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에이브레햄 링컨, 찰스 다윈, 에드가 앨렌 포우는 1809년에 출생한 동갑내기들로 근대의 끄트머리에 태어나 인류 역사를 현대로 옮겨놓은데 일조한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찰스 다윈은 인류가 철학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최초로 과학적인 답을 한 학자이다. 철학과 정신 그리고 신을 운운하던 인류도 결국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진화에 따른 우연적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만큼 위대한 발견도 없으리라.


다윈 자신은 윈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transmutation)' 또는 '수정된 상속(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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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는 말 속에는 목적 또는 목표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성이 없다. 만일 진보가 '향상'이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면 거의 모든 생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적응 현상들은 다 나름대로 예전 상태보다 향상된 상태를 의미한다. 개선이나 효율의 관점에서 진보를 얘기하려면 각각의 생물이 처해 있는 환경 내에서 분석해야 한다. 인간의 지능이라는 잣대에 맞춰 다른 동물들의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는 능력을 비교하면 초음파를 보낸 후 그것이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한 박쥐들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인간보다 훨씬 진보했다고 평가해야 옳을 일이다. 따라서 진화의 역사에서 객관적인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현대 진화 생물학의 관점이다.


-최재천, <다윈 지능> p68 中-


<다윈 지능>은 생물학자로서 인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조예가 깊은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학부 교수가 2009년 다윈 탄생 200주년 겸 <종의 기원> 출간 150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책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진화론에 얽힌 오해와 진실을 알아가다 보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대전제에 슬며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진실 앞에서 만큼은 어쩔 수없이 누구나 겸손해지는 법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 역시 작은 풀 한포기 곤충 한 마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이 저절로 솟구친다. 저자인 최재천 교수의 지적처럼 찰스 다윈의 위대함은 일찍이 비글호에 몸을 싣고 갈라파제도를 여행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우연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발견을 통해 유아독존식 오만함에 빠져 있던 인류에게 겸손함을 일깨워 준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집단 지능의 결과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관찰과 개인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탄생한 걸작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찰스 다윈은 학문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국의 외딴 고향마을에서 동식물들을 수 십년 동안 관찰하면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갈라파제도 방문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냈다. 일찍이 찰스 다윈이 명나라 명의인 이시진(李時珍)이 작성한 <본초강목>을 참조했다거나, 마르크스가 자신의 <자본론>을 찰스 다윈에게 헌사하려했다는 말들은 다분히 설(說)에 불과하다.


찰스 다윈의 위대한 발견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번식은 수컷이 아닌 암컷에 의해 결정되고 주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성권위적인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점에 볼때, 만약 찰스 다윈과 그의 <종의 기원>이 갈리레오 갈리레이가 살았던 중세시대에 등장했더라면 진실은 빛조차 보지 못한채 사장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유전자다'라는 지적은 가히 자연 과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빚어낸 빼어난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해묵은 논쟁에 일갈을 고할 수 있다. 즉, 알이 닭을 낳는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다윈주의자들의 해석이 윤회사상을 주장하는 동양불교와 일맥상통한다는 추측을 불러 오는 것이리라.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 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을 보면서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고 생각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 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 갈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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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성 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이라고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 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최재천, <다윈 지능> p213~215 중 발췌-


이 쯤되면 나란 존재는 한없이 작어지고 삶은 한없이 허무해진다.

'나란 존재는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면, 열심히 노력하여 삶을 가꿀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물며 나의 노력으로 얻어진 우수한 획득 형질이 후세로 유전되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진화란 결국 우연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차가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글을 이어나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얕디 얕고 나의 마음세계 역시 넉넉치 못함을 통감한다.


이와 같은 진리를 담아내기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그릇이 너무도 얕고 좁다. 어쩌면 바로 이렇기때문에 종교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조우에 대해 저자는 대니얼 데닛의 표현을 빌리고 있다.  


데닛은 우리가 종교의 실상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종교를 보다 철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종교를 축소하거나 또는 종교를 보다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belief in god)'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belief in belief in god)'의 확산을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최재천, <다윈 지능> p248 中-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이란 바로 인간의 '선함'을 믿는 믿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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