 묻혀 있던 곳만 검은 흙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휑하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바닥에 뚜껑이 비뚤어진 관이 반쯤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ㅡ살아난 거야.ㅡ

흙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ㅡ살아나서 그 여자를 죽인 거야.ㅡ

다이조는 엄마의 무서운 집념에 바들바들 떨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은 엄마와 함께 한 9년이라는 세월의 추억을 단번에 공포로 바꾸어 놓았다. 자상했던 엄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바닥에서 기어 나오는 엄마. 원한의 상대를 찾아서 마을을 걸어 다니는 엄마. 썩어가는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리는 엄마. 그 돌을 내려치는 엄마.

 

 

-미치오 슈스케, <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 中-

 

 

후루세 다이조처럼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인 엄마를 잃어버린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왜곡된 이미지와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온상이 되었을 것이다.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압적으로 조여오는 그 어떤 힘 같은 것 말이다.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다이조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두려움을 잠시나마 회피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카프카의 <변신>과 함께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날 갑자기 흉칙한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의 일그러진 일상과 죽음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고독과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우린 자기 자신만은 아니라고 결코 아닐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지만 모두 알고 있다.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공포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후루세 다이조'이자 '그레고리 잠자'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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