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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범인 색출과 범죄 방식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본격추리소설과는 달리 범행 동기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특히, 이 분야의 원조할 수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그 계보를 잇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한편,
<백야행>의 히가시노 게이고와 온다 리쿠 역시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작품
세계는 사회파추리소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범행 동기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사회파추리소설과 같지만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색채가 짙어서 기존의 추리소설 기법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포와 환상은 일찍이
'괴기소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드가 앨런 포우와 '호러킹' 스티븐 킹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면을 갖고 있다.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범행 동기...
비현실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범행 사주 과정...
진범과 공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몽롱함...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 역시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전부 다 갖고 있다.
한껏 긴장감에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보면,
"아니 고작 이따위 이유때문에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그것도 가족을?" 라던가, "말도 안돼! 어떻게 암시만으로 타인에게 범죄를
사주하며 또 사람이 어떻게 손쉽게 타인의 범죄 도구가 될 수 있는거지? " 등등 수많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허탈해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역시 하루 꼬박 이와 같은 배신감(?)에 시달렸으니까...
그런데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여 <유지니아>를 추리소설로만 바로보지 않는다면, 전혀 색다른 작품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온다 리쿠라는 작가가 구축한 (작품)세계가 아닐까 싶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에게 헌사된 수식어다. <유지니아> 역시 독자에게 잊혀졌던 아련한 추억의 몽롱함을 선사한다.
작품의 기둥 줄거리는 어린 시절 이웃집 잔치에서 1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죽은 사건을 경험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다시 사건 관계자들을 인터뷰하여 기록하고 <잊혀진 축제>라는 책으로 출판한다는 내용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데, 작가는 처음부터 이 점을 의식하고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기억의 어긋남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나 실마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나하면 이미 범인의 윤곽은 초반부에 이미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똑같은 사실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고 기억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속에서 사이가 씨를 도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녹음하고 기록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인물의 '고백'이다.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듣는 건 흥미로웠습니다.
거꾸로, 사실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저
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 그대로 이야기한단느 건 쉽지 않아요. 아니, 불가능합니다.
선입견이 작용한다든지, 잘못 봤다든지, 잘못 기억한다든지 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받은 교육, 성격에 따라 보는 방식도 달라지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신문이나 교과서에 실린 역산느
극히 대략적인, 최대공약수의 정보구나 하고요.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건 사릴일지 몰라도, 그때 상황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같은 건 아마 당사자들도 모를걸요.
대체 뭐가 진실인가, 그런 건 그야말로 전능한 신밖에 모를 겁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말입니다만.
-온다 리쿠, <유지니아> p57 중-
왠지 모르게 추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유가 뭘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세월의 두께가 얹혀지면 아련한 추억으로 재현되곤 한다.
온다 리쿠는 바로 이점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인간 내면으로의 회귀 또는 원초성으로의 환원인 것이다.
<
밤의 피크닉>도 그렇고 이번 <유지니아>라는 작품도 그렇고... 과거 회상은 온다 리쿠 작품 속에서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범인과 범행 동기 따위는 어느덧 회상과 추억의 건너편 저 너머에 존재한다. 보일듯 말듯 아련하게...
박쥐의 기척.
히사코는 가끔씩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썼다.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탓에, 이미지와 본 적이 있는 사물이 뒤섞여 가끔씩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반대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되레 히사코를 신비스럽게, 기적처럼 보이게
했다. 히사코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쪽이 이상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들게 했따.
그렇기 때문에 히사코가 '백일홍'을
몰라도, 혹시 다른 것을 그렇게 불렀다 해도,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있다 해도, 착각을 지적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히사코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온다 리쿠, <유지니아> p423 중-
1964년생임에도 불구하고 다작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만에도 무려 37편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단다.
고작 두 편의 작품만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진다. 대표작들만 찾아 읽는다해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참!
그리고 오사와가 집안 잔치날 음료수에 독극물을 탄다는 설정은 1948년 1월 26일 실제로 있었던 제국은행 사건을 모티프로 삼지
않았나 싶다.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1960년대에 이미 제국 은행 사건을 모티프로 여러편의 작품을 쓴 바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
20여년이나 뒤에 출생한 온다 리쿠가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뜻밖의 곳에 발견하게 되어 신선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현대문학 특히 추리문학장르에 끼친 '세이초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