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 뇌과학이 밝혀낸 중년 뇌의 놀라운 능력
바버라 스트로치 지음, 김미선 옮김 / 해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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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막 접어든 나에게 기적같이 찾아온 책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중년에 대한 정의를 뒤바꿔 놓는다.


사실,이 책이 막 한국에 출판 소개되었던 2011년 초 당시 신문의 책소개글에 낚인(?) 나머지 일부러 대형 서점에 가서 찾아 읽었던 책이었다. 그 당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순간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빠져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이제 막 마흔에 접어든 나로서는 저자가 도입 부분에서 적나라하게 밝혔던 '망각' 혹은 '설단현상'-사람 이름이나 명사가 입에서만 맴돌 뿐 떠오르지 않는 현상-을 조금씩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영화배우 특히 내가 20대를 보낸 90년대의 영화배우 이름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뇌가 이렇게 늙어가는구나'하고 씁쓸해하던 시절 바버라 스토로치는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중년에 접어들면 뇌의 기능 중, 특히 기억하는 능력과 빠른 계산력 등 민첩함을 요하는 능력이 저하될 뿐,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고 유추하며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능력은 훨씬 뛰어나진다고...

물론, 저자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많은 과학적 성과들을 열거하는데 인색하지 않는다.  


중 년에 접어든뇌는 세심하게 구축된 연결고리와 경로를 지니며 우리를 더 영리하고, 더 평온하며, 더 지혜롭고, 더 행복하게 한다. 이러한 연결망이 바로 우리가 순간적으로 주위의 기본 패턴들을 인식하고 올바른 판단(좋은 선택이냐 나쁜 선택이냐, 친구냐 적이냐?)을 내리게 하는 것들이다. 중년이 되면 우리의 뇌는 복잡한 상황과 주위 인간들을 거의 자동조종 상태로 누빈다. 우 리 중년의 뇌는 최신 화상회의 휴대폰이나 다이어리의 할인가는 전혀 할인이 아님을 그냥 알고, 딸애가 최근에 사귀는 유별난 남자친구도 결국 오래 가지 않을 것이므로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며, 말해서 도움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정말 낫다는 것을 알고, 변화를 부리기위해서는 언제 소리를 높여야 하는지를 안다.


-바버라 스트로치,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中 p293-


모두 3장으로 나누어진 책에서 제1장은 중년이 겪게 되는 증상들로 주로 기억력 감퇴에서 오는 해프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고 다양한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는 놀라운 중년 뇌의 능력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 히, 대부분의 중년-물론 저자가 만나본 중년들은 저자를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은 기억력 감퇴에 쑥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젊은 시절에 비해 상당히 지혜로워졌음을 인정한다는 저자의 지적에는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정 말 그렇다. 나 역시 일말의 거짓도 보태지 않고 말하자면 2,30대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똑똑하다고 느낀다. 물론, 정서적으로도 훨씬 더 안정되어 있고 행복감도 더 많이 느낀다. 그리고 뭐랄까 자신감이 커지면서 훨씬 더 원숙해졌다고나 할까.  저자처럼  나 역시 때론 '보면 그냥 아는 일들'이 점점 많아짐을 느낀다.


중년에 접어들면, 사회적 책임감이 막중해지고 돌보아야할 가정사도 복잡다단해지는 법인데, 청년시절보다 행복감을 더 많이 느낀다는 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을 들어보자.


새 로이 발견한 이 평온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저 나쁜 일에 신물이 난 나머지 방어막을 친 것일까? 분명히 중년의 만족은 우리에게 주입되어온 끔찍한 중년의 그림과는 도대체 일치하지 않는다. 중년의 위기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빈둥지 증후군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탐색을 시작하기 가장 좋은 장소는 뇌의 안쪽, 특히 편도(amygdala)라 불리는 곳이다. 편도는 뇌 안 깊숙한 곳의 조그만 조각이다. 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자신의 편도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편도는 신체의 국토안보부이다. 비행기에서 무섭게 생긴 승객을 보았을때, 상사와 당신의 성과에 관한 면담해야 할 때, 심지어 십대 자녀와 섹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 편도가 작업에 들어가 당신의 신체를 깨우며 중요한 판단, 즉 싸울 것이냐 달아날 것이냐를 결정하게 한다.

편도는 뇌의 원시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작다. 아니, 염밀히 하자면 "그것들은 작다."라고 해야 한다. 편도는 뇌의 양쪽에 하나씩 위치해 있고 영어의 복수형은 amygdalae인데, 라틴어로 '아몬드들'이라는 뜻이다. 형태와 크기가 아몬드와 비슷해서 얻은 이름이다. 아무튼 초기 인간들을 미쳐 날뛰는 사자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 설치된 이 오래된 경보 장치가 우리 현대의 중년에게는 어떤 역할을  하기에 바쁜 것일까? 얼마 전 마라 매더가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스탠퍼드 의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 현재 MIT 뇌영상ㅇ연구실의 실장으로 있는 존 가브리엘리와 공동으로 젊은이와 나이든 이의 편도를 스캔해본 매더와 동료들은 나이가 들면서 놀라울 만큼 비례적으로 우리 자신도, 우리의 편도도 부정적인 것들에 덜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버라 스트로치,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中 p69-




'아 그렇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 뇌의 편도가 부정적인 것들에 덜 반응하게 되어 행복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되지만, 또한 상황을 낙관함으로서 종종 피할 수 있는 위험에 종종 노출되기도 한다. 이는 2005년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쳤을때 도시를 떠나라는 대피 명령을 어기고 남아 있나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매우 늙은 사람들이었다는 점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카트리나의 희생자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매우 늙은 사람들이었다. ' 나이트리더'의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의 4분의 3이 60세를 넘었고, 절반은 75세를 넘었다. 그들은 카밀(1969년에 상륙했던 5등급 태풍)이 상륙했을 때 이미 중년이었다. "카밀이 카트리나 때 왔다면, 아마 1969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겁니다." 국립허리케인센터 소장 맥스 매이필드는 말했다. "경험이 언제나 훌륭한 스승인 것은 아니죠"


-아만다 리플리, <언씽커블> 中 p61-



경험이 언제나 훌륭한 스승은 아니며, 중년 이후의 지나친 낙관적 사유가 언제가 복(福)을 불러오는 건 아니지만, 어찌되었던 나이가 들수록 슬퍼지고 인생의 허무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회색의 중년'에 밝고 새로운 서광이 비쳐들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알고 이해하는 바가 커질수록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져서 행복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단다. 그렇다면, 폐경기를 맞이한 중년 여성의 '빈둥지증후군'과 중년 남성들의 이른바 '사추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 우리가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중년의 그림을 잘못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알기 쉬운 일이다. 앞서 언듭했듯이, 우리는 중년이라는 이 짐승을 전에 마주친 적이한 번도 없었던 적이다. 실로, 중년의또 다른 거대한 신화인 '빈 둥지 증후군'역시 지금은 대개 허구로 여겨진다. 

(......)

자 라나는 십대의 높은 에너지와 활력에 찼던 집을 그리워하며 애석함을 느끼는 것은 확실하지만, 핑거만의 말대로 빈둥지 '증후군'은 대중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대개 남성을 대상으로 했던 '중년의 위기'에 상응하는 '여성 대응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빈 둥지 증후군'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신의 모든 시간을 자녀 양육에 바친 여성들조차 아이들이 독립하게 되었을 때 대체로 '대단한 만족감'을 느꼈다.


-바버라 스트로치,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中 p109~110-


저자는 중년에 대한 인류의 정의와 이해는 잘못되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중년이라는 특수한 연령대는 저자의 지적처럼 역사적으로 규정되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앞에 펼쳐진 중년의 세계는 과거 인류 역사가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기가 될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과거 조부모나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활기찬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기에 앞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은 필수라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바버라 스트로치의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는 어떤 식으로든 중년을 이해하고 맞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줄 것같다. 누구나 나이먹음을 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중년의 뇌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연구들을 언급한 제2장과 3장은 다소 지루한 면이 있다.

그 렇게 많은 연구자들의 이름과 연구 프로젝트들은 이제 막 청년기를 지나 활기차게 망각하고 공상하기 시작하는 나의 뇌가 다 받아들이기에는 역시 역부족인 것 같다. 그리고 뇌에 좋다고 알려진 음식들 예를 들면 블루베리 등등 각종 음식에 대한 지나친 선호는 자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개별 식품들이 갖고 영양소들의 효능이 각종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식품을 섭취하여 소화시키고 흡수되는 전과정에서 마찬가지로 똑같은 효과와 효능을 갖고 있는지 따져봐야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계는 단편적이고 개별적이며 또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분석, 이해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뇌의 세계는 그렇게 단편적이지도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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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 - 중국인의 행동을 읽는 7가지 문화코드
유광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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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중국은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굳이 역사책의 내용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성(姓)과 이름(名)의 조합에서부터 우리는 중국의 영향을 참 많이도 받았다. 그런 중국이었건만 냉전 시대 중국은 우리에게 잊혀진 대륙에 불과했다. 가까이 있지만 가볼 수 없는 나라, 역사적 문화적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라는 커다란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나라였다. 그런 중국이 고립무원에서 걸어나와 우리 곁으로 걸어오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중국와 중국인에 대해 논한 책들은 많지만 주로 <손자병법> <삼국지연의>로 대변되는 고대 문헌에 입각한 분석이나 개인적 체험에 의존한 흥미위주의 여행안내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중국과 중국인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모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라는 책은 색다른 관점으로 중국인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이라 하겠다.


홍콩에서 고대 중국 문자학을 연구했고 대만과 대륙 곳곳에서 특파원으로 머물렀던 저자는 중국인의 정신세계와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7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바로, 무(武) 담(城) 모략(計) 축선(軸線) 회색(灰色) 현문(賢文) 황금몽(黃金夢)이 그것이다.

이들 키워드에 입각하여 중국인을 간략하게 정의하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예를 닦고, 안과 밖 남과 나 사이에 담을 쌓아 철저하게 구분하며, 명분과 실리를 조화시키되 둘이 충돌한다면 실리를 택하고, 내세움과 드러냄을 경멸하고 가림과 숨김을 처세술로 익혀 왔으며 현세에서의 물질적 풍요를 노골적으로 지향한다'라고 하겠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 대륙인들이 무를 숭상하는 것에는 과거 북방 유목민의 빈번한 공격과 군웅할거로 인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 땀흘려 조상 대대로 지켜온 땅과 곡식을 빼앗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영토가 너무 넓어 변방까지 황제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다보니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건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이와 같은 중국인의 피해의식과 자위의식이 만리장성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담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특히, 광둥성 카이핑(開平) 일대의 가옥 형식 중 하나인 토치카식 집(중국명:碉楼)과 푸젠성과 장시성 접경 지역에 자리한 집단 거주지인 토굴식 집(중국명: 土楼)은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베이징의 전통 가옥인 사합원(四合院) 역시 매우 폐쇄적인 형태로 중국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과 피해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국의 전통 가옥 형태라 하겠다.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 중국인이 의(義)와 예(禮)를 숭상하기보다는 임기응변식 권모술수가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걸 간파했음은 당연하다. 물론, 인의(仁義)를 핵심으로 한, 공자의 유교와 같은 사상이 없지 않았으나 일반 민중들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생활 규범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중국 대륙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유교적 사유방식과 행동양식이 굳건히 자리잡게 된다.


중국인은 '전통'보다는 '정통'을 중시한다.

옛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착이 아니라 '정통' 즉 '정중앙'에 대한 집요함이랄까.

세 계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그들의 욕망은 왕조의 도읍을 정하고 왕궁을 지을 때에도 남북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 양옆으로 정방형 혹은 장방형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중국인들이 현재 명품을 가장 많이 모방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정통을 중시하긴 하지만 정통보다 금전을 더 중시하는 중국인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관우가 '재물의 신'으로 중국에서 널리 추앙받는다는 점 하나만 보더라고 중국인들이 얼마나 돈에 집착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관우가 재물의 신으로 둔갑(?)하게 된 건, 그가 산시성 출신으로 과거 산시성에는 소금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이곳 사람들은 중국 각 지역으로 소금을 내다파는 장사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한다. 그 유명한 진상(晉商)이 바로 이들 산시성 사람을 가리킨단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관우상 숭상을 통해 과거 진상(晉商)처럼 현세에서의 재물 획득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중국 하면 붉은색을 떠올리게 되지만 사실 붉은 색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색일뿐이다.  오히려 회색이야말로 호불호와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구분하려 하지 않는 중국인의 애매모호한 특징을 대변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십분 공감한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중국인들 역시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지 않고 얼버무리곤 했다. 이처럼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마저도 어둠 속에 숨기고자했던 중국인의 사유 방식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국인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것은 겸손이나 겸양의 미덕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처세술이었다.


중국의 고문자를 연구했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한자성어와 중국어 표현을 통해 중국인들의 의식구조를 해석한 부분은 매우 참신하면서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저자가 최고로 꼽는 현문은 유명한 사자성어인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중 국의 처세훈은 매우 깊고 넓다.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성어의 세계를 닮았다. 중국이라는 바다가 다른 바다보다 훨씬 더 거칠었을까. 중국이라는 바다는 늘 바람이 불고 사나운 비가 몰아닥쳤다는 얘기일까. 감히 그랬을 수도 있다고 추정할 만큼, 중국인이 건너야 했던 인생의 바다는 다른 어느 곳에 비해 무섭고 어두웠으며 거칠어싿. 중국의 처세훈은 비바람이 늘 몰아치는 암흑의 바다를 건널 때 꼭 필요한 등대의 빛이었따. 좋은 처세의 교훈을 얻으면 비바람이 잦아들고 성난 물결이 숨을 죽이는 인생의 항로로 배를 몰아 갈 수 있었다.

필자에게 5만 개가 넘는중국 성어 중 가장 인상적인 처세훈을 꼽으라면 단연 변방 요새의 늙은이를 일컫는 '새옹지마'를 들 것이다.

(......)

새 옹은 중국인들이 가진 통찰의 대역이다. 전운이 몰려와 곧 피비린내가 번질 수 있는 변방에서 말을 키우며 살았던 늙은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변방의 높은 요새 위를 뒤덮는 구름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다. 구름이 상징하는 전쟁 또한 사람이 피하려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험악한 변방 요새는 우리가 태어나서 맞닥뜨리는 천변만화의 인생 무대일 수 있다. 변화가 다시 변화를 부르는,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위협적인 환경에 몸을 드러내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편안한 일상에서도 불행은 늘 예고 없이 찾아든다.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을 키우며 일상을 살던 늙은이의 변방 요새는 어쩌면 우리가 머무는 삶의 무대라는 얘기다.

(......)

추정컨데, 늙은이는 인생의 거친 바다를 노련하게 헤쳐 나가는 사람이다. 즉 굴곡이 심한 변화무쌍한 인생의 길을 요령있게 넘어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서는 변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면서 순간적으로 닥치는 감정의 기복을 이겨내는 인물이다.


-유광종, <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 p220~226 중 발췌-



저 산위의 소나무처럼 굳게 뻗은 우직과 정직을 훌륭한 인간됨의 본보기로 배워온 우리들에게 중국인의 처세술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가?

정 의롭지 못하며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어리석다고 할 순 없지 않을까. 어찌되었던 전쟁이 빈번하던 변방의 요새에서 살아남은 자는 강인하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힘없는 늙은이였듯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쪽은 어쩌면 우리가 아닌 그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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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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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생물학자로서 과학을 대중들에게 좀 더 쉽게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통섭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얼마전 <다윈 지능>이라는 저자의 책을 통해 진화론에 대해 다시 한번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긴침에 <통섭의 식탁> 이라는 저자의 책소개집까지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명사들의 서평이나 책 소개 모음집들은 멀리하는 편이다. 중구난방식으로 저자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소개하고 있어 나와는 독서 취향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이런 책들을 읽었다'식의 자기 자랑과 함께 출판사들의 상업성이 개입되어 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최재천의 <통섭의 식탁> 역시 여타 서평집들이 갖고 있는 단점들을 전부 극복했다고 할 순 없지만,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생물과 진화'라는 한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엮여져 있서 이 분야의 독서 초보자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소개된 책들의 목록을 부록이나 목차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알아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상당히 많은 책들과 저자들의 이름이 소개 나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모두 몇 권의 책들이 소개되어 있는지 조차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어림잡아 세어보니 백서른다섯권 정도의 책들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다. 더 읽어볼 책으로 소개된 책들 중에는 독립적으로 소개된 책들도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통일성이 다소 떨어졌다. 아마도 저자가 그동안 써왔던 서평들을 한데 모아 엮는 과정에서 발생한 편집상의 '실수'가 아닐까 싶다.


자, 이 정도로 책에 대한 '흠집잡기'는 그만 두기로 하자.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 속에 소개되어 있는 책들을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전부 다 읽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 나머지 취사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데에 따른 투정이리라. 



엄선하고 엄선하여 꼭 읽고 싶은 책들만 골라본다면, 일단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만큼은 꼭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1976년에 쓰여진 책이 3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해당 분야 전문가로부터 명저로 언급되고 있다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게 아닐까 싶다. 십 수년전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을 때 읽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지금처럼 서평이라도 써놓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리고 <이타적 유전자>를 쓴 매트 리들리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에서는 소장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참고로,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을 읽게 된다면, 제프리 밀러의 <연애>도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문명의 붕괴>도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 그리고 도모노 노리오의 <행동경제학>도 빼놓을 수 없을 듯.  이 밖에도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짚어보는 프랑크 쉬르마허의 <고령사회 2018>과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 역시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리라. 그리고 가족 구성원 특히 형제간의 알력을 유전학과 진화론적으로 접근한 플랭크 설로웨이의 <타고난 반항아>와 더글러스 W 모크의 <살아남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도 함께 읽어볼 계획이다.  한편, 물리학 분야에서는 최무영 서울대 교수의 책들이 좋을 듯 싶다.


유일하게 인간만 정치적 동물이라고 여겨왔던 인류의 오만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프란스 드 발 <침팬지 폴리틱스>는 인간과 98%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침팬지를 통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된다. 



참고로 중국어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저자가 위화의 <인생>을 소개한  대목을 살펴보면,


푸구이라는 이름의 노인이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도박으로 거덜 난 다음, 평범한 농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겪는 처절한 애옥살이를 야속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읽는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데 작가는 그저 밭이랑을 일구며 노래만 한다.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아 안 가려네."


푸구이가 도살 직전의 늙은 소를 사들여 자기랑 똑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늙어가며 부르는 이 노래는 읽는 이들을 묵연한 달관의 경지로 이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많은 재산을 주색잡기로 날려 보낸 푸구이, 노름으로 푸구이 집안의 재산을 앗아가 부자가 되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인민정부에 의해 악덕 지주로 몰려 총살을 당하는 룽얼, 달리기를 잘해서 어쩌면 쓰러진 집안을 도로 일으켜 세울지도 모르겠다는 기대했건만, 새로 부임한 현장의 부인에게 수혈을 너무 과다하게 해주다 죽은 아들 유칭, 그러가하면 유칭의 목숨 대신 살아난 부인의 남편은 알고 보니 그토록 찾았던 푸구이의 전쟁 천우 춘성, 그러나 그 역시 끝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처럼 기구한 삶들을 그린 이 소설의 원제는 '활착(活着)'이다.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 만들며 <인생>이라는 제목을 달아준 걸 우리말 역서에도 그대로 붙여 썼다. 장 감독은 <인생>으롤 199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지만, 나는 제목이 바뀐 것에 불만이 크다. '활착'이란 원래 "옮겨 심거나 접목한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간다."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는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부제가 은근히 따라다닌다. 하지만 나는 그 부제 역시 그리 탐탁지 않다.


-최재천, <통섭의 식탁> 中 p55~57 -




저자는 위화의 소설 <인생>의 원제목인 <活着>을 지극히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어에서 '活'자는 '살다'라는 동사이고 동사 뒤에 붙는 '着'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제인 '살아간다는 것'은 원제목을 최대한 직역한 것이며,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이 '活着'를 의역한 것으로 중국어 번역가들 사이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상당히 잘 옮긴 번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만약, 최재천 교수의 말대로 원제목을 한자 독음 그대로 <활착>이라고 옮긴다면, 그 제목을 보고 얼마나 많은 한국독자들이 그 뜻을 이해할지 의문이다. 그렇지않아도 중국 소설이 의도와는 달리 촌스러운(?) 한국어 제목 등으로 독자들의 오해와 외면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어를 한자 독음 그대로 옮기는 번역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재천 교수의 <통섭의 식탁>은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진화와 유전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라 할 순 없을지언정 최선의 상차림이라 하겠다. 책에 언급되어 있는 많은 학자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모두 읽어볼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최소한 자연에 대한 겸손함과 모든 생명체들과의 공생을 꿈꾸게 되었다.


인간은 불과 500만 년전에 침팬지와 같은 조상에서 분화되었으며, 현생 인류가 탄생한 건 그보다도 훨씬 최근인 약 20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지구의 탄생 역사를 하루로 친다면 20만 년이란 세월은 채 1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라고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자, 한없이 겸손해지는 순간이다.

저자의 말처럼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리라.


"알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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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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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레햄 링컨, 찰스 다윈, 에드가 앨렌 포우는 1809년에 출생한 동갑내기들로 근대의 끄트머리에 태어나 인류 역사를 현대로 옮겨놓은데 일조한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찰스 다윈은 인류가 철학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최초로 과학적인 답을 한 학자이다. 철학과 정신 그리고 신을 운운하던 인류도 결국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진화에 따른 우연적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만큼 위대한 발견도 없으리라.


다윈 자신은 윈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transmutation)' 또는 '수정된 상속(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

진보라는 말 속에는 목적 또는 목표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성이 없다. 만일 진보가 '향상'이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면 거의 모든 생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적응 현상들은 다 나름대로 예전 상태보다 향상된 상태를 의미한다. 개선이나 효율의 관점에서 진보를 얘기하려면 각각의 생물이 처해 있는 환경 내에서 분석해야 한다. 인간의 지능이라는 잣대에 맞춰 다른 동물들의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는 능력을 비교하면 초음파를 보낸 후 그것이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한 박쥐들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인간보다 훨씬 진보했다고 평가해야 옳을 일이다. 따라서 진화의 역사에서 객관적인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현대 진화 생물학의 관점이다.


-최재천, <다윈 지능> p68 中-


<다윈 지능>은 생물학자로서 인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조예가 깊은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학부 교수가 2009년 다윈 탄생 200주년 겸 <종의 기원> 출간 150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책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진화론에 얽힌 오해와 진실을 알아가다 보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대전제에 슬며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진실 앞에서 만큼은 어쩔 수없이 누구나 겸손해지는 법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 역시 작은 풀 한포기 곤충 한 마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이 저절로 솟구친다. 저자인 최재천 교수의 지적처럼 찰스 다윈의 위대함은 일찍이 비글호에 몸을 싣고 갈라파제도를 여행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우연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발견을 통해 유아독존식 오만함에 빠져 있던 인류에게 겸손함을 일깨워 준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집단 지능의 결과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관찰과 개인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탄생한 걸작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찰스 다윈은 학문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국의 외딴 고향마을에서 동식물들을 수 십년 동안 관찰하면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갈라파제도 방문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냈다. 일찍이 찰스 다윈이 명나라 명의인 이시진(李時珍)이 작성한 <본초강목>을 참조했다거나, 마르크스가 자신의 <자본론>을 찰스 다윈에게 헌사하려했다는 말들은 다분히 설(說)에 불과하다.


찰스 다윈의 위대한 발견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번식은 수컷이 아닌 암컷에 의해 결정되고 주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성권위적인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점에 볼때, 만약 찰스 다윈과 그의 <종의 기원>이 갈리레오 갈리레이가 살았던 중세시대에 등장했더라면 진실은 빛조차 보지 못한채 사장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유전자다'라는 지적은 가히 자연 과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빚어낸 빼어난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해묵은 논쟁에 일갈을 고할 수 있다. 즉, 알이 닭을 낳는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다윈주의자들의 해석이 윤회사상을 주장하는 동양불교와 일맥상통한다는 추측을 불러 오는 것이리라.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 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을 보면서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고 생각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 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 갈 존재이다.

(......)

유 성 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이라고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 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최재천, <다윈 지능> p213~215 중 발췌-


이 쯤되면 나란 존재는 한없이 작어지고 삶은 한없이 허무해진다.

'나란 존재는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면, 열심히 노력하여 삶을 가꿀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물며 나의 노력으로 얻어진 우수한 획득 형질이 후세로 유전되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진화란 결국 우연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차가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글을 이어나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얕디 얕고 나의 마음세계 역시 넉넉치 못함을 통감한다.


이와 같은 진리를 담아내기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그릇이 너무도 얕고 좁다. 어쩌면 바로 이렇기때문에 종교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조우에 대해 저자는 대니얼 데닛의 표현을 빌리고 있다.  


데닛은 우리가 종교의 실상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종교를 보다 철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종교를 축소하거나 또는 종교를 보다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belief in god)'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belief in belief in god)'의 확산을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최재천, <다윈 지능> p248 中-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이란 바로 인간의 '선함'을 믿는 믿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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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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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색출과 범죄 방식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본격추리소설과는 달리 범행 동기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특히, 이 분야의 원조할 수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그 계보를 잇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한편, <백야행>의 히가시노 게이고와 온다 리쿠 역시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작품 세계는 사회파추리소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범행 동기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사회파추리소설과 같지만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색채가 짙어서 기존의 추리소설 기법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포와 환상은 일찍이 '괴기소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드가 앨런 포우와 '호러킹' 스티븐 킹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면을 갖고 있다.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범행 동기...

비현실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범행 사주 과정...

진범과 공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몽롱함...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 역시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전부 다 갖고 있다. 

한껏 긴장감에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보면,

"아니 고작 이따위 이유때문에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그것도 가족을?" 라던가, "말도 안돼! 어떻게 암시만으로 타인에게 범죄를 사주하며 또 사람이 어떻게 손쉽게 타인의 범죄 도구가 될 수 있는거지? "  등등 수많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허탈해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역시 하루 꼬박 이와 같은 배신감(?)에 시달렸으니까...

그런데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여 <유지니아>를 추리소설로만 바로보지 않는다면, 전혀 색다른 작품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온다 리쿠라는 작가가 구축한 (작품)세계가 아닐까 싶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에게 헌사된 수식어다. <유지니아> 역시 독자에게 잊혀졌던 아련한 추억의 몽롱함을 선사한다.

 

작품의 기둥 줄거리는 어린 시절 이웃집 잔치에서 1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죽은 사건을 경험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다시 사건 관계자들을 인터뷰하여 기록하고 <잊혀진 축제>라는 책으로 출판한다는 내용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데,  작가는 처음부터 이 점을 의식하고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기억의 어긋남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나 실마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나하면 이미 범인의 윤곽은 초반부에 이미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똑같은 사실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고 기억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속에서 사이가 씨를 도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녹음하고 기록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인물의 '고백'이다.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듣는 건 흥미로웠습니다.

거꾸로, 사실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저 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 그대로 이야기한단느 건 쉽지 않아요. 아니, 불가능합니다. 선입견이 작용한다든지, 잘못 봤다든지, 잘못 기억한다든지 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받은 교육, 성격에 따라 보는 방식도 달라지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신문이나 교과서에 실린 역산느 극히 대략적인, 최대공약수의 정보구나 하고요.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건 사릴일지 몰라도, 그때 상황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같은 건 아마 당사자들도 모를걸요.

대체 뭐가 진실인가, 그런 건 그야말로 전능한 신밖에 모를 겁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말입니다만.

 

-온다 리쿠, <유지니아> p57 중-

 

 

왠지 모르게 추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유가 뭘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세월의 두께가 얹혀지면 아련한 추억으로 재현되곤 한다.


온다 리쿠는 바로 이점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인간 내면으로의 회귀 또는 원초성으로의 환원인 것이다. 

< 밤의 피크닉>도 그렇고 이번 <유지니아>라는 작품도 그렇고... 과거 회상은 온다 리쿠 작품 속에서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범인과 범행 동기 따위는 어느덧 회상과 추억의 건너편 저 너머에 존재한다. 보일듯 말듯 아련하게...

 

박쥐의 기척.

히사코는 가끔씩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썼다.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탓에, 이미지와 본 적이 있는 사물이 뒤섞여 가끔씩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반대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되레 히사코를 신비스럽게, 기적처럼 보이게 했다. 히사코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쪽이 이상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들게 했따.

그렇기 때문에 히사코가 '백일홍'을 몰라도, 혹시 다른 것을 그렇게 불렀다 해도,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있다 해도, 착각을 지적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히사코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온다 리쿠, <유지니아> p423 중-

 

 

1964년생임에도 불구하고 다작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만에도 무려 37편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단다. 

고작 두 편의 작품만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진다. 대표작들만 찾아 읽는다해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참!

그리고 오사와가 집안 잔치날 음료수에 독극물을 탄다는 설정은 1948년 1월 26일 실제로 있었던 제국은행 사건을 모티프로 삼지 않았나 싶다.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1960년대에 이미 제국 은행 사건을 모티프로 여러편의 작품을 쓴 바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 20여년이나 뒤에 출생한 온다 리쿠가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뜻밖의 곳에 발견하게 되어 신선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현대문학 특히 추리문학장르에 끼친 '세이초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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