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스티븐 킹은 '호러 킹'이라고 불리울 만큼 공포물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단순한 공포추리물과는 확연히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순수문학처럼 깊은 감동과 울림이다.

 

 

하여, 나는 일찍부터 스티븐 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일단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장중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내가 처음 접한 스티븐 킹의 작품은 단편 모음집이었는데 하나같이 멋진 작품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원제가 <The body> 

 

<캐리>는 스티븐 킹의 처녀작이자 내가 읽은 그의 첫번째 장편이다.

광신도인 엄마로부터 학대받으며 성장한 한 소녀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된 초능력으로 엄청난 '복수'를 감행한다는 이야기다. 단편 작품들에 비해 감동은 덜 했지만 위대한 '호러 킹'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한 통과 의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스티븐 킹의 장편들을 접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분량에 읽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주눅이 들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런 차에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가족의 두 얼굴>이라는 책 속에서 언급되어 부랴부랴 일게 되었다.

 

 

1992년에 쓰여진 이 작품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알콜중독인 가장과 근친상간의 위험에 노출된 십대 딸 그리고 매맞는 엄마 등등...

아침 TV 상담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 같다.

 

 

아내 구타와 술주정 그리고 아이들의 학비로 모아놓은 은행계좌의 돈까지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피가 흐르고 있는 친딸을 성폭행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남편이 있다. 이런 남편을 둔 아내가 상담을 해온다.

 

 

일단 남편의 알콜중독을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치료를 해보라고....?

이미 그녀의 남편은 단주 클럽인 AA 회원이 된지 1년이 넘었으며 정기적으로 상담도 받고 있다.

그럼,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방법은 어떨까...?

 

남성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여전히 팽배해 있는 1960년대 미국사회는 남편이 술을 좀 과도하게 마시는 건 남성다움의 상징이고, 아내를 구타하는 건 '가정바로잡기' 정도로 인식되어 있다. 하물며,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남편을 성폭행범으로 고소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맞고소를 당하게 될 우려가 크다. 물론, 엄마에게 아빠의 나쁜 '손버릇'을 고백하며 도움을 요청한 딸의 증언이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과연 이 세상에 공개적으로 딸에게 나쁜 기억을 되새기게 하려는 엄마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하여,

우리는 위와 같은 고통에 직면해 있는 여성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주인공인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그녀는 상담프로그램에 사연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경찰에 남편을 잡아가라고 고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과 아이들의 안전을 운명에 맡기지도 않았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세 아이의 엄마인 돌로레스가 폭력 가장으로부터 자신과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그리고 부잣집 여주인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베라 도노반과 어떻게 교감을 나누고 우정을 쌓았는지를 고백하는 1인칭 소설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 메인주 앞바다에 떠 있는 리틀톨이라는 조그만 섬이다. 시간적 배경은 1992년 늦가을이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므로 그로부터 30년 전인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작품의 기본 배경은 바로 '일식(日蝕)'이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자연현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일식...

이런 일식을 배경으로 스티븐 킹의 위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실제로 1962년 7월20일(한국시간으로는 7월21일) 20세기 최대의 일식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생애 단 한번뿐인 일식현상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사를 연발했을 따름이지만, 스티븐 킹은 <돌로레스 클레이본>이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족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 여성을 구원해 냈다.

 

 

 

위대함과 평범함의 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인물 그리고 똑같은 사건 앞에서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아무런 감흥도 그 어떠한 영감도 일어나지 않지만 스티븐 킹과 같은 비범한 이들은 위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니 말이다.

 

 

 

태양은 남성을 상징하고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달이 태양을 가리는-삼키는- 일식현상은 남성 위주 사회에 저항하여 승리하는 소수의 용감한 여성을 상징한다. 작품의 기본 배경인 일식 현상은 그저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구현해 낸다. 스티븐 킹의 비범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티븐 킹을 한낱 대중소설작가에 불과하며 그의 작품을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공포추리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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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문에서는 1963년 여름에 일어난 일식 현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돌로레스 클레이본> 한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점을 언급하고 있다.

 

 

1963년 여름 2016년 이전 뉴잉글랜드 북부에서 볼 수 있는 최후의 개기 일식이 일어난다. 메인주 서쪽 끝인 샤보트와 동쪽 끝인 리틀톨 섬은 모두 이 개기일식이 지나가는 길목에 포함되어 있다.

(......)

태양은 하늘에서 불타는 요정의 고리처럼 변했고, 이 비정상적인 어둠 안에 속한 세상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귀뚜라미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고는 태양의 열기를 따라가는 꽃들처럼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제시 마후트 라는 이름의 소녀였다. 그녀는메인 주 서쪽 끝의 샤보트에 살았다. 또 한 사람은 세 아이의 어머니로 돌로레스 세인트 조지라는 이림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메인 주 동쪽 끝의 리틀톨 섬에 있었다.

(......)

제시 마후트는 나중에 제럴드 벌링게임이라는 남자와 결혼했고, 그녀의 이야기는 <제럴드의 게임>이라는 작품에 실렸다. 돌로레스 세인트 조지는 처녀 적 이름인 돌로레스 클레이본으로 돌아갔으며, 이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두 작품은 일식의 길목에 있었던 두 여자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티븐 킹-

 

 

제시 마후트는 누구일까?

혹시, 돌로레스의 눈에 종종 '환상'처럼 그러나 선명하게 나타나곤 하는 그 소녀는 아닐까.

혹시, 돌로레스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감뿐만 아니라 3000만달러라는 엄청난 유산까지 남겨준 베라 도노반의 어릴 적 이름은 아닐까?

 

 

베라 도노반은 비록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지만 돌로레스 클레이본과 함께였기에 결코 외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못된 남자가 나쁜 사고를 당하는 것 역시 때로는 좋은 일이 될 수 있지...'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녀에게 드러나지 않은 '엄청난 과거'가 있다는 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의 여정을 놓칠 스티븐 킹이 아니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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