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홍신 세계문학 2
미우라 아야코 지음, 최호 옮김 / 홍신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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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독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의 책들은 고전 소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내가 태어난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중년에 접어들어 다시 책읽기에 집중하게 된 이후에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쓰여진 책들은 둘 중 하나다. 반세기라는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어  '고전'의 발열에 올랐거나 아니면 이미 도태되어 사라져버렸거나...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은 전자에 해당된다.

1964년 아사이(朝日) 신문 1천만엔 현상소설 당선작으로,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번역, 재출판되면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재 미있게 완독을 한 책일지라도 세월이 흐르면 내용은 커녕 제목조차 가물거리는 경우가 있다. 반면,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기억되는 책들이 있는데, <빙점>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될 것 같다. 책 제목이 너무 인상적이여서 익숙해지면 마치 읽지 않아도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익히 알고 있던 제목의 책이 도서관 서가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우연찮게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습관처럼...

그 러다가 재완역되어 출판된 산뜻한 겉표지를 보고는 도대체 어떤 내용의 책이기에 50년이 지나도 마치 신간 서적처럼 읽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그동안 익숙한 제목의 <빙점>이라는 책 내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계획에도 없던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읽게 되었다.

작가는 아마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에서부터 모티브를 얻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미우라 아야코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일수록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라는 자기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아로 태어나, 게이조-나쓰에 부부에게 입양된 요코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범은 바로 다름 아닌 질투, 의심, 이기심, 위선 등등이 아닐까 싶다.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의심을 멈추지 않았던 게이조의 위선과 허영심과 질투에 눈이 먼 나쓰에의 이기심이 빚어낸 비극을 따라가노라면 마치 내 마음속의 '빙점'을 마주하는 것 같다.


#-1


'나는 요코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게이조는 오버 깃을 세웠다.

'본심은 요코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쓰에에게 범인의 자식을 키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배반하고 무라이와 밀통한 나쓰에 때문에 그날 루리코는 살해되었다. 나는 그런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괴로워할 날을 위해 그 아기를 데려온 것이다. 그러나 사이시의 자식인 줄 알고 키우는 내 쪽이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요코를 키우는 나쓰에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위안을 받고 있다. 나쓰에의 부정을 일시적인 마음의 방황으로 돌리고, 어떻게든지 용서할 수는 없는가? 한번은 나도 용서를 했다. 루리코의 죽음을 미칠 듯이 슬퍼하는 나쓰에를 나는 용서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루리코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또다시 무라이의 품에 안겼을 리는 없다.'



#-2


'쓰지구치는 무라이와의 일을 용서하지 않고 사이시의 자식을 기르게 했어. 나도 그런 쓰지구치를 용서할 수 없어.'

무라이와의 관계를 오해하고 괴로워한다면 오해하게 내버려두어야겠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그리고 적어도 게이조 앞에서는 요코를 지금까지보다 더 사랑하는 것같이 보이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몸도 마음도 남편을 배신해 보일 테야."

나쓰에는 거울 속의 자기를 보고 맹세하듯 크게 소리를 내어 대담하게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하자 그 말은 묘하게 힘이 들어 있어, 언젠가 틀림없이 자기는 게이조를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쓰지구치 병원 안과 의사인 무라이와 게이조 친구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다카키 역시 비극에 일조한다.

만약 무라이가 친구의 아내를 넘보지만 않았더라도...

다카키가 친구의 신념을 시험하려 하지만 않았더라도...

이 불행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다만, 인간의 미숙한 욕망에서 초월한 듯한 유일한 인물인 다쓰코의 역할이 미비하다는 점이 아쉽다.

개인적으로 나쓰에의 친구이자 무용가인 다쓰코가 뭔가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인간 관계와 욕망을 교통정리(?) 하면서 희망과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선과 악의 대립, 평면적인 등장인물, 해피엔딩 등등...

고전소설의 특징을 갖고 있어 현대적인 감각에서는 많이 벗어나지만, 60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실험성과 예술성은 부족하지만 시대상황 반영이라는 대중소설로서의 요건은 충분히 갖춘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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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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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과 독일문학은 묘한 '끌림'이 있다. 

동성애 역시 묘한 '끌림'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성애자일지라도 한번쯤은 멋진 동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던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독일문학 역시 묘한 '끌림'이 있다. 재미없고 어렵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독일문학에 깊숙이 빠지곤 한다. 

헤르만 헤세, 니체, 토마스 만 등등...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단편으로 1912년에 쓰여졌으니 꼭 100여전 작품이다.


베네치아로 여행을 온 어느 노작가가 십대 소년의 모습에 매료되어 콜레라가 창궐하는 베네치아를 떠나지 못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작품을 읽기에 앞서 이미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서의 호기심은 반감되었지만 '동성애를 대문호는 어떻게 표현했을까?'라는 궁금증에 이끌려 책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다소 지겹고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노회한 남성이 새파란 젊은 청년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 나도 모르게 불쾌감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단순한 통속작가가 아니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역시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작품은 예술의 절대미(美)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런 욕망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라고 하겠다.

 

타치오에 대한 아센바흐의 사랑은 마치 절대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그것과 닮아 있다. 

욕망에 무릎 꿇거나 욕망을 죽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욕망을 달성시킨다.


아센바흐는 소년의 외모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창백하고 우아하며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 소년의 얼굴은 벌꿀색 머리칼에 에워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런 입, 감미롭고 신적인 진지한 표정은 가장 고귀한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생각나게 했다. 더없이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에도 하고,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자가 자연에서도 조형 예술품에서도 그만한 성공작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일무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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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아센바흐는 아름다운 소년의 뒤를 따라가다가 병든 도시 안쪽의 어지럽게 뒤엉킨 곳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미로처럼 보이는 골목과 운하들. 다리와 광장들이 다 그게 그것처럼 똑같이 생각되어 그는 그만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방위조차 더 이상 가늠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오로지 자신이 그리워하며 쫓아온 대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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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몸이 불편해서 평소보다 늦은 아침 시갓에 해변 호텔을 나왔다. 그는 딱히 육체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현기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와 아울러 불안감이 급격히 치솟아 올랐고 그것이 외부 세계와 관계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와 관계되는 건지 분명치 않은, 탈출구와 전망이 없다는 감정에 사로 잡혔다.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中-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

소년 타치오를 애처롭게 찾아 헤매는 주인공 아센바흐의 심경이 완성될 수 없는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예술의 끝은 어디일까?

사랑이 영원하다는 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예술 또한 영원하다. 이 말은 곧 예술의 끝이 없다는 뜻이다.

끝이 없는 사랑과 예술...

그 끝은 바로 '죽음'가 맞닿아 있는 건 아닐런지... 


생전 토마스 만은 동성애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이력을 근거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단순히 '동성애'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작품의 주제마저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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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인문학 책상 위 교양 21
박홍순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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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한 글쓴이의 사유가 돋보인다. 

학창시절 미술책에서나 접하던 명화들과 유명 화가들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밤이 깊어졌다.


그림 이야기라고 지레짐작 겁을 집어 먹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명화 감상에 필요한 소위 미적 감수성을 발동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림 자체의 감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역사와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림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역사책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문자가 만들어지지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그림을 그려왔다.

유 희적 차원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달과 기록이라는 문자의 역할을 '그림'으로써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후, 문자가 발명되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림은 정보 전달과 기록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보고 즐기는 심미, 예술적인 역할이 강조되었다. 특히, 사진과 영상 기술이 발달된 근현대 사회 에 들어와 소위 '추상화'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도 어쩌면 위와 같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림과 함께 인문 교양 서적을 연결시켜 놓은 소제목을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목차만 훑어도 몸과 마음이 '무언'가로 꽉찬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저자의 깊이 있는 성찰과 사유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 교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현상과 사물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과 생각하는 연습이 부족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한 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겹지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비록 크기는 작지만 최대한 원화(原畵)에 가깝게 실어놓은 그림 덕분이 아닐까 싶다.


1 권에 머물지 않고 최근 2권까지 출판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독(一讀)할 만한 책이다. 아니 '이독(二讀)' '삼독(三讀)'은 해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2권부터 읽은 나로서는 1권이 훨씬 더 재밌고 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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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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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책이다.

읽는 내내 여러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퇴근길 전철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뜨거운 눈물을 달래기 위해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올리기를 여러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읽고 싶은 책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재미와 감동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읽고 싶은 책이 있더라도 묵혀두는 편이다.

책소개 기사나 리뷰글 등은 종종 '상업성'과 결탁되어 하나같이 작품의 장점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기다림'이라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때론 예상보다 훨씬 더 긴 기다림이 되어버리곤 하지만....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는 바로 이처럼 기나긴 기다림 끝에 만나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한국어 발음으로 '연(kite)'과 인연의 '연(緣)'이 똑같다.

하여, 작품의 중심 모티브로 등장하는 '연(kite)'이 바바, 아미르, 알리, 하산 그리고 소랍으로 이어지는 등장 인물들 간의 '연(緣)'을 이어주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이 또한 인연(人緣)이라면 인연(人緣)이 아닐까 싶다.

<연을 쫓는 아이>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자 인연(人緣)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므로 또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하겠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운명...

그러고 보면,  운명과 인연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같다.  


우리는 운명을 좌지우지할 순 없지만 운명에 대해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시아파 소수 회교도인 하자라인으로 태어난 하산과 다수파인 수니파 파쉬툰인으로 태어난 아미르...

둘은 각기 다른 운명을 타고 났지만,  운명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한다. 


책임을 다한 자의 뒷모습은 숭고하다고 했던가.

도련님이 위기에 빠진 자신을 외면하고 누명까지 씌워 쫒아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연을 쫓는 하산...

하산과 자신이 이복형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탈레반에게 목숨을 잃은 하산의 아들 소랍을 입양하는 아미르...

이 둘의 모습을 통해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의 숭고미를 엿보게 된다. 

감히 따라하겠다는 흉내조차 내볼 수 없는 그런 숭고함에 깊은 존경을 표하며...



그나저나 인간으로서의 숭고함보단 비열함과 나약함을 더 많이 갖고 있는 내가 최선을 다해 쫓고 있는 '연'은 무엇일까?

.

.

.

연일 이어지는 열대야와 한두번씩 쏟아지는 스콜성 소낙비가 지나는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책이 주는 감동에 오랫동안 젖어 본다.  

올해 읽은 책들 중 아니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 '좋은 책 10권'으로 꼽을만큼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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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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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무섭다.

각고의 노력으로 힘겹게 쌓아올려 지켜온 평범한 일상들이 순식간에 물속 저편으로 가라앉아 버릴까봐...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은 바로 누구나 갖고 있는 이런 두려움에 대한 '재인식'이요 '재발견'이라 하겠다. 

철옹성같은 거대한 댐이 새오라기같은 미세한 균열에 무너지듯, 평탄한 일상으로 채워진 삶이 예기치 않게 무너질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그 불행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도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게 '기회'였음을 너무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

어쩌면, 인생이란 애당초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쌓아온 자신만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주인공 최현수도... 그의 아내 강은주도...

오영제도...

역시 그랬다.


힘겹게 쌓아 올린 자신만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러나,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그 몸부림이 타인의 일상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자각은 하지 못한다.



<7년의 밤>은 바로 그런 '몸부림'의 교향곡이다.

작가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와 같다.

각기 다른 악기들이 모여 전혀 다른 세상을 연주해내듯,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들을 하나의 정점으로 집결시켜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주인공 최현수와 '우물'에 얽힌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는 교묘하게 '세령호'와 연결되고...

월남에서 돌아온 아버지 최상사에 대한 반감과 어린 아들 서현에 대한 집착 사이에는 '부성애'라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영제와 그의 딸 세령은 어떻게 연결될까?

최현수의 일상을 뒤흔든 작은 균열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아들에 대한 집착이라면, 오영제의 일상에 파고든 균열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가족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가족에 대한 폭력은 자학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런지...



최현수와 최서현의 7년의 밤이 '후회'와 '외면'이었다면, 오영제와 그의 아내 하영의 7년의 밤은 어떠했을까?

500페이지가 넘는 적잖은 분량 어디에서도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첫번째 아쉬움이다.


최현수의 아내 강은주의 삶에 여러 지면을 할애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퇴장' 장면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두번째 아쉬움이다.


세번째 아쉬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시작해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다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마무리되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승환이라는 인물의 '소설'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형식을 취한 점이다. 


전반부와 중반부의 고강도 흥미와 재미에 비해, 거칠고 장황하며 기대했던 '반전' 따윈 없었던 후반부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재.밌.다.

.

.

.

작가의 말처럼,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언제나 '그러나'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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