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1994년이후 18년만의 폭염이라고 한다. 이처럼 더운 여름철에는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올 여름 내가 선택한 작가는 스티븐 킹과 일본의 신예 미치오 슈스케였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추리소설이 순수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발달해 있는 나라이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작가층도 두텁고 작품도 다양할뿐만 아니라 순수문학작품을 뛰어넘는 수준 높은 작품들도 많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2004년 <등의 눈>으로 등장한 미치오 슈스케의 두 번째 장편이다. 추리소설이 일반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인 것과는 달리 매우 시적이다. 8~9월에 피는 한해살이로 향일화(向日花), 조일화(朝日花)라고도 하며 꽃말은 숭배, 애모, 그리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해바라기는 강렬한 색상과 정열적인 이미지로 예술가들의 사랑을 일찍부터 받아왔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가 대표적이다.

 

 

도시화가 진행되어 더 이상 주변의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지만, 해바라기가 피어나지 않는 여름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7월20일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종업식날.

주인공 마야 미치오-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따 주인공 이름을 지었다-는 담임인 이와무라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결석한 친구 S의 집에 가게 된다. 미치오는 S의 집으로 가는 도중 두 다리가 모두 골절된 채 입에는 비누를 물고 죽어 있는 고양이 사체를 발견한다. 벌써 아홉번째다. 최근 미치오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는 개와 고양이의 사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 분명한데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한편,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S의 집에 도착한 미치오는 목을 매고 죽어 있는 친구의 모습에 기겁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즉각 이와무라 선생님께 알리지만 이와무라 선생님이 형사와 함께 S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거미로 환생한 S가 미치오를 찾아와 자신을 죽인 범인과 사라진 자신의 시신을 되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주인공 미치오와 동생 미카가 자주 찾아가던 동네 국수가게의 '도코할머니'가 어느날 비누를 입에 물고 두 다리가 절단된 채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슈스케는 상식과 비상식,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았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보면 커져만 가는 의구심에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여기에서 잠깐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의 작품 해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본격 미스터리는 1+1=2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격 미스터리에서 주관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쿄고쿠 나츠히코의 데뷔작 <우부메의 여름>(1994년)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이후의 본격 미스터리는 수수께끼를 푸는 범위 내에서 주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하게 된다. 자신에게 보이는 세계와 타인에게 보이는 세계는 반드시 동일할 수 없다는 회의가 작품 배경에 깔리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본격 미스터리 장르의 위기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세계 역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본격 미스터리의 가능성을 넓힌다는 사실을 우리는 쿄고쿠 나츠히코나 야마구치 마샤야의 뛰어난 작품에서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이 같은 미스터리 흐름에서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들, 특히 이 책은 주인공의 주관을 중시하면서 합리적인 수수께끼의 해결을 구축한 뛰어난 야심작이라 하겠다.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의 비뚤어진 주관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구성력 또한 이 소설이 본격 미스터리와 양립하는 데 일조한다. 결국 주관을 모티브로 한 본격 미스터리는 문장이나 구성 면에서도 최대한으로 기교를 부린 인위적인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소설과 현실성의 연출은 양립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두가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진부한 소설관에 반기를 든다. 그는 본격 미스터리는 인간을 그리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 '인간을 그린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일상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자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현실 세계는 항상 주관과 오해, 그리고 환상에 좀 먹히는 약한 존재일 다름이다.

 

 

-2008년 5월,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

 

 

그러니까 슈스케는 독자의 상식을 시험하고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친구가 거미로 환생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동생이 도마뱀으로 환생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걸어다닐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같은 질문에 'No!'라고 대답한다.

이 세상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걸까?

이 세상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상식적'이라면 애당초 두려움 즉 '공포'라는 감정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혹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는 걸 보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귀신에 대한 공포, 소외에 대한 공포 등등......

공포의 근원은 환상과 착각이다. 그리고 환상과 착각은 무지(無知)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인간이 모르는 무지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며 환상과 착각도 많다는 의미일 터.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은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우린 이를 '승화'라고 부르며,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가장 훌륭하게 극복한 사례이다- 통제되지 않는 일탈행위나 심지어 금지된 행동 등을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이다.

 

 

엄마의 장례식 날. 마루 밖을 바쁘게 오가며 일을 도와주던 동네 사람들.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 낯선 소리.

다이조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들이 엄마를 관에 넣을 때였다.

ㅡ뭐지?ㅡ

마루에서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던 아홉 살짜리 다이조는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당 구석에 동네 여자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

"저, 소리......"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둔하고 낮은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그들은 엄마의 두 다리를 담담히 부러뜨리고 있었다.

(......)

ㅡ설마 저 사람들이ㅡ

지금 엄마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어쩌면 엄마와 자신은 그 남편들 덕에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들이 알아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몰래 남편과 정을 통했던 다이조의 엄마에게 그녀들이 제재를 가한 것은 아닐까. 모두가 공모하여 엄마에게 독을 먹인 것은 아닐까.

(......)

다이조는 마당 한 구석을 노려보았다. 담담히 작업을 진행하는 여자들을 분노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ㅡ저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죽인 거야ㅡ

저 사람들은 엄마가 다시 살아날까봐 무서워하고 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자신들이 죽인 여자가 복수를 하러 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한 여자가 말끄러미 바라보는 다이조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다이조도 잘 아는 여자였다. 볼이 축 늘어지고 입술이 두꺼운 여자. 바로 순경의 아내였다. 이웃여자들 속에서 항상 앞장서며 툭하면 주변에 이것저것 시키는 여자. 아까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그 무서운 작업도 다른 여자들은 그녀의 지식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

다이조는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다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마당을 등지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을 빠져나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대충 꿰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 속에서 의미 없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정신없이 달렸다.

ㅡ살해된 거야.ㅡ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가면서 다이조는 가슴속으로 소리 질렀다.

ㅡ그 사람들이 엄마를 죽인 거야.ㅡ

(......)

사흘 뒤, 순경의 아내가 살해되었다. 머리를 돌로 맞고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온 얼굴을 피로 물들인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범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ㅡ어쩌면.ㅡ

사건 소식을 들은 다이조는 엄마가 묻힌 무덤으로 급히 가보았다. 그리고 산간의 해가 들지 않는 그 장소를 한 번 보고, 온 몸이 움츠러들었다. 엄마의 법명이 적힌 졸탑파(묘지에 쓰이는 나무로 된 비석)만이 딸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 엄마가 묻혀 있던 곳만 검은 흙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휑하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바닥에 뚜껑이 비뚤어진 관이 반쯤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ㅡ살아난 거야.ㅡ

흙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ㅡ살아나서 그 여자를 죽인 거야.ㅡ

다이조는 엄마의 무서운 집념에 바들바들 떨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은 엄마와 함께 한 9년이라는 세월의 추억을 단번에 공포로 바꾸어 놓았다. 자상했던 엄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바닥에서 기어 나오는 엄마. 원한의 상대를 찾아서 마을을 걸어 다니는 엄마. 썩어가는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리는 엄마. 그 돌을 내려치는 엄마.

 

 

-미치오 슈스케, <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 中-

 

 

후루세 다이조처럼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인 엄마를 잃어버린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왜곡된 이미지와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온상이 되었을 것이다.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압적으로 조여오는 그 어떤 힘 같은 것 말이다.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다이조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두려움을 잠시나마 회피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카프카의 <변신>과 함께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날 갑자기 흉칙한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의 일그러진 일상과 죽음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고독과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우린 자기 자신만은 아니라고 결코 아닐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지만 모두 알고 있다.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공포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후루세 다이조'이자 '그레고리 잠자'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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